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설민석_십장생한국사

[설민석 KBS TV 역사특강] 2018 제주 4.3사건 70주년, 우리가 몰랐던 제주 이야기

Buddhastudy 2018. 4. 11. 21:40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녘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아아 아아아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잠들지 않는 남도, 안치환

 

사랑하는 제주도민 여러분, 그리고 이 방송을 보고 계시는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 땅에서 23년째 역사를 강의하고 있는 설민석입니다. 반갑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할 주제가 194843일날 있었던 제주 4.3사건인데요, 이 이야기는 매우 슬픈 이야기에요. 매우 가슴 아픈 이야기인데, 이것은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에서부터 시작해서 지금 막 공부 열심히 하고 있는 우리의 미래 새싹들이 함께 해야 할, 반드시 함께 기억해야 할 이야기다. 라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대한민국 국민뿐만 아니라, 실제의 제주도에 사는 젊은 학생들도 4.3사건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이 이야기를 우리가 다시 한 번 이야기 해보고, 그 날을 추모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보자라는 의미에서 이 강연을 만들어봤습니다.

 

여러분들 지금 가슴에 다 동백꽃 달고 계시네요. 저도 달고 있습니다. 이 동백꽃이요, 제주도 4.3사건을 상징하는 꽃이 됩니다. 꽃말이 기다림이에요. 어찌 보면 70년 전 그날, 죄 없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신 그분들이 진상을 규명하고, 그리고 그 진실을 다시 밝혀지는 시간, 70년을 어찌 보면 하늘에서 기다려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함께 공감하는 그런 멋진 시간을 가져봤으면 좋겠습니다. 제주 4.3이야기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4.3사건 머리에는 있는데 가슴에 새겨져 있는데 막상 입으로 꺼내려니까 좀 입이 떨어지지 않거든요. 일단 4.3사건의 진상보고서에 나온 사전적 의미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 제주 4.3사건은요, 473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해서 경찰, 서청,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언뜻 봐도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르겠죠? 그래서 제가 왔습니다. 4.3사건을 먼저 우리가 배우기 전에 배경지식이 조금 필요한데, 우리가 꿈꿨던, 일제강점기가 끝나는 1945815, 광복의 그날로 한번 떠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이 패망했어요. 일왕이 항복을 합니다. 광복의 그날, 우리는 모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데, 그 순간 소련군은 러시아, 소련군은 이미 우리나라 북쪽으로 진주해 들어와 있었어요. 미국이 깜짝 놀란 거예요.

 

뭐야? 아니 전쟁이 끝나는데 소련이 한반도로 진격해 내려오네. 그럼 한반도가 전부 다 사회주의제가 되는 거야. 그런 안 되지. 기다려.”

 

그러면서 일본에 주둔해 있던 우리나라 한반도로 들어오니 이것이 우리가 광복한 다음 달이에요. 그래서 광복 이후에 우리는 꿈꾸던 즉각 독립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북쪽에는 소련군, 남쪽에는 미국이 주둔하는 미·소 군정 상태를 맞이하게 되고, 둘 사이에 경계선은 북위38도선, 38도선이 갈리게 되는 거예요.

 

이유는 우리 스스로 힘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우리 마음대로 독립할 수 없죠. 그럼 우리 민족의 독립의 열쇠를 쥔 사람들은 누구에요? 미국과 소련이었어요. 그럼 둘이 잘 합의를 봐서 독립 안을 내놔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2차 세계대전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면서 둘 사이의 어떤 회담이 결렬이 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불안했어요. “뭐야? 우리 이러다 독립 못하는 거 아니야. 아니 지금 정부도 없는 무정부 상태인데, 어떻게 되는 거야?”라고 불안해하고 있을 때 당시에 미국편에 섰던 미국 유학출신 이승만 박사가 전라북도 정읍에서 이런 발언을 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정읍발언인데요, 내용은 그래요.

 

저기 있는 공산주의자들과는 어차피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까, 38도선 이남,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옳을 같다. 라는 취지의 발언을 해요. 그럼 민족주의적 시각에서는 이건 안 될 일이잖아요. 그래서 당시 좌익, 우익, 심지어는 중도파 할 것 없이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여기에 반대를 하고 나섭니다.

 

그래서 미국이 소련한테 제한을 합니다. “, 소련아. 어차피 우리끼리 대화가 안 되니까, UN에 물어보자. UN의 뜻에 따르자.”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소련이 뭐라고 그랬게요? 반대합니다. “안 돼.”라고 얘기를 해요.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밀어붙여서 UN에 물어봐요. 이 한반도 어떻게 할까요? 답이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UN에서 뭐라고 그러냐?

