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6)

법륜스님의 희망세상만들기_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Buddhastudy 2016. 8. 9. 06:12



 

 

질문1) 서점에서 책을 세권 사서 이틀 만에 다 읽었거든요. 그리고 일주일 정도 집에만 틀어박혀서 저에 대해서 생각하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삶을 180도로 바꿔야 되겠다 싶어서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거든요.
저는 사치 과시욕 남 무시하는 거 되게 심했습니다. 많이 바뀌었는데 평생 이 삶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다시 예전으로 안 돌아가고 지금 이대로 살 수 있을지 말씀 좀 해주십시오.

 

 

예전에 사는 게 더 재미있었어요? 요즘에 사는 게 더 재미있어요? 그럼 안 돌아가요.

요렇게 바뀌다가 죽으면 아주 좋아요. 왜 그러냐 하면 다음 생에는 요 씨앗으로 처음부터 똑바로 자랄 거니까. 더 좋은 일이요. 나쁜 거 아니에요. 그걸 걱정해요? 안 죽어서 탈이지. 원래 옛날부터 뭐라고 그래요? 천성이 변하면 죽는다. 이러잖아요. 그러니까 천성은 못 고친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뭘 말하느냐하면 그만큼 천성이라고 이름 붙여진 근본적인 까르마, 자기의 어릴 때 형성된 거는 바꾸기가 어렵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3살 이전에 형성된 거는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천성에 가깝다. 이렇게 말해서 그런 얘기가 나오거든요. 그런데 자기가 사치하고, 과시욕하고 하는 거는 천성에 속하는 거는 아니에요. 그건 적어도 중고등학교 이후 때, 초등학교 이후에서 생성된 거니까, 그건 능히 결심만 굳게 하면 바뀔 수가 있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죽으면 좋은 일이라니까. 엄마가 그렇게 바르게 살다가 죽으면 아이들은 더 훌륭하게 되지. 왜 그러냐하면 예수님이 80까지 살았으면 좋을까요? 예수님이 33살에 죽었기 때문에 더 파워풀 했을까요?

 

이차돈이 22살에 죽었는데, 죽어서 불교가 공인이 되었을까, 이차돈이 그냥 왕이 앞으로 안 믿겠다면 너 살려주겠다.” 하니까 . 안 믿겠습니다.” 이래서 살아서 80까지 살았으면 불교가 공인이 되었을까? 때가 죽을 때가 되면 죽는 게 좋아요.

그러니까 얼마 전에 지진이 나서 건물더미에 깔려서 많은 사람이 죽었거든요. 그래서 발굴 작업을 하는데 3일 후에 발굴했는데 시신을 하나 꺼냈어요. 그런데 죽었어요. 죽은 시신을 꺼냈는데, 그 품에 여자 품에 애기가 안겨있었는데, 애기는 하나도 안 다치고 살았어요. 그런 기사 본 적이 있어요? .

 

그러니까 죽어서 애기를 살렸잖아. 그죠? 이렇게 살아난 애기는 절대로 삐딱하게 안 갑니다. 자기가 자기의 삶을 180도로 바꾸어가지고 이렇게 해서 아이들을 돌보다가 죽으면 자기의 다음생도 있는지 없는지 그건 우선 차치하고, 새로운 씨앗으로 출발할 뿐만 아니라, 그런 어머니의 원과 정성이 아이들에게 담겨있기 때문에 비록 먹는 건 조금 부족하고 입는 건 조금 부족하고, 약간 사는 게 조금 어려울 수는 있어요. 부모가 돌봐주는 거 보다 못하니까. 그러나 그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는 훨씬 더 좋은 일이 되지.

 

그러니까 못 바꾸고 살아남아서 애를 돌보는 거 보다는, 그러면 애도 자기 닮아서 사치하고 향락하고 과시욕하고 이렇게 살아갈 텐데, 그 업을 받아갈 텐데, 자기가 죽을 각오로 업을 딱 바꾸어버리면 아이들한테는 이게 소위 유전, 대물림이 안 된다. 이렇게 볼 수 있거든요. 그래서 좋은 일인데 뭘 그걸 자꾸 걱정해요?

