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0)

<특집>군장병과 함께하는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5부 나를 비우는 연습

Buddhastudy 2010. 8. 17.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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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거 절 집안하고 똑같다. 절 집안도 그래요. 절에 어른이 많으면 한 사람은 이거 하라고 그러고. 내가 봉암사에 부목으로 좀 살았어요. 그런데 부목으로 밑에 머슴살이를 해보면 그런 일이 똑같이 생겨요. 한 사람은 빨리 화장실 치우라 그래가지고 오줌통 매고 가기도 전에 불러가지고 ~ 밭 매라이래요. 다른 또 와가지고. 그래 어쩔 줄 몰라서 이래 놔 놓고 밭 매는데 가 있으면. 이 사람은 시켜놓고 가버리고 없고. 이 사람은 호미 메고 와가지고 가지고 그러니까 따라가야 되잖아요. 그래 밭 매고 있으면. 점심 때 들어오면. ‘네 이놈시끼 왜 화장실 치우라는데 안 치웠어?’ 이렇게 되면 나중에 이런 마음이 들죠. 나보고 어쩌라고. 너희가 교통정리 해가지고 나한테 내려주지. 왜 너희가 일을 벌여가지고 중간에 있는 나만 못살게 구느냐? 어떻게 하라는 거냐? 이런 게 생겨요.

 

그래서 아까 내가 얘기 들으니까 절절이 이해가 된다 이 말이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경우는 허다하다 아시겠어요? 이거 만약에 회사취직을 하면 이런 일이 생겨. 사장이 와서 하는 일이 다르고. 부장이 와서 하는 일이 다르고. 절에 와도 이런 일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나는 수행차원에서 얘기해요. 어차피 이것을 내가 시정하라고 한다고 시정될까 안될까? 안되겠지. 그러면 내가 군대 시정해주러 군대에 왔나? 내 생활 잘 하려고 군대에 왔나. 대한민국 군대 고쳐주려고 내가 군대 왔나? 내가 군대 생활 잘 하려고 군대 왔나? 내가 그런 경험을 해서 굉장히 힘들었어. 나도. 그런데 내가 절에 갈 때 조실 스님한테만 얘기했어요. 제가 부목 살이 좀 하겠다. 무얼 와서 그런 걸 하냐? 아닙니다. 스님 내가 너무 이렇게 남 위에만 있어가지고 나도 모르게 자꾸 이게 시키는 것만 몸에 베니까. 나를 좀 정화하기 위해서 좀 하겠습니다. 남한테 얘기하지 마세요.

 

이렇게 해서 내가 살아보니까. 이 업식이라는게 내가 여기 올 때는 내 공부하러 왔지. 봉암사 고쳐주러 온 거 아니고. 절 고쳐주러 온거 아닌데. 와서는 보면 이것도 문제고 저것도 문제고. 창고 열어보면 창고 문제고. 온 천지가 문제투성이에요. 그런데 내가 어느 날 하루 장작을 내 성질이 있잖아. 뭐든 열심히 하는 성질이 있으니까. 장작을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패고 있으니까. 조실 스님이 뒤에 계시는 줄도 몰랐어. 한참 하고 있으니까 땀을 닦고 돌아보니 스님 오셨습니까? ‘이러니까. 나보고 빙긋이 웃으면서 뭐라고 하느냐? ‘여보게 자네 없을 때도 봉암사가 잘 있었다.’ 마치 내가 하는 짓이 내가 없으면 봉암사가 오늘이라도 안될 것처럼 그렇게. 여기 온 거는 봉암사 장작 패주러 온 게 아니라 집착하는 마음. 집착하는 말음을 내려놓기 위해서 왔는데 이 일에 대한 집착을 장작 패는거로 하든, 밭 매는거로 하든 대상만 바꿨지 그 자체는 똑같이 작용을 한단 말이오.