 

즉각 독립시켜요. 임시정부고 뭐고 필요 없고 즉각 독립시켜. 국회의원 선거 해. 인구비례로. 남북한 인구비례로 국회의원 총선을 실시하라.”고 명령을 내려요.

 

인구비례 국회의원 선거를 하면, 예를 들면 남한의 국회의원 한 200석 나오잖아요. 북한은 인구비례로 따지면 100석 밖에 안 나와. 그럼 지금 당장 국회의원 선거를 하면 과반수이상을 누가 차지하겠어? 사회주의가 차지하겠어? 자유민주주의가 차지하겠어? 자유민주주의가 차지하죠. 그럼 미국의 입김이 세지는 거예요. 그래서 소련이 이것을 반대하는 거죠.

 

이런 상황에서 UN위원단이 우리나라의 국회의원선거를 홍보하고 감시하기 위해서 남한으로 들어옵니다. 남한은 좋아하죠. “, 빨리 국회의원 선거합시다.”하고 좋아하는데, 소련이 방북을 거부를 해요. “못 들어와. 어딜 들어와. 오지 마. 우리는 이거 불공정한 선거라고 생각해. 집어치워.” 이렇게 된 겁니다.

 

당황한 미국은 , 이거 UN이 시켰는데.” UN에 다시 물어봐요. “저기 지금 소련이 선거 못하겠다고 그러는데 어떻게 할까요?”라고 하니, UN에서 뭐라고 다시 명령을 내리냐. “그렇다면 실시 가능한 지역에서만 UN감시 하에 인구비례 총선, 국회의원 총선을 실시하라.” 그 얘기는 뭐죠? 38선 이남에서만 국회의원 선거를 하라는 얘기에요.

 

그럼 그 국회의원들이 38도선 이남 만의 헌법을 만들고, 남한 만의 대통령을 뽑고, 남한 만의 정보를 수립하겠죠. 이거 누가 주장한 뭐하고 똑같은 거예요? 이승만 박사가 주장한 정읍발언이 현실화 되게 생긴 거예요. 우리나라가 반으로 쪼개지게 생겼습니다. 큰일 났잖아요.

 

그래서 이건 안 된다. UN의 결정안 따를 수 없다. 남한만의 단독 정보 수립을 반대한다. 그러면서 나서신 분이 있었으니, 그 분이 그 유명한 김구 선생이었습니다. 김구 선생님은 남한에 있는 민족지도자를 많이, 많은 분들을 모시고 38도선을 넘어 북쪽으로 갑니다. ?

 

내가 김일성이 만나보겠다. 사회주의자 김두봉을 만나겠어. 그래서 이념을 초월해서 우리 민족지도자들이 UN의 결정안에 대해서 터놓고 논의하자.” 이런 의미에서 북으로 가세요. 평양에서 민족 지도자들이 만나서 이 문제에 대해서 합의를 봅니다.

 

남한만의 단독 정부수립반대

우리 민족은 하나다.

미군 소련군, 이 땅에서 물러가라.”

 

라는 결정을 내렸어요. , 그런데 이런 민족지도자들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남쪽에서는 차근차근 남한만의 국회의원 선거가 준비되고 있었어요. 그래서 48510, 우리나라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를 한다는 거예요. 50총선을 막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택하시냐? 불참. 보이콧을 선언해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청소년들이 많으니까 쉬운 예를 들어볼게요. 연말가요 시상식을 하는데, YG하고 SM이 불참한데. 심지어는 방탄소년단도 안 나와. 그러면 그 연말 가요시상식의 의미가 있어? 없어? 그럼 무산 될 거 아니야. 뭐 이렇게 생각을 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당시 선거관리 위원회에서는 불참? 알았어요. 참여하지 마세요. 필요 없어요.” 그리고 차근차근 진행을 하게 됩니다. 결국 김구를 비롯한 불참세력들은 권력을 잃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구요, 당시에 남한만의 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하는 사회주의 세력은요, 좀 더 적극적인 방법을 펼치게 됩니다.

 

510, 남한에서만 200개의 선거구에서 200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가 치러지는데요, 제주도의 선거구, 3군데였거든요. 그 중에 두 군데가 불이 타요. 그래서 초대 국회의원이 200명이 아니라 198명이 됩니다. 이래서 제주도는 그 당시에 50총선을 방해한, 사회주의자들의 섬, 빨간 섬으로 낙인이 찍혀지게 된 거에요.

