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4)

[즉문즉설] 제964회 아이 키우는 문제로 남편과 견해 차이, 어떡하죠?

Buddhastudy 2014. 8. 15. 21:14
출처 YouTube

 

 

그럼 아까 아이는 누구를 닮는다고 그랬어요? 엄마가 갈등을 일으키면 아이에게 좋을까? 마음이 편안하면 좋을까? 그러면 마음이 편안한 게 아이에게 제일 좋다면 자기가 남편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게 아이한테 좋을까? 갈등을 안 일으키는 게 아이에게 좋을까? 갈등을 안 일으키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그 얘기 하지 말고. 그러니까 지금 남편은 돈을 좀 더 벌었으면 좋겠다고 자기는 애들하고 시간을 더 보냈으면 좋겠다고 지금 견해차이가 있잖아. 이럴 때 내가 갈등을 일으키는 게 자기지금 주 과제는 아이에게 잘 되는 방법이 돈이 아니라 남편이 시간이라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스님은 아이가 가장 잘되는 방법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뭐라고 그랬어?

 

엄마의 심리가 안정이 되어있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랬잖아. 아이가 잘 되는 게 남편이 애하고 얼마나 놀아줘야 된다고 스님이 얘기 하더나? 엄마가 마음이 편안한 게 중요하다 그러더나? 그럼 자기가 마음이 편하려면 남편하고 돈이니, 시간이니 이거 갖고 다투는 게 마음이 편하나? 남편 뜻을 받드는 게 자기 마음이 편하나? 그럼 어느 게 자식을 위하는 길인데? 남편이 잘했다는 얘기가 아니야. 남편이 그걸 여보 그러지 말고 나하고 애들하고 같이 놀아. 돈 조금 벌어도 돼.” 할 때 남편이 그래 알았다.” 그렇게 하면 괜찮은 얘기야. 그런데 남편이 자기얘기 듣고 지금 그렇게 하겠다 할 인간이가? 애 셋이니까 돈 많이 벌어야 된다고 그걸 지금 계속 고집할 인간이가?

 

그래가지고 자꾸 헷갈리면 나중에 애도 계속 헷갈리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고맙게 생각해야 돼. “아이고, 우리 남편 저렇게 힘드는데도 아이들이 셋이니까 자기 몸 힘드는데도 나하고 애들한테 잘해주려고 저렇게 열심히 노력하구나. 아이고 고맙습니다. 아이고 여보 고생이 많습니다. 고생합니다.” 퇴근하고 애들하고 놀려고 해도 아이고 여보 애들은 내가 돌볼 테니까 쉬세요. 쉬셔야 건강해야 일도 하죠.” 이렇게 하고, 집안일에 신경 안 쓰도록 그렇게 자기가 남편을 편안하게 해주는 게 자기가 편안하고 자기가 편안해야 애가 잘 되요.

 

남편이 애하고 놀아주는 건 핵심이 아니야. 또 지 고집한다. 자기가 힘드는데 자기를 고집하는 거 아니야. , 셋 키우기 힘들다. 이 말이지. 다 어른들한테 물어봐라. 7, 8낳아 다 키웠는데, 다 불 때서 밥해먹고, 냇가에 가서 빨래하고, 그렇게 다 키웠는데, 전기밥통에 밥하고 가스에 밥해먹고 그러면서 애 셋 키우는 게 힘들다. 그거는 자기가 엄마로서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지. 그러니까 항상 남편이 도와주려 그러더라도 아이고 여보 피곤한데 쉬어요. 집안일이야 뭐, 내 쉬엄쉬엄하니까 괜찮아요.” 이렇게 말하는 마음을 내어야 된다. 그래야 자기 마음이 편안하나? 안하나나?

 

내 셋 키우는데 힘드는데 집에 와서 이거나 거들어주지 뭐, 시어머니한테 가서 그거나 하고 앉아있고,” 요렇게 심보를 쓰면 애도 그런 심보를 배워서 아까 저 집 애처럼 벌써 조그마한 게 대들고 그런단 말이오. 알았어요? 그러니까 남자가 스스로 알아서 아이고, 부인 애 셋 키우는데 얼마나 힘드나, 내가 좀 거들어줘야 되겠다.” 이건 누구 몫이다? 남자의 몫이고 그걸 요구할 수 있는 거는 아니다. 요구하면 뭐가 생기니까? 갈등이 생기니까. 그건 자기가 그렇게 하는 거는 괜찮은데, 그걸 안 해준다고 불만할 일은 아니다. ? 엄마가 불만하면 뱃속에 있는 아이는 크는 아이가 나빠지니까. 그러니까 항상 기도해야 돼. 뭐라고?

