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현덕마음공부] 크리슈나무르티, 세상은 나의 그림자

Buddhastudy 2023. 8. 29. 19:40

 

 

크리슈나무르티는 세상을 자신 밖에서 영향을 미치는 오물로 보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 감정, 행동의 반영으로 본다.

그래서 세상의 혼란과 자신의 혼란을 극복하고 한다면 자신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한다.

자기이해를 위해서는 외부(이상, 지도자,쾌락,소유)에 관심을 끄고

내적으로는 비난이나 합리화, 사실 왜곡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와중에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형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오늘부터는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라고 하는 사람의 생각을 중심으로

여러분들하고 마음공부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잘 알다시피

20세기에 붓다의 현신, 혹은 세계의 교사

이런 식으로 표현되고 있는 분인데요

저는 20대 때 크리슈나무르티를 책으로 접한 이후에 지금까지

어떻게 보면은 크리슈나무르티의 생각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라고 하는 사람은 뭐 이렇게 생겼고요

그다음에 실제로 이 사람은 인도에서 태어났는데

1985년에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명상에 두각을 나타내서

그것을 본 베산트 여사라고 하는 영국인 출신인데

이 신지학회라는 게 있습니다.

그 신지학회에 발탁되어서 20세기에 뭐랄까

메시아가 올 몸으로 선택되어서 교육받게 됩니다.

 

그런데 1929년이니까 거의 한 45정도 된 나이에, 중년의 나이에

그렇게 메시아로 키워지고 있던 이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중대한 선언을 합니다.

유럽 전역에 라디오로 방송되었는데 실황 중계가 되었는데

거기서 엉뚱하게도 이 별의 교단이라고 하는 이 교단을

해체하겠다라고 하는 선언을 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메시아의 역할 이런 것도 거부하겠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그런 걸로는 안 된다.

이 진리라고 하는 것은 길 없는 길이기 때문에

스승이라든지, 교리라든지, 단체를 가지고 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입장은 죽을 때까지 관철하고 있는데요.

진리에 이르기 위한

기본적인 그리고 궁극적인 방식이라는 게 있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 이해밖에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이해를 해야 자유가 생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자유는 딱 한 번 생기는 것이 아니고

끝없는 자기 인식의 과정이기 때문에

그래서 굉장히 창조적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크리슈나무르티의 기본적인 생각은 뭐냐 하면

세계가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자기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과 관계의 확장이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세계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한테 있어서는

자기 자신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가라고 하는 내면을 관찰하는 것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너무나 중요한 출발점이 되는 것이고

또 귀결점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어쨌든 이 사람은 그 이후로

수십 년간 지구촌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대화를 나누는

스승이라기보다는 교사

이 사람은 스승은 따르는, 추종가 있는 사람을 말하는 거고

교사는 사람들이 성장할 수 있게

헬퍼, 도와주는 정도의 역할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는 20대 때 이 크리슈나무르티를 접한 이후에

지금까지도 그 영향권에서 별로 벗어나고 있지 못합니다.

하지만 크리슈나무르티는

20세기의 인류의 지성사회에 굉장히 커다란 영향을 미쳤죠.

비슷한 시기에 누굽니까? 오쇼 라즈니쉬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이 많지만

어쨌든 크리슈나무르티라고 하는 사람이

굉장히 현인이고 철학자고, 20세기에 붓다다 이런 얘기는 손색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크리슈나무르티가 나와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한번 여러분들과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가 볼 때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그림자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뭐냐 하면

나의 생각, 나의 감정, 그리고 나의 행동이

이렇게 확장된 것에 불과하다.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 어차피 너와 나의 관계가 이렇게 커진 건데

그것을 규정하는 것이 나의 생각, 감정, 행동 아니냐

이렇게 보는 것이죠.

 

그래서 세상을 바깥에 있다고 보기 시작하면

잘못된 왜곡이 일어난다고 보는 겁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살 만하다고 느끼든 힘들다고 느끼던

이 세상에서 곳곳에서 혼란과 투쟁과 그것으로 인한 비참함을 경험하죠.

