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4)

[즉문즉설] 제967회 혼수 문제로 예비 신부와 갈등

Buddhastudy 2014. 8. 26.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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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할 때 물론 이제 조건을 따지죠. 그런데 조건 따지는 이유는 뭐에요? 덕 보려는 거 아니에요? 맞아요? 나보다 돈이 좀 많았으면 좋겠고, 인물도 좀 잘났으면 좋겠고, 교양도 좀 있었으면 좋겠고, 성격도 좀 나았으면 좋겠고. , 다 이러잖아요. 그런데 친구사귈 때는 그 사람이 인물이 잘났든 돈이 많든 별로 중요 안 해요. 뭐가 중요하다? 의리가 중요해요. 의리만 있으면 되지. 그런데 사업을 동업할 때는 많이 안 봐요. 뭐만 있으면 된다? 신용만 있으면 되요. 그래서 우리가 인간관계라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한두 개만 봐요. 그리고 관계를 맺어요.

 

그런데 결혼이 제일 복잡합니다. 왜냐하면 그걸 한두 개를 보는 게 아니라 열 개 스무 개를 봐요. 열 개 스무 개 보는 이유는 뭐에요? 하나 잡아가지고 평생 벗겨먹겠다는 생각이오. 하나 잘 잡아가지고. 그러니까 이렇게 욕심을 내면 부부라도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도 뭐가 된다?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면 갈등은 두 가지에요. 첫째가 이해를 다툰다. 손익을 따진다. 이거요. 두 번째는 손익하고 아무 관계없는 데 결혼하면 갈등이 생겨요. 이것은 서로의 업식, 까르마가 다르다. 즉 취향이 다르고 이념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생활방식이 다르고 음식 맛보는 게 다르고 간보는 게 다르고, 서로 다르게 때문에 갈등이 생겨요.

 

이해가 아니에요. 이해관계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라. 이렇게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거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다름을 인정해야 되요. 나는 이런데 쟤는 저렇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쟤는 저렇게 생각하구나. 이렇게 다름을 인정해야 된다. 예를 들면 아내가 음식을 딱 국을 끓여줬는데 남편이 떠먹어 보더니, “이것도 간이라고 맞췄냐?” 이런단 말이오. 예를 들어서. 싱겁단 말이오. 아내가 떠먹어보니까 간이 딱 맞구나.” 이런단 말이오. 그러면 누구 말이 맞느냐? 이건 맞고 틀리는 게 없다. 입맛이 서로 다르다. 그건 습관이 서로 다른 거요. 싱겁다 짜다는 기준은 없어요. 기준은 자기에요.

 

그렇게 서로 간보는 게 서로 다르면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되요. 서로가 옳고 그른 게 아니에요. 그러면 서로 다르다는 걸 첫째 인정하면 이거 갖고 다툴 일이 없고. 그럼 한 집에 사는데 어떻게 맞출 거냐? 그러니까 싱겁게 먹는 사람 짜게 맞추든지. 짜게 먹는 사람이 싱겁게 맞추든지. 한사람이 한사람에게 맞추는 방법이 있고, 안 그러면 둘이가 타협해서 중간을 맞추는 방법이 있고, 그다음에 세 번째 방법은 따로따로 먹는 방법이 있어요. 그러니까 싱겁게 먹는데 기준을 해서 음식을 만들고 짜게 먹는 사람은 거기다 어때요? 간을 좀 더 쳐서 먹으면 되요. 이것은 방안 온도에도 차이가 납니다.

 

몸에 약간 열이 있는 사람은 덥다 그러고, 약간 냉기가 있는 사람은 춥다 그러고. 온도 조절을 어떻게 할 거냐? 에어컨을 몇 도에 조절할 거냐도 같이 살면 싸우게 됩니다. 싸울 일이 아니에요. 체질이 뭐하다? 서로 다르다. 그런데 이걸 마치 겨울에 낮출 때는 난방을 아낀다는 주장으로 낮춘다든지. 겨울에 높일 때는 에너지 절약한다고 주장을 한다든지 그러면 안 된다. 서로의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아까도 얘기했지만, 한쪽이 한쪽을 맞추어주든지, 중간을 선택하든지, 방을 따로 쓰든지.