 

여보, 감사합니다. 우리 세 식구하고 네 식구 돌본다고 당신 얼마나 힘들어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이렇게 자꾸 기도를 해야 아이들이 잘 커. 애가 잘되고 못되는 건 남편이 놀아주느냐에요? 안 놀아주느냐에요? 자기 마음이 편하냐? 안 편하냐에요? 그러니까. 그럼 내 마음이 편하려면 남편이 내 말 들으면 내 마음이 편하다. 그런데 이 세상에 아무도 6살짜리도 엄마 안 듣는데, 어떻게 다 큰 남자가 내 말 듣겠어? 그러니까 의견을 한번 말해볼 수는 있지만, 그걸 갖고 이렇게 장기간 갈등하는 건 옳은 일이 아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의견은 한번 내 볼 수 있다.

 

여보,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애들 같이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는데 어때요?” 이러면 , 그래. 네 말 맞아.” 이러면 되고, “그래. 그런 의견도 있지만 그래도 요즘은 그래도 돈을 좀 벌어야 안 되겠나? 그래도 내가 좀 힘들지만 애가 셋인데 그래도 열심히 애야 되겠다.” 이러면 알았어요. 그럼 열심히 한번 해보세요. 애들은 내가 맡아서 키울게요.” 요렇게 하면 서로 부부가 화합이 안 되겠어? 그러니까. 그런 마음을 쓰는 게 뭐다? 지금 엄마가 가야할 길이고 불자가 가야할 길이다. 이거야.

 

제가 말씀드린 이런 얘기는 불교인은 들으면 이해가 되고, 기독교인이 들으면 이해가 안 되는 거요? 불교인이든 기독교인이든 종교가 있든 없든 다 그렇구나하고 이해가 되는 거요? 그럼 어른이 들으면 이해가 되고, 애가 들으면 이해가 안 되는 거요? 애든 어른이든 다 그렇구나.” 되요? 그럼 한국 사람은 들으면 이해가 되고, 일본 사람이 들으면 이해가 안 되는 거요? 아니죠. 그래서 진리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거요. 정신만 차리면. 그래서 부처님이 눈 있는 자 와서 보라. 이런 거요. 눈만 뜨면 다 보인다. 이 말이오. 어떻게? 손안에 숨겨진 감춰진 진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거야.

 

그럼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얘기를 책속에 넣어놓거나 천장에 달아 메어놓거나 법당에 넣어놓거나 이랬단 말이오. 그게 아니라 우리 삶에 이대로 적용이 되어야 된다. 그러니까 남편이 돈을 애가 셋이니까 내가 돈을 많이 벌어야 되겠다하는 이 남편의 행위를 저 아내는 지금 긍정적으로 봐요? 부정적으로 봐요? 부정적으로 보니까 기분이 나쁜 거요. 그럼 기분이 나쁘면 나만 불행한 거요? 애도 나빠지는 거요? 그러니까 이런 거를 화를 자초한다 그래. 자기가 자기 불행을 자초하는 거요. 그런데 어떤 딴 여자는 남편이 애가 셋이나 있는데도 돈을 있는 것만 조금 벌고 맨날 집구석에나 붙어있으면 짜증날까? 안 날까? “좀 나가서 벌어라. 애가 몇이고?” 그런 사람도 있어요? 없어요? 있겠지.

 

그러니까 저분이 아이고 우리 남편은 그래도 지가 알아서 가라 소리 안 해도 지가 알아서 어때요? 나가 열심히 하니까. 그러니 건강은 조심해야지.” 이래가지고 좀 건강도 챙겨주고, 집에 오면 일찍 자라 그러고. 등도 두드려주고, 이래야 되는데, 어디 가서 밖에 돌아다니고 어머니한테나 가있고 나는 애나 셋이나 키우는데 돌봐주지도 않고. 이렇게 보면 부정적 사고. 그럼 내가 괴로워진다. 그럼 남편이 집에 자꾸 들어오고 일을 조금밖에 안하는 남자는, 나가서 일하라 그래도 안하면 그건 또 어떻게 봐야 한다? 그럼 저 여자 분처럼 봐야 되요.