예를 들어서 남편이 살아있으면 아이의 엄마 역할을 하면 되고, 그런데 이게 자기도 콱 바뀌듯이 혹시라도 자기가 죽으면 남편이 확 바뀌어버려요.

 

그래서 걱정 안 해도 되요. 자기가 살아있으면 자기가 그 역할하면 되니까 문제가 안 되고, 남편은 죽었다고 치면 되고, 또 자기가 죽으면 남편이 확 또 바뀌어서 개과천선해서 애들하고 엄마의 역할을 잘하고, 이렇게도 될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 되도 괜찮다는 얘기를 내가 지금 하려는 거요.

, 아빠가 애들하고 놀아주니 좋으네. 그렇게 안 놀아주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 그러면? 아니 그것도 노는 거라고 그래요. 옛날에는 손잡고 놀고, 요즘은 같이 앉아서 컴퓨터 게임하고 노는 거요. 노는 방식이 달라.

 

옛날에는 우리 보다 더 앞에는 뭐하고 주로 놀았다? 화투치고 놀았고. 아시겠어요? 우리 때는 뭐하고 놀았다? 만화보고 놀았고, 우리 다음 세대는 TV 보고 놀았고, 그 다음에는 컴퓨터보고 놀고, 그 다음에는 아이패드나 스마트 갖고 놀고, 시대가 바뀌어 가는 거요. 으흠. 내버려둬도 되느냐고? 내버려두면 안 되지. 만화방에 가서 맨날 처박혀 있는데 내버려둬도 됩니까? 내버려두면 안 되지. 있으면 데리고 와서 공부하라고 그러고, 그래야 되는데, 그거 놔두면 안 되느냐? 지금 60대 다 만화방에 한 번씩 쳐 박혔다 나온 사람들이오. 그래서 괜찮다.

 

그러니까 크게 보면 괜찮고, 작게 보면 너무 쳐 박히면 조금 손해니까, 좀 덜 쳐 박히도록 조금 도와주면 되지. 크게는 문제가 없어요. 크게는.

 

앉지 말고 조금 더 서봐. 덜 끝난 거 같은데. 자기가 지금 스님 글이나 유튜브를 보고 바뀌었다고 그랬잖아요. ? 자기 말로 바뀌었다 그랬잖아. 그런데 자기가 도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어. 안 돌아가려면 죽는 걸 겁을 안내야 돼. 내가 지조를 지키다가 죽는다면 정말 기독교 신자라면 하나님의 은총이고, 불교신자라면 부처님의 가피다. 이렇게 생각해야 안 돌아가게 된다는 거요. 그런데 이게 아무리 좋아도 살고 싶다. 하면 자기가 어떤 죽을 일이 자기에게 닥치면 병이 나거나 뭘 하면, 탁 돌아가 버려요. 일순간에. 일순간에 오듯이 일순간에 돌아가 버린다. 이 말이오.

 

그래서 스님이 약간 좀 농담같이 들릴지 몰라도 죽는 거 좋은 일이다. 자꾸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자기가 이 삶이 정말 소중하다하면 내가 죽더라도 요렇게 하다가 죽어야 되겠다. 하루를 살더라도 요렇게 사는 게 좋다. 3일을 살더라도 나는 요렇게 한번 살아보고 죽겠다. 나에게 너 요렇게 살래? 옛날로 살래?” 요렇게 살려면 죽이고, 옛날로 돌아가겠다면 너 살려주겠다. 그러면 저는 기꺼이 요렇게 살다가 죽겠습니다. 요런, 각오가 있으면 안 돌아간다. 이 말이오. 그런데 죽는다 그러면 옛날로 산다면 살려주고, 요렇게 산다면 죽는다 그러면 지금 돌아갈 마음이 있다는 거요.

 

그래서 제가 자꾸 예수님 얘기하고 이차돈 얘기하는 거요. 예수님은 너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런 거 전하고 이런 짓 안하겠다면 살려주겠다. 그런데 죽어도 하겠다고 했고, 이차돈도 안 믿으면 살려주겠다 했는데 믿겠다고 해서 죽었거든요. 그러니까 죽은 게 더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얘기를 자꾸 내가 하는 이유는, 그 사람들은 그때 죽는 게 그 사람의 삶에 가장 위대함이다 이 얘기요. 그러니까 자기가 요런 마음으로 죽어도 좋다. 요렇게 내가 살면 하루를 살다 죽어도 나는 후회가 없다. 요게 분명해야 요거를 자기가 지켜나갈 수가 있다. 이 얘기요.