 

부부가 방을 따로 쓰면 어떻게 하느냐? 같이 쓸 일이 있을 때만 합하고 각자 쓰면 된다. 이런 얘기다. 이게 뭐에요? 이게 민주주의고, 이게 서로를 존중하는 거요. 그래서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 존중입니다. 존중이라는 건 받드는 게 존중이 아니고, 나와 다르구나, 틀렸다가 아니라, 잘못했다가 아니라, 나와 다르구나 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 두 번째는 저 사람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라고 이해하는 것. 인정과 이해.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을 이해하는 것을 다른 말로 뭐라고 한다? 존중이라 그래요. 사랑은 이해를 기반으로 해야 됩니다. 사랑은 이해다.

 

이해 없는 사랑은 폭력입니다. “내 너 좋아.” 하고 상대에 이해 없이 껴안아 버리면 뭐가 됩니까? 성추행, 성폭력이 되는 거요. 그러니까 이해가 사랑이에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이해가 아니고 욕망이에요. 자기 욕구에요. 내 너 좋아 못살겠어. 그러니까 너 나하고 있어야 돼. 이거는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게 아니라 욕망을 내세우는 거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상대에 대한 배려. 이해. 이해를 하느냐하는 거요. 내건 버리고 무조건 상대를 존중해야 된다. 이런 뜻이 아니에요. 그 사람입장에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라는 이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갈등이.

 

이거는 부부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갈등이 생깁니다. 사춘기의 아이들이 이렇게 좋은 봄날 놀고 싶은 것은 그 아이의 특성이에요. 그런데 부모는 자기 생각만 해서 늘 사랑하기 때문에 넌 공부해야 돼. 그러기 때문에 자식하고 싸우고 자식은 엄마에게 억압을 받고, 엄마는 자식 때문에 속을 썩이고 이러잖아요. 그러니까 엄마는 자식의 공부하기 싫어하는 그 처지를 옳다는 게 아니라 인정하고 이해해야 된다는 것. 그리고 아이는 인생을 다 살아본 엄마입장에서 저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

 

그러니까 이 상호 사이에서 우리가 조화를 이뤄가는 거예요. 인생이라는 거는. 친구지간에도 그렇고, 남북 간에도 마찬 가지오. 지금. 서로의 처지에 대한, 나와 다른, 우리와 다른 시스템의 북한. 나와 다른 처지에 놓여있는 그들에 대한 인정과 그들 입장에서는 그걸 수도 있겠구나하는 이해가 있어야 되요. 그런데 우리가 전혀 인정도 없고 이해도 없잖아요. 지금 보면. 상호 다. 그러니까 내일 전쟁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상태로 가는 거요. 그래서 결혼이 중요한 게 아니라, 결혼을 하려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만나는 거요.

 

그렇기 때문에 뭐가 중요하다? 나와 다른 상태를 인정하고. 두 번째 뭐하고? 그게 옳다가 아리가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걸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구나. 그런 행동을 할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밥을 먹을 수도 있겠구나. 우리 어릴 때는요, 가난했기 때문에 먹는 게 힘들었어요. 그래서 우리 이웃집은 우리 집 보다 더 못살았어요. 그래서 그 집 총각이 우리 집에 어떤 일이 있을 때 가끔 도와줘요. 그러면 그때는 도와주면 돈을 줄 서로 관계는 아니에요. 밥을 한 끼 줘요.

 

그런데 이 총각이 술을 좋아하는데, 그 당시에는 일을 좀 해주면 참을 주거나 막걸리를 한 잔 주거나 국수를 주거나 그래요.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물었어요? “아이고, 아무개야 술 줄까? 밥 줄까?” 이랬어요. 그랬더니 한참 있다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아요? “술에 밥 말아 주세요.” 그랬어. 무슨 말이에요? 둘 다 먹고 싶다. 이 말이지. 줄 사람은 한 가지만 주려고 둘 중에 뭘 줄까?” 걱정했는데 본인은 둘 다 먹고 싶다. 이런 얘기요. 그러면 그 처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거요. 사랑은 이해를 기반으로 해야 된다. 예수님의 사랑도 이해에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자기를 죽인 두 사람에 대해서 뭐라고 그랬어요?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이랬죠. 이게 예수님의 사랑 아니오. 그런데 이 사랑은 어디서 옵니까? 이해에서 오는 거요. 그 두 사람은 사형집행인에요.

