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18.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

Buddhastudy 2018. 7. 4. 20:47


안녕하세요. 오늘은 기사고타미 여자신자의 얘기를 해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사위성에 계실 때 있었던 일입니다. 기사고타미라고 불리는 한 여인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고 아들을 살려달라고 몸부림을 치고 돌아다녔습니다.

 

이 여인에 대한 것은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원래 장자 집에 태어나서 훌륭한 집에서 성장했고, 또 좋은 데 시집을 가서 애기를 낳았는데, 그 애기가 갑자기 죽게 되자 거의 정신이상을 일으킬 만큼 미쳐 날뛰었다. 이런 경우도 있고,

 

또 하나는 원래 이 여인은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아주 고생을 했는데, 아들을 못 낳는 부잣집이었데요. 아들 낳아주려고 시집을 가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아주 환대를 받았다. 그랬는데 그 아이가 갑자기 죽게 되어서 죽은 아이를 안고 반 미치다시피 해서 돌아다녔다.

 

엄마가 자식을 잃고 괴로워한다는 정황은 같은데 후자라면 하나가 더 추가가 됩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아기를 낳기 위해서 부잣집에 시집가서 아들을 낳았을 경우에는 단순히 내 자식인 것을 넘어서서 그 아들로 인해서 자기의 인생이 바뀌었지 않습니까.

 

그럼 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곧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거 아니오. 자기가 누렸던 부, 행복이 다 함께 사라진다. 이런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전자의 경우보다는 후자의 경우가 이 여인에게는 더 큰 충격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이런 얘기하면 늘 여러분들은 그럽니다.

그럼 앞에게 맞습니까? 뒤에게 맞습니까?”

이건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워낙 오래된 얘기다보니까 얘기가 중간에 섞이고, 사람이 서로 혼재가 되고 이렇게 해서 서로 달리 기록이 되어 있는데, 여기서 그 스토리가 약간 달라도 결과는 같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이 말이죠. 자식이 죽었거나 또는 귀한 재물을 날렸거나, 또는 어린 아이에게는 부모가 돌아가셨거나, 자신이 온통 의지하고 어떤 삶의 기둥으로 삼고 있던 것이 뿌리째 뽑혔을 때 인간이 느끼는 고통, 허무함, 이런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죠.

 

그러니까 이 죽은 아들을 안고 다니면서 아들을 살려달라고 울부짖고 다니니 누가 이 있어서 죽은 아들을 살려주겠어.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단 말이오. 이미 죽어버린 아들인데. 어떤 가르침에 보면 손으로 만져줘 살려줬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부처님 얘기가 아니고 다른 종교에는.

 

부모의 그런 현실적 요구에서야 죽은 자식 살려주는 것보다 더한 고마움이 어디 있겠어요. 죽은 자식을 살려달라는 게 우리가 말하는 기복이죠. 기복이라는 게 다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기의 바람과 욕망을 이루게 해달라는 거요.

 

그런데 누구도 그걸 못해주니까 누군가가 하도 안타까워서

저기 원정사의 부처님이 계시니까, 부처님께 한번 가보라. 이건 오늘도 마찬가지요. 누가 굉장히 괴로워하면 법문을 한번 들어보라든지, 깨달음장에 한번 갔다 오라든지.

 

그럼 가는 사람은 거기가면 자기 원이 들어질까.’ 이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잖아. 그죠? 사실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되기는 되는데, 문제가 해결 되는 건 사실인데, 그게 내가 원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이란 말이오. 사실은 더 좋은 결과인데.

 

이 여인은 부처님한테 가면 아이 살려준다고만 생각을 한 거요. 그래서 가서 울부짖고 하소연을 했더니 부처님께서 물끄러미 여인을 바라보더니 지금은 이렇게 미쳐 날뛰지마는 원래 총명한 사람이다. 하는 것을 아셨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여인이여, 사람이 죽지 않은 집에 가서 겨자씨 한 움큼만 얻어 오시오.”이렇게 얘기했어.

그런데 이 여인이 듣기에는 어떻게 들렸을까? 겨자씨가 아이를 살리는 특효약이라고 생각했을 거 아니오. 그런데 아무 겨자씩 갖고는 안 되고 부정 안타는 겨자, 즉 사람이 죽으면 부정 탄다. 이러잖아요. 초상집가면.

