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올라마음학교

[교장쌤 특강] 내가 나라고 여기는 것, 정견의 쉬운 해석

Buddhastudy 2024. 5. 13. 19:42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우리를 유혹하는 것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것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

고통스럽게 모든 것들은 내가 아니에요.

그냥 내 앞에 왔다 갔다 하는 것들이야.

 

근데 우리는 그것을 붙들고

이걸 어떻게 더 잘해보고자

이걸 또 어떻게 바로잡고자

또는 더 어떻게 만들어보고자, 바꿔보고자

무진 애를 써요.

 

이게 보통 사람들의 삶이고

정견하는 사람은 이것을...

 

 

--

Q: 정견이 팔정도의 그 정견인가요?

(팔정도: 깨달음을 성취하는 원인이 되는 8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길, 수단 또는 실천 덕목)

 

그 뜻도 있고

비단 불교의 정경뿐만 아니라

천주교나 기독교에서도 영성을 증진하려면

깨어있으라는 말을 하는데

깨어있으려면 정견을 해야 합니다.

 

요즘 서구 영성가들 사이에

마음챙김이라든지, ‘윗바사나라든지, ‘깨어 있기

이런 것들이 많이 유행하는데

이게 다 정견이라는 명상법에서 파생돼 나온 현대 명상법들이죠.

 

 

--

Q: 정견은 뭐고, 뭐가 좋다는 거죠?

저 같은 일반인에겐 정견이라는 말조차 너무 어렵고 현실과 동떨어진 것처럼 들립니다.

마음을 비우라는 말, 많이 들어는 봤지만, 실천은 못 해봤는데

정견이란 무엇이고

그걸 하면 무엇이 좋은지 알려주세요.//

 

 

원래 쉬운 설명이 제일 하기가 어려운 법이죠.

 

지금 한번 실험을 해봅시다.

두 가지로 듣는데

-첫 번째는 저게 어떤 소리가 나나하고 의도를 갖고 한번 들어보는 거예요.

-두 번째는 마음을 텅 비우고 무심하게 들어보는 거예요.

 

한번 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

아 저런 소리가 나는구나

두 번째

*~!

무심하게 듣습니다.

 

자 이 차이를 좀 느끼시는 분 있어요?

다시 한번 해볼게요.

 

첫 번째

집중해서 듣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무슨 소리가 나나.

*~!

 

두 번째 그냥 무심하게 텅 비었는데

이런 소리가 날지도 모르고 있는데

*~!

 

자 무슨 차이를 느끼시나요?

제가 설명드릴게요.

이 소리에 집중하면 다른 거에 대한 그 의식이 약해져요.

이 소리가 내 눈앞의 공간에 가장 중요한 게 됩니다.

 

그런데 무심하게 들을 때는

다른 거하고 평등하게, 그냥 소리가 있다는 건 알지만

그렇게 주의 집중이 안 돼요.

 

이걸 예를 들면

갑자기 눈앞에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나 멋있는 남자가 갑자기 나타났어요.

그랬을 때 갑자기 세상에 다른 게 안 보이고

이 사람만 확 클로즈업돼서 보입니다.

 

근데 반면에

지금 내가 그런 데 별로 관심이 없고, 나이가 90이야.

그럼 아름다운 여인이나 멋있는 남자나 별 관심도 없고

그리고 지금 그냥 무심하게 있어.

그랬을 때는 그런 사람이 나타났는지 안 나타났는지

아까만치로 그렇게 확 크로즈업이 안 돼요.

 

이게 무슨 차이가 있느냐 하면

정견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일상 중에 계속 일어나는

이런 소리, 대상, 어떤 생각, 감정

이런 거를 찾고, 크로즈업을 하는 버릇이 있어요.

 

-우리가 누구랑 대화할 때는

이 옆에 걸 잊어버리고, 여기에 몰두하게 되고

-어떤 감정이 있을 때는

이 감정을 우선 진정시키거나, 다루려고 이게 크로즈업 되니까

딴 거를 제대로 대처를 못해요.

-어떤 중요한 생각이 떠오르면

딴 거를 신경을 못 써요.

이 생각을 골똘하게 어떻게 해봐야 돼.

 

우린 이렇게 살아왔어요.

