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20. 본래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아니다.

Buddhastudy 2018. 7. 18. 20:53


부처님께서 왕사성 밖 기사굴산에 계실 때였습니다. 그 산 뒤쪽에 한 70여 가구의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신분은 다 높아서 우리말로 하면 다 양반들이었나봐요. 바라문들이었요. 부처님께서

 

당신들은 뭘 하고 삽니까?”

, 저희들은 농사짓고 목축하고 삽니다.”

당신들은 어떻게 마음공부를 합니까?”

저희들은 해한테 제사지내고, 달한테 제사지내고, 불한테 제사를 지내고, 물한테 제사를 지내며 하늘에 태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일월화수에 제사를 지낸다는 거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 얘기를 들으시고 그 도는 해탈지도가 아닙니다. 설령 그렇게 해서 하늘나라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그 복이 다하면 또 삼악도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윤회의 돌고 도는 수레바퀴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그럼 어떤 도가 해탈지도입니까?

부처님께서 마음속에 탐진치 3독의 불을 꺼야 이 윤회고에서 벗어난다.

 

그러니까 당시의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게 목적인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하늘나라마저도 윤회의 수레바퀴의 한 부분이라는 거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감동을 해서 출가할 것을 발원했고, 부처님께서

오라 비구여하고 승낙을 했어요. 그래서 다 머리를 깎고 수염을 깎고 한꺼번에 70명이 비구가 됐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따라서 중림정사로 돌아가는 데 아까는 법문을 듣고 확 발심을 해서 깨쳤는데, 그래서 출가를 했는데, 시간이 조금조금 지나면서 마누라 생각도 나고, 자식 생각도 나고, 집안 생각도 나고, 이렇게 해서 후회를 하기 시작하는 거요.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 거요.

 

마침 그때, 비도 슬금슬금 오고 하니까 이 사람들이 더욱더 마음이 흔들린 거요. 그래서 비를 피한다고 어떤 빈집의 처마 밑에 쭉 서 있는데, 그 지붕이 낡아서 비가 샜나 봐요. 부처님님이 그걸 보시더니

 

이 지붕이 잘 엮어지면 비가 아무리 와도 새지 않듯이, 마음이 단도리가 잘 되면 어떤 경계에 부딪히더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지붕이 잘 엮어지지 않으면 비가 새듯이 이 마음이 잡도리가 잘 안 되면 결국은 음탕한 생각도 나고 갖가지 경계에 끄달리게 되느니라.” 하는 이러한 법문을 즉석에서 지붕에서 비가 새는 것을 보고 게송을 읊었더니 그걸 듣고 또 발심을 했어.

 

그래서 오다가 또 마음이 흔들리는 거요. 참 재미있죠. 늘 부처님 경전 보면 한번 탁 법문 듣고 깨쳐버리면 그거로 공부 잘해서 아라한과를 증득했다. 이러한 얘기만 나오잖아요. 그런데 이 경우는 그렇게 해놓고는 또 흔들리고, 또 흔들리고, 몇 번이잖아요.

 

마침 길을 가다가 종이가 하나 떨어져 있었는데, 부처님이 그 종이를 주워봐라. 그래서 종이를 주웠어.

그게 무슨 종이냐?” 냄새를 맡아 보더니

행을 쌌던 종이입니다.”

어떻게 네가 아느냐?”

이 종이에서 아직도 향내가 나는데요, 향 싼 종이가 맞습니다.”

 

조금 더 길을 가다보니 새끼줄이 하나 있어.

부처님이 주워봐라.

뭐하던 새끼줄이냐?” 냄새를 맡아 보더니

생선 엮었던 새끼줄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아직도 냄새가 나는데요.”

 

부처님이 그 비유를 가지고 그걸 소재로 해서,

그거 봐라. 이 종이나 새끼줄은 본래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란다. 그런데 향을 싸니 거기서 향내가 나고, 생선을 엮으니 비린내가 나는 거다.

 

그것처럼 사람이라는 것은

훌륭한 사람과 함께 가까이 있으면

, 계정혜 삼학을 닦는 수행자와 함께 있으면

마치 향을 싼 종이처럼 천천히 물들어서 고귀한 인격으로 가고,

 

이 악행을 행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탐진치 3독에 물든 사람과 함께 있으면

거기에 배어서, 마치 새끼줄에 비린내가 배듯이 나쁜 인격을 형성하게 되느니라.

 

그러니 비구들이여, 성현의 가르침을 따라서 계정혜 3학을 잘 닦아나간다면 누구나 다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 법문을 듣고서야 그때야 확연히 깨닫고 수다원과를 증득하고, 그때부터는 마음이 흔들림이 없이 부지런히 정진을 해서 마침내 아라한과를 증득했다.

 

부처님 당시에도 사람에 따라서는 한번 낸 초발심을 견제하지 못하고 이렇게 흔들렸던 사람들이 있었나봐요. 이렇게 해서 부처님의 몇 번의 가르침을 듣고 퇴굴심을 냈다가 또 발심을 했다가, 또 물러났다가 또 발심을 했다가, 이렇게 깨달은 사람들도 있다.

