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0)

<특집>군장병과 함께하는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3부 군에서 찾는 독립성

Buddhastudy 2010. 8. 13. 21:59

  방송 보기: BTN


. 아주 좋은 질문 해 주셨는데요. 스님들이 출가해서 일정한 기간 일년이면 일년, 삼년이면 삼년, 오년이면 오년, 공부하는 기간에는 일부러 사회와 단절합니다. 왜냐하면 여러 분들도 그렇잖아요. 늘 현안에 몰두하게 되면 크게 못 봐요. 그리고 본질을 못 봐요. 늘 현안에 쫓기기 때문에. 그래서 일부러 이런 신문도 안보고, TV도 안보고, 인관 관계도 탁 끊고, 딱 단절시켜서 오히려 자기성찰, 자기를 내면을 보는 성찰을 깊이 할 때 오히려 훨씬 더 큰 인물이 된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본인이 지금 사회를 한 번, 사회 속에서 살다가 사회를 끊고 들어와 보니까 사회에 대한 미련이 계속 남잖아 그죠? ~ 이건 집착이라고 알아야 되. 집착. 수행적인 도인이 되려면, 둘이 있으면 둘이 있어서 좋고. 혼자 있으면 혼자 있어서 좋아야 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어떠냐? 혼자 있으며 외로워, 둘이 있으면 귀찮아. 그래서 둘이 있으면 헤어지려 그러고, 혼자 있으면 외로워 사귀려고 그러고. 그래서 결혼 생활해도 혼자 있을 때는 어떻게 하나 사귀어서 같이 살까 하는데, 같이 살면 어떻게 하면 이혼할까 이 생각만 하고. 헤어지면 또 어떻게 하나 사귀어야 되고. 그래서 이래서 괴롭고 저래도 괴로워요. 혼자 살면 외롭고 둘이 살면 귀찮고. 그런데 마음 공부를 하면 어떠냐 하면. 혼자 있으면 자유로워서 좋고. 둘이 있으면 함께 있어서 좋아. 그래서 진정한 부부는 둘이 같이 살 때는 같이 있어서 좋은데. 한 사람이 돌아가셔도 그걸 울며 불고 그리워하고. 혼자서 외로워 하고 이러는 거는 공부가 안된 거야. 자기가 괴로워하는 거지. 죽은 사람한테 그렇다고 도움이 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항상 진정한 부부의 관계는 같이 살 때는 같이 있어서 좋지만은. 한 분이 돌아가시면 그래도 나는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어야 되. 그러면 그게 너무 상대편에게 무정한 거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있어. 장례에 부모가 돌아가시거나 아내나 남편이 돌아가셨는데 안 운다고 무정한 사람이라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요.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살고 죽는 건 누가 한신다? 기독교 식으로 말하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지. 그런데 인간이 그걸 갖고 시비를 해? 신앙이 있다면. 주님께서 알아서 하시는 일이지. 그런데 말은 신앙이라 하면서도 안 그래. 지 맘에 안 들면 하느님도 미워해 버려. 그러니까 진정한 신앙이라면 그건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그건 주님께서 알아서 하는 일이고. 천국에 가는 일이잖아 그죠? 불교적으로 말한다면 인연이 다해서 간 거란 말이오.

 

그러면 아까 얘기한 데로. 그러면 새로운 몸을 받아서 좋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기쁘게 안녕히 가세요. 빠이빠이. 이렇게 보내줘야 된단 말이야. 그런데 막 울고 불고. 이건 뭐냐 하면. 자기 문제야. 죽은 사람 아무 관계없어. 제가 이렇게 사람이 죽었다면 문상을 가잖아요. 그럼 남편이 죽었다고 아내가 막 울어. 그럼 내가 등 두드리면서 위로를 하면. 이렇게 말해요. ‘스님, 아이고 남편도 없이 이제 난 혼자 어떻게 살아요?’ 이래요. 남편 걱정해요 혼자 살 자기 걱정해요? 사람이 죽었는데도 죽은 사람 걱정 안하고 자기 걱정만 하고 있어요. 그래다 또 어떻게요? ‘아이고 저 애 둘을 혼자서 어떻게 키워요.’ 이래. 애 걱정해요. 키울 자기 걱정해요? 키울 자기 걱정해요. 이게 인간이에요. 인간은 늘 자기 걱정밖에 할 줄 몰라요. 이게 나쁘다는 뜻이 아니에요. 보통 사람이 그렇다 이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을 너무 이렇게 과대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그래서 그런 자기 점검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그래서 우리가 본인의 질문을 보면 이렇게 사회로부터 떨어져서 혼자도 능히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야 외롭지 않거든요. 안 그러면 늘 사람들 속에서 군중 속에서 살게 되고. 군중 속에 고독이라는 말 들어 보셨죠? 그 안에 있으면서도 고독해져요. 그러니까 오히려 스님들은 3년씩, 5년씩, 이렇게 세상하고 단절해서 무문관에 들어가 가지고 아예 단절하고 살고. 또 가톨릭에 봉쇄 수도원 같은데 가보면 수녀님들 딱 수녀 되면 세상하고 단절하는 사람도 있죠. 그런데 우리는 세상하고 단절한다고 해도 몇 년 밖에 안 해요. 2년 밖에 아니잖아. 우선 별거 아니고. 두 번째는 또 이게 세상하고 단절이 그렇게 큰 것도 아니고. 전화로 두 번이나 했다며.