 

그러니까 사람이 안 죽은 집의 겨자씨를 가져오면 부처님이 뭔가 우리아들을 살려주겠거니, 이런 생각이 드니까, 너무너무 기뻤던 거요. 그래서 사위성으로 들어간 거요. 그래서 어떤 집에 가서 우리 아들이 죽었는데, 부처님에게 가서 얘기하니까, 아들을 살리려면 겨자씨가 한 움큼 필요하다는데, 한 움큼 불 수 있느냐 하니까, 누가 안 주겠어요.

 

아이고 그러죠.” 하고 겨자씨를 한 움큼 줬단 말이오. 여인이 받고 난 뒤 물었어.

이 집에 죽은 사람이 없죠?”

. 작년에 우리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요.”

그럼 이거 약에 못쓴다고 버리고.

 

또 딴 집에 가서 겨자씨를 한 움큼 얻고 또 물어봤어.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거요. 또 어떤 집에 가서 물어보니까 또 누가 돌아가셨다는 거요. 겨자씨 한 움큼 얻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인 줄 알았는데, 집집마다 다 가도 전부 누군가가 죽었단 말이오. 그게 몇 년 전이든.

 

그래서 지친 다리를 끌고 맨 마지막집에 갔는데, 그 집에서도 마찬 가지오. 그때 물었단 말이오.

이 집에는 누가 죽은 사람이 없겠죠.”

에이, 여보시오. 사람이 안 죽은 집이 어디 있소?”

그때 이 여인은 크게 깨달은 거요.

 

어떤 집이든 다 사람이 죽는다는 거요. 그것이 오늘 죽냐 내일 죽냐? 또는 그것이 어제 죽었냐 그제 죽었냐? 몇 년 전에 죽었냐. 이런 차이만 있지. 태어난 사람은 다 죽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우리 아들이 죽었다이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죽음의 고통은 나에게만 있다고 생각한 거요.

 

그런데 세상에 나가봤더니 죽음이라는 것은

그냥 하나의 보편적인 존재의 모습이오. 삶의 한 모습이다.

 

그때 이 여인의 마음속에 내 아이하고 움켜쥐고 있던 그 집착이 놓여난 거요. 이 집착이 놓여나니까 사물이 눈에 보이죠.

 

그래서 기뻐하면서 아이를 안고 숲에 가서 묻고는 밝은 얼굴로 부처님께 돌아왔단 말이오.

여인이여, 겨자씨는 얻어왔는가?”

아닙니다. 부처님. 겨자씨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겨자씨를 얻을 필요도 없습니다.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는 그 길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니 그 길을 따라 살아가겠습니다.”

 

이미 여인이 우리가 말하는 수다원과를 얻었다. 이미 법의 이치를 깨쳤다. 수다원과라는 것은 이치를 깨친 겁니다. 이치는 깨쳤지만 아직 습관이 다 바뀐 것은 아니에요. 그러기 때문에 알아도 실천은 다 안 됩니다. 그러나 물러서지는 않는다.

 

그래서 성인의 류에 들었다. 넘어지고 넘어지고 넘어져도 이제는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게 되는 거요. 이걸 우리가 수행의 과정에서는 견도가 열렸다. 이렇게 말해요.

 

그러면서 그 이치 따라 수행착오를 거듭하면서 그 몸과 마음에 배어 있는 습관을 하나하나 소멸해서 나아가는 과정을 뭐라고 그래요? 견도를 얻고 수도를 닦고 그 다음에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경지를 무학도라고 그래요.

 

그래서 삼도. 도에는 3가지가 있다. 견도, 수도, 무학도. 이것을 성문사과에 비교한다면 견도를 얻은 것이 수다원과에 이르는 거요. 수도를 하는 과정에 내가 한번 실수를 했다. 그랬을 때 다시 또 한 번의 실수만 더 하면 그 다음부터는 다시는 실수하지 않는다. 이게 한 번 더 윤회한다. 이런 말이오. 아시겠습니까? 그게 뭐다? 사다함.

 

이번의 이 실수로 끝이다.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다. 이게 아나함. 불례. 다시는 오지 않는다.

그다음에 경계의 마음이 팔리지 않는 경지, 아라한. 이게 성문사과죠.

