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식/윤홍식_즉문즉설

81. 윤홍식의 즉문즉설 - 참나, 하느님이 양심인가요?

Buddhastudy 2013. 12. 22. 21:44

출처 : 홍익학당

 

그렇죠. 양심이라고 부르는 게 제일 좋은 거 같습니다. 명확히 표현하자면 말이야 많죠. 조선시대 선비들은 천리라고 불렀습니다. 하느님의 이치. 천심. 하느님 마음. 천심이 양심이죠. 양심, 또 진심. 불교에선 참마음, 진심 그럽니다. 그 말도 좋죠. 저는 그런데 왜 심을 자꾸 붙이느냐? 하느님에다가? 우리 안에서 심을 찾는 게 일단은 저는 자명하다고 봅니다. 밖에 있는 신을 우리가 찾을 수가 없고. 우리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야 되니까. 우리 마음 중에 제일 순수하고 올바른 영역을 찾아서 그 자리에다가 하느님이라고 붙이는 게 일단은 제일 좋은 거 같습니다. 그래서 제일 오해의 여지도 적고, 종교 간에도 서로 성경에도 양심에 증거니, 양심은 늘 얘기합니다. 양심의 증거, 양심의 입증이란 말도 쓰고.

 

이런 식으로 양심은 늘 하느님 편이라는 거는 어디나 공통이니까, 철학자들 중에 그럽니다. 루소가 그랬나요? 인간이 가진 것 중에 오직 양심만이 신에 도달할 수가 있다. 이런 얘기들. 제일 신성하더라는 거예요. 인간이 가진 부리는 욕심들을 다 보면 추한 것도 있고, 다 어둠이 많이 섞여 있는데, 순수하게 우러나오는 그 양심 하나만은 참 고결하더라는 겁니다. 신이 있다면 양심이구나라고 본 철학자들도 많았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한테 얘기하기 제일 좋은 거는 하느님은 양심이다.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다만 또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 민족한테는 하느님이란 표현이 제일 맞죠. 이슬람 가면 하느님이란 뜻입니다. 알라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용은 하느님이라는 뜻이거든요. 다 어디나.

 

어디나 이름은 다르지만 부르는 뜻은 하느님이라는 거니까 우리 민족이 하느님이니 한울님이니 이렇게 불렀던 그 존재이고, 또 우리에게 있어서는 양심이고, 우리에게는 양심이고. 또 그 자체로는 한울님인, 하느님인 그 자리. 이렇게 표현하는 게 저희는 제일 편하더라고요. 다른 얘기들은 다 이제. 혹시 종교를 가지고 계시면 그 종교에 맞게 부르시라. 저희는 그렇게 권합니다. . 마음에서 편하신 거로 권하시되, 의미는 정확히 알고 갑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다. 막연하잖아요. 성령. 나를 도와주시는 어떤 인격적인 존재를 상상하기도 하고, 내가 상상해서 느끼는 그 성령 말고요. 진짜 우리 마음 안에서 성스럽다고 느끼는 그 성령의 작용은 양심 나올 때 밖에 없습니다. 다를 때가 없어요. 양심 나올 때 말고, 성스럽다고 느낄만한 그 령을 느끼실 수가 있나요? 다른 방식으로?

 