 

당시에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세력이 전국 각지에 있었는데, 왜 유독, 이곳 제주도에서만 선거구가 불타고, 선거를 치루지 못하는 그런 극단적인 일이 벌어졌을까? 과연 4.3 사건 이전에 이곳 제주도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제주도의 역사적 특성을 좀 알아야 될 거 같아요. 조선시대 제주도는요, 주로 죄지은 사람들이 오는 유배지였습니다. 제주도로 유배 온 사람 중에 제일 유명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영화 주인공도 했었는데. 광해군이 제주도로 유배를 왔어요. 광해군이. 그리고 또 추사체로 유명한 조선후기 김정희 그 분도 제주도로 유배를 왔어요. 주로 유배자들이 죄지은 사람들이 많이 오고.

 

그리고 곡물이라는 이름으로 육지에 많은 세금을 빼앗겼던, 쉽게 얘기해서 규모나 이런 거에 비해서 많이 대우를 받지 못한 섬이 제주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주도가 일제강점기에는 더더욱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유가 뭐냐? 이 지정학적으로 일본하고 가까운 거예요. 여기가. 그러니까 일본인들이 우리 제주도에 있는 남자들, 이런 어린 학생들을 징용으로 끌고 가고, 징병으로 끌고 가고, 마구잡이로 일본으로 끌려간 거예요.

 

그리고 일본이 폐망하기 직전에 이 제주도를 군사기지로 여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혹시, 가미가제 특공대라고 들어봤어요? 미국 군함이 있으면 전투기가 가서 그냥 들이 받아들이는, 자살특공대거든요. 그런데 이 가미가제만 전투기만 있는 게 아니라, 자살 어뢰정도 있어요. 잠수정. 그 잠수정들을 숨겨놓는 기지로 제주도를 딱 정해요.

 

이 제주도를 파헤치기 시작하는데, 해안 동굴을 파. 그리고 자살특공대 잠수정을 거기다 감춰놓습니다. 일본인들이. 그러면 2차 대전 막바지에 미국은 뭐에요? 제주도가 요새니까 또 제주도를 공격할 거 아니에요. 일본인들에 의해서 어뢰정 숨기는 동굴 만든다고 강제 노역당해. 우리 제주도는 너무 힘든 상황이었어요.

 

 

, 이렇게 힘든 일제강점기가 가고, 45815, 광복의 그날이 왔습니다. 이제 광복이 됐잖아요. 그리고 9, 우리나라에 미군이 들어온다고 그랬잖아요. 여기 있는 제주도가 한 달 늦게 들어와요. 육지보다. 그러니까 고립된 섬에서 만세를 부르고 싶은데, 일본경찰들이 총칼로 위협하고 있고, 만세도 못 부르고, 아마 그 당시에 미군들이 언제 들어오나, 하루가 천년 같았을 거라구요.

 

그때 또 일본군인들이 어떤 나쁜 짓을 했느냐? 군수물자를 뒤로 빼서 팔아버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총칼로 우리 제주도민들을 위협하기도 하고, 가장 나쁜 짓이 뭐냐하면 일제강점기에 공출제라고 그래서 우리가 생산물을 내잖아요. 그럼 일본인들이 그것을 다 빼앗아가. 빼앗아가고 배급을 나눠줍니다. 그럼 광복한 다음에 우리가 먹을 게 없으니까 배급을 줘야 되잖아요. 그런데 도민들 보는 앞에서 그 곡물에다가 석유를 붓고 불을 질러서 다 태워버려요.

 

 

이렇게 두 달 보름이 흘렀어요. 그리고 일본군들 물러가고 새로이 미군이 제주도로 들어왔습니다. 우리 도민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희망을 가졌습니다.

이제 미군들이 들어왔으니까 보기 싫은 친일파들, 친일파 경찰들 다 처단해 주겠지. 그리고 어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주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당시 미군정의 행보는 정반대로 흘러갑니다.

 

미군정은요,

제주도뿐만 아니라 전국에 있는 남한 지역에 있는

친일파 경찰과 친일파 공무원을 그대로 등용을 해요.

 

, 미국이 왜 그랬을까?

더 이상 미국의 적은 일본, 나치가 아니고

이미 폐망했으니까 새로운 사회주의 소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의 생각은

일본하고 한반도를 잘 아울러서

밀고 내려오는 소련과 어떤 대결양상을 펼쳐진다.

이 생각을 하고 있었다구요.

 

그래서 제주도에 들어와서 친일파 경찰들을 다 등용을 한 거예요. 조금 시간 지나잖아요. 전체 경찰 고위 간부 중에 거의 80% 이상이 친일파출신 경찰이었다는 거죠. 뿐만이 아닙니다. 당시 제주도를 에서 로 승격시켜요. 미군정이. 앞에 도는 섬 도 자고, 뒤에 얘기한 도는 길 도 자인데, 쉽게 얘기해서 섬이었던, 전라도 부속이었던 제주도를 경상도 전라도하고 같은 급으로 만들어줬다는 얘기에요.