 

첫째가 수다원. 예류 또는 임류, 성인의 유에 들었다.

두 번째 사다함. 일왕례 한 번 더 윤회한다.

세 번째 아나함. 불례. 다시는 오지 않는다.

네 번째 아라한. 모든 번뇌가 다했다.

 

그러니까 적어도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어디에 도달은 했다? 수다원과에는 이르렀습니다. 수다원과에 이르러서 견도를 증득하고부터 정진을 해서 수도를 거쳐서 무학도에 이른다. 아라한과를 증득해서 거기에 마지막 계에 이르는 거요. 그러니 이 수다원과 이상, 견도를 얻은 이후부터가 불법승할 때 승이 됩니다. 원칙은.

 

그것이 중생의 귀의처가 될 만하다. 이런 얘기요. 부처님의 법을 듣고 나도 깨달았다. 할 때 그 말이오. 아시겠어요? 나도 깨쳐야 바로 법에 가피를 입는 거 아니오. 내가 깨닫지 못한다면 그건 가피가 아니잖아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견도를 얻는 데는, 즉 수다원과에 이르는 것은 머리가 붙어있고 깎았고 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오. 다 이분들이 수다원과를 증득하고 거기서부터 수도를 닦아서 아라한도에 이르는 거요.

 

그러니까 선으로 말하면 언하에 깨치고이 말이 뭐요? ‘초견성을 하고그 다음에 보림을 하는 만행을 해서 오도에 이르는 거요. 그러니 법의 이치를 깨쳐야 돼. 꿈을 깨야 된다. “, 이게 꿈이구나.”하는 걸 알아야 돼. “일체가 다 마음이 짓는바구나.” 하는 이걸 확연히 여러분들이 알아야 또 그런 현상이 일어나더라도 금방 되돌아 올 수가 있다. 경계에 팔리지 않고.

 

그런데 우리는 이 법의 이치를 체험하지 못하니까 불법을 아무리 공부를 해도 어떤 경계에 부딪히면 마음이 밖으로 뺏겨서 남편이, 자식이, 너가, 이런 식으로 또 나가는 거요. 설령 그렇게 탁 가더라도 금방 안으로 돌이켜서 딱 돌아와야 된다. 이 말이오. 오뚜기가 일어나듯이.

 

깜박 졸더라도 금방 눈을 떠야 되는 거요. 그래서 수다원과를 증득했다. 이건 수행의 가장 기본입니다. 수다원과에 이르러야 다음부터 엄격한 의미에서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어. 견도를 얻어야 공부라고 말할 수 있지, 견도를 얻기 전에는 무지입니다. 헤매는 중이다. 이 말이오.

 

헤매는 것은 세월이 흘러도 발전이 없어. 눈이 열리고부터 그 다음부터 연습이 나아가는 거란 말이오. 왜냐하면 되고 안 되고가 검증이 되어야 공부가 진척이 있을 거 아니오. 견도가 열리지 않으면 공부가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도 자기가 모르잖아. 자기 공부가 자기가 점검 못하고 스님한테 와서 묻잖아.

스님 제가 공부 좀 됐습니까?”

안 됐다.” 이러지. ? 그것도 모르는 게 무슨 공부가 됐냐고.

이게 견도가 열리지 않아서 그렇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세속에 살면서 그러더라도

이 생에 목표를 최소 어디까지는 둬야 된다?

수다원과를 증득하는 데까지는 둬야 됩니다.

 

그래야 윤회고에서 벗어나는 방향이라도 틀어놓고 죽더라도 죽어야 돼.

안 그러면 그 자리에서 또 시작하니까.

 

그러니까 수행자는 아라한과를 증득하는 게 목표지마는

최소는 수다원과는 증득해야 한다.

 

안 넘어지면 좋지만

넘어지더라도 벌떡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수준까지는 내가 공부가 되어야 된다.

 

그렇게 공부를 하지 않고 불법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은 도무지 불법을 모르는 소리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처님 당시에 다 법의 이치를 깨쳤다 하는 것은 공부를 마쳤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바보 주리반특이 티끌을 털고 때를 닦으라는 그 말과 청소를 하면서 결합하면서 이치를 깨쳤다. 똥군 니다이가 옷에 묻은 똥물을 씻으면서 마음의 때를 씻으면 이와 같이 청정해 진다는 것을 깨쳤다. 이게 다 법의 이치를 깨친 거요. 복을 비는 거와는 성격이 틀립니다.

