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나는 누구인가 18. 깨달음, 입자와 파동을 알면 끝난다!

Buddhastudy 2023. 9. 6. 19:41

 

 

 

이중슬릿 실험 -> 나는 우주이다.

 

우리의 경험 가운데 가장 확실하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은 물질의 존재이다.

오감을 통해 잠시도 쉬지 않고 들어오고 곧바로 확인되는 것이 물질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아리송한 것들이 꽤 되지만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물질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러다 보니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어처럼

물질과 함께하는 현실의 가치를 무엇보다 우선시하게 됐다.

 

이런 물질에 대한 신념을 더욱 높여준 것이 아이작 뉴턴이다.

그는 1687년에 발표한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중력 질량과 관성질량이 같다는 사실에 착안해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뉴턴의 명성과 함께

물리 법칙에서 질량이 차지하는 비중은 급상승하게 되었다.

오랜 신앙의 압박에 대한 반작용 때문인지

기계론적 사고는 줄기차게 확산되고

1814년에 이르러서는 측정값만 정확히 알면

먼 미래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는 라플라스의 괴물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우리의 오감을 통해 가장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물질

그것의 가장 큰 특징인

질량의 위상이 커진 것은 물질세계가 실제한다는 믿음을 더욱 공고하게 해줬다.

 

물질은 질량으로 표현되고

질량은 입자의 덩어리로서 설명되어진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작은 입자를 찾았고

결국 돌턴이 예견한 원자라는 것을 차례대로 발견하였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1905

광전 효과를 통해 빛이 입자로 되어 있음을 증명해내자

물질은 실제라는 등식은 진리로 굳어졌다.

그리고 10년 뒤,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 원리에 이어 일반상대성 원리를 발표하자

질량의 위상이 정점에 달했고

이제 질량과 입자를 부정할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명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질량= 입자= 실제> 라는 등식에 제동을 거는 움직임이

암암리에 일어나고 있었다.

1800, 토마스 영은

<소리와 빛에 관한 실험과 연구개요>에서 빛의 파동성을 주장했고,

그의 뒤를 이어 오귀스탱 프레넬은

빛의 파동 모형을 정식 이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여전히 뉴턴의 명성에 가려, 파동성이 입자성에 대적하기란 버거웠다.

 

그러다가 1927년에 데이비슨과 저머의 <전자 이중슬릿실험>을 통해

파동성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이들은 입자성과 파동성이 동시에 나타날 수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입자성의 권좌에 커다란 흠집을 내었다.

 

 

이제 물질만 참된 존재라고 여기던 세상에

파동이라는 무시무시한 적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더라도 실험 결과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과학자는 거의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입자는 무조건 우선해야만 하는 대상이었다.

 

그래서 파동이 가능하게 하는 어떤 물질로 우주가 가득 채워져 있을 것이라 여겼다.

입자의 파동성을 부정하거나 폄하하기 위해

에테르라는 가상의 물질까지 만들어 우주를 가득 메웠다.

훗날, 마이켈슨과 몰리 실험으로 에테르의 존재는 부정되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꾸준한 실험 결과, 빛이나 전자만 파동성을 띤 것이 아니었다.

존재하는 모든 입자가 파동의 성질을 구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되자, 입자를 신봉하던 과학자들 역시

파동성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입자는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지닌다는

이중성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그 내막이 어찌 되었든 합리적인 절충점이었다.

 

 

그런데 양자역학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입자성과 파동성의 균형은 점점 허물어져 갔다.

계속된 실험은 입자성을 축소하고 파동성을 부각해 나갔다.

그러다가 일부지만 [파동만이 존재의 실제 모습]이라는 주장까지 대두되었다.

 

 

이렇게 되자, 입자 신봉론자 측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여태껏 양보한 것도 억울한 일인데, 권좌까지 넘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양자역학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범한 입자물리학의 속도를 바싹 높였다.

 

이때 구원 투수로서 등장한 것이 표준 모형이다.

이것은 양자역학의 실험 결과에 상관없이

우주는 변함없이 입자로 되어 있다는 가설에서 출발한다.

쉽게 말해 우주의 모든 것을 입자로써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표준 모형은 그 첫발을 디뎠다.

 

 

초반과 중반의 표준 모형은 탄탄대로였다.

양자역학자들이 관찰자의 문제를 들어

[의식도 자연의 일부]라고 떠드는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표준 모형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세 가지 힘을 순조롭게 풀어나갔다.

약간 복잡하고 어설픈 구석은 있지만

그런대로 하나의 방정식 내에 묶어놓기도 하였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에 봉착하였다.

최초의 입자, 그러니까 질량이 어디서 왔는지의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했던 것이다.

첫 단추를 제자리에 끼지 않으면

그 이후의 단추는 모조리 무의미하게 되고 마는 이치이다.

 

표준모형은 [입자와 질량이라는 절대불변의 원칙] 하에 세워진 이론이다.

그렇기에 질량을 부여하는 입자가 반드시 관측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그 유명한 힉스입자이다.

 

참고로 과학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반증이 없는 이론이다.

반증의 구석이 없이 일방 통로로 나아가는 이론을

유사 과학, 쉽게 사이비 과학이라 한다.

