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올라마음학교

[현대선1] 우리는 괴로움을 느끼게 프로그램되어 있다! / 피올라 현대선 1강 "집짓는자와 부수는자" 1회

Buddhastudy 2024. 5. 21. 19:09

 

 

*!

 

오늘의 주제는

가장 원초적이라고 해야 되나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돌아가서

집짓는자부수는자라는 제목으로

그렇지만 이게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기도 하죠.

그래서 오늘 이 문제를 좀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그 불붙은 집이라는 얘기를 하셨어요.

화택이라는.

그래서 거기서 사람들을 그 아이들을 끄집어내야 된다

이런 얘기를 하셨죠.

 

여러분들이 석가모니 부처님 입장에서 보면

불붙은 집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야.

저걸 빨리 불러내야 되는데

안 나가겠다고 지금 눈앞에 장난감 가지고

막 떼를 쓰고 있는, 이런 상황이죠.

 

그러면 왜 석가모니께서는 삶의 본질을 불붙은 집이라고 봤나?

우리 이 생각 한번 해봅시다.

이 삶이라고 하는 이 자체가 왜 불붙은 집인가?

 

우리가 이 삶을 산다는 거에는 필수적인 요소가 몇 개 있어야 돼요.

첫 번째는 우선 내 몸이 있어야 돼요. 삶을 산다 그러면

내 몸이라는 게 우선 있어야 되고

 

두 번째는 이 세상이라는 게 있어야 돼요.

이 세상에 내 몸이 나타난 게 삶이잖아요.

그리고 이 세상에 내 몸이 나타나도 가장 중요한 건 뭐냐 하면

이 마음이라는 게

이 세상에서 내 몸을 이렇게 가지고 살면서

우리가 자동차를 새로 하나 사면은 매뉴얼이라고 그러죠.

자동차를 관리하고 움직이는 그 매뉴얼 북을 주고

그 프로그램이 어떻다.

 

근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삶의 매뉴얼을 보신 거예요.

삶의 매뉴얼을 보니까, 거기서 뭘 발견하셨냐면

[연기법]이라는 진리를 발견하신 거예요.

 

즉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 마음을 가지고

몸과 세상 사이를

몸을 운영해서, 몸을 자동차처럼 타고 다니면서, 비유를 들어서요.

그래서 세상을 산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잘 생각해 보면

[마음과 몸과 세상은

항상 동시에 나타나고, 동시에 사라집니다.]

이게 서로 따로 분리됐다라는 건 우리 생각이지

실제로는 한 번도 따로 분리돼서 어느 하나만 나타난 적이 없어요.

 

그래서 마음 없이는 몸도 인식될 수가 없고

우리가 분별한 거지

마음이 곧 몸이고, 몸이 곧 세상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과 이 몸이

따로 떨어져서 몸만 딱 우주에 나타났거나

나는 몸은 없는데 세상만 딱 나타났거나

이런 적이 없어요.

 

즉 다시 말하면

, 마음, 세상이 이콜이란 얘기예요.

너무나 듣기에 좀 새로우시겠지만.

 

그런데 문제는 부처님은

이 마음이 무슨 프로그램을 갖고 있느냐 하면

[연기법]이라는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라는 걸 발견하신 거예요.

 

연기법이라는 게 뭐냐 하면

[상대법]이라는 얘기예요.

[이것이 있으려면 저것이 있어야 한다.

저것이 없는데 이것은 혼자 있을 수가 없다.

저것이 사라지면 이것도 사라진다]

이 얘기예요.

 

예를 들면

이게 짧으냐 기냐?”하고 질문하면

우리가 답을 못하죠.

이거보다 짧은 거 있으면 이게 긴 거고

이거보다 긴 게 나오면 이게 짧아지죠.

 

이렇게 세상은

연기법에 의해서 인식하고 분별하는 세상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연기법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분별]이라는 얘기거든요, 분별한다.

저거는 어떻다 이거다 저거다이렇게 분별하는데

문제는 이 분별이 반드시

좋고 나쁨, 그리고 옳고 그름

이런 것들을 동반한다는 거예요, 내용물 안에.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다 보면

좋은 것도 있지만 나쁘고 싫은 것도 많죠.