 

그러니까 모든 부처님의 교화사례에는

잠에서는 깨는 것 같은 그 깨침의 순간에 있는 거요.

알아차림의 순간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정진이 되는 거요. 그걸 쥐고 세속에 살면서 재가신자로 가는 길이 또 있고. 그래서 출가를 하는 거요. 부처님 당시에는 다 견도가 열리고 출가를 하는 거요. 이걸 너무 높이 산정하면 안 돼.

 

그러니까 몸이 세속에 있느냐, 출세간에 있느냐의 차이뿐이지, 우리가 공부하는 이 방향은 같습니다. 그런데서 기사고타미라고 하는 여인은 자식이 죽어서 슬퍼서 아우성을 쳤다. 자식 살려달라고 부처님한테 갔지, 깨치러 부처님한테 간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복 빌러 간 거요. 그러나 그에게 고통을 없애주는 것은 복을 달라니 복을 주는 게 아니다. 그는 어리석기 때문에 복을 달라했지만 부처님은 어리석음의 눈을 뜨게 해서 그의 번뇌를 없앤 거요. 이게 정법이라는 거요.

 

그러니까 중생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리석기 때문에 그렇게 밖에 접근이 될 수가 없다는 거요. 처음부터 올 때,

내가 누굽니까?” 이렇게 와야 어이고 저놈 구도자구나.”

하이고 부처님 남편이 죽어서 죽겠습니다.” 이렇게 찾아오면

아이고 저거는 세속적인 욕망이구나.” 이런 게 아니다 이 말이오.

 

괴로움은 똑같아. 괴로움에는 질이 높고 낮음이 없어. 그러나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정법은 무지를 깨치는 거고, 복이라고 하는 것은 그 무지에 기초해 있는 상태에서 일시적인 태학과 같은 거란 말이오.

 

이런데서 우리는 이 여인은 자식을 잃고 슬피 울고 괴로워 몸부림쳤지만 부처님은 그녀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러나 지혜의 눈을 뜨게 해서 다시는 괴로움이 없는 제행이 무상함을 깨치도록 해서 해탈케 했다. 그 길을 가도록 했다. 그래서 그녀는 출가를 해서 정진을 했고, 마침내 아라한과를 증득했다.

 

여기에 부처님께서 그녀에게 일러준 법문은 이렇습니다.

죽음을 초월하는 길을 모르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는

단 하루라도 죽음을 초월하는 진리의 길을 알고 사는 것이 훨씬 낫다.

 

우리 멍텅구리 노래도 그런 말이 있잖아요.

세상의 온갖 것 다 안다고 해도

자기가 자기를 모르누나. 이것은 멍텅구리다.

 

오늘 우리들은 하늘과 땅, 현재와 미래, 미세한 것과 무한한 것, 온갖 것을 다 알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 온갖 것을 구하면서도 진정한 자신의 행복, 진정한 자신의 자유를 구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을 잃고 산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잃어버린 보석이 중요하냐,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찾는 게 중요하냐라고 했을 때, 보석을 잃어버렸다고 찾아 헤매던 젊은이들이

부처님,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찾는 게 더 중요합니다.” 이렇게 동의하니까,

그렇다면 여기 앉아라.” 이렇게 해서 설법이 시작된 거 아니오.

 

오늘 우리들은 이 기사고타미처럼

온갖 것으로 괴로워하며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생겨난 것은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저 바다를 바라볼 때 수없이 파도가 생기고 사라지듯이

그러나 바다 전체를 보면 생기고 사라지는 것 같지마는

사실은 생김도 아니고 사라짐도 아니고 다만 물결이 출렁일 뿐입니다.

 

이 도리를 알 때 우리가 반야심경에서

그것은 생도 아니오 그것은 사도 아니다. 이 말이 뭐요?

불생불멸이다.

 

여기에 생도 없고 사도 없는 열반의 경지,

생겼다 해서 기뻐하지 않고 흩어졌다 해서 괴로워하지 않는

고락이 사라진 열반의 경지가 있다.

 

우리가 이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를 이런 길로 인도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