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현덕마음공부] 계정혜와 탐진치

Buddhastudy 2023. 8. 28. 19:51

 

 

불교를 공부한다는 것은 계정혜(8정도)를 닦는 것이다.

이것은 탐진치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이를 통해 를 소멸하게 되는 과정이다.

 

진정한 계는 정 속에 있는 것이고

진정한 정은 혜 속에 있는 것이며,

지혜란 근본 무명의 타파

즉 무상, , 무아를 철저히 알아차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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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계정혜와 탐진치

이 두 가지 카테고리를 한번 여러분들과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교에서 마음을 닦는다, 혹은 마음공부를 한다라고 하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는

계정혜를 닦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원래 계정혜는 어떻게 하는가 하면

유학, 배움이 있는, 닦음이 있는 데서부터

무학, 배움이 없는 닦음이 없는 쪽으로까지 갈 때까지 가야 된다.

이게 계정의 삼학을 닦는 것의 기본적인 절차가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공부도 하고, 실천도 하고,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하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자연스럽게 그냥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 사이에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뭐냐 하면

습관 드는 것이 아니고

습관보다는 정확한 이해를 통해서 계정혜가 닦인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계정혜를 잠깐 얘기하자면

계라고 하는 것은 계와 율로 돼 있잖아요.

계라고 하는 것은

마음공부를 하기 위해서, 정신적인 안정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가 절대 하면 안 되는 것들

살생을 한다든가, 도둑질을 한다든가, 뭐 이런 것들이죠.

본질적으로 하면 안 되는 것들이고

율이라고 하는 것은 단체 생활에서 필요한 규칙들을 잘 준수하는 것이죠.

 

그래서 계는 범하면 심각한 문제가 되는 거고

율은 범하면 적절한 제재를 받게 되는

이런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계를 지킨다라고 하는 것은 어떤 도덕적 표본 표준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욕망을 억누른다 라는 개념하고는 조금 다르죠.

잘못하면 위선이 될 수 있고

기껏해야 억눌러서 구석에 처박혀 있는 욕망

이렇게 될 수 있기 때문에

 

불교에서 계를 지킨다라고 하는 것은 그거하고 조금 다릅니다.

불교에서 계를 지킨다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정의 상태에 있으라는 얘기입니다.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 있어야 생활이 번잡해지지 않는다

이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계를 지킨다라고 하는 것은

육근, 우리 몸에 안이비설신의라고 하는 감각기관을

너무 요란하게 하지 말고 잘 다스리자 라고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재색식수명 그죠?

돈에 대한 거, 돈 참 좋아하죠.

그다음에 성적인 거, 남녀 그거 좋아하고

먹는 거 좋아하고

그다음에 잠자는 거 좋아하고

부기와 명예를 좋아하죠.

이런 것들과 관련되어 있어서

이런 것들 쪽으로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모되어서 나가는 것이죠.

 

불교에서 말하는 계정혜 삼학은 전부 다 에너지의 유출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생활이 번잡해지고

생활이 번잡한 사람이 어떻게 고요히 마음을 닦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계라고 하는 것은

우선 자기의 활동을 번잡하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시작이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 그건 생활이나 행동을 번잡하지 않게 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정신 활동을 번잡하게 하지 않는 것이 또 있겠죠.

그것을 우리는 정이라고 한다.

고요하게 잘 안정되어 있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정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이 번잡하지 않은 상태다

이렇게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을 번잡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뭐랄까요, 집중하는 공부를 합니다.

보통 호흡을 가지고 들숨날숨에 집중하기도 하고

이마라든지, 가슴이라든지, 이런 몸의 어떤 특정 부분에 집중하기도 하고

혹은 무아라든지, 이런 어떤 개념, 단어에 집중하기도 하죠.

또는 부처님을 외우는 염불을 하기도 합니다.

 

이게 전부 다 무타념 무타사

딴생각이 들어오지 않도록

생각이 어지럽게 날뛰지 않도록

한 곳에 묶어두는 것으로서의 공부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정의 진정한 의미는

지혜로워라, 어리석지 말아라 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정신활동이란 뭐겠습니까?

더 좋은 것과 더 안 좋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되지 않고 저렇게 돼야 되는데, 저렇게 되면 좋겠는데

이런 것들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정을 닦으려면 또 정의 상태에 들려면

지혜가 있어야 된다.