 

그런 각오가 자세가 안 되어 있으면 지금은 이렇게 각오해서 하지만, 작심3일이라는 말이 있잖아. 그죠? 3일을 못 넘기는 데, 자긴 3일은 넘겼어. 그러나 아직 100일 넘어갔어? 안 넘어갔어? 그래. 그럼 100일 못 넘기고, 오늘 강의 듣고, “아이고 이러다가 죽을지 모르겠다.”고 관둘 수도 있고, 3년을 넘겨야 돼. 천일을. 천일을 넘기면 고비를 넘겼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어. 자기는 아직 천일 멀었잖아. 그지? 그러니까 팽, 되돌아가버릴 위험이 있단 말이야. 그러면 그걸 넘기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 “요렇게 살다가 죽는 건 하루를 살아도 좋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애들한테도 이거를 포기하고 엄마로서 사는 거 보다는 요걸 지키고 죽는 게 우리 아이들한테도 좋다. 요게 마음에서 딱 자리를 잡아야 안 돌아가지, 지금은 돌아갈 확률이 훨씬 높다. 자기가 첫 질문이 나한테 뭐라고 그랬어요? 안 돌아가고 싶다고 그랬잖아. 그래서 스님이 이런 얘기 하는 거요. 그런데 자기가 결론을 딱 안 듣고 벌떡 앉아버리니까, 왜 그런 얘기 했는지 이제 이해하시겠어요? 자기 어떻게 하겠어요? 요렇게 살다가, 하루를 살더라도 이렇게 살다가는 게 훨씬 낫겠다. 이게 확실한가? 거기에 흔들리면 돌아갈 확률이 높다 이 말이오.

 

그래도 그 말 하면 안 된다. 살아보니까 좀 힘들지만 요렇게 살다가 하루를 살아도 요렇게 살다 죽겠습니다. 나는 이제 다른 삶은 아무리 유혹하고 아무리 뭐해도 원하지 않습니다. 애를 데리고 와서 애를 어떻게 해버린다고 협박을 하더라도 난 눈도 깜짝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요렇게 살다가 죽으라면 기꺼이 죽겠습니다. 요렇게 산다는 전제조건하에서 나에게 역할이 주어진다면 엄마 역할도 하고, 남편 역할도 하고 세상의 역할을 하지, 이렇게 못살 바에야 나는 차라리 죽는 게 낫습니다. 요렇게 지금 마음이 서야 그래도 유지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 말이오.

 

고개만 끄떡끄떡하면 안 되고 말로 분명히 얘기해요. 알겠습니다갖고 안된다니까. “하루를 살다 죽더라도 이렇게 살겠습니다.” .

 

우리들의 무의식이라는 거는 의식의 아래에 있습니다. 의식, 이래야 되겠다. 저래야 되겠다. 이게 좋다. 저게 좋다는 거는 의식이요. 의식. 그거보다 더 아래에 이거하고 싶다. 저거 하고 싶다는 마음의 밑뿌리에 무의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은 무의식의 영향을 받고, 생각은 의식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강의를 듣고 , 나도 저렇게 한번 해봐야지.” 이거는 마음이에요? 생각이에요? 생각이에요. 그래서 이 문 열고 나가면 없어져요. 그런데 그 생각이 아주 강하면, 의식이 무의식을 커버하게 됩니다. 통제하게 된다. 그게 죽을 각오를 해야 통제가 된다는 거요. 그 전까지는 안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 다 작심 3일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들이 내 얘기를 듣고 마음에서 감동, 그러니까 생각에 머리로 이해되는 게 아니고, 마음에서 감동이 와요. “, 그렇구나. 내가 이렇게 잘못했구나. 정말 그렇게 살아야 되겠구나.” 마음에서 감동이 오면 무의식으로 바로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감동을 한 거는 변화가 쉽고, 생각으로 이해한 거는 거품처럼 그냥 금방 꺼져버려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술 공연이라는 거는 생각으로 하는 거예요? 마음에서 느끼는 거예요? 오늘 공연처럼 느껴야 되요. 알았어요? 느껴야 마음에서 느껴야 변화가 가능하다. 그러니까 저분은 책을 읽었지만, 머리를 굴린 게 아니라 마음에서 좀 느꼈어요. 그런데 얘기 들어보면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바르게 살아야지.” 일주일 생각해서 결심을 했어요. 그런데 이거는 마음으로 느낀 건 보다는 생각이 더 강해요. 생각이 더 강하다는 거는 되돌아갈 가능성이 더 높다 이거에요.

