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올라마음학교

[교장쌤 특강] 100살까지 재밌게 사는 방법

Buddhastudy 2024. 5. 14. 19:59

 

 

--이근후 박사님의 책을 봤습니다.

그 분이 말씀하시는 정견과

교장선생님의 정견은 무엇이 다른지요?//

 

 

근본적으로는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정견을 하면

반드시 어디로 연결되냐면, 깨어있음으로 연결돼요.

 

근데 우리가 성경에도 보면

깨어있으라는 말이 굉장히 많이 나오고

불경에도 깨어있으라는 말이 엄청 나와요.

 

근데 이 깨어있음이

조금 전에 말씀하신

자기의 옛날 선입견이나 관점을 가지고

라떼 얘기

그런 거 하는 게 깨지 못한 거예요.

 

그래서 현재 지금 이 순간에 가장 충실한 삶을 사는 게 깨어있음인데

그거를 넘어서 더 깊이 정견을 하게 되면

깨어있음으로 연결되고

깨어있음은 또 영성의 증진으로 연결이 됩니다.

그리고 영성의 증진은

나아가서 깨달음이나 구원

그리고 자기의 영혼을 자기가 직접 보게 돼요.

이런 어떤 영성 증진의 문제까지

아주 심오한 그 문제까지 연결이 돼 있습니다.

 

 

--내 마음에 좌우되지 않고 바르게 보는 방법은?

우리는 어떤 사람 한 명을 보아도

어제까지만 해도 좋았던 사람이

오늘 내 기분이 안 좋다고 나쁘게 봅니다.

그 어떤 사물도 마찬가지죠.

이런 내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을 벗어나는 방법이 무엇인지요?//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셨는데

이 정견, 바를 정자는

사실 모든 사람마다 자기의 관점이 다 옳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자기가 정견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근데 사실은 예수님도 마찬가지고, 석가모니도 마찬가지지만

올바로 정견하려면 자기가 보면 안 돼요.

나를 비우고 봐야 돼요.

 

나를 비우고 보면 왜 정견이냐 하면

내가 내 안에서 나의 고집, 나의 선입견, 나의 편견, 나의 가치관이 비워질수록

그게 하나님이나 부처님의 눈을 닮아가요.

 

우리가 비워졌다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진다, 멍청해진다, 바보 같아진다가 아니고

무한한 어떤 영적 메시지가 떠올라오고

상대방을 정말 있는 그대로 다시 보게 되고

지혜롭게도 보게 돼요.

 

근데 그게 끝이냐 하면

그보다 더 영성 높고, 더 지혜로운 관점이 또 나올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견법은

[내가 아는 나를 온전히 비우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해 주는 거]예요.

그게 정견입니다.

 

 

--책을 쓰는 비법이 궁금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이 바쁘셨을텐에

어떻게 그런 와중에도 책을 쓸 수 있는지요?//

 

사실 이 책을 제가 열두 번째인지 열세 번째인지 잘 몰라요.

세어 봐야 알아요.

 

저는 그 하루의 시간을 몇 등분을 내서

그중에 어느 부분은 온전하게 나만의 내면의 시간

영성공부 시간에 할애해요.

 

아침에 제가 회사에 7시 반에 출근합니다.

그래서 9시까지 1시간 반은 묵상하고, 명상하고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글을 써요.

그런 시간이 그 글이 마음에 들면 모아뒀다가

1년 동안 모으면 충분히 책이 되고도 남죠.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초자아와 영성은 같은 뜻일까?

전에 말씀하신 바로는

모든 사람에게 초자아가 있고

아까는 일반인들이 영성적인 부분에서 개발이 덜 되었다고 했는데

에고와 영성, 그리고 초자아는 서로 무슨 관계인지요?//

 

 

그 개념은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하면

애고 중심의 삶을 살던 사람이

초자아라고 해도 좋고, 하나님이라고 해도 좋고, 부처님이라고 해도 좋고

깨어 있는 그런, 어떤 신에 가까운 그런 삶의 상태

삶의 방식으로 다가가는 것이

바로 영성이 증진되는 삶이라고 그래요.

 

그거는 뭐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손길, 예수님의 손길 이렇게 말할 수가 있고

불교적으로 말하면 깨어나는 과정이죠.

 

깨어나는 과정은 뭐냐 하면

사람 안에는 사실은 7가지 요소가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랑 따로 계신 게 아니라

이미 우리랑 항상 같이 계시거든.

같이 계시는 그거를 나의 근원이라고 그래요, [근원체]

 

그다음에 우리가 뭘 아는 게 있어요, 뭘 보고 깨달아 아는 게 있어요.

그거를 우리가 삶을 살게 하는 [원인체]라고 그러고

 

그다음에 우리가 정신활동을 해요.

의식을 갖고 이런 거를 [정신체]라고 하고

 

그다음에 또 우리는 뭘 상상해요.

[상념체]가 있고

그런가 하면 우리가 기운이 있어야 또 움직이고 의식활동을 해요.

그래서 [기운체]도 있고

 

그다음에 이렇게 생각, 감정, 느낌, 뭐 이런 것들을 막 써서

어떤 불교식으로 말하면 오온활동을 해요.

의식활동을 한다고

분별하고, 의도를 행하고

이걸 [오온체]라고 그래요.

 

그다음에 물질 [육체]가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은 7가지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그 무지개층을 가진 존재, 영적 존재에요.