실제로 자기 인생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세상은 혼란하고 투쟁의 와중에 있고 비참한데

그래서 그런 세상에 사는 나도 불행한 거죠.

행복하기 어렵습니다.

나만 행복하려고 하는 것이 더 큰 불행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런 세상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이 부당한 세상의 직접적인 피해자로

또 어떨 때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가해자가 되는 경우도 있어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가 하는 것에 대한 답을 찾기가 어려운 과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사는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어떤 선택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보통 우리가 투표 같은 정치적 행위

그다음에 사회적 활동

그다음에 종교적 지도자나 영적인 구루를 찾아다니는 마음공부

이런 것들이죠.

 

그러니까 지도자나, 이념이나, 무슨 무슨 체제나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뭔가 질서를 가져다 주지 않을까라고 희망을 걸고

거기에 우리 에너지를 많이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보기에는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지도자들도 사실은 혼란에 빠져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를 미스리드

잘못된 곳으로 이끌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하면

내가 선택한 그 지도자가 어떻든지 간에

그 선택하는 내가 이미 혼란에 빠져 있기 때문에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가 없다.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깊이 빠져들어서

거기서 뭔가 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마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보면은 중독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슈나무르티는 산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뭐냐

결국은 움직이는 거다.

그리고 뭐가 존재한다라고 하는 것은 뭐냐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뭡니까? 관계 맺는 것 자체가 움직임이잖아요.

이 산다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관계 맺고 서로 주고받고 하는 그 과정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사람은 두 가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고립되어서 살 수 있다라고 하는 거, 인정하지 않고요.

두 번째는 세계가 나하고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제3의 존재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계하고 나는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고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내 머릿속의 생각과 그다음에 그런 감정과 행동

그리고 그 관계, 너와 나의 관계의 투영이거나 그 확장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은 그러니까 너와 내가 만들어낸 것이 이 세상이다.

이 세상에 어떤 혼란이 있다면, 부당함이 있다면, 비참함이 있다면

그것은 너와 나의 작용의 산물이고

그 혼란에 대한 책임도 너와 나에게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죠.

나의 머릿속에 생각과 감정과 행동이 이 세계를 만들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이 관점을 여러분들이 공감할 수도 있고

뭐라카노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크리슈나무르티는 평생 일관되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다음으로는

그러면 세상을 안다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관찰해서 이해해야 된다.

그때만 혼란도 종식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세상을 자꾸 알아가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본질을 회피한 것이기 때문에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서

거기에 혹시 해결책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어버린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지도자에 대해서는 본인이 지도자의 길 자체를 포기하고 교단을 해체하고

이런 것에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조금 거부 반응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지도자라고 하는 것은

추종자라고 하는 개념과 대칭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추종자가 없는 지도자는 있을 수가 없어서

이 관계 자체가 대단히 불건강하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결국은 지도자는 우리 추종자들을 이용하고

추종자들은 이용당하게 돼 있는 관계다.

이게 잘못하면 지배와 착취 관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면 혼란을 종식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혼란을 더욱더 가중시킬 수 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크리슈나무르티가 이야기하는 것은

어깨동무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라는 것이죠.

단독돌파

자기를 성찰하고, 자기를 이해하고, 홀연히 벗어나는

단독돌파만이

그런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은 바뀐다.

방법론적으로 보면 대단히 개체주의적인, 미시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은 이 사람은

자기를 이해한다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한번 보면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당연히 물리적인 세상에서 고립과 은둔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죠

 

그럼 자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크리슈나무르티는 두 가지 얘기를 중요한 얘기를 합니다.

하나는 자기를 이해한다라고 하는 것은

세상과 자기를 이해한다라고 하는 것은

어떤 멋진 이론에 탐닉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멋진 설명이나 이론이나 이상

이런 것들에게 거기에 어떤 탈출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에너지를 쏟지 마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엉뚱한 짓을 한다는 것이죠.