 

아이고 그래도 돈에 집착 안하고 뭐한다? 가정에 충실해가지고 일찍 들어와서 어떻게? 애하고 같이 놀아도 주고, 참 가정적인 남자다. 이렇게 봐야 돼. 그러면 누가 행복해진다? 자기가 행복해져. 그러면 자기가 괜찮은 남자하고 사는 거요. 그런데 자꾸 부정적으로 보면, 자기는 결혼생활도 속았고, 늘 이렇게 되면 자기가 자꾸 불행해진다. 이거요. 알아들었어요? 자기불행을 자기가 자초한다. 지금. 아까 이 엄마도 마찬가지요. 애가 지가 알아서 엄마 그거 아니야. 이래야지.” 이러면 어이고, 우리 크게 될 애다. 벌써 저게 자기주장이 또렷또렷하게 있으니 얼마나 착하냐?” 이래야 되는데.

 

이게 조그마한 게 엄마말도 안 듣고.” 이런 식으로 보니까 애하고 싸우지. 나이가 서른이 넘은 게 조마한 5살짜리 6살짜리 애하고 싸운다는 게 말이 되요? 창피하게. 아이고. , 그래서 우리가 진리요. 그게 스님이 즉문즉설하는 거는 그냥 인생 상담이 아니고, 이런 진리로 가는 거요. 아시겠지요? 그러니까 이런 단어를 제법이 공하다. 일체가 유심조다. 이런 거를 기억하고 이해하는 게 이 젊은이한테 그런 거 아는 게 지식을 아는 게 불교가 아니다. 이 말이오. 그것이 우리 삶에서 이렇게 이 남자가 있는데 이 남자가 내가 부정적으로 보니 문제 있는 남편이 되는데 긍정적으로 보니 좋은 남자가 되구나.

 

그럼 이 남자는 본래 뭐다?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다. 그 남자는 그 남자일 뿐이다. 그 인간은 그 인간일 뿐이다. 이게 진리에요. 그 인간은 공하다. 이 얘기에요. 그런데 내가 좋게 보니 좋은 남자고 나쁘게 보면 나쁜 남자다. , 그래서 일체가 유심조구나. 어차피 내가 이 중생계 와서 한생을 살 바에야 좋게 보고 사는 게 좋지. 그러니까 이 현상계가 버려야만이 행복이 아니라, 이 현상계 속에서 행복하게 살 수가 있다. 이 얘기에요. ~ 그래서 즉문즉답이 아니라, 우리가 설법이다. 이 경전을 읽고 해석을 해서 생활에 정용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살펴서 진리를 발견해가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가 늘 진리 안에 있어야 된다. 그래서 이 진리를 깨치게 되면 어때요? 삶이 자유로워지고 마음이 편안해지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어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진리의 측면으로 나아가야지, 진리를 놓쳐버리면 어떠냐? 교회 다니면서 더 폐쇄적이 되고, 더 꽁꽁 묶이고, 더 눈이 어두워지고, 절에 다니면서 더 어두워지고. 그래서 이 부작용이 많이 생겨나는 거요. 그러니까 여러분들, 인생을 어떻게 본다? 긍정적으로 봐야 되요? 부정적으로 봐야 되요? 긍정적으로 봐야 돼. 긍정적인 눈으로 봐야 돼. 그런데 우리의 지금 중생의 까르마가 뇌가 이 뇌 작용이 심리작용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알아요?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도록 형성이 되어있습니다. 중생의 까르마라는 게. 그래서 중생이 괴로운 거요. 그런데 어젠가 누가 그래요. 그 책에 요즘 과학적으로도 이게 밝혀졌데요. 인간의 뇌 작용이 사물을 어떻게 보도록 형성되어있다? 부정적으로 보도록 형성되어있데요. 그래서 인간이 괴롭다는 거요. 그래서 그걸 긍정적인 시야로 바꾸어야 해탈한다. 과학서적이 그런 게 있다고 어떤 분이 어제 우리 세미나 하다가 스님 책 읽어봤어요.” 그래서. 안 읽어봤다니까 그런 얘기를 해요. 그건 책 안 읽어봐도 다 아는 거예요. 중생의 업식은 뭐다? 사물을 뭐로 본다? 부정적으로 본다.