쾌락도 있지만 고통도 있죠.

그럼 이런 것들이 반드시 같이 다닌다는 거예요.

혼자 댕기질 않아요.

좋은 것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발견하신 삶의 본질

이 우리 삶을 있게 하는 마음의 프로그램이라는 게 뭐냐 하면

[분별]이라는 걸 발견하신 거예요.

[연기법은 다른 말로 하면 분별법]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끝없이 분별함으로써 자기를 인식하고 있어요.

어떻게?

내 몸과 내 몸이 아닌 것을 분별함으로써

내 몸이 인식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어서

자기 몸이 여기 있는지 까맣게 모를 때가 있잖아요.

독서삼매 아니면 연속극삼매 아니면 운동삼매

뭐가 됐든 간에, 그럴 때 여러분은

자기 몸에 대한 분별을 안 하기 때문에 자기 몸을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다시 우리가 몸으로 돌아와서

몸을 인식할 때 또 분별할 때는

몸과 세상이 딱 분별되죠.

어디가 아프다당연히 분별되죠.

 

이렇게 석가모니가 발견하신 건 뭐냐 하면

이 몸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본질]이 바로

[분별에 의지하고 있다]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분별을 하기 전에는, 우린 도대체 뭔가?”라는 거를 집중하신 거예요.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래서 분별 속에서 인식된 감각의 대상들이나

생각 또는 감정 이런 거를 조합해서 오온이라고 그러죠.

색수상행식 그게 오온이에요.

(-, -느낌, -생각, -의지, -분별의식)

그걸 라고 여기고 살아요.

 

그런데 여러분이 정말 정견을 철저하게 하면

이 분별의 본질이 보이기 시작해요.

그러니까 이게 깨어나는 거예요.

[분별의 본질]을 보면 뭐냐 하면

[의식]일 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도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

삶에 내재한 고통에서 구원받는 길에 대해서 예수는 뭐라고 얘기를 했냐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런 얘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나가 곧 길이고, 동시에 생명이고, 진리라는 거예요.

 

또 뭐 이런 얘기도 했죠.

나는 아브라함 이전에 있었다

또 무슨 뭐 내가 없는 곳은 없다

무슨 나무 밑을 들춰보거나 돌밑을 살펴봐도 내가 있다

뭐 이런 좀 알쏭달쏭한 얘기들을 하셨단 말이에요.

 

그 얘기나 사실 석가가 말씀하신

분별하기 이전에 우리의 참모습은 무엇인가?”가 똑같은 얘기예요.

그러니까 결국 진리는 하나인 거죠.

 

그래서 [집을 짓는자]라고 하는 것은

석가모니가 발견하신 것은 우리의 [분별]이라는 거고

예수가 발견하신 거는 그때는 유대교 문화적 바탕에서 유대인이니까

시작했기 때문에

유대교의 그 개념이나 정신세계를 빌려서 말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그때에서 볼 때는 예수는

[너를 버리고 하나님을 만나라]

성경에 보면 계속 그런 말이 나와요.

니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우리는 가진 것이라고 그러면 자꾸 [재산]만 얘기하는데

나라고 하는 [에고심]도 가진 것이에요.

왜냐하면 갓난아기 때는 없었으니까.

 

네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나를 따르라.”

하나님을 따르라.”

하나님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런 말들이 결국 다 뭐냐 하면

석가모니가 말한 거와 똑같은 거예요.

참나를 발견해라그리고 그것과 하나되라

똑같은 말이에요.

 

이렇게 [집짓는자]라고 하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

그 본질이

석가모니는 분별이라고 하셨고

예수는 뭐냐 하면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자기 몸만을 생각하고

그리고 에고심인 나만의 이기적으로 그거에 잘 되기만을 추구하는 삶이

집짓는자라는 거예요.

그게 고통의 원인이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프로그램적으로 구조적으로

우리는 고통 속에 살도록 태어났어요.

우리의 삶 자체가 집짓는자예요.

그러면 여기서 이 불붙은 이 집을 빠져나오든지 부수는자는 과연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