 

그러니까 큰 스님께서 웃으면서 ~ 너 없을 때도 봉암사 잘 있었다.’ 그때 내가 딱 깨쳤어. 내가 일부러 하던 일 그만두고 여기 와서, 나를 보러 와서는 또 나를 상실하고 또 여기에 휘말려서 내 까르마에 휘말려서 있구나. 이것을 돌이켜 보는 계기가 됐다. 그러면 이건 과제인데 선에서의 과제거든요. 화두를 던져 줄 테니까 한 번 들어보세요. 이 불경에 이런 말이 있어요. 일체 중생은 모든 생명 가진 것에는 다 불성이 있다. 일체중생 개유성불. 다 부처가 될 성품이 있다 이 말이오. 스님이 되면 그거 다 외워서 알 거 아니오. 그래 선방에서 공부를 하다가. 휴식시간에 나와가지고 겨울에 마루에 앉아서 휴식시간 인데도 안쉬고 정진한다고 참선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계속 빠그작 = = = 소리가 나는 거요.

 

그런데 명상할 때는 옆에서 소리가 나는걸 한눈을 팔아야 되나. 안 팔아야 되나? 안 팔아야 되지. 소리가 나든 말든 화두만 참구해야 되는데. 현실은 그리 안되. 계속 뭐가 빠그작 = = = 하니까 요렇게 봤어. 요렇게 보니까 강아지가 한 마리 앉아서 마른 뼈다귀 있잖아. 살점은 없는 뼈다귀를 가지고 꽉 = = 씹었다 탁 뱉었다. = = 씹었다 뱉었다. 이러고 있는 거요. 그래 가만 보니까. 살점이 있으면 이해가 되는데 살점 하나 없는 마른 뼈다귀를 갖고 계속 그렇게 하니까 쓸데없는 짓 아닙니까 그죠? 저 쓸데 없는 짓을 개가 왜 저럴까? 쓸데없는 짓을 하는 저 개는 쓸데없는 거 아니오. 만약에 그때 생각이 떠오르는 거요. 일체중생이 다 부처의 성품이 있다면 개도 부처의 성품이 있어야 되잖아. 그러면 개가 부처라면 개가 하는 짓은 뭐다? 부처의 행이라 하잖아. 그럼 마른 뼈다귀 씹고 뱉는 거 저게 부처의 행이라면 말이 안되잖아. 그러니까 의심이 든 거요.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말 자체가 그냥 경전 읽을 때는 그런 줄 알았는데. 어 거기 의심이 탁 든 거요. 그래서 일어나서 스승한테 가서 물었어 스님, 개새끼한테도 불성이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단 말이오. 저 개새끼한테도 불성이 있느냐 이거야. 그러니까 스님이 야 임마 개새끼한테 무슨 불성이 있노?’ 이런단 말이야. 그럴 때 한 번 생각해 봐라. 지금 이 문제에요. 자 스님 말마따나 개한테 불성이 없다는 걸 받아들이면 경전이 틀렸지. 그래 안 그래요? 그럼 경전이 틀렸다 이 말은 내가 경전 못 믿겠다 이렇게 얘기가 되잖아. 그럼 부처님이 하신 말씀도 내가 못 믿으면서 깨달음을 얻겠어 못 얻겠어? 못 얻겠지. 그럼 반대로 스님은 경전엔 있다고 써 놨던데요. 이렇게 말하면 누구 말은 못 믿는다? 스님 말은 못 믿지. 그럼 스승 말을 못 믿으면서 수행해서 깨닫겠나 못 깨닫겠나? 못 깨닫겠지.