 

가령 교황청에서 신을 증명하거나

티벳 불교에서 윤회를 증명하는 실험을 한다면

이미 답이 정해져 있기에 반증의 기회가 없다.

이렇게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몰려 원하는 결과만을 추구한다면

그건 영락없는 유사과학이다.

 

평면 세계 생물들은 평면이야말로 일모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들의 과학이 발전하여

평면은 높이가 없어 실제할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떨까?

평면이 보정되는 동시에 그들의 세계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실제하지 않는 허상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그들 역시 환영으로 전락될 터.

그렇기에 그들은 관측 사실을 어떡하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평면으로 치환하여 평면 세계의 규칙에 맞게 적용해야만 한다.

이처럼 과학에 어떤 원력이 끼어들면 유사과학이 되고 만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기이하게도 오늘날 입자 물리학자들이

힉스 입자에 목매면서 그런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힉스 입자가 없으면

표준 모형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증발해 사라져야만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과학자들은 입자물리학의 생존을 걸고

픽스 입자에 대한 마지막 줄다리기를 하였고

2013년 양성자를 8TeV(테라전자볼트)의 에너지로 가속시킴으로써

마침내 그것을 찾아냈다.

 

그렇다면 표준 모형이 완성됨과 동시에

입자물리학이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인가?

 

그런데 입자라는 것 자체가

어떤 임의적 계산에 의한 가상적 산물임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힉스 입자를 비롯해 새로운 종류의 입자가 수없이 등장해도

구조적 모순은 해결할 수 없다.

왜냐, 입자를 설명하기 위한 질량 개념부터가 오류투성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질량을 모든 존재와 운동 법칙의 잣대로 삼아왔지만

사실상 그것을 직접적으로 측정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에너지나 물리량이 주어졌을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놔두어서는 인식의 한계에 걸린다.

애매모호한 자연 상태의 질량을 붙이고,

이로써 입자를 만들어야만 우리의 인식은 활발하게 작동하게 된다.

양의 무리에 1, 2, 3, 4...의 숫자를 붙여야만

셈을 쉽게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때 양과 그것에 붙여진 숫자는 엄밀히 다르다.

 

 

우리는 물질, 다시 말해 질량과 입자에 흠뻑 길들어져 있다.

물론 그렇게 해서 우리의 삶이 편리해진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편리한 것과 진실을 바로 아는 것은 별개이다.

 

평면 세계 생물들이 단지 편리만을 위해 사각뿔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어떻겠는가?

그들 입장에서는 관측되는 사각뿔을 모조리 평면으로 치환하여 인식하는 것이 편리하고 유용하다.

하지만 속해 있는 차원의 고유 특성과 편리만을 계속해서 고집한다면

영원히 사각뿔의 실체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양자역학에서 진행된 숱한 실험들은 경고하고 있다.

양자의 세계에는 입자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가 없음을 꾸준히 보여줘 왔다.

그렇기에 양자역학이 자신의 목소리를 좀 더 세게 높인다면,

입자물리학의 질주에 어느 정도의 브레이크를 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양자역학자들도 대부분 입자 추종자들이다.

보고, 듣고, 만져지는 모든 것들이 입자로서 다가오기 때문에

그들 역시 입자를 떠나서는 이해의 한계에 걸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리차드 파인만은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자신을 포함하여 단 한 명도 없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왜냐, 모두들 입자를 버려서는 인식의 한계에 걸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평면 세계 생물들이 평면을 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은 서글픈 한계이다.

 

 

양자역학자들 역시 자신들이 실험하는 결과에 대해 어떡하든 입자론적으로 해석하려 했다.

생사를 동시에 만족하는 고양이를 받아들일 수 없기에

논점을 벗어난 앙상불 해석을 내놓았고

또한 상태가 결정될 때

남게 되는 다른 쪽 고양이를 처리하기 위해 우주를 쪼개기도 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입자론적 해석들이 줄을 이었지만,

어느 것 하나 상태의 중첩이나 양자 얽힘 현상에 대해

분명한 답을 내려주는 것은 없었다.

 

결국 다수결 투표를 진행해서 코펜하겐 해석을 따르는 식으로 어물쩍 넘어갔다.

그래도 여전히 남는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분리하여 따로 접근하는 방식을 택했다.

납득할 수 없는 현상은 모조리 거시세계와 구별되는 미시세계만의 특성으로 몰아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양자역학은 양자장론을 만들어

수학적으로 연속적인 장을 입자로 재해석하게 되었다.

이것을 양자화라 하는데 연속인 장을 무한한 입자들의 합으로 보고

무한대가 되는 점을 온실 입자로 해석하기도 한다.

 

일반 상대성 이론의 연속성과 양자역학의 불연속성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노력도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초끈 이론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1차원 끈의 지속적 진동에 의해 입자마다 고유한 성질이 생기고

여기서 우주 질서가 생성된다는 이론이다.

 

이것 역시 입자를 옹호하기 위한 가설에서 시작됐으니

과학자들이 얼마나 입자를 포기하기 어려워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그렇다면 도대체 실재하는 건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