 

그 사람들은 매일 출근해서 일하는. 사형 내린 사람을 뭐하는? 십자가에 매다는. 우리로 말하면 공무원이에요. 그냥 일꾼이에요. 그들의 처지를 예수님이 그대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아무 죄가 없다. 이 얘기에요. 그런데 우리가 감정에 치우치면 어때요? 그렇게 되요? 안되지. 주여. 딴 놈은 몰라도 저 두 놈은 지옥에다 확~ 처해버리세요. 이렇게 되기가 쉽다. 그러니까 이해하지 못함이 가장 큰 미움이고, 모든 미움은 이해할 수 없음에서 생기는 거요. 그러니까 사랑은 이해다. 그러니까 부부는 사랑이 중요한 게 아니고, “내 너 좋아가 중요한 게 아니라 뭐가 중요하다? 이해가 중요하다. 이해가 사랑이에요.

 

그런데 지금 나 너 좋아. 너 없으면 못살아. 나 너 보고 싶어.” 이걸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 사랑하는 사람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거요. 두 사람 싸우는 것도 마찬 가지오. 첫째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라. 두 번째가 서로에게 공동의 이익을 추구해야지, 이익을 다투지 마라. 가족공동체인데, 결혼하는 게 두 사람에게 다 이익이기 때문에 결혼을 하는데, 거기에는 두 사람이 또 상호 이익을 다투는 측면이 있어요. 그런데 이익을 다투는 측면이 둘이가 같이 살기 때문에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보다 우선되면 깨질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혼수니, 뭐니 하는 거는 이해를 지금 다투고 있다. 이런 얘기요.

 

그래서 거기에는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 여자 말고, 딴 여자하고 결혼하면 상대를 하면, 이거 없어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으면 내가 이해를 다투는 한은 어떤 여자 어떤 남자를 만나도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질문하신 분은 내부터 먼저 노력을 한번 해보는 거요. 이 사람하고 이해관계를. “얘 진짜 이해 너무 따진다.” 이러지 말고, 나부터 이해를 좀 덜 따지고, 나부터 이 사람의 처지, 상황, 가족 조건을 이해하는 마음을 내본다.

 

그렇게 했는데도 본인이 싫다면 어때요? 다른 여자를 한번 사귀어 볼 기회가 생긴다. 그런데 내가 차는 거는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가 될 수가 있다. 나중에 그 사람 잘못됐다.” 하면 내가 굉장히 죄의식을 갖게 되요. 그리고 또 나중에 후회하게 되요. 아쉬워서. 그래서 내가 벌인 것은 되돌아 갈 수 있기 때문에 후회가 되지만 차인 거는 후회가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연애할 때는 차지 말고 가능하면 어떻게 끝을 맺어라? 차여서 끝을 맺어라. 그런데 성질로 보면 차야 속이 시원해요? 차여야 속이 시원해요? 차여야 속이 시원해.

 

오늘 딱 절교 선언을 받을 때 기분은 내가 어제먼저 팍~ 절교 선언을 해버리는데, 이것 때문에 잠 못 이루지 모르는데, 그것은 어리석다. 가능하면 차이는 거는 내 죄가 아니죠.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내 잘못이 아니니까, 가능하면 차이는 거에 대해서 순간적 기분은 나쁘지만, 그것이 사실은 나한테 이익이다. 이거야. 그런데서 조금 지금 질문자는 노력을 좀 더 해보세요. 알았죠? 딴 여자 만나도 똑같은 일이 반복될 거기 때문에 내가 좀 더 내 자신을 바꾸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 노력이 조금 더 되어야 될 거 같다. 이렇게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