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현덕마음공부] 번뇌의 소멸을 위한 지혜는 지식을 쌓듯이 하면 안 된다

Buddhastudy 2023. 9. 5. 20:34

 

 

 

외부의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지식을 가져야 한다.

그 방법은 분석하는 데 있다.

분석, 개별 지식의 범주화, 연결, 구조화, 예측, 통제가 지식의 과정이고 성과다.

마음 즉 내면의 문제 - 번뇌는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 되지 않는다.

마음이 마음을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잘못된 결과로 이끌기 때문이다.

 

유일한 방법은

관찰하는 자신의 왜곡 상태 (지식, 경험, 관점, 신념으로 인한)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 뒤에 의도하지 않은 변형의 가능성이 있고,

이것이 번뇌로 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생각이 바뀌지 않고 노력으로 번뇌를 벗어나는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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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혜의 목적은 번뇌의 소멸에 있다라고 하는 것을 제목으로 해서

한번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데 많은 문제에 부딪히고

문제 해결을 하기 위해서 지식이 필요하죠.

이 지식은 문자적인 지식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을 의미하는 겁니다.

지식의 목적은 생계라든지 하는 이런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는 거죠.

 

그런데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체계적이다이런 표현을 쓰는데

지식 이야기를 할 때는 주로 범주화, 카테고리별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단편적인 정보들을 너무 많이 가지게 되면 용량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방을, 폴더를 만들어서

지식의 지도를 만들고

위치를 설정하고

각각의 관계를 이어놓습니다.

그렇게 하면 이런 메커니즘으로 이것이 작동하는구나하는 것을 알 수가 있죠.

그게 이해입니다.

 

이해가 되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예측이 가능하고

그러면 이런 이런 변수를 조정해서 결과를 통제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해, 예측의 통제가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지식은 당연히 인류에게 굉장히 유용했고

인류는 이런 지성을 가지고 어떻게 보면 지구를 정복을 했죠.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충분히 행복하지 않다라고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지식 말고 지혜라는 말을 또 우리가 쓰고 있습니다.

이 지혜라고 하는 것은 목적을 보면

현실적인 바깥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심리적인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는 건데

결국은 괴로움이죠.

이 내적 괴로움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 데 쓰는 용어는

지혜라고 말을 다르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식과 지혜를 가를 때에

지식의 기본적인 개념은 쪼개는 거죠.

어떻게 쪼개는가 하면

-생각하는 자와 생각되는 대상

-관찰자와 관찰 대상

-나와 세계

이렇게 쪼개고

그 대상을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서 굉장히 잘게 세분해서

그다음에 그것들 간에 아까 이야기한 위치와 연결점, 메커니즘을 밝혀서

결과를 통제하려고 하는 것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지식이라고 하는데

이 지혜 쪽, 마음의 번뇌라고 하는 문제는

그런 식으로 분석을 해도 잘 안 됩니다.

그게 알았다고 해서 그렇게 되지 않는 것

이게 우리의 문제죠.

 

그래서 지혜가 지식처럼 이런 방식으로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을 위해서

분석이라고 하는 주제를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내면적 지식을 쌓아가는 것도

외면적 지식을 쌓아가는 것과 똑같이 작업을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뭔가를 걱정한다 염려한다, 뭐 뭐 때문에 괴롭다라고 하면

?

이런 질문을 가질 수밖에 없죠.

그래서 나의 괴로움을 분석합니다.

거기는 심리적인 또는 정신분석학적인, 뇌과학적인, 철학적인, 종교적인

여러 가지 분석 툴이 있고

그런 것들은 일정 부분 유용하죠.

 

근데 이 분석 툴의 구조를 보면

분석하는 사람과 분석되는 대상이 있는데

지식의 세계에서는

예를 들면

달을 분석한다라고 할 때는

내가 달을 분석하잖아요.

근데 내 마음의 번뇌를 분석한다라고 할 때는

내가 나를 분석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분석하는 자와 분석되는 대상이

동일한 것에서 오는 혼란이 또는 분열이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내면의 문제를 분석할 때는

주관과 객관이 분열되는 문제가 생기고

이것에 자아를 갖다 붙이면 자아분열

이런 표현이 쓰이지 않습니까?

 

여기서 분석자가 단순한 관찰자냐

아니면 분석자가 어떤 권위를 가진 평가자냐에 따라서

이 결과가 많이 달라집니다.

 

만약에 분석자가 어떤 권위를 가지고 분석 대상을 평가한다고 하면

즉 무슨 습관이나 사고방식 또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심리적 약점

이런 것들을 지적하면서

너는 이거 이거 때문에 안 돼라고 하는 그 너가 바로 분석하는 자기거든요.

 

그렇게 됐을 때는

이 분석하는 자가 권위를 가진 평가자가 되면

이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약점들 때문에 생기는 건데

그 약점에 대해서 낙인을 찍는 거죠.

너는 이래서 그래” “너는 이래서 안 돼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렇게 낙인을 찍으면 그 다음에 몰아가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해야 돼” “저렇게 해야 돼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럼, 그것이 뭡니까?

셀프 가스라이팅이죠.

스스로를 못 견디게 몰고 가는 겁니다.

이게 셀프 가스라이팅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면 반성문 쓰는 거죠.

자기를 분석한다고 해놓고 나중에는 반성문을 쓰고 앉아 있고

그 결과는 뭐냐 하면

나는 그래서 안 돼” “나는 좀 안 될 것 같아

이런 부정적인 상태에 빠질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면 분석자가 권위를 가진 평가자가 아니라

분석자가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릴 수 있는 관찰자가 되려면

이런 것들이 모두 어디에서 왔나 하는 것을 봐야 합니다.