그래서 예전에 뭐죠? 서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사 중에 한분도 그런 주장을 했어요. 성령부흥회 가면 다 뛰고 있더라는 겁니다. 노래를 부르고 뛰고 있고. 그런 데 그분은 근원적인 질문을 합니다. 성경에서 성령을 느낄 때 증상은 모든 사람들이 성령을 진짜로 느꼈다면 거룩해졌다. 왜 거룩해진 사람은 안 나오고 부흥회를 가면 혼자 막 좋아가지고, 무아지경에서 뛰느냐는 거죠. 뭔가 요즘 성령 부흥회 잘못된 거 아니냐? 이런 지적하는 걸 들은 적이 있어요. 목사님의 증언입니다. 성령을 만났다면 인격이 성스러워져야 되는데. ? 왜 더 잡스러워지느냐? 이런 의문이 있는데. 그런 부분도 또 똑같은 얘긴 거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 마음 안 에서 그런 성스럽다고 느낄 만 한 건 양심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저는 양심을 가지고 설명 드리면 누구나 이해하시기 좋아서 양심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아까 그 내포된 의미는 하느님의 의미도 있습니다. 양심이 천심이다. 민심이 천심이다 처럼, 그 민심 중에 백성마음 중에 뭐가 천심일까요? 양심이죠. 백성의 욕심이 천심이겠습니까? 그 말에도 결국은 양심이 들어있는 겁니다. 그래서 민심이 천심이다도요 다른 게 아니에요. 임금이 정치를 잘못하면 백성들이 화가 나시죠. 백성들이 뭐가 화를 내게 할까요? 양심이요. “이건 아니지. 리더가 저러면 안 되지.”하는 그 부당하다는 마음은 어디서 나올까요? 정의감에서요. 즉 민심이 천심이라는 얘긴요, 백성들 마음속에 하느님 마음이 다 살아있기 때문에, 백성이 화내면 하느님이 화내는 거라고 생각하고 조심하라는 경고를 줄 때 쓰는 겁니다. 민심이 천심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 마음이 다 살아있고, 그게 양심이다. 저는 그렇게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양심한테 경배 드리세요. 나를 지금까지 그래도 죄 안 짓게 끌고 오신 건 양심밖에 없습니다. 이게 ??서 성령이지 다른 겁니까? 나를 보호해주고, 나한테 은혜를 계속 베풀어 주신 분은 양심이에요. 그래도 옆에 지나가다 옆에 차 뭐, 하나 기분 나쁘면 기스라도 내고 갈 텐데, 꾸욱~ 참게 하신 건 양심이구요. 지나가다 아주 좋은 물건 봐서 그냥 주인이 없어보세요. 집어버리고 싶었는데, 그래도 놔두고 가는 건 양심이구요. 길가다가 천만 원 주었을 때, 경찰서로 갈까? 집으로 갈까? 하다가 그래도 경찰서로 가는 건 그것도 그것도 그렇게 나를 인도한건 양심입니다. 양심이 지켜주니까 우리 그래도 이렇게 도깨비같이 안사는 거예요. 이런 인간의 모습을 하고 산겁니다.

 

인간 안에서 양심이 얼마나 잡아주고 있는지 몰라요. 양심의 실체를 느낄수록요, 양심 아니면 우리 인간 애저녁에 몽둥이로 거리 돌아다닙니다. 이렇게 옷도 안 입어요. 이것도 예의를 갖추어 준거죠. 뭔 짓을 할지 모릅니다. 양심이 있어서 그래도 짐승처럼 안 살고, 짐승보다 더 하죠. 인간이 양심을 버렸을 때는 짐승보다 훨씬 더 가거든요. . 그걸 양심이 잡아주고 있어요. 여러분이 그래도요, 남 믿고 그래도 돈 거래도 하고, 남 믿고 뭐, 이렇게 인터넷 쇼핑도 하고 다 양심을 믿고 하시는 거지, 상대방이 순수욕심일거라고 보면 절대 10원한장도 못줍니다. 그 음흉한 속에 뭐가 있을지 알고요. 그런데 그 깊이를 뭐죠?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는 그 사람을 믿고 여러분이 살아가고 계시지 않습니까? 양심 때문에 그래요.

 

저쪽에서도 양심이 그래도 그 정돈 잡아주고 있겠지 하는 거를요, 사람들은 금방 알고, 귀신같이 압니다. 상대방이 양심수준을 귀신같이 먼저 탐색해요. 우리가 남을 처음 만났을 때. 처음 사람들 만났다고 보세요. 말을 나누면서 금방 탐색해요. 이 사람이 신뢰할만한 사람인지. 인의예지가 있는지 금방 탐색합니다. 말 한마디 딱 나눠보면 알아요. 말을 이렇게 아이고, 안녕하세요.” 했는데. “.”하고 딱 그러면 ~ 무례하구나. 배려를 안 하는구나. 좀 개념이 없구나. 피해야지.” “되도록이면 이 사람하고는 말을 많이 안 나눠야 되겠구나.” 금방 계산해요. 왜 그럴까요? 여러분이 양심적이지 않았는데 왜 그랬을까요? 기본적으로 양심이 있으니까 양심이 뭔지도 알고요, 양심 안 지키는 사람 못 믿을 거란 것도 알고요, 여러분이 또 마음이 욕심이죠.