그런데 이거를 다른 말로 에고라 그래요.

에고라는 게 우리는 이기적으로 사는 사람을 에고이스다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근데 영성에서는

이게 천주교도 그렇고, 관상 기도라든가 이런 거 할 때는

이거를 기피해야 돼요.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해요.

우리가 맨날 하고 있는 짓을.

 

왜 그러냐면

지금 여기에 계신 분들이 자기가 살고있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은 사실은 살려지고있어요.

 

여러분 중에 어느 누구도 예수님 말씀처럼

자기 생명을 걱정한다고 하루 더 연장할 수 없고

신경 쓴다고 머리카락이 더 빠르게 자라게 할 수도 없어요.

그리고 여러분이 아무리 원치 않아도

조금 있다 심장마비 걸리면 바로 죽어야 돼.

 

즉 여러분은 자기가 산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어떤 생명력에 의해서 살려지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잠을 잔다고 하지만

깊은 잠을 잘 때 내가 숨 쉬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그냥 완전히 내맡기고 자고 있어요.

그런데 자동으로 숨을 쉬고 있어.

이 심장도 자동으로 뛰고 있고

피를 지금도 자동으로 돌려주고 있고

우리가 아침 먹은 거, 점심 먹은 거

자동으로 다 소화시켜 주고 있어요.

 

예수님이 마태복음 625절부터 34절까지 말씀하신 게 있어요.

뭐냐 하면

너희들 너무 염려하고

그렇게 에고를 강조하고 활용하면서 살지 말라, 이 얘기예요.

그러면서 아주 유명한 산상수훈의 비유가 있죠.

들에 핀 백합도 길쌈하는 수고를 갖지 아니하고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도 자기가 씨앗을 뿌리고 추수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다 키워주는데, 다 먹여주고, 저렇게 길러주는데

너희는 왜 맨날 그렇게 걱정 근심과 자기 욕심 속에서 사느냐?”

이런 취지의 얘기를 하십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미 너희들 목숨은

하나님한테 내어 맡겨져 있다는 거예요.

네가 아무리 설치고 해봐야

거기에 단 티끌만큼도 영향을 줄 수가 없다.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거는

자기가 살아온 생각이라든가, 어떤 사고 관습

이런 것들에 의해서 지금 생각하고 말하고 하는 거예요.

그게 자기를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그거는 어떤 충격을 받거나 다른 교육을 받으면

당장 바뀌는 거예요.

 

진짜 여러분을 살리고 있는 거는

지금 여러분을 자기도 모르게 숨 쉬게 하고 있고

이렇게 자기도 모르게 살려지고 있는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어요.

이게 하나님이거든.

그리고 이게 부처님이에요.

말만 다른 거예요.

 

그러니까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생명의 근원을

우리가 더 가까이 가는 게

영성이 증진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거를 자주 느끼는 게 영성 있는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이고.

 

그래서 정견을 한다고 하는 건 뭐냐 하면

이런 거예요.

이제 좀 얘기가 어려워졌는데요, 쉽게 설명을 하면

우리가 만약에 어떤 일상 중에서 어떤 소리가 이렇게 들리면

*~!

이 소리에 따라갑니다.

 

그 소리가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뭐 평을 하고 분별을 해요.

또 누가 무슨 말을 하면

그 말이 의견이 나한테 유리한지 불리한지

또는 내가 볼 때 합리적인지 비합리적인지를 또 분별해요.

이 모든 거는 에고가 하는 거예요.

 

깨어있는 사람은, 정견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그런 것이 있을 때마다

나한테 원래 있는 하나님의 자리, 원래 있는 부처님의 자리

진리의 자리, 영성의 자리로 돌아와요.

 

그 실습을 해봅시다.

*~

즉 이 소리가 나인가요?

이 소리가 나예요?

아니죠.

이 소리는 나한테 일어난 현상이에요, 대상이에요.

어떤 대상이야.

 

이 대상이 내가 아닌데

우리는 이거하고 나를 동일시해요.

그 대표적인 예가

누가 욕을 했어.

누가 나를 뒤에서 험담을 했어.

또는 무슨 좋지 않은 얘기를 했어.

헛소문을 퍼뜨렸어.

 

그러면 우리는 굉장히 기분 나빠하고, 복수하고 싶어하고

흥분하고, 참지를 못하죠.