 

, 그럼 친구가 생각할 때 이건 나쁜 거예요? 좋은 거예요? 얼핏 들으면 좋은 거 같죠. 커졌으니까. 이게 안 좋아요. , 왜 안 좋으냐? 일단 도로 승격이 되다보니까, 전라도에서 오는 물자가 끊겨. 지원이 끊깁니다. 너희도 똑같은 도인데 왜 지원을 해주냐 이거지.

 

두 번째는 범위가 커지다보니까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했다고 그래요. 당시 제주도는 광복이후에 일본에서 다시 우리 땅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6만 명이었어요. 일자리는 그대로인데 사람은 많아져. 그럼 실업률이 높아집니다. 전염병이 돕니다. 흉작이 돕니다.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운데 세금을 더 내라고요? 지원은 끊는다고요? , 우리는 도로 승격되는 거 싫습니다. 라고 했지만, 미군정은 그냥 도로 승격시켜버려요.

 

그리고 도의 개념이 되었으니, 더 많은 치안유지를 위해서 경찰력이 필요하지 않느냐. 그러면서 육지에서 외지에서 경찰을 불러. 이 경찰을 뭐라고 부르냐하면 자, 다 같이 따라해 보죠. ‘응원경찰제주도에 있는 경찰을 응원해주기 위해서 오는 경찰 그래서 외지경찰을 응원경찰이라고 했는데, 이들도 역시 친일파 출신이었다는 거죠.

 

, 그럼 친일파 출신 경찰들이 어떻게 했습니다. 지난 동안, 일제강점기동안, 그들의 그 권위적인 모습과 악랄함과 그 표독함을 그대로 갖고 있는 사람들이 여기 있는 제주도로 온 거에요. 이런 것 때문에 제주도민들은 미군정에 대한 상당한 불신과 불만을 가득 가지고 있었다. 광복 이후에.

 

그렇게 2년의 세월이 흘러가요. 그리고 운명의 194731, 그 끔찍한 3.1발포사건이 시작되게 됩니다.

194731일은요, 3.1운동 28주기를 맞이하는 기념행사였습니다. 지금은 유덕지로 되어있지만 관덕정이라고 아시죠? 그 관덕정. 서울로 따지면 시청 앞 광장 같은 곳이죠. 거기서 가두 시위하는 평화시위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까, 당시 제주도 경찰서에서는 좀 두려웠나 봐요. 그래서 육지에서 응원경찰 좀 더 보내달라고 그래서 100명이 더 충원되어서 온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3.1만해. 만세 부르고 하고 있는데, 구경꾼들도 많이 왔을 거 아닙니까. 그때 경찰이 말을 타고 가고 있는데, 코너를 딱 돌 때, 6살쯤 먹은 어린아이가 뛰어나온 거예요. 그런데 그 경찰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 아이를 치고 지나간 겁니다. 말발굽에.

 

그러면 제대로 된 경찰이면 어떻게 해야 되요? 지금으로 따지면 경찰차가 6살 먹은 어린 아이를 친 거야. 그럼 내려서 일단 응급처치하고 병원으로 가서 아이를 치료받게 하고, 정중히 사과하고 잘못한 게 있으면 진상규명해서 처벌받고 이게 정의잖아요. 그죠?

 

경찰은 아이를 치고 그냥 달려요. 도민들이 터져버린 거예요. “저사람 잡아라. 뺑소니 잡아라.” 그러면서 우리 도민들이 쫓아갑니다. 쫓아가는데 계속 말 타고 도망가니까 돌을 던지면서 계속 쫓아갔어요. 경찰이 경찰서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때 경찰서에 있던 경찰들이 보니까, 경찰이 말을 타고 도망을 오는데, 뒤에 군중들이 우~하고 몰려오고 있거든요.

 

, 폭동인가보다. 경찰들이 오인을 한 거예요. 그래서 여기 있는 경찰들이 총을 겨눠요. 그 자리에서 발포를 합니다. 그래서 무려 6명의 사망자가 나와요. 그런데 너무나 가슴 아픈 것이 정작 돌 던지고 쫓아온 사람들 이외에, 그냥 구경나온 아무 죄 없는 어린이와 여성들이 피해를 입었다.

 

당시 사상자 명단을 보면요, 15살 먹은 어린 아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젖먹이를 안고 있었던 21살 어린 여인도 있었어요. 이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옆에서 이 총을 맞아야 했는가. , 우리 도민들, 분노 했습니다. 도민들이 모여서 당시 제주도 경찰서로 쳐들어갑니다.