 

그런데 그 생각을 어느 정도로 굳혀줘야 그게 막아낼 수가 있느냐? 죽을 각오, 죽어도 좋다. 하는 까지 의식이, 생각이라 하더라도 죽을 각오를 해버리면 이게 되돌아가기가 좀 어렵다. 그래서 저 분은 작심 3일을 넘겼고, 지금 100일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이제 언제 해야 안심을 할 수 있느냐? 얼마까지 가야 된다? 천일까지 가야 안심을 할 수 있어. 그 전에 방심하면 되돌아 가버립니다. 왜 나무꾼과 선녀에도 애 둘 낳을 때 이게 괜찮겠지.”하고 방심해서 날아가 버렸잖아. 언제까지 참아야 된다고? 애 셋 낳을 때까지. 그런데 거 봐라. 2년하고 놔둬서 날아가 버렸잖아. 3년까지 기다려야 되는데.

 

그것처럼 일정한 고비를 넘겨줘야 되요. 물통에 물이 있는데 호스를 연결해서 이렇게 내려놓으면 수위가 여기가 높고 여기가 낮으면 자동으로 물이 내려오죠. 그런데 그냥 꽂아놓으면 자동으로 내려옵니까? 안 내려옵니까? 안 내려오지. 이걸 빨아서 물을 끌어올려서 바깥부분을 넘겨줘야 물이 저절로 내려오잖아. 그죠? 그런데 빨아올렸다가 놓으면 내려가고, 빨아 올렸다가 놓으면 내려가고 빨아올렸다가 놓으면 내려가고. 이 경계를 넘기 않으면 천 번을 도로 내려갑니까? 안 내려갑니까? 내려가요. 한번을 해도 요 경계를 넘으면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성냥을 그을 때, 살살살살 그으면 300번을 그어도 불이 납니까? 안 납니까? 안 납니다. 한번을 그어도 탁 그으면 불이 나잖아. 그죠? 횟수하고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정한 그 분기점을 넘겨줘야 되요. 그러니까 그분기점을 넘기는 데는 한 번에 탁 넘어오려면 마음에서 완전히 감동을 해버려야 돼. 그래서 무의식에서 바로 변화가 일어나버리면 단박에 넘어오는 거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으로 이걸 넘기겠다할 때는 지속적 노력을 통해서 죽을 각오로, 지속적 노력을 통해서 이 분기점이 넘어올 때까지는 방심하면 안 돼요. 다시 돌아간다 이거요.

 

그래서 만약에 지금 저분은 내가 볼 때 다시 돌아갈 확률이 높아요. 어떤 얘기를 들어보면 스님이 알 수 있느냐? 자기 위험도. 내가 나를 변화시킨 거는 1단계에요. 그럼 내가 나를 변화시켰는데, 저분은 지금 내가 나를 변하듯이 남편 너도 변해라하는 것이 남아있어요. 너도 변해라. 하는 게 남아있기 때문에 이거는 아직 고비를 넘긴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수행이라는 것은 상대가 안변하더라도 수용해 내는 힘까지 가야 고비를 넘겼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어요.