이게 보통 사람이지만

 

영성을 공부하는 사람은

이 소리가 내가 아니에요.

나는 뭐냐면 이 소리를 듣는 자가 나예요.

이 소리를 듣는 자가 나지

소리가 내가 아니라고.

 

그러면 그런 말도

그 말이 내가 아니고

그 말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가 나잖아요.

 

즉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우리를 유혹하는 것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것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것들은 내가 아니에요.

그냥 내 앞에 왔다갔다하는 것들이야.

 

근데 우리는 그거를 붙들고

이걸 어떻게 더 잘해보고자

이걸 또 어떻게 바로잡고자

또는 더 어떻게 만들어보고자, 바꿔보고자 무진 애를 써요.

이게 보통 사람들의 삶이고.

 

[정견하는 사람은

이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이거에 영향받고, 슬픔을 받고, 상처를 받고, 고통을 받을 정도로

어리석은 인간이 아니다.

이게 깨어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수고하고 짐진 자들은 다 나에게 와라.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편히 쉬게 하시겠습니까?”라고 제자가 물어요.

그랬더니 쌀이나 빵을 줘서, 먹을 걸 줘서, 옷을 줘서, 재물을 줘서

이게 아니고

너희들이 가진 그 자기만을 위하는 그 에고심을 벗어놓게 함으로써

그걸 십자가에 매달게 함으로써

너희들을 편히 쉬게 하겠다고 그런다고요.

 

[정견을 한다는 것]

내가 살아가는 이 습관이

나를 점점 더 불행하게 하고

이 고통의 질곡에서 나를 못 벗어나게 한다는 것을

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삶의 방식을 확 바꾸는 거야.

 

그게 뭐냐 하면

예를 들면

우리가 기간인데 이쁜 젊은 여자가 지나가면

성경에도 그런 말이 있지만

마음의 음욕을 품었느냐? 아니냐?

이런 거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음욕을 품은 것까지 죄가 아니다

이런 사람도 있고

그것도 죄다라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 품었다 안 품었다가 사실은 중요한 게 아니고

그거는 대상일 뿐이에요.

그 대상을 가지고

-나한테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

-나를 돌아보느냐?

-아니면 대상에 끌려서 그거에 따라가느냐?

 

이게 바로 우리의 깨어있음을 결정하는

삶의 태도라는 거예요.

 

더 단적인 예로

와이프나 남편하고 갑자기 부부 싸움을 해요.

별것도 아닌 말을 가지고 상대가 꼬투리를 잡아.

그랬을 때 우리가 왜 싸움을 하게 되냐면

상대방 말에 떨어져요.

그 말에 반응을 하는 거야.

 

근데 이건 뭐냐 하면

*~!

이 소리를 나라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이 내가 아니거든.

근데 그걸 나라고 여기는 거야.

이런 어리석음에서 싸움이 시작되는 거에요.

그 말이 기분 나쁘다고.

근데 사실은 그건 내가 아니야.

이게 정견이에요.

 

즉 모든 것은 내가 나라고 여김으로써

그게 나처럼 자기 동일시됐을 뿐이지.

 

사실은 우리가 깨어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이나 슬픔이나 유혹이나 상처나 아픔들은

내가 [나라고 할 때만 와서 나한테 그게 돼요.]

 

내가 [‘저건 내가 아니다할 때는

그냥 그것으로 있을 뿐]이야.

부인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있다고.

있는데 그게 나한테

과거처럼 그렇게 상처나 고통이나 슬픔이나 분노를 주지 않아요.

그 힘이 미약해지기 시작해요.

 

그리고 나중에는

그런 거와 일체 상관없이

온전한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돼요.

 

이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편히 쉬는 방법이에요.

그리고 이게 바로 마음속에 있는 천국이고

Kingdom of Heaven(천국, 하나님의 나라)으로 들어가는 길이고

우리가 영성을 증진하는 길이고

 

이게 불교나 기독교나 이슬람에서조차

이슬람의 수피즘도 이거를 공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세계적인 종교들이

한결같이 사실 내면에서 추구하는 것은

[정견함으로써 깨어있고

깨어있음으로써 자기의 영성을 높여서 신을 만나라]

이런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