 

욕심도요, 양심적인 사람을 좋아해요. 왜냐하면 욕심, 내 욕심을 충족하려면 상대방이 날 좀 배려해줘야 되거든요. 그런데 욕심이 욕심꾼 만나면 아주 질색하죠. 내 욕심을 자꾸 침범하니까요. 그래서 우리는요, 내가 양심적이지 못해도 양심적인 사람은 다 알아봐요. 왜냐하면 내가 먹고사는 데 편하기 때문에. 양심적인 사람하고 거래하는 게. 이렇게 결국 우리는 욕심도 양심을 좋아하고 있고, 베이스에 양심을 깔고 있고, 양심 아니면 이 욕심이 어디까지 달려갔을지도 모르는, 이런 실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요, 양심을 연구하실수록 삶의 엄청난 지혜를 얻으실 거라고 제가 확신을 하는 겁니다. 삶이 지혜로워지시고요. 뭔가 안 풀리던 게 풀려요.

 

왜 내가 그렇게 속이 내가 시끄러웠는지를 이해하시게 될 거에요. 단순한 내 욕심만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왜 그랬을까? 내 양심 때문이구나. 내 양심 안에 있는 정의감이 뭔가 나에게 뭔가 사회를 위해 남을 위해서 뭔가 하라고 나한테 외쳤었구나. 이런 걸 이해하셔야지 잠을 편하게 주무시죠. 안 그러면 내가 병 걸렸나?” 하실 수도 있어요. 내 안에 있는 정의감이, 아니면 내 안에 있는 그 측은지심 동정심이 나로 하여금 자꾸 뭔가를 하게 내몰 수 있거든요. 양심을 잘 이해해주시면요, 양심을 잘 표현하실 수도 있고, 여러분 욕심을 잘 절제하는데 양심을 쓰신다면 남에게 갈 피해도 미리 막으실 수 있고, 결과적으론 여러분 평판이 좋아지는 겁니다. 남이 여러분 욕할 거리들을 미리 줄여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이 진정한 친구가 생기고 벗이 생기는 거죠. 그래서 덕은 외롭지 않다. 논어에 나오는데, 그게 양심은 외롭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 다른 사람도 양심이 있기 때문에 누가 양심적으로 살면 남들도 다 알아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남들이 다 순수 욕심이면 누가 양심적으로 살아도 손해만 보겠죠. 안 그래요. 사람들 안에도 양심이 다 있기 때문에 아주 사이코패스 아니고는요, 양심적인 사람한테는 함부로 못합니다. 이쪽 양심에서 찔려서도 못해요. 이렇게 무형의 양심이 공기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 우리 마음을 다 잡아주고 있다는 걸 아신다면 관심 가져주고 연구해주시는 게 맞고, 여기 말고 다른 하느님을 찾지 마시라는 주장도 가능하죠. 하느님이에요. 우리를 늘 잡아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양심 어디 가지를 않아요. 이게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세요. “그래도 이렇게 살아라.” 양심은 쉬지도 않아요. 그렇게 내가 양심을 묵살해도 또 양심은 나한테 그거 훔치는 건 찜찜하지 않니?”라고 또 얘기할 겁니다. 으흠. 이게 진정한 우리의 하느님 아닌가요? 우리를 인도하시는. 저는 양심을 하느님으로 섬기는 게 제일 깨끗할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명칭이야 뭐건 간에. 저한테 누가 종교가 뭐냐고 물으면 양심교라고 할 겁니다. 양심교. 양심 하느님한테 늘 빌고, 복을 비는 게 아니고요, 내가 더 양심적인 사람이 되게 도와주라고 빌고, 내가 더 노력해서 양심을 더 드러나겠다고 또 다짐하고. 이런 분이 제일 인격자고요, 사대성인 경전 놓고 보세요. 다 똑같아요. 다 양심 지킨 분들이라 다 똑같아요.