 

권위를 가진 평가자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내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 아니죠.

그것은 사회화의 결과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지 않습니까?

글을 모를 때는 부모에게서

또 글을 배울 때는 학교나 세상으로부터

이래야 된다라고 하는 것들이 많죠.

 

그런 것들을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내면화했고

그 내면화가 나를 분석할 때 나를 관찰할 때

권위를 가진 평가자로 작용을 하는 겁니다.

헬퍼가 아니라 낙인찍고 단죄하는 평가자로 작용을 한다.

그러면 이 사람은 자기를 알려고 가다가 주눅이 들어버린다.

이렇게 되겠죠.

 

그래서 분석자가

관찰자가 아닌 평가자로 활동하면서 일어나는 문제가 있어서

그게 더 복잡해져 버리는 겁니다.

문제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이 분석한다라고 하는 것은 주관과 객관이 모두 난데

내가 나를 분석하는 모순이 있고

그 결과도 좋지 않다 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면

뭔가 이렇게 쪼개고, 분석하고, 뜯어본다 라고 하는 것이

이 마음 문제에 있어서는 해결책이 아닐 수도 있겠다라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분석자가 있다는 것은

이미 분열을 대상으로 하니까

분열된 마음에 평화나 지혜나 명확성이 있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런 생각을 해봐야 하는 겁니다.

 

분석자가 분석 대상

내가 내 마음의 어떤 모습을 보는, 이런 모순적인 상태가 아니라

전체를 전체로서 그 순간에 그냥 봐버릴 수 없을까, 그죠?

그러니까 분열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전체적으로 한순간에 진실, 사실을 볼 수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해봐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온전한 관찰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특별히 분석하거나 인과관계를 설정하지 않아도

저기서 차가 오면 피할 줄 알고

또 뱀이 고개를 들고 있으면 그 도망갈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어떤 지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우리한테 갖추어져 있는 것인데

우리는 너무 문제를 복잡하게 생각하고

그 복잡하게 생각한 것의 결과로

우리는 더더욱 큰 번뇌를 안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생각하기 시작하면 밤을 새우고

밤을 세우면 수만 가지의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지?’라고 하는

걱정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지각

전체를 전체로 순식간에 봐버리는, 명확하게 봐버리는

이런 온전한 지각은 또 어떻게 가능하지?

또 어떻게라고 하는 방법론을 묻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어쨌든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생각을 해봐야 되는 것이죠.

 

또 다르게 이야기하면 이건 에너지의 문제라는 것이죠.

우리는 분석하는 데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쓰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에 상상을 해보면

분석하는데 쓰는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 막대한 에너지가 찰랑거리면서 남아 있지 않겠어요?

그러면 그 에너지가 우리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즉시 직관하는 데 쓰여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표현을

보는 자가 따로 있는 건 아닌데 확실하게 보이는 것이죠.

그래서 명료하게 보이는

그러나 보는 사람이 따로 있고, 보이는 대상이 따로 있고

내 마음을 분석하는 내 마음이 있고, 분석 당하는 내 마음이 있고

이거는 마음의 세계에서는 모순이다, 이거죠.

 

그리고 이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은 보는 자 없이 그냥 보는 것

말이 어려울 수 있는데 생각을 해보면

즉 보는 자 없이 본다는 것은

누군가가 평가하고, 누군가가 낙인을 찍고

누군가가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는 거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내 마음을 보게 되는 것

이렇게 이야기하면 조금 쉬울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석자라고 하는, 권위를 가진 분석자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마음에 있어서는

내가 갖고 있는 지식, 경험, 아까 사회화된 내면으로 받아들인 가치들

그다음에 그것이 신념이 된 거, 나의 관점 이런 것이잖아요.

그건 모두 굴절을 만들어낸 왜곡을 만들어 내죠.

그 굴절률이 크다는 것은

자기만의 독특한 시각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겠죠.

그러면 그 굴절률이 굉장히 크다 라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첫 번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알아차리면

수많은 분석에 쓰이는 그 에너지의 소모를 막을 수 있고

그 에너지가 찰랑찰랑하게 되면

우리가 사물을 보는 명확성이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럼, 그것이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한

너 자신을 알라라든지, 또는 너 속에 답이 있다라든지

이런 것들을 실감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불안하고 자신이 없고

명확하게 보이지가 않으니까 자꾸 물어보고

이러면 어떻게 하지, 저렇게 저러면 어떻게 하지?

번뇌의 번뇌를 더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왔죠.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내가 굉장한 왜곡의 굴절율, 나의 신념, 지식, 경험

이런 나의 그런 부분으로 내가 많이 왜곡되어 있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말고

사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죠.

 

그렇게 해서 물이 흐려진 것을 이해하면

가만히 있으면 흐려진 물이 가라앉으면 물은 다시 맑아지고

그러면 밑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비유로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 될 유일한 것은

내가 나의 지식, 그다음에 경험, 신념, 관점

이런 것들에 의해서 많이 왜곡되어 있구나

하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면

그 즉시로 그런 것들이 깨어져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가능성이 높아진다.

상황이 점점 더 명료해질 수 있다.

그래서 나의 본능의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다.

그것이 지혜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은 지혜, 내면의 번뇌를 다스리는 지혜라고 하는 것은

외부의 우리의 생계 문제를 해결하는 지식의 차원

즉 분석해 가는 방법으로는 안 된다.

 

유일한 방법은

나의 왜곡을 알아차리는 것 정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그리고 거기서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다.

하는 얘기를 하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