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월도스님_BTN즉문즉설

월도스님 BTN 즉문즉설 11_2. 참회와 반성은 다른 것입니까?

Buddhastudy 2017. 8. 14. 22:35



참회는 계율에서 출발을 하는데 불자님들 오계를 받지 않습니까. 오계를 받는데 오계를 지키는 경우도 있지만, 가끔은 계를 까먹는 경우도 있고 계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랬을 때 내 스스로가 , 내가 이 스스로 죄를 지었구나. 하는 것을 뉘우치는 것을 뭐라고 그러냐하면 포살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포살.

 

부처님 당시에도 1250인 비구가 모여 살면서 그 때때로 모여서 포살법회를 했습니다. “저는 오늘 이런 계를 범했습니다.” “저는 이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런 계율을 제가 어겼는데, 앞으로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포살이라고 합니다.

 

그다음 자자라고 해서 그 자자라고 하는 것은 어떤 거냐하면 /본인 스스로가 잘못을 지적하는 게 아니고 내가 상대를 지적해 주는 겁니다./ 네가 느끼지 못했는데도 넌 이것을 잘못하고 있더라. 부처님 말씀에 이것을 어기고 있더라. 이런 부분을 지적해 주는 것입니다.

 

그 지적해주는 것은 상대방의 인격을 깎아내리거나 상대방의 기분을 우울하게 해주기 위해서 해주는 게 아니고, 비판의식이기보다는 그가 알지 못하고 저지르는 것을 깨우쳐주는 거죠. “너 이런 거 고쳐야 돼. 이런 부분 문제가 있어.” 그런데 오늘날 이 자자라는 것은 상대방을 도와주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잘못 지적하면 괜히 화가 나는 경우가 생길까? 안 생길까요?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심스럽게 언짢이 않게 만들어주는 분위기가 필요해서 이런 법회를 마련했습니다. 자자법회 포살법회.

 

그래서 모든 대중이 모이는 겁니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가 난 이런 잘못을 했다. 난 이런 잘못을 했다. 앞으로는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 이렇게 맹세를 하는 것을 포살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상대방에게 기분이 언짢지 않게 본인 스스로 느끼지 못하지만 이런 게 문제가 있었네.” 하고 지적해 주는 것을 자자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 다음 반성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아까 나왔던 이야기지만 스스로가 말이나 행동이 부족함이나 또 소위 느끼지 못하는 부분을 통해서 상대방에게 해를 깨쳤거나, 다시 하지 않겠다는 반성. 그래서 우리가 집에서도 아이들 보면 네가 네 스스로가 뭘 잘못했는지 반성해.” 이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또 유치원 같은 데서도 아이들이 잘못을 저질렀는데 뭘 잘못을 저질렀는데 잘 모르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럼 선생님이 뭐라고 그래요? 손들고 서서 뭘 잘못했는지 반성해 봐. 이제 요즘에는 유치원 같은 데도 보니까 생각하는 의자, 이런 것을 만들어 놨더라고요.

 

그래서 의자에 앉아서 내가 뭘 잘못했지?” 라고 생각해서, 선생님이 네가 이거 잘못한 거야.” 이야기하기보다는 본인이 본인 스스로 점검해 보고 , 이거였구나.” 라고 느끼면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르는 데 상당히 방어가 될 수 있는 것을 반성이라고 이야기를 하죠.

 

특히 참회라고 하는 것 공덕이 있어요. 참회를 하면 어떤 공덕이 있는지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참회를 잘하면 번뇌라고 하는 땔감을 태우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 부처님 계율이라고 하는 것을 잘 지키면, 번뇌가 사라지겠죠. 그런데 그 계율을 잘 안 지키면 번뇌덩어리가 많은 거예요.

 

예를 들어서 우리 천태종에서 닭고기 먹으라 그래요? 먹지 말라고 그래요? 먹지 말라고 그래요. 그런데 어느 때인가 모르고 닭고기가 들어간 만두라도 하나 먹었으면 기분이 찝찝해요? 안 찝찝해요? 찝찝하잖아요. 이럴 때는 참회를 하는 거예요. 참회를 하지 않으면 내가 이거 먹어 잘못되었나? 이것 때문에 문제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안 들어요?