 

그 신들이 다르다면 모습이 달라야 되는데 왜 다 똑같은 말을 할까요? 그 신의 실체가 결국은 양심이기때문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인간의 마음에 없는 걸 인간이 느낄 수가 없어요. 밖에서 신이 들어온다고 우리한테는 없는 어떤 신성한 영역을, 밖에서 신이 들어와서 우리가 느낀다고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 인간은요, 인간 마음에 원래 있는 건 아니고 절대 못 느껴요. 그럼 우리의 신성을 느꼈다고 치죠. 우리 마음 안에 원래 신성이 있기 때문에 신성을 느낀 겁니다. 여러분 눈에 지금 보이는 색깔이 있죠? 가시광선 말고, 다른 광선이 들어오면 느끼시겠습니까? 못 봐요. 여기 지금요, 우리 눈에 감지 안 되는 황홀한 빛이 여기 있다고 해도 우리 눈에는 없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에 감지가 안 되는 것들은요, 애초에 감지할 수 없는 것들은요, 신이 나타나도 우리는 못 느끼게 되어있어요.

 

즉 우리가 황홀경을 느끼고 신성을 느낀다는 얘기는요, 우리 마음 안에 신성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결국은 내가 내 안에 있는 신성을 느끼는 겁니다. 외부에 어떤 자극, 제가 이걸 외부 자극을 드렸죠. 결국은 여러분은 여러분 마음에서 볼 수 있는 영역밖에 못 봐요. 제가 아무리 자극을 해드려도. 즉 외부에서 신이 자극을 해도 결국 내가 신을 이해하는 방식은 내 안에 있는 마음 중에 성스러운 영역으로 신을 이해하는 것뿐입니다. 결국에는 내 안에 이미 신이 있고, 그 신성이 있다는 겁니다. 내 안에 없는 걸 느낄 수가 없어요. 이거 뭐랑 똑같냐 하면 사랑의 감정이라고 치죠.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이성을 만나기 전까진 사랑의 감정이 나한테 있는지 몰라요. 없었나요? 그런데 애초에? 있었죠. 속에.

 

그런데 그 대상을 봐야 그 마음이 들어요. 신을 보면 그 신성을 느껴요, 결국 그런데 느끼고 있는 건 내 마음이라는 겁니다. 중요한건. 신이 없다가 아니라. 결국 내가 느끼는 신성이라는 건, 원래 내 마음에 허락된 영역만큼 내 마음에서 원래 구현 가능했던 딱 그 부분을 느끼는 겁니다. 내 마음 안에 원래 신성이 있고, 내 마음 안에 원래 사랑이 있으니까 그 대상을 봤을 때 그 마음이 들죠. 내 마음에 원래 감정이 없다면 이 대상이 나한테 이 감정을 준거라면 이 대상이 가면 그 감정도 다시는 못 느끼겠죠. 그런데 사랑이 갔네 하는데 또 누가 와요. 또 느껴요. 사랑이 다시 있네. 내 마음속에 늘 있었죠. 적합한 대상을 만났을 때만 나온 거죠. , 여러분도 하느님을 계속 느끼고 싶다. [몰라 괜찮아]를 통해서 적합한 환경만 만들어 주세요.

 

하느님은 걱정 속에선 잘 안 나와요. 우리가 사실은 계시는데, 우리가 잘 못 느껴요. 하느님을 느끼는 최적의 조건은 생각감정을 내려놓고 편하게 쉴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가장 지복의 상태를 느낄 수가 있어요. 결국 그 마음은 이미 여러분 안에 있는 거예요. 있는데 늘 있는데, 그 조건을 갖추어 줘야 나오더라는 겁니다. 조건을 갖추어주는 걸 배우시는 거지. 하느님을 어디서 불러 올 수도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여러분한테 뭐 하느님을 뭐죠? 신을 붙여주듯이 붙여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원래 여러분 안에 있는 신성을 느끼는 방법만 말씀드린 거고, 그 신성이 저는 양심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제 말씀을 좀 참고해서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지금 다 된 거 같아서요. .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