 

그런데 보통 사람은

이 물질과 온체 생각, 감정, 느낌 여기가 중점적으로 개발돼 있고

아까 내가 먼저 말씀드린 근원체나 원인체, 정신체 쪽은

아주 개발이 안 돼 있어요.

 

그러니까 형평이 안 맞아서

이쪽에 한쪽에 치우친 사람을

그거를 불교식으로 말하면 범부 중생

내지는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죄인

이렇게 말하는 거고

 

저쪽이 개발되고 그쪽을 정견해서 깨달아 아는 사람을

기독교식으로는 의인또는 구원받은 자라고 그러고

불교식으로는 깨달은 자라 그러고

상위자아라고 불러도 되고

말은 중요하지 않아요.

 

 

--깨달음을 얻은 고승들의 기행?

우리 나라의 고승들의 기록을 보아

득도를 했음에도 일반인의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분명 깨달음을 얻었을 텐데

이런 고승들의 행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요?//

 

 

그런 걸로 치면

원효대사도 파괴해서, 아이 자식도 낳고 뭐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거는

우리가 그 일반 깨달은 사람의 경지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이렇게 하지 말아야 되는데 왜 그러느냐?”라고 하는 관점을 가지고

어떤 법칙으로 사람을 얽어매려고 그래요.

왜 그런 법에 어긋나느냐?”

 

근데 예수님도 말씀하셨지만

안식일이 너희를 위해서 있는 거지

너희가 안식일에 규제받을 존재가 아니다

이런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그와 같이

우리가 그런 것부터 자유스러워져야 돼요.

자유스럽다는 걸 방종하고 혼동하면 안 되는데

 

방종은 지멋대로 막 하고도 뭐 상관없다 이런 게 방종이고

자유라고 하는 건 뭐냐 하면

글자 그대로 자유

스스로 자, 말미암을 유

나로 인해서 모든 게 말미암게 된다.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진다.

이게 자유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자유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정말 깨어난 사람, 구원받은 사람의 삶이라고 말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고승이 그런 행위를 했다고 해서

무조건 좋다 나쁘다고 하기보다는

예를 들어

누구한테 어떤 그런 것도 깨라라고 하는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일부러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진짜 자기가 그런데 무애하고 걸림이 없기 때문에

그래도 나는 아무 마음에 흔적이나 무슨 거리낌이 없다

그래서 그랬을 수도 있고

그거는 뭐 모르겠죠.

 

 

 

--일반인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나요?

그래서 정견을 하면 정말 삶을 바꿀 수 있나요?

명상이나 기도하지 않는 우리 같은 일반인도 깨달을 수 있다는 건가요?//

 

 

아니 저 같은 진짜 범부 중생도

지금 저 공부를 하는 중인데

누구나 가능하죠.

 

왜냐면

누구나 다 기독교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자기가 거부하고 있을 뿐이지, 항상 하나님이 손잡고 계셔요.

 

불교식으로 말하면

항상 누구나 부처의 성품을 다 갖고 있고.

 

이슬람 교리로 말하면

하나님이 네 문 앞에 와서

네가 문 열기를 학수고대하고 기다리고 계신다고 그래요.

이슬람 수피즘에서는.

 

그러니까 어느 말이든 간에

결국은 다 자기 하기 나름인 거예요.

 

근데 저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저는 정말 평생을 여기에 관심을 가져왔어요, 어렸을 때부터.

남들이 볼 때는 어떨지 몰라도

저는 [마음의 평화]를 여기에서 참 많이 얻었어요.

 

저는 교회도 다녀보고, 절에도 가봤고

또 무슨 대종교도 잠깐 다녀봤고

무슨 별별, 종교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데 좀 섭렵을 좀 했지만

 

결국은 그런 종교 형식이 중요한 게 아니고

거기에서 말하는 진짜 진리의 길

우리를 안내하는 그 정말 중요한 생명의 길을

우리가 실제로 자기가 얼마만큼 가느냐?

그게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효과를 봤다.

물론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그러나 요만치 왔어도 그만큼 효과를 봤고

, 그것 때문에 내가 행복하고

정말 인생이 허무하지 않고

너무 보람되고

나날이 기뻐지고, 밝아지고.

 

내가 어디서 와서 이렇게 지금 살고 있고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몰라.

그런데 깨달으면 알게 돼요.

 

기독교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영접을 하면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진짜 천국이라는 게 뭔지

지가 상상하는 게 아니고

진짜 천국의 문이 열리거든.

 

그분들이 와서 저는 거짓말하신 게 아닌데

너무나 많은 후세

예수 팔고, 부처 팔아서 밥 먹고 사는

중생 사이비 스승들이

너무 어렵게 만들어 놨다고 생각해요.

 

저는 지금 사실 어떤 종교색을 띠고 이런 걸 하는 게 아니거든요.

말은 불교 용어도 쓰고, 기독교 용어도 빌려 쓰지만

진리의 길은 어디에나 있지

그게 기독교에만 있거나 불교에만 있다는 거는

그 사람들의 일방적인 에고인 생각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한 번 관심갖고

이제 우리가 나이가 60대가 됐으면

한번 앞으로 인생을 추수할 때가 됐기 때문에

그 곡식이, 열매가 맺을 때 맺을 열매가 없다는 것은

굉장히 참 슬프고 허망한 일이기 때문에

정신적인 열매나

물론 이제 다른 사회적 측면에서는 그런 것도 물론 많이 맺으셨지만

영성적인 측면에서

그런 거를 한번 관심을 가져보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말이 길어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