 

이 도민들한테 발포한 그 경찰, 진상규명하고 책임자 처벌해라.” 이 요구가 잘못된 겁니까? 정상적인 겁니까? 이건 당연히 해야 될 요구잖아요. 그때 제주도 경찰서에서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제주도민들을 향해서 기관총을 거치합니다. 그리고 당장 발포할 태세를 취해요. 이거 일촉즉발이었습니다. 이게 3.1발포 사건이에요.

 

큰일 나게 생겼으니까, 당시 제주도에 기자님들이 그만해. 그만하세요. 경찰 그만하고, 제주도민 이러다 큰일 나겠습니다. 일단 댁으로 돌아가세요.” 그래서 그 기자 분들이 뜯어 말린 거예요. 그리고 집에 갔는데, 도민들이 참을 수가 없는 거지. 그래서 9일 뒤에 310일이죠. 3.10 총 파업에 들어갑니다.

 

나가던 직장에 나가지 않고, 다 같이 모여서 진상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시위를 하게 되죠. 제주도에 있었던 기업인, 또 장사하시는 분, 그리고 금융하시는 분, 심지어는 공무원의 경찰 공무원까지, 전 제주도 166개 군 95%의 자영업자나 공무원들이 파업에 동참을 해요.

 

그러니까 제주도민이 하나로 똘똘 뭉쳤다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당시에 이 파업에 참여했던 경찰공무원들의 증언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중문지서 직원 일동은

오늘까지 치안확보라는 숭고한 정신으로 봉직을 해 왔으나

금번 발포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희생적 정신은 수포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 악독한 명령을 복종할 수 없으므로

직장을 떠난다. -중문지서 경찰관의 담화

 

, 이 사실이 제주도뿐만 아니라, 서울지역자기 쫙 알려지게 됩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서울 경찰청에 해당하는 당시 중앙경무부까지 알려지게 되는데, 당시 중앙경무부장 조병옥은 뭐라고 얘기를 하느냐? 그 사람은 아예 제주도에 와요. 와서 제주공무원들을 다 불러놓고 뭐라고 그러냐?

 

제주도민들, 왜 이렇게 사상이 불온해? 사회주의자야? 뭐야? 이게. 만약에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제주도민들을 다 싹 쓸어버리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요. 여러분들, 이 사건이 지금 사회주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니 주민들한테 어린아이 치고, 주민들한테 발포한 사건 진상규명하라는 거잖아요. 이게 사회주의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 수많은 응원경찰이 속속 제주도로 몰려들게 되구요, 그 끔찍한 이름 서북청년회, 서북청년단도 제주도로 들어오게 됩니다. 서북청년단이 뭐냐? 한반도 지도 머릿속에 그려보세요. 서북쪽이면 어디인가요? 평안도네. 북한 땅이죠. 남한에 내려와서 뭐를 외쳐야 살 수 있어? 반공입니다. 친미와 반공을 외치는 거죠. 이 사람들이 서북청년단이에요.

 

그 서북청년단들 중에서 어깨 좀 떡 벌어지고, 주먹 좀 쓰고, 소위 말해서 건달 끼 있는 사람들한테 완장을 채워줘요. 그리고 제주도로 보내옵니다. , 보내올 때 그들은 어떤 명목으로 올까요? 경찰의 명목으로 와요. 아까 제주도 경찰들 파업했죠. 그만뒀죠. 그 자리를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 출신 건달들이 채우기 시작한 거죠.

 

이 사람들이 좌익세력을 색출한다는 명목 하에 사람들을 잡아가두고 고문하기 시작하고 이런 일이 1년 동안 계속 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의 주제인 운명의 194843, 그 제주 4.3사건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죠.

 

 

194843일 한라산 중턱에 오름에서 봉화불이 새벽 2시에 불타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좌익세력들은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저지한다는 명분으로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니 이것이 제주4.3사건이예요.

 

 

, 그런데 여기 있는 좌익 무장대는 이들 때문에 무고한 제주도민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라는 그 비판에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 좌익무장대가 우익들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그 자리에 있던 무고한 우익들의 가족도 같이 목숨을 잃어요. 이들도 책임이 있다.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라고 말 할 수가 있겠습니다.

 

, 이렇게 해서 무장봉기까지 벌어지니까, 이제 총대 총이죠. 완전히 전쟁이 일어날 상황입니다. 이때 실낱같은 희망이 비칩니다.

 

당시 정부에서는요, 군대를 투입하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9연대가 있었는데, 당시 9연대장, 김익렬이라는 분이에요. 이분한테 토벌하라고 했더니 김익렬 연대장이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이번 사건은 제주도에 있는 경찰과 주민사이에 마찰로 벌어진 사건인데, 여기에 군대가 동원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평화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 이렇게 된 거에요.