 

내가 부정직했다. 이건 내 문제요. 그런데 내가 이제 정직해졌다. 그럼 내가 개선이 된 거요. 그런데 주로 내가 정직해지면 어떠냐? 남 부정직한 걸 못 봐줍니다. 여러분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래요. 내가 바르지 못한 사람이 남 바르지 못 봐주는 거 이게 범부중생이고. 그러나 내가 바르지 못한 사람이 남 바르지 못한 거를 봐줄 수 있어요. 지도 그러니까. 그런데 그것도 못 봐주면 지는 안보고 남만 쳐다보는 건 천하 웃기는 인간이라 그래요. “니나 잘해라.” 이 소리 듣죠. 그런데 자기가 정직하다. 자기가 바르게 사는 사람이 남을 바르지 못한 남을 봐내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바른 사람은 바르지 못한 거를 못 봐내는 성질이 있어요. 다시, 바르지 못한 사람이 바르지 못한 사람도 못 봐내는, 지는 바르지 못하면서 남 바르지 못한 걸 못 봐내는 건 범부중생이고, 지가 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남 바르지 못한 거 봐 주는 사람, 그게 그 다음 단계고. 자기가 바른 사람, 그게 그 다음 단계인데, 자기가 바른 사람 중에 남 바르지 못한 걸 이번엔 또 못 봐내요. 자기가 바르니까. 그런데 자기는 바른데, 바르지 못한 사람을 봐내는 사람. 여기가야 수행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있어요. 제 말 무슨 말인지 이해하셨어요?

 

그런데 저분은 자기가 바른데 바르지 못한 남편을 지금 못 봐주는 거요. 그러면 자기가 사치하고 자기가 바르지 못할 때는 남편을 좀 봐줘요. ? 자기도 지은 죄가 있으니까. 그런데 자기가 바르면 바르지 못한 거를 못 봐주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일정한 스트레스가 도가 차면 자기 바른 것도 어떻게 된다? 되돌아가버려요. “나 혼자 이런다고 뭐가 되노? 협조가 되어야지. 이래봤자 아무영향력이 없어.” 이렇게 해서 되돌아 가버려요. 위험을 안고 있어요.

 

그래서 되돌아 안 가겠느냐고 나보고 자꾸 묻고 묻고 물어도 내가 대답을 안 하는 이유가 너는 가능성이 있다.” 벌써 딱 얘기 들었을 때 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그걸 넘기려면 어떤 각오로 해야 된다? 죽을 각오로. 그러니까 남편 따지지 말고, 이렇게 살다가 난 하루를 살다 죽어도 좋다. 이렇게 딱 중심, 남편 따지지 말고 제 중심이 딱 잡혀야 이거를 넘길 수가 있다. 그러니 내가 남편이 애하고 컴퓨터하고 노는 거, 그거는 남편이 고치는 건 남편이 알아서 자기가 언젠가 고칠 거니까, 그건 남편한테 놔두고, 또 아이들 문제는 내가 아이들하고, 남편이 텔레비전 볼 때, 남편보고 애 봐달라고 하니까, 어떻게 된다? 귀찮으니까 뭐다? 사탕사서 이빨상하든지, 사탕 줘 달래듯이 뭐든 하라고 하는 거 아니오.

 

그러니까 내가 그 부탁을 남편한테 안 하면,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없잖아. 내가 애 데리고 공부하는 게 좋으면 애들 데리고 저 방에 가서 공부하면 되고, 자기야 텔레비전을 보든, 자기가 손끝하나 안하든 상관할 게 뭐가 있어? 자기만 바르게 하면 되는 거야. 내버려두고. 그래도 그 인간이 있어서 이 귀여운 애 둘을 않았어? 안 낳았어? 낳았잖아. 그 인간이 돈 벌어서 어쨌든 좀 생활에 보태요? 안 보태요? 보태잖아. 그 정도로 역할을 그냥 한정하고, 손끝약간 안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간단해요.

 

그걸 싸우고 이래라 저래라 하면 안 되고, 내가 힘에 부치면 그냥 밥을 안 해주면 되요. 그런데 내가 먹으면서 밥을 안주면 이거는 미움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거는 안 돼요. 그러니까 밥해주기 싫으면 누구도 굶어야 된다? 나도 굶어야 돼. 그때 뭐라고 그러면 뭐라고 해야 된다? “아이고, 몸이 아파서요.” 이렇게 하면 돼. 내가 굶으면 되는 거요. 청소도 안 해줘도 되요. 내 방은 치우고 그러면 안 되고, 전체를 딱, 빨래를 안 하려면 누구 옷도 안해야 된다? 내 옷도 안하고, 내 팬티도 그냥 벗어서 놔놓고. “왜 그러냐?” “몸이 아파서요.” 이런 방법이 있어요.