 

이와는 조금 다르지마는 이 물든다는 얘기가 나오니까, 이 세상에는 4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가 범부중생, 어리석은 중생이다.

두 번째가 현인, 아주 현명한 사람이다.

세 번째가 성인, 성스러운 사람이다.

네 번째가 부처, 깨달은 사람이다.

 

범부중생은 어떤 사람인가, 물드는 사람이오. 물드는 사람. 우리 대부분 물드는 사람이죠?

담배 피우는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따라 담배 피우고,

술 먹는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따라 술 먹고,

욕하는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따라 욕 배우고,

게으른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따라 게을러지고.

이게 물드는 사람이오.

 

맹모삼천 얘기도 있지 않습니까. 그죠? 따라 배우기 하는 거요. 좋게 말하면 따라 배우기지만 달리 말하면 물드는 사람이오.

 

물드는 사람 중에는

좋은데 물들기가 있고,

나쁜 데 물들기가 있죠.

 

그래서 우리가 나쁜데 물들지 않기 위해서는 그 나쁜데 가서 물드니까, 나쁜 데 가서 물들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된다? 나쁜 데를 안가야 돼. 이게 현명한 사람이오. 어리석은 사람은 나쁜데 가서 나쁜 물이 드는데, 현명한 사람은 그 물들지 않기 위해서는 안 가야 돼. 그게 뭐요?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이거야.

 

그러니까 나쁜데 가지 말고 좋은데 가라는 얘기요.

거기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돼.

 

그러니까 술 먹는 사람하고 안 어울리고,

담배피우는 사람하고 안 어울리고,

욕하는 사람하고 안 어울리고,

게으른 사람하고 안 어울리고,

 

오히려 부지런한 사람하고 어울리고,

청정한 사람하고 어울리고,

이렇게 해서 물들지 않는 사람이 되는 거요.

나쁜 것에 물들지 않는 사람.

 

나쁜 것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는

거기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돼.

이게 현명한 사람이오.

 

그럼 선인은 어떤 사람이냐?

나쁜 것들과 함께 있어도 물이 안 드는 사람이오.

 

담배 피우는 사람하고 있어도 따라 안 피우고,

게으른 사람하고 같이 있어도 자기는 부지런하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다 아침에 안 일어나도 자기는 일찍 일어나고,

예불 안 해도 자기는 예불하고,

다른 사람 다 놀더라도 자기는 일하고,

도무지 거기에 물들지 않는다. 이게 뭐요?

진흙탕 속에서 피는 한 송이 연꽃 같은 존재에요.

 

그러니까 세속을 떠나는 게 아니라,

세속 가운데 있어도 물이 안 드는 거요.

이걸 성인이라 그래. 이걸 보살이라 불러요.

그래서 보살을 상징하는 게 뭐요? 연꽃이잖아. 그죠?

 

 

그런데 4번째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 깨달은 이는 어떤 분인가?

이 부처님은 중생을 교화한다. 이러잖아요. 스스로 물드는 사람이오.

 

그게 무슨 소리냐?

게으른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게으름에 물들지 않는 게 아니고,

그 게으름을 빼내버리는 거요.

 

그래서 게으른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게으른 사람이 도로 부처님에게 물들어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거요.

걸레 같은 존재요.

상대의 때를 닦아내버려.

 

내가 물든다. 물들지 않기 위해서는 가까이 가지 않는다. 가까이 있어도 물 안 든다.” 이게 아니고, 상대를 물들여 버린다. 상대의 물어버린 것을 빼내버리는 존재요.

 

어리석은 자를 깨우쳐버리는 거요.

게으른 자를 부지런하게 만들어버려.

이게 중생을 갖가지로 교화한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생각했던 불교는 어떤 거예요? 두 번째 케이스 같은 거죠.

물들지 않으려고 멀리 떨어지는 거요.

그게 아니라 부처님은 중생의 더러운 때를 닦아내는 존재요.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존재라는 거요.

 

그러니 부처님이 중생 가운데 그 몸을 거하는데 무슨 두려움이 있겠냐. 중생을 교화하러 이 세상에 오시는데. 그러니 지장보살은 지옥에 스스로 들어가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옥에는 가기 싫은데, 하는 짓은 지옥에 갈 수 밖에는 짓을 한단 말이오.

가기 싫은데 가니까 얼마나 괴롭겠어.

 

현명한 사람은 지옥에 가기 싫으니까 지옥 갈 짓을 안 하는 거요.

보살은 지옥에 안가도 되는데 스스로 지옥에 가는 거요. ?

거기 있는 지옥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똑같이 지옥에 있어도

지옥에 가기 싫은데 지옥에 떨어진 사람은 업에 끌려온 존재고,

지옥에 안가도 되는데 지옥 중생을 구제하러 지옥에 떨어진 사람은

자기가 선택해서 온 존재요.

 

전자는 윤회고에 떨어진 사람이고,

후자는 원력으로 온 존재에요.