어떤 어떤 이데올로기나 어떤 이상적인 어떤 아이디얼한 사상이나

아니면 또 나를 구원해 줄 것 같은 지도자나 그다음에 체제

또는 돈이라든지 이런 눈에 보이는 것

그다음에 배설적인 쾌락

이런 것들은 그 순간에 뭔가 마비를 시킬 수 있지만

결국 더 큰 괴로움으로 돌아오는 것이어서

그렇게 에너지를 써버리고 나면

자기 성찰을 통한 이해를 하기 위한 그런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질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지 말고, 그런 상상을 하지 말고

현재 내가 겪고 있는 혼란을 똑바로 봐라

거기서부터 시작해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좀 다른 점이고

두 번째는 자기를 이해하려면

주의를 잘 주의력을 잘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거죠.

 

주의력이 뭐냐?

관심이 있으면 깊이 들여다보게 되겠죠.

첫 번째는 깊은 관심을 가져야 되고

두 번째는 있는 그대로 봐야 된다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현대 심리학에서 지금은 상식이 되었지만

이때 20세기 초에 크리슈나무르티는 이런 얘기를 주장한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어떻게 경험하고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평가하는가 보면

어떻게 보면 당사자를 비난하기도 하고

또는 자기 자신을 비난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다음 합리화하기도 하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고 합리화하기도 하고

완전히 사실관계를 왜곡해서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기억하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비틀죠.

 

그런데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그것은 헛된 탈출구를 찾는 것만큼이나

자기 성찰, 자기 인식, 자기 이해에 해로움이 된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 식으로 비틀어서 보는데 에너지를 다 써버리면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쓸데없는 탈출구를 찾지 말 것

두 번째는 왜곡하지 말 것

그것이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고

그 있는 그대로를 보는 그 과정 속에

내가 이해가 되고

내가 이해가 되는 그 과정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변형과 탈바꿈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두 가지 길을 딱 막아놨습니다.

세상 밖에서 뭔가를 거머쥐려고 하지 말라

두 번째는 내면에서 뭔가 비틀지 말라.

 

이 두 가지를 하고

그런데 쓰는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의 사실

있는 그대로 사실은

내가 혼란에 빠져 있고 괴롭고 뭐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직시하는 데서 시작을 해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크리슈나무르티는 어떻게 보면 조금 차가운 진실

그렇게 막 위로하거나 다독거리거나 그렇게 하지는 않지만

생각해 보면 부정할 수 없는 팩트 폭행을 하고 있다

이렇게 말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분이 글을 썼는데 그 글을 잠깐 읽어보면 이런 말을 합니다.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나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내가 사람, 사물 그리고 온갖 관념과 맺고 있는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지요.

그런 관계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갈등과 투쟁이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 담긴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빠짐없이 알아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억지로 기를 쓰고 알아내려고 하면 안 되고

가만히 앉아서 스크린에 비친 영화를 보듯이 그렇게 지켜보아야 합니다.

자기 인식에는 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시시각각으로 스스로를 알아갈 때마다 창조적인 행복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크리슈나무르티는

모든 에너지를 집중해서 자기를 성찰하라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정리해보자면

크리슈나무르티의 세계관은

마치 천동설을 지동설로 뒤집어엎듯이

세상이 아니라 내가 문제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세상은 나의 확장 혹은 투사

나의 생각, 감정, 행동의 투사이고 확장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그래서 세상을 이해하려면 나를 이해해야 되고

세상을 바꾸려면 나를 바꿔야 되는데

바꾸어진다라고 하는 것은

온전한 이해 속에서만

강제로 하는 것은 안 되고

온전한 나의 이해 속에서만 변형될 수 있고

세상은 그럼 나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내가 변형이 되면 세상은 탈바꿈될 수 있다 하는 것이

크리슈나무르티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세상의 혼란과 또는 나 자신의 혼란과

세상의 비참함과 내 삶의 비참함에 대해서

만약에 우리가 뭔가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거 다 접어두고

자기 자신 속에 있는 혼란과 비참을 즉시하라.

거기서부터 시작해라.

그게 시작이고 그게 끝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저한테는 이것이 평생의 화두였는데

여러분들에게는 마음공부에 어떤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크리슈나무르티 첫 번째 시간

세상은 나의 그림자이다

이런 얘기로 여러분과 말씀을 나눠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