 

그래서 산 위에 있던 좌익 무장대, 총책임자였던 김달삼과 여기 있는 9연대장 김익렬 둘이 구억국민학교에서 만납니다. 그래서 서로 대화를 나와요. 그때 좌익 쪽에서는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우리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반대합니다. 외지경찰 더 철수시켜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화해를 하면 신변보장 해줄 겁니까? 당신 일개 연대장인데, 당신 힘으로 평화협정, 믿을 수 있는 겁니까?” 라고 얘기를 해요.

 

그때 김익렬 연대장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루 바삐 귀순해서 우리 손 합쳐서 자주독립 합시다. 제가 일개 연대장 자격으로 온 게 아니라, 미군정장관의 명령으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우리같이 평화적으로 해결합시다.” 라고 얘를 해서 평화회담으로 합의를 봐요.

 

그래서 72시간 내에 전투를 중하고 평화롭게 대화로 풀자. 라고 약속을 합니다. 그래서 그 약속이 지켜지는 것 같았는데, 그 약속이 지켜줬다면 비극도 없었고 오늘날 이 자리에 제가 설 일도 없었겠죠. 그런데 그 약속은 결렬이 되요.

 

얼마 안 있다가 우익 청년들이 마을에 불을 지릅니다. 이것은 약속을 깨는 행위죠. 그런데 황당한 것은 하늘에서 미국군용기가 항공촬영을 하고 있었어요. 무슨 얘깁니까? 우익들의 방화 사건을 미군정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얘기인가요? 그럼 우익들이 방어하는데 그 배후에 미군정이 있었다는 얘깁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하고 있고, 앞으로도 연구를 해야겠지만, 저는 깊이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최초의 평화적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했던 미군정의 입장이 대토벌 쪽으로 변화한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그 미군정장관이 제주도에 은밀히 방문을 해요.

 

그래서 김익렬 연대장과 당시 중앙경무부장이었던 조병옥하고 그 앞에서 썰전을 벌입니다. 조병욱은 얘기합니다.

이거 제주도민들 다 사회주의자야. 쓸어버려야 됩니다.” 이렇게 얘기해요. 그런데 그 김익렬 연대장이

무슨 소리입니까. 평화적으로 문제를 풀어야지, 이러다 큰일 납니다.”

 

그때 미국의 딘장군이 이것은 조병옥 말이 맞다.” 그러면서 조병옥 경무부장의 손을 들어주고,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을 시켜버립니다. 그리고 새로 온 연대장이 박진경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새로이 연대장으로 부임하면서 어떤 말을 했는가?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 명을 희생시키더라도

나는 이건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하들이 보다가 너무 심하게 탄압을 하니까 뭐 이런 사람이 있어하고 부하가 총을 쏴야. 그래서 부하한테 암살당한 사건이에요. 얼마나 악랄하게 도민들을 탄압을 했으면. 그래서 박진경이라는 사람이 죽고. 김익렬 연대장 해고되고 박진경이 왔는데 이런 소리 하다가 암살당하고, 이제 미군정은 끝나고 새로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이 되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이 수립이 되었는데, 정권이 수립되니까 제주도는 이제 어떤 섬이 됩니까? 여기만 선거를 못 치렀잖아요. 이건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어떤 반기를 든, 빨간 섬으로 낙인이 찍혀진 거예요. 그래서 대대적으로 제주도 토벌 명령이 중앙에서 내려져요.

 

당시 중앙 정부는 군대를 더 동원해서 서북청년단? 응원경찰? 약하다 이거죠. 군대를 동원해서 제주도를 토벌하라고 그럽니다. 이거 1980년 광주 5.18하고 뭐가 다릅니까? 당시에 광주도 고립되어 있었고, 공수부대가 투입되어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사건이잖아요. 그 비슷한 상황이 이미 한참 전에 제주도에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당시 정권이, 여수 있잖아요. 전라도 여수. 여수에 있는 14연대한테 명령을 내려요. 가서 제주도 토벌하라고. 여수에 있는 군인들이 반발을 합니다. “아니 제주도면 같은 우리 민족인데 우리가 왜 우리 민족의 목에 총구를 겨눕니까? 난 당신이 마음에 안 들어.” 그러면 거기서 들고 일어나요. 1019일날.

 

그래서 여수에서 들고 일어나서 군인들이 순천까지 밀고 들어가거든요. 이게 옛날식 표현으로 여수반란사건입니다. 지금은 여순사건이라고 표현을 하죠. 이것 때문에 여수에 있는 무고한 주민들도 엄청나게 보복을 당하게 됩니다.