 

그러기 때문에 중생에게 있어서의 지옥은 지옥이지마는,

보살에게 있어서의 지옥은 뭐다? 정토요. ?

보살이 활동하는 국토이기 때문에.

 

, 우리 인도 수자타아케데미가 있는 둥게스리 천민마을에

그런 가난한 마을에 살고 싶지 않는데

거기 태어나서 할 수 없이 사는 사람은 그곳이 지옥이고,

그곳을 떠나 사는 사람은 좀 복 있는 사람이오.

 

그런데 이곳에 있는 사람이

그곳에 도리어 가서 그들과 같이 사는 우리 행자들은

봉사자들은 이게 보살이에요.

 

이 사람들은 거기에 살면서

그들과 똑같이 먹고 입고 자고 사는데도,

이들은 기쁨을 갖고 있는 거요.

이들은 보람을 갖고 있는 거요.

이들은 주체적인 존재에요.

 

그런데 거기를 떠나고 싶은데 못 떠나서 사는 존재는 어때요?

그곳은 지옥 같은 곳이란 말이오.

 

그러니 똑같은 곳이라도

보살은 정토가 되고

중생은 지옥이 되는 거요.

 

그래서 보살에게 있어서의 정토란

이미 완성되어있는 세계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서 보살이 활동하는 국토다.

 

그래서 보살심을 내면 정토 아닌 곳이 없는 거요.

보살심을 내면 하는 일마다 불사 아닌 것이 없는 거요.

 

우리가 이런데서 좀 더 적극적인 불교인이 되자. 부처님 같은 불교인, 부처님의 제자들 같은 불교인, 대승보살의 불교인이 되어야 돼. 그런데 우리는 때 묻을 까봐 도망가는, 세상과 격리하는, 그래서 자기 울타리를 쌓아놓고 거기서 만족하는 그런 소극적인 불교를 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나 여기서 세속에 거해서

세속에서 무슨 활동을 한다고

다 불교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요즘 사회사업을 굉장히 좋게 평가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고 이것저것 봉사활동을 벌여서 열심히 한다고 다 보살행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그걸 하면서 괴로워하면 그건 그냥 세속일입니다.

돈에 쪼들려서 괴로워하고, 애들 말 안 듣는다고 괴로워하고,

누가 안 알아준다고 괴로워하고, 운영하기 어렵다고 괴로워하고,

그거는 가게 내놓고 괴로워하는 거나 똑같아요.

 

포교를 하는데도 돈이 없어 법당 못 내서 괴로워하고,

절 짓는다고 돈이 떨어져 괴로워하고,

신도가 안 온다고 괴로워하고, 힘들어 하고,

이러면 이건 그냥 자기 집 짓다가 자금 떨어진 사람하고 똑같은 사람이오.

 

수행자는 이런 난관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수행 삼는다.

, 마음에 괴로움이 없어야 돼.

마음에 괴로움이 없기 때문에 좌절하거나 절망하는 게 없다는 거요.

안되면 되도록 하는 거요.

한번 해보고 안 되면 두 번하고,

열 번해서 안 되면 열한 번 하고,

백 번해서 안 되면 백한 번 하고, 이게 원력이오.

 

원력과 욕심의 차이는 어디 있냐?

욕심은 안 되면 괴로운 거고

원력은 안 되면 더 커지는 거요. 괴롭지가 않아.

 

그런데서 우리가 대승보살의 원력의 불교,

부처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불교,

이런 불교를 우리가 해나가야 된다.

 

여기서 물론 부처님께서 향 종이를 갖고 설명하는 것은 초심자가 이 경계에 더러운 경계에 자꾸 물드니까, 좋은 경계에서 물들어라. 지금 이런 교훈을 주는 거고, 요거는 요 수준의 사람들에게 즉, 계속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경계에 물드니까, 이런 비유로서 설명한 거고, 이거 갖고는 깨달음에 이르는 거는 아니죠.

 

우리가 깨달음에 이르게 되면

바로 경계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 되는 거요.

 

이제 오늘 우리 불교는 500년 동안 탄압을 받으면서 생존하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유지되었던 그런 소극성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정법으로, 바른 법으로 본래 모습으로 담마에 의지하는 그런 불교로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된다.

 

이게 이루어지게 되면 우리 사회에도 불교가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희소식으로 다가오기 시작할 거다. 그래서 괴로운 사람들은 마치 나방이 불빛을 쫓아 모여들듯이, 번뇌와 괴로움에 지친사람들이 이 법으로 모여들어서 이 법을 듣고 이해하고 깨쳐서 경험을 해서 기쁨을 얻는 그런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불교에 대해서 너무 실망하지 마시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 보여지는 여러 불교의 모습, 이런 걸 보고 실망하지 마시고, 그것은 이 변환기에 나타나는 하나의 작은 현상이다. 이렇게 보시고,

 

어떤 경우에도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고,

그렇게 정진을 해나가야 스스로에게 희망이 있고,

또 세상에게 희망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좋은 불자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