 

그럼 우리가 업장소멸한다 하는 거는, 이 부정적으로 보는 사고를 버리는 거요. 아시겠어요? 그래서 우리가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이 부정적으로 보는 걸 어느 쪽으로 봐야 된다? 긍정적으로 바꾸어야 되요. 그런데 긍정적으로 바꾸는 것만 진리냐? 아니에요. 그거는 방편이고 근본은 공한 줄을 알아야 된다. 그것이 이제 공의 세계에요. 그러나 그것을 한 생각 일으켜서는 긍정적으로 보면 중생계에서 기쁨을 가지고 살 수가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그 누구도 어떤 조건의 처한 사람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어요? 없어요? 있죠. 그게 바로 일체중생은 다 뭐다? 부처가 될 수가 있다. 일체중생계유성불이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거는 어떤 특정한 존재가 아니라 행복해 질 수가 있다는 거요. 니르바나. 열반을 증득할 수가 있다. 해탈할 수가 있다. 자유로울 수가 있다. 이 얘기요. 그걸 어떻게 해야 자유롭냐? 그 사물을 긍정적으로 봐야 돼. 어느 정도로 긍정적으로 봐야 될까? 오늘 여기 법문 듣고 나가다가 계단에 넘어져가지고 한쪽 다리가 부러졌어. 그러면 아이고, 재수 없이 부처님 믿어도 소용도 없네.” 그러면 이거 긍정적으로 보는 거요? 부정적으로 보는 거요? 그때 이미 다리가 부러졌어요? 안 부러졌어요? 부러졌어. 사전에 조심하는 건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그러나 인간은 다리가 부러지는 일이 일어났다.

 

그럴 때는 안 부러진 다리는 딱 쥐고, “아이고 이거 까지 부러졌으면 큰일 날 뻔 했다. 그래도 오늘 기도했더니 공덕으로 한쪽다리는 안 부러졌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좋아요? 안 좋아요? 좋아. 여러분들이 인간 심리를 한번 보세요. 버스타고 가다 버스가 넘어졌어. 그래서 자기가 팔이 하나 부러졌어. 그래서 이렇게 팔을 하나 딱 쥐고 아파서 이렇게 둘러보니까 다 죽고 지 혼자 살았어. 그럼 재수 좋아요? 안 좋아요? 재수 좋지. 그 판에 나는 살아났어? 안 살아났어? 살아났어. 그런데 이렇게 주위를 쭉 둘러보니까 아무도 안 다치고 지 팔만 부러졌어. 그러면 어떻게 되요? 재수 더럽게 없게 돼.

 

그러니까 이 팔 부러진 사건은 재수가 좋은 일도 아니고, 재수 나쁜 일 도 아니고, 그냥 하나의 뭐다? 사건이다. 이게 공하다는 거요. 아시겠어요?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재수 없다고 볼 수도 있고 재수 있다고도 볼 수가 있는 거요. 그러니 우리가 이 도리만 잘 안다면 여러분들이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지금 이렇게 행복할 수가 있다. 그러면 지금 늙으면 좋아요? 싫어요? 좋아요. 그러니까 젊은 애들처럼 육신을 따져서 눈이 안보이고 못 움직이고 이렇게 생각하면 부정적인 생각이고. 이제 취직할 일 있어요? 없어요? 애 낳을 일 없죠? 이렇게 다져보면 좋은 일 굉장히 많아요.

 

아이고 땡이다. 늙으니까 이래 좋구나.” 이렇게 얼마든지 생각할 수가 있어요. 그리고 또 이 젊을 때는 점잖아지려니까 자꾸 동작이 빨라서 천천히 하려면 힘들었는데 늙으면 다리가 천천히 움직여. 점잖해요? 안 해요? 점잖해요. 그리고 이 분별하지 마라는데 자꾸 보여서 분별 안하기가 힘든데 눈도 침침해서 안 보이니까 분별 안 해도 되고, 온갖 소리 이런 거 잘 안 들리니까 안 들어도 되고, 아시겠어요? 좋게 생각하면 좋은 거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항상 젊을 때는 빨리 어른 되려고 그러고, 어른 되면 나이 속이고. 애들 때 보면 서로 지 나이 서로 올려요? 낮춰요? 어른 되면? 왜 그래? 나이가 뭐가 문제요?

 

그러니까 현재 지금, 현재 여기, 여기에 있는 지금의 나를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됩니다. 지나가버린 옛날도 아니고, 올 미래도 아니고, 지금 여기. 그래서 부처님 뭐라고 그랬어요? 지금 여기 깨어있어라. 이렇게 말하는 거야. 그러면 성인의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면 머리 깎고 스님이 되어야 공부할 수 있는 거요? 지금 내 삶에서 밥 먹고 똥 누고 화내고 짜증내는 이 자리에 지금 필요한 거요? 지금 여기 필요한 거요. 지금 여기서. 나를 행복으로 이끄는 길이다. 이거요. 그렇게 해서 나날이 행복하세요?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