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뇌는 나의 근원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웹진 ‘생명과학정보실’의 대표이자
<장뇌력>이라는 책의 저자 나가노마 타카노리는
우리는 장에서 생겨났으며,
뇌는 우리의 근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뇌가 명령한 대로 몸이 움직이고
뇌가 생각한 대로 행동한다는 기존의 인식은 크게 바뀌어야 한다.
생물은 먼저 장에서 진화했으며
장은 뇌보다 훨씬 오래된 생명의 근원이다.
장은 마음의 움직임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제2의 뇌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기관이며
[장이 더러우면 마음까지 더러워진다.]
오늘은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장의 놀라운 힘에 관한 책
<장뇌력>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심장과 폐에도 ‘마음’이 깃들어 있을까?
심폐 이식 수술을 받은, 클레어 실비아라는 미국인 여성이 있다.
그녀는 수술이 끝난 뒤부터
자신 안에 ‘새로운 마음’이 생겨났음을 느껴왔다고 한다.
그 ‘새로운 마음’은 오토바이 사고로 숨지면서
그녀에게 심장과 폐를 기증한 젊은 남성의 성격이었다.
심장과 폐를 이식받으면서 새로운 인격까지 이식받게 된 것이다.
의학적 관점으로 보면
심장은 산소를 온몸으로 내보내는 장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소화기관인 장에 관에서도 마찬가지다.
진화의 계통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초기 척추동물은 입부터 항문까지 이어진 한 개의 소화관
즉 장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단계에는 아직 뇌가 생기지 않았다.
장에서 심장이나 폐와 같은 장기들이 생겨나고
장벽과 체벽에 있던 신경들이 서로 이어져서
뇌가 생겼다고 추정된다.
그러니 심장에 마음이 있다고 하면
당연히 그 근원은 장에 있는 것이다.
동양의 전통적 신체관은
사고와 머리의 자아를 관장하는 지知
감정과 가슴의 자아를 관장하는 정精
의지와 배의 자아를 관장하는 의意로 요약된다.
머리는 물론이고 가슴과 배에도 자아가 존재한다고 본다.
‘나’는 뇌라는 부분이 아닌, ‘몸’이라는 전체에 존재한다는 의미다.
동양에서는 이 3개의 자아 가운데서도
배(장)의 자아를 단련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왔다.
중요한 점은 이 세계의 자아가 균형을 잡는 것이다.
머리(뇌)의 자아만으로는
몸에서 일어나는 힘차고 활발한 생명활동을 느끼지 못한다.
--먹은 음식이 장과 마음의 건강을 좌우한다
산다는 것은 먹는다는 것이다.
먹는다는 행위는 장이 꿈틀거리는 현상이며
여기에 ‘느낀다’라는 행위의 기원이 있다.
즉, 생물은 뇌가 생겨나기 훨씬 이전부터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고자 느끼면서 살아왔으며
소화기관인 장은 느끼는 기능의 주체였다.
장은 마음의 근원이면서
음식물을 소화, 흡수, 배설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먹는 음식이
신체 건강은 물론, 정신 건강도 좌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배가 아프면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해진다.
반면 이유도 없이 불안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정신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장이 그렇게 반응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장이 건강해져서 뱃속이 안정되면 의욕이 생기고
각오를 다질 수 있을 만큼 서서히 마음이 단단해진다.
마음의 작용을 조절하는 세로토닌은
뇌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알려졌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체 양의 95%가
장이 꿈틀 운동을 할 때 장에서 분비된다.
장이 제대로 운동하면
세로토닌이 분비되어 마음이 안정된다라고 인식하면
정신 안정의 메커니즘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감정과 직관은 어떻게 다른가?
마음이나 감정 너머에는 더욱 모호한, 의식의 세계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영혼의 세계’다.
영혼이라는 말을 쓰면
종교적 색채가 짙다는 이유로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영혼을 무시해버리면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사는 데 꼭 필요한
직관력이나 인격의 본질을 파악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면 영혼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영혼과 마음]의 차이가 이해되지 않는다면
두 단어를 [직관과 감정]으로 바꾸어 보자.
직관은
외부로부터 정보를 포착하는 안테나와 같다.
이는 장에서 시작된 감정과 어딘지 모르게 성질이 다르다.
순간적으로 번쩍이는 것은 직관이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은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두 단어를 확실히 구분할 수 있다.
직관이 안테나가 신호를 감지하듯 포착되는 것이라면
안테나는 어디에 붙어 있을까?
일반적으로 뇌를 떠올릴지도 모르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야생동물은 느낀 대로 행동함으로
생각해서 행동하는 인간에 비해
훨씬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다.
생각하자마자 행위로 바로 이어지지 않으면
직관도 문득 떠오른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야생동물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따라 행동하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뇌에는 안테나가 없다.
느끼는 것은 마음(장)이며
생각하는 것은 머리(뇌)다.
그렇다면 직관은 어디에서 나올까?