 

이제 경찰, 서북청년단, 그리고 9연대, 군인까지 하나가 된 토벌대가 제주도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하는데 당시 프로젝트 이름이 뭐냐? ‘삼진작적이었습니다. 삼진이 뭐냐? 제주도에 있는 좌익세력들을 태워 죽이고, 굶겨 죽이고, 죽여 없앤다.

 

해안선을 기준으로 5Km를 그어요. 그래서 “5Km 이상에 있는 중산간부터 한라산 정상까지 사는 사람들은 다 죽여라. 거기에 발을 디디면 죽여라.” 라는 발을 디디지 못하게 하는 금족령을 내려요.

 

왜냐하면 당시 좌익은 힘이 없으니까 다 총을 들고 산위로 빨치산처럼 올라가 있었거든. 그래서 오름이나 해안 동굴에 숨어있었거든요. 그래서 중산간에 있었던 사람들을 해안가로 내려 보내는, 주소지를 바꾸는 소개명령이 내려져요.

 

그래서 중산간에 있는 사람은 뭣도 모르고 해안가로 내려오게 된 거요. 그런데 중산간에 있던 사람들 중에 소식을 못 들었거나, 아니면 내 밭도 여기 있고, 똥도야지도 다 여기 있는데 내가 어딜 가. 나 여기 있을 거예요.” 라고 그 자리에 남은 사람들은 이유 불문하고 전부다 군인들에게 총살을 당하게 됩니다. 끔찍한 학살극이 벌어지게 되죠.

 

 

그럼 제주도에 살았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당하셨던 피해가 어떤 피해였는지, 그 생생한 증언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보실까요?

 

이 사료는 안인행씨의 증언이 되는데요, 어떤 이유에서 이 분이 군인 앞에서 섰는지 몰라요. 예를 들면 이들 가족 앞에 와서 경찰이 , 너희들 사라진 가족 어디 있어?”라고 물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가족 중에 사회주의자가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좌익 무장대의 행방을 물었는데 대답을 못했을 수 있어요. 그 이유는 모르겠으나 엄마와 함께 좌익으로 몰려서 굴비 엮듯이 묶이게 됩니다.

 

당시에 안인행씨는 13,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동생은 그 밑으로 10, 7, 4, 동생들이 있었는데, 당시에 어머니가 울고불고 살려달라고 그래서 10, 7, 4살 동생들은 다행히 빠졌구요, 어머니와 함께 밧줄에 묶인 상태였습니다. 안인행이라는 13살 난 어린아이가.

 

그때 갑자기 따다다닥 하는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총소리가 나니까 엄마는 어떻게 했겠어요? 반사적으로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아들을 꽉 끌어안게 됩니다. 그때 어머니의 등으로 총알이 빗발치게 쏟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꼬꾸라지고, 그 어머니의 뜨거운 피가 어린 안인행의 온 몸을 적시게 됩니다. 안인행은 피눈물도 함께 흘렸을 거예요.

 

그 상황에서 숨도 쉬지 못하고 있는데, 군인들이 와서 살아있는 놈 다 죽이라고 그러면서 대검으로 다 찌르고 다녔다는 거예요, 시신들을. 그때 자기를 보호하고 있는 엄마의 시신도 대검으로 찌르고, 요동치는데, 그때 안인행은 너무나 슬퍼서 뭐라고 표현도 할 수 없었다. 얼마나 그 당시에 상황이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만약에 연극이나 영화를 이것을 만든다면 그날의 일을 상세하게 설명할 수 있다.” 이렇게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 또 다른 증언을 보겠습니다.

60대 노부부인 안만규, 김인하는 3살 된 손녀 한명과 1살 된 손자를 데리고 깊이 냇가로 피신합니다. 그저 사회주의 세력으로 몰렸다 라는 그 이유 아닌 이유 때문에 피신을 한 거죠.

그래서 굴을 찾아서 몸을 숨겼는데, 아이가 31살이니까 응애하고 울었나 봐요. 그 울음소리가 새어나가니까, 진압군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나오라고 그래야죠. 어린 아이 울음소리가 나오면. 그런데 묻지도 않고 결국 수류탄을 집어던져서 모두 다 폭사시켰다.

 

이 자리에 제가 사료로 갖고 나오지 못한 너무 끔찍한 증언들이 많아서 일일이 소개해 드리지는 못하는데요, 하나만 더 말씀 드리면 여러분들, 제주도의 빌레못이라고 있습니다. 선사시대 유적지인데요, 그 곳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토벌대한테 들켜요. 그 토벌대가 오더니 3살 난 어린 아이의 양팔을 잡고 바위에 패대기를 쳐서 죽였다는 거예요.