지혜라고 하는 것이 뭔지는 바로 또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계정혜라고 하면

계는 행동, 정은 정신활동

이 두 가지가 고유해지려면

혜가 있어야 된다. 혜를 닦아야 된다.

 

혜가 닦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혜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무명, 즉 어리석음에 빠져 있지 않은 상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언가 하면

세상에는 더 좋은 것이 있다라고 하는 마음이죠.

그리고 그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마음이죠.

그것이 있고,

반드시 그것을 추구해야 내가 행복해 진다 라고 하는

이 마음을 비워내는 것

그것이 그렇지 않다라고 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버리는 것

그것이 지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개정혜라고 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보면 세 가지 독이라고 하죠.

우리를 괴로움을 이끄는 세 가지 독

탐진치와 어떤 면으로는 굉장히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계라고 하는 것은

계를 왜 지켜야 되느냐

이 탐심에서 나오는 행동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탐심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좀 더 가지기를 외칠 때, 마음이 외칠 때 일어나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것이 탐욕의 문제고

 

이 정의라고 하는 것은

왜 우리는 고요해지지 못하는가?

바로 아까 그 욕망 때문이죠.

그 욕망과 또는 그 욕망이 좌절됐으면 화가 나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

그리고 그 욕망, 기대했던 것의 좌절

이런 것들이 분노심으로 나타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계는 탐심,

그다음에 진심, 화나는 마음은 욕망의 좌절

그리고 혜는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왔느냐? 욕망은 어디서 왔냐?

욕망이 생긴다면 욕망의 좌절로 인해서 생기는 분노는 필연적인데

이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세상에는 더 좋은 것과 더 나쁜 것이 있고

더 좋은 것은 내가 가져야 되고

나에게 나쁜 것을 밀어넣어야 된다 라고 하는 그런 구분

그런 구분이 존재하는데

지혜로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는 실체가 없고

그 실체가 없음으로 해서 더 좋은 것과 더 안 좋은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런 것은 없다 라고 하는 마음이 갖추어졌을 때

우리는 혼란이 없어진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지혜라고 하는 것은

목적에 이르는 가장 좋은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속적인 얘기고, 세속이라고 하면 그렇고

사회에서는 그런 전략이 필요하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제약 조건을 극복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크리티컬 패스 혹은 스트레티직 메스톨로지가 필요하긴 한데

마음의 세계에서의 지혜라고 하는 것은

아예 분별 자체가 사라지는 것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분별한다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무슨 가르침이냐?

탐진치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탐진치를 계정혜로 녹여서 없애고

그것이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짧게 줄여서 계정혜라고 얘기했지만

이것은 팔정도를 줄인 거거든요.

그러니까 팔정도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잖아요.

 

그래서 계정혜라고 하는 것은

나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자유로워지기 위한, 해탈로 가기 위한, 심리적 자유로 가기 위한

어떻게 보면 디딤돌이 되겠다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결국 불교 가르침의 핵심은 어디로 모이는가 하면

욕망과 욕망의 좌절을 일으키는

또 욕망의 좌절로 인한 분노를 일으키는 어리석음

근본 무명으로 가는 것이죠.

그래서 치, 탐진치 이렇게 가는 것이죠.

 

처음에 근본 무명이 있는 것이죠.

이것과 저것이 실체로 있고

두 번째는 이것이 저것보다 더 좋고

세 번째는 좋은 것은 당기고 싫은 것은 밀어내는

이런 과정에서

그것이 잘 되면 조금 기분 좋다가

그것이 잘 안 되면 화가 나다가

이런 것들이 윤회를 일으키는 굴러가는 바퀴가 되어서

우리를 괴로움에서 한없이 헤매게 하는

이 근본적인 어리석음의 핵심에 무엇이 있다라고 하는

붙잡을 만한 무엇이 있다라고 하는 생각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 생각은 근거가 없고 허망한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근본 무명을 타파한다라고 하는 것이 곧 불교의 실체고

그것을 통해서만 탐진치가 사라지고

탐진치가 사라짐을 통해서만 괴로움이 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겠죠.

 

그래서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하는 것은

계정혜라고 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정화되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완전한 정화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마음을 닦는다, 마음 공부한다라고 하는 것은

계정혜를 닦는 것이고

그것은 욕망과 관련된 탐진치를 해결하는 것이고

그것은 근본 문명인 어떤 실체도 없다라고 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으로 정리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