옛사람들은 ‘번쩍이다’ ‘직관하다’를
영혼이라는 개념과 연관해 [영감]이라고 불렀다.
품격이란 영성을 갈고 닦는다는 의미이다.
영혼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본능과 관련지어서 과학적으로 인식해야 하는 감각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장뇌력을 갈고 닦는 일은 직관력을 기르는 길이다.
--직관은 뇌로 포착하는 것이 아니다
품격, 직관과도 의미가 통하는 영성은
어떻게 연마하고 그 수준을 높일 수 있을까?
마음은 소화관인 장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만
직관은 신경계와 관계가 깊다.
신경은 외부의 자극을 포착하는 구실을 하며
몸속 구석구석까지 둘러쳐져 있다.
그러면 핵심인 ‘안테나’는 도대체 어디에 세워져 있을까?
예를 들어
축구 선수가 물 흐르듯이 경기를 이어가려면
직관과 행위가 끊임없이 서로 연결되며 나타나야 한다.
경기 동작에서 행위의 출발점이 되는 무게 중심이 바로
복부 또는 단전이라 불리는 부위다.
복부에 위치한 소화관인 장에는
안테나를 세울 만한 장소가 없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신경의 작용이다.
척추동물은 척추뼈를 따라서 중추신경이 뻗어 있는데
그중에 우리 몸의 무게 중심에 해당하는
[엉치뼈에는 다섯 쌍의 신경이,
끝부분인 꼬리뼈에는 한 쌍의 신경이 있다]
우리 몸의 기능을 제대로 조사해보면
다음과 같은 역설이 자연스럽게 성립된다.
첫째, 뇌를 아무리 단련해도 직관이 연마되지 않는다.
둘째, 머리 쓰는 일을 그만두었을 때 비로소 직관이 생긴다.
동물은 꼬리로 직관을 포착한다.
인간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먼저 꼬리뼈로 정보를 포착하고
그것을 몸의 중심부인 배에 전하는 구조가
자연스러운 행위의 기본이다.
뇌가 직관을 인식해 어떤 행위인지 파악하는 것은
동작이 끝난 뒤의 일이다.
꼬리뼈에 남은 단 한 쌍의 신경은
그 자체가 직관의 본질을 일깨우는 상징이다.
뇌는 대상이 있기에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느낀다.
뇌는 무엇을 알아채고, 무엇에 감동하는 것일까?
과학으로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동양에서는 이를 [기氣]라고 일컬으며 하나의 에너지로 인식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에너지 비슷한 무엇인가를 느끼고
그 사람의 가치를 나름대로 감지한다.
하지만 이런 가치는 과학적으로 검증될 수 없어서
뇌의 작용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깨달음은 ‘생물로서의 나’를 기억하는 일
일반적으로 좌선은
수행자가 번뇌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구하는 데 의의가 있으며
묵직한 무게 중심을 낮춤으로써
수행자를 평안하게 하는 훈련이다.
고민을 만들어 내는 원천인 뇌에서 벗어나
생물로서의 기원이 더욱 오래된
배에 의식의 중심을 내려놓는다.
바꾸어 말하면
자손은 생물로서의 나를. 기억해 내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가슴이나 복부에서 느끼기만 하지, 고민 따위는 하지 않는다.
고민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뇌다.
하지만 사람은 습관적으로 머리로 생각하기 때문에
고민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고 믿어버리곤 한다.
불교에는 ‘무명’이라는 용어가 있다.
무명은 마음을 어지럽히는 원인이다.
몸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뇌만 기능하는 현상도 ‘무명’이라 할 수 있다.
몸은 자연의 일부이다.
몸의 존재는 잊어버린 채, 뇌만 기능한다는 것은
뇌만 이 세상에서 고립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무명에서 벗어나려면
뇌로 의식이 쏠린 상태를 알아차려서
의식의 중심을 신체의 중심에 맞추어야 한다.
이것이 좌선의 의미이며
중심을 맞추는 연습을 거듭하다 보면
직관의 회로와 연결되는 깨달음이라는 체험을 하게 된다.
중요한 점은 [생물로서의 나와 연결되는 것이다.]
내가 존재하는 세계와 연결되었다는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다.
뇌는 ‘나’라는 존재를 가두고 있다.
그곳에는 외로움, 고민, 갈등이 항상 따라다닌다.
그런 자유롭지 못한 세계에서 벗어나려면
생물로서의 감각이 깃들여 있는 장을 깨끗하게 함으로써
활성화시켜
직관을 포착하기 쉬운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생물로서의 나와 연결되는 것은
마음의 평안으로 이어져
당당하고 자신 있게 살아가는 생명력의 원천이 된다.
인체가 보내는 신호에 귀를 기울이면
자신이 참으로 무엇을 바라는지 스스로 알 수 있다.
신체는
그러한 경고 신호를 받아들여야 하는 바탕이며
생각을 행동으로 바꾸는 귀중한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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