 

그러니까 따지지 말고, 그 사람은 그 사람 일 하고 나는 내일 하면 되고, 두 번째 상대를 조금이라도 고치려면 애도 마찬가지에요. 요렇게 하면 고칠 수가 있는데, 그러려면 내가 불편을 감수해야 돼. 그런데 이거를 갖고, 야단을 쳐서 고치려고 하면 안 고쳐져진다. 이런 얘기에요. 안 고쳐진다. 그러니까 그런 게 필요하다. 고치려고 하지 말고. 그러니까 자기를 바르게 사는 데. 그리고 애기는 80~90프로가 엄마 닮기 때문에. 그러니까 아버지는 배 깔고 엎드려 있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자기만 잘 하면 문제가 없는데, 그런 아빠를 갖고 시비를 하면, 내가 시비를 하면 아이가 아빠를 닮습니다.

 

그러니까 아빠로부터 아이에게 바로 전달되는 게 아니라, 그거를 문제 삼으면 아이가 아빠행동이 잘못되었구나. 하는 거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안 닮아야 되는데, 이 존재가 안 그렇습니다. 생각은 안 닮아야 되는데, 마음은 닮아요. 그래서 다 내리기라. ‘저희 아버지가 술주정꾼일 때는 애도 술주정꾼이다.’ 이런 얘기 나와요. 그런데 그걸 차단하는 방법은 엄마가 아버지 술주정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 없이 웃으면서, 보약 먹은 수준으로 이렇게 다루면, 아이한테 전이가 안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이거 얘기하려면 한 사람한테 너무 길어지니까. 그런데서 조금 발심을 이왕지 마음을 내었으니까 바르게 해봅니다. 알았죠? . 다음 분.

 



질문2) 깨장(깨달음의 장)에 다녀와서는 직장에서 비슷하거나 거의 똑같은 상황인데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니 화도 많이 안 나고 좋았는데 한 달도 되지 않아서 화도 많이 나고 그럽니다. 화가 왜 일어나는지? 욕을 하고 인격적 모독을 하는데 화가 안 날 수가 있는지 궁금하구요. 깨장에서 매미소리랑 욕하는 소리랑 같다는데 저는 아무리 들어도 다른 소리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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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얘기한데로 똑같은 상황인데, 그 전에는 화가 났는데, 갔다 오고는 바로는 화가 안 났다. 이랬잖아. 그러면 그때는 왜 안 났어?

그런데 지금은 왜 화나는데?

그러니까 법사님이 뭐라고 그랬냐? 이런 건 중요한 게 아니오. 그러니까 누가 뭐라고 그랬기 때문에 맞고, 누가 뭐라고 그랬기 때문에 틀리고, 이런 게 아니고, 내가 생각해 봤을 때, 내가 생각해도 이렇구나. 저렇구나. 이래야 진리이지. 자꾸 누가 뭐라고 그런다. 하나님이 뭐라고 그랬다. 부처님이 뭐라고 그랬다. 이러면 인생이 자꾸 당위로 살게 돼.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안 되고, 자꾸 이렇게 살아야 된다하는 의무감을 갖고 산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전에는 그 사람이 어떤 독촉을 했을 때, 왜 나보고 너나 잘하지 왜 나한테 잔소리냐?” 이렇게 해서 화를 냈는데, 깨장을 갔다 오니 저 사람은 자기 직분대로 그냥 할 뿐이지, 꼭 나를 화나게 하려고 한 거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거를 내식대로 듣고 내식대로 안 된다고 짜증을 냈구나.” 그래서 , 저 사람 마음이 저렇구나.” 이렇게 생각하니까 전에는 나든 화가 지금은 안 나고. 그런데 한 달 쯤 지나니까 그렇게 생각이 잘 안 되고, 저 인간 저거는 진짜 문제가 있는 인간이다. 이렇게 또 저 인간을 쳐다보니까 어때요? 내가 또 화가 나니, 약발이 떨어진 게 아니고, 약발이 떨어졌다면 그게 마약이란 얘기 아니오. 깨장이 마약이란 얘기 아니오. 그러면 지금은 정상이란 얘기 아니오. 그지?