 

제가 아들이 하나 있어요. 올해 3살입니다. 이제 아빠, 엄마, 말 띄고 이제 한창 뛰어 놀아야 될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왜 그런 잔인한 방법으로 죽음을 당해야만 합니까?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당시의 부모와 가족들의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를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목이 메인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 그리고 제가 사진 한 장을 좀 보여드리겠습니다. 저는 이 사진을 차마 볼 수가 없는데요, 진아영 할머님의 사진이에요. 당시 4.3사건 때 총탄에 턱이 없어지셨습니다. 평생 턱이 없었어요. 그래서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셨습니다. 음식물을 씹을 수가 없어서 항상 위장병에 시달리셨어요.

 

그런데 그 할머니가 너무 아픈 것은 음식물을 씹어서 소화시키지 못해서 아픈 속보다 그날의 그 참상을 평생 말하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는 그 아픔, 그것이 더 큰 아픔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194843일부터 시작된 그 끔직한 비극의 역사가 1954년까지 무려 7년 동안이나 이 제주도 땅에서 자행되었다. 이때 제주도민 30만 명 중에 1/10에 해당하는 3만 명이 학살을 당합니다. , 그런데요, 제주도민들의 아픔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닙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를 하다가 4.19혁명에 의해서 하야를 하게 되요. 그리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어요. 그게 2공화국입니다. 그러면 다시 진상조사하고, 책임자 처벌하고, 이 제주도민에 대한 사과랄지, 배상이랄지, 여러가지 정책들이 행해질 거라고 기대를 했는데, 바로 5.16군사 쿠데타가 벌어지게 되요.

 

반공을 제일의 국시로 하는, 미국을 최대의 우방국가로 여기겠다는 군부가 등장을 하게 됩니다.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어요. 금칙어가 됩니다.

 

이 제주4.3사건이 최초로 전국에 있는 대중들한테 알려진 게 1978년에 쓰여진 순이삼촌이라는 소설로 인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요, 당시에 작가는 그 소설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용공분자로 몰려서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그 누구도 아무도 이 사건을 입에 담을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세월이 지납니다. 박정희 정권 끝나고 전두환 정권, 노태우 정권, 그리고 김영삼 정권 때까지 침묵이 계속 되다가 김대중 전 대통령 때 이르러서 이 사건이 공론화가 되고, 그리고 4.3제주 특별법이 통과가 되죠.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 때 이르러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그 당시에 희생된 희생자와 유가족들, 그리고 제주도민들 앞에 고개 숙여 사과하는 그런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당시에 영상을 준비 봤습니다.

/국정을 책임지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우리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많은 아픔을 가지고 있었어요. 4.19혁명, 광주5.18, 6월 민주화 항쟁들 등 .그런 민주화 운동의 바탕에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우리 제주4.3사건은 가장 가슴 아픈 사건 중에 하나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요. 같은 국민이 같은 국민을 죽이는 씻을 수 없는 아픔의 역사가 되죠. 폭압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70년이 지나도록 우리가 이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그분들에게 사과하지 못하고, 함께 나누지 못했다는 이 자체가 너무나 가슴 아픈 역사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여러분들, 여기서요, 차로 한 30분 정도 가면 제주평화 기념관이 있습니다. 가보신 분? 우리 학생들 참 많이들 가보셨는데요, 그 기념관에 가면요, 백비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그냥 비석이에요. 그래서 백비입니다. 왜 아무것도 새기지 못했을까요?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으니까. 공론화 할 수 없었으니까. 추모할 수 없었으니까. 4.3도 이름도 없어요. 4.3, 폭동, 4.3소요사태, 4.3항쟁, 4.3사건, 이름조차 지을 수 없었던 거죠.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기는커녕 우리는 그 어떤 행위도 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저는 이 땅에서 일어난 수많은 역사적 이야기들을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계층 앞에서 강연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4.3사건관련 강연준비를 하면서 저는 가장 아파했고,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던 거 같아요. 너무도 슬프고 가슴 아픈 이야기에 여러분들도, 지금 함께 눈물 흘리고, 굉장히 우울할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마지막으로 정리를 하면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이 슬픔과 비극 속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희망을 보고 있지 않은가.

그 희망은 뭐죠?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거죠.

이제는 추모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제는 우리가 이 비극을 함께 나눌 수 있다. 라는 것이죠.

 

그래서 저기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비에

우리가 이 역사를 함께 새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을 하고요,

 

기억 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제라도 이 비극의 역사를

우리 제주도민과 전국에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 바로 알고,

추모하고, 각성한다면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이 땅에서 되풀이 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습니다.

 

제주 4.3사건은

더 이상 묻히고 감출 역사가 아닌,

반드시 기억 돼야 할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라는 사실,

오늘 함께 해주신 여러분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