 

예를 들어서 아이들이 치킨을 사달라고 때를 씁니까? 안 씁니까? 우리는 분명히 절에 다녀서 우리는 구인사 다니기 때문에 우리는 천태종 다니기 때문에 치킨 같은 것은 안 먹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도 아이들이 하도 사 달라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사 주는 경우가 있어요? 없어요? 있고나면 그것을 먹고 난 다음에 좋은 일만 계속 생기면 , 부처님께서 용서를 했나보다.”하고 넘어갔는데, 그런 일이 있고난 후에 조금 이상한 일이 생기면 마음에 걸려요? 안 걸려요? “, 먹지 말아야 될 것을 먹어서 그랬나?” 이런 생각이 든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럴 때 해야 되는 게 참회입니다. 참회를 하고 나면 , 내가 이런 다짐을 갖는 순간에 내 마음속에 번뇌(=찌꺼기, =쓸데없는 생각)를 정리해 갈 수 있기 때문에 이 번뇌라는 땔감 하나를 태워 없애는 것처럼 내 마음이 좀 맑아질 수 있다.

 

두 번째는 이 참회를 진실하게 잘하는 사람들은 다음 생에 천상세계에 태어날 수가 있어. 그런데 본인 스스로가 잘못을 했거든 잘못을 뉘우치면 마음이 깨끗해서 천상세계에 갈 수가 있는데, 본인이 잘못을 해놓고도 뉘우치지 않으면 다음 생에 절대 천상에 못 간다는 것을 아시고 참회 잘하는 불자 되시기 바랍니다. 아시겠죠. 대단히 중요한 거예요.

 

그 다음에 참회는 항상 즐거움만 있고 나중에 사선천에 태어날 수 있다. 아주 착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계에 가서 태어날 수가 있는 거예요. 이 참회는 아주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불교라는 장르가 좋은 것이 뭐냐 하면 완벽한 행동만 하고 살수는 없잖아요.

 

고치는 게 불교에요.

내 행동을 고치고

내 생각을 고치고

고치는 거예요.

 

참회를 한다는 것은 고친다는 거와 통하는 거예요. 그런데 대게 보면 아상이 꽉 차 있는 사람은 본인이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안 하면서 우겨요? 안 우겨요? 우기잖아요. 특히 보면 방구 꿔놓고도 꿨다고 그래? 안 꿨다고 그래? 그러니까 방구를 꿨으면 꿨다고 얘기를 하면 되는데 꼭 안 꾼 척 하잖아요. 예를 든다면 그런 것일 수 있는 거예요.

 

내가 행했으면 내가 행했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고, 그것이 잘못되어진 것이거나 상대방에게 피해가 가는 것이라면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자기 다짐의 의지를 갖는 것이 진정한 참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참회를 하면요, 즐겁게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가 잘못을 지적했을 때 내가 잘못했네.”라고 상대가 인정을 하면, 서로가 즐거울 수 있고, 또 누군가에게 내가 이렇게 잘못했네.”라고 말하는 것은 당당함이고, 그 당당함은 즐거움과 연계될 수 있어 부족함이 없다.

 

또한 참회를 잘하는 사람에게는 재앙이 없어진다. 대승불교에서는. 재앙이라는 것은 왜 생기는 겁니까? 당당하지 못한 사람에게 모함으로 일어나는 재앙이 많거든요. 그래서 재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 다음에 참회를 잘하는 사람에게는 소원을 들어주고 마니보주를 내려주는 가피를 얻을 수 있다. 라고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불교의 장르라고 하는 것은 많은 불자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계를 만든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크나큰 공덕을 짓고 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계율을 제정하신 거고,

 

그 계율을 어기면 그 계율 어긴 것을 용서 할 수 있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게 참회일 수 있느니만큼 당당하게 참회할 수 있는 불자들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