 

그러니까 화를 내는 거는 일종의 정신적으로 말하면 미친 증상이오. 비정상적인 증상이에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런데 우리가 워낙 다 비정상적인 증상, 그러니까 자기 식대로 안 되면 이렇게 전부 약간씩, 비정상적 증상이 나타난다. 이 말이오. 그러다가 거기 가서 진실을 살피고 살피고 또 살피고 또 살피고 또 살피고 또 살피다보니까 , 이게 저 사람 때문에 화가 나는 게 아니구나. 내 심리적인 이상증상이구나.” 이걸 자각하고 나니까, 이제는 그 사람의 얘기를 그냥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은 자기 성질대로 자기 기분대로 사는 거지, 꼭 나를 괴롭히려고 의도적으로 하는 거는 아닌데, 그냥 나하고 다르니까, 내 바라는 대로 안 되니까, 내가 그 순간순간 미쳤구나.

 

이렇게 해서 , 저 친구 바쁘구나. 저 친구 지금 조급하구나.” 이렇게 생각이 들어서 조금 여유로웠는데, 지금도 살다보니 또 미친 거지 뭐. 원래대로 돌아간 거지.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 아침에 절을 하면서 정신 차리겠습니다. 정신 차리겠습니다.” 그것도 정신 차렸을 때 그 자리로 돌아가지. 그러니까 한 번도 정신차려본 사람이 없는 사람은 이게 잘 이해가 안 될 거요. 그러나 자기는 한번 정신 차려본 경험이 있잖아. 그러니까 , 또 내 생각에 사로잡히구나. 내 뜻대로 안된다고 또 미쳐 날뛰구나.” 이렇게 자기를 돌이키는 쪽으로 자꾸 이렇게 돼 내이고,

 

일종의 자기 암시지. 기도라 그러는데 자기 암시를 자꾸 주게 되면 이렇게 화를 퍽 내더라도 , 또 내가 사로잡히구나. 또 내가 내식대로 하려고 하는구나.” 이렇게 자꾸 돌이켜지니까 짜증이 나더라도 그것이 오래가지 않고, 또 때로는 일어나지 않고, 이래서 짜증은 내지만 옛날하고 비교해보면 횟수가 어때요? 확실히 적어지고, 짜증은 내지만 화는 내지만 옛날보다 강도가 훨씬 약해지고. 짜증은 내지만 그 되돌아오는 시간이 훨씬 짧아진다. 전에는 진짜 미워서 하루 말도 하기 싫었는데, 요즘은 한 35분 있다가, “아이고, 내가 또 경계에 말려들었구나. 또 내가 저 사람의 장난에 내가 속았구나.” 이렇게 해서 딱 돌아오고. 이러면 화가 좀 나더라도 그런 게 남아있더라도 훨씬 더 옛날보다 자유로워진다. 부족한 건 나에게 있는 거지.

 

그러니까 우리가 내가 가진 이런 것도 잘 안 고쳐지는데 내가 그 사람 살아온 평생의 그 습관을 그 일하는 습관, 말하는 습관, 생활하는 습관, 이런 걸 고칠 수 있을까? 그걸 자꾸 고치라고 하니까 그 사람 어떻게 고치겠어? 안 고친다고 내가 성질내니까 그러면 누구만 손해다? 나만 손해니까. 그러니까 엎드려 절을 하면서 하나는 화나지 않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화내지 않는 사람이 아니고, 화나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 화는 나는데 바깥으로 내지 않으면 참아야 되지. 참으면 뭐가 된다? 병 돼. 참는 건 수행이 아니야. 화나지 않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화는 현실로 나요? 안 나요? 나지. 그래서 그걸 늘 돌이키면, 이것은 나의 문제에요.

 

그러니까 내 생각에 사로잡히면 이렇게 살짝, 살짝 미쳐서 이런 정신현상이 생기니까, 그래서 화나지 않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자꾸 자기에게 돼 내어야 돼. 그래도 화나잖아요. 그래. 그러나 화가 나지만 금방 돌이킬 수가 있고. 그러니까 돌아오는데 시간이 짧아진다 이 말이오. 횟수가 줄어들고. 그렇게 자꾸 정진을 하면 어느 순간에 화가 탁 일어나도 , 내가 사로잡히고 있구나.” 이렇게 자기를 알아차리게 되는 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