 

그러면 첫 번째는 스님 말을 못 믿거나 이 경우는 부처 말을 못 믿거나 둘 중에 하나인데. 또 한가지 더 있어. 나오면서 혼자서 스님 말이 맞나? 경전이 맞나? 이러면 이건 둘 다 못믿는거요. 그러니까 스님 말이 틀렸다 하면 스승을 부정하는 거고. 경전이 틀렸네 하면 부처님을 못믿는거고. 누구 말이 맞나 하면 둘 다 부정하는 게 되.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냐? 스님 말도 100% 맞고 믿고. 부처님 말도 100% 믿는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그렇지 않다는 거요. 스님 말을 100%믿고 부처님 말을 100% 믿으면 하는 이 가 개한테 불성이 없다 하는 이 가 내 눈을 멀게 하고. 내 귀를 먹게 한다 이리 말해요. , 라는 게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렇게 가게 되는 거요. 있다 없다 의 가 아니다 이 말이오. 만약에 있다, 없다 하면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려야 되잖아. 그지? 그럼 둘 다 맞을 때는 없다라는 말은 있다 없다를 넘어서는 전혀 다른 소식이어야 되는 거요.

 

그래서 . 이게 도대체 뭘 의미하느냐? 이 거요. ‘. 있다 없다로 생각으로 표현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 ‘. 이게 목구멍의 가시처럼 탁 걸려 가지고 앉아도 . 누워도 라 이걸 화두라 그래. 이렇게 들었다 딴생각 하면 잊어버리고. 아 놓쳤네. 이게 화두가 아니야. 놓을래야 놓을 수 없어야 화두란 말이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할 때 있다 없다는 극단에 속하는 거요. 둘 다를 떠나야 되. 둘 다를 떠나야 이제 진정으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도리로 돌아가요. 지금은 어떠냐? 사단장 말이 맞나? 여단장 말이 맞나? 누구 말 들어야 되나? 옆에 사람 말 들을까? 아니다. 내가 가까이 있는 사람 말 들어야 될까? 이건 내 머리 굴리는 거요. 내 머리를 굴리지 말아야 되. 내 머리를 굴리지 말아야 되. 그럼 어떻게 될까? 그래 사단장이 파라 그러면 파는 거야. 여단장이 와서 메워라 하면 메우는 거야. 나무 심으라면 심어놓고. 또 옮겨라 하면 옮기면 되는 거야.

 

시키는 데로 한다는 개념이 아니야. 시키는 대로 하면 종이고. 내가 나를 비우는 연습을 하는 거야. 이것을. 아 이렇게 모순적인 게 와도 나한테는 모순이 하나도 없는 거야. 내가 나를 움켜쥐니까 모순이 생기지. 내가 나를 놔 버리면 아무 모순이 없어. 그럴 때 항변하면 안되. 그러면 한 대 때렸다. 뺨따귀를 한대 때렸다. ‘너 이 놈! 파라는데 왜 안 했나?’ 이러면 여단장님이 파지마라 그랬는데요.’ 이런 거는 책임을 남한테 전가하는 거요. 한대 탁 때리고 왜 아팠나?’ 하면 죄송합니다. 파겠습니다.’ 이러면 되. 파고 있다가 또 사단장이 와서 딱 때리면서 왜 파지 마라 했는데 왜 팠냐?’ 하면 죄송합니다.’ 그리고 또 하면 되. 이렇게 내가 되느냐를 연습하란 말이오. 이렇게 내가 되느냐? 그러면 이 모순 속에서 누가 깨닫는다? 내가 깨닫는다.

 

그 두 분은 나를 깨쳐주려 한 것은 아니지만은. 이것을 내가 나한테 긍정적으로 받아 들여서 모순 속에서 나를 놓아버리게 되면 무아를 내가 체득하게 되요. 그러니까 질문한 사람이 수행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을 수행으로 받아들여 버리면 두 가지 모순에서 벗어나. 그런데 이것을 세속적으로 생각하면 두 가지 모순에서 못 벗어나고. 이래로 못하고 저래로 못하고 사면초가가 돼서 꽉 끌려가지고 나보고 어떻게 하란 말이냐? 이렇게 항변이 나오는 데. 나를 탁 놔 버리면 두 개의 모순은 그냥 사라집니다. 그렇게 말은 쉽지만 될까 안될까? 안되지. 그러니까 이것을 과제로 삼으란 말이야. 군대에 있다 이 한 소식만 깨치고 나가면 절에 스님 10년 하는 것 보다 낫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