 

그래서 내가 생각할 땐 좀 적극적으로. 이런 내, 이렇게 세상에 너무 끈끈이 메어서 내가 안절부절못하는 이 나를 독립시켜서. 나 홀로 설수 있는 사람이 되는 기회를 이번에 군대에서 잡겠다. 그래서 전화를 할 수 없어서 안 하는 게 아니고. 할 수 있더라도 가능하면 지금 질문하는 분한테 하는 거에요. 가능하면 뭐 한다? 안 한다. 면회를 오겠다 해도 가능하면 뭐라고 한다? 오지마 라고 한다. 휴가도 어쩔 수 없이 안 가면 안 되는 휴가는 가고. 포상휴가 같은 건 줘도 안 간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내가 내 삶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 그렇다고 내가 군대 휴가 안 가겠다고 해서 군대에서 휴가 가지 마라고 놔둡니까? 강제로 내 보냅니까? 강재로 내 보내죠. 그러니까 안 가겠다고 해도 보내주거든요. 그럼 가겠다 그래도 보내줍니까 안 보내줍니까? 안 보내줘. 이건 나하고 아무 관계 없는 일이오.

 

나는 이거 언제 깨쳤냐? 내가 감옥 가서 깨쳤어요. 내가 아무 죄도 없는데 나를 잡아 가버렸어. 내가 아니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안 되요. 너 죄 있다고 잡아 가버렸으니. 그런데 그 안에 있으면서 옆에 같이 있는 간방에 있는 사람이 종교가 기독교도 있고 이런데. 다 천주교 아니면 기독교고. 불교인은 딱 1명 있었어요. 10명 있었는데. 그래서 그 사람이 불교 좀 가르쳐 달라는 거요. 그래서 프로그램을 딱 짜가지고 매일 가르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나 보고 가라는 거요. 아직 덜 끝났는데. 아이 안 들어 오겠다고 그렇게 해도 들어가라고 그러더니. 이번에는. 그래서 내가 가서 검사한테 그랬어. 검사님 나 며칠만 더 있다 가면 안되냐고? 왜 그러느시냐고 그래. 그래서 내가 공부를 가르치다가 놔 놨는데. 이거 일주일만 더 가르치고 나가며 되겠다 하니까. 거 이상한 사람이라고.

 

죄가 있느니 업느니 나하고 억수로 싸웠거든요. 20대 후만 때 얘긴데. 싸웠는데. 이번에는 또 안 가겠다고 하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안 가겠다고 하는데도 그냥 내 보내버려요. 그래서 내가 거기서 큰걸 깨쳤어요. 나는 이게 그래서 좋다는 게. 내가 거기에서 나오겠다고 할 때는 감옥이 감옥이었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런데 내가 안 나오겠다고 하니까. 그게 감옥이요 감옥이 아니오? 감옥이 아니에요. 자유는 남이 나를 자유를 속박할 수도 있지만. 내가 내 자유를 늘 속박하는 거요. 본인이 여기서 집에 가겠다 그러면 군대가 내 자유를 속박하는데. 내가 안 가겠다 그러면 내 자유를 누구도 속박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아까 성경 말씀대로 오리를 가자면 뭐 해 주라? 10리를 가 주는 식으로. 군대에서 6개월 마다 휴가 보낸다 하면 나는 휴가를 어떻게 계산한다?

 

아 원래 군대를 가면 휴가를 한 번도 안주는 데 일년에 한 번은 주니까 고맙다. 이렇게 생각하면 중간에 덤으로 또 한번 나오잖아. 그럼 더 고맙겠지. 그러니까 이렇게 주어진 조건을 내 삶에 유리하게 생각해라. 아 내가 너무 부모하고 형제 사이에 너무 이렇게 아직 독립을 못하고 있구나. 마치 애완용 동물처럼 너무 묶여 있구나. 차제에 내가 부모 없이도 부모 돌아가셨다 해도 살 수 있고. 아까 누구 얘기하듯이 애인이 헤어졌다. 고무신 거꾸로 신었다 해도 허허 웃으면서 살 수 있는 그런 내가 이 번에는 주인이 되는 삶을 한번 살아봐야겠다. 이렇게 이 주어진 조건을 적극적으로 생각을 하세요. 저기 부대장님 잘 기억하셨다가 휴가를 가능하면 주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