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36. 사람이 자기밖에 생각할 줄 모르게 되면

Buddhastudy 2018. 11. 8. 20:59


안녕하세요.

오늘은 자신만 알고 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교화한 얘기를 해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왕사성 중림정사에 계실 때였습니다.

이 왕사성에 하리테라고 불리는 마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마녀는 시집을 가서 많은 아이들을 낳고 살았지마는, 아마 본래 성격이 포악해서 그런지, 남의 집 아이들을 특히 천한 집 아이들을 몰래 잡아다 먹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이들이 길거리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아이들이 보이지 않으면 늘 놀라고 그렇게 했답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이러한 원성이 자자했기 때문에 빈비사라왕은 많은 군대를 풀어서 아이를 잡아가는 사람을 잡으려고 했지만 찾아내지를 못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 여인은 신분이 높은 집 사람이라서 천한 집 아이들을 훔쳐가고 죽이고 해도 아마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은 항의를 못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볼 수 있죠. 왜냐하면 당시 사회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천한 집 아이들을 마치 길거리에 다니는 개나 동물들을 잡아가듯이 몰래 잡아가서 노예로 부리고 이랬기 때문에 인도에서는 지금도 천한 사람들은 아이들의 결혼을 매우 빨리 시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이미 다 결혼을 시키거든요.

 

그 이유는 아마 예부터 혼자 있는 아이들을 자꾸 잡아가기 때문에 일단을 결혼을 하게 되면 부인이라고 손을 대지 않는 이런 데서 조혼 풍속이 생겨나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중생들의 민중들의 고통을 아셨습니다. 사람들은 참다못해서 결국은 부처님께 찾아가서 자신들의 고통을 하소연을 했죠. 부처님께서 가만히 들어보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거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하루는 제자들을 데리고 조용히 집을 방문을 했습니다.

 

이분은 귀자모라고 부르죠. 사람들을 많이 해쳤기 때문에 마녀다. 귀신이다. 이래서 귀자모라고 불렸는데, 마침 부처님께서 이 집을 방문해서 보니까 외출을 했는지, 그 여인은 집에 없고 그 집 여러 명의 아이들 가운데 막내 아이만 혼자 집에서 놀고 있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 아이를 정사로 데려와서 숨겼다. 이렇게 하면 좀 이상하죠. 어린 아이를 납치한 것처럼 되니까, 좀 신비하게 기록된 것은 부처님께서 바루로 그 아이를 덮어서 그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그 아이를 숨겼다는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아요.

 

외출하고 돌아온 이 귀자모는 막내아들이 없는 것을 알고 아들을 찾아 아무리 헤맸지마는 아들을 찾을 수 없자, 매우 슬퍼하고 괴로워하면서 결국은 부처님께 찾아와서 우리 아들을 잃어버렸다고 아들을 혹시 못 봤냐고. 이렇게 자기 괴로움을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때 부처님이 그 여인에게

당신에게는 아이들이 몇이나 있소?” 하니까

아이들이 많습니다.”

많다는 게 몇 명 정도 될까요?

여러분들은 많다니까 5명이나 될까? 이렇게 생각하는데, 인도에서는 많다 그러면 15명에서 20명 정도 되어야 많다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7~10명은 보통 그런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러면 당신은 그 많은 아이들 가운데 한 아이를 잃었는데도 그렇게 슬프고 괴로운데, 하물며 한 명이나 두 명밖에 없는 부모는 그 아이를 잃으면 얼마나 슬프겠소.”

그렇게 자기 스스로 생각해 보니까, 나는 이렇게 많은 아이들 가운데 한 명이 없어도 이렇게 가슴이 에이고 괴로운데, 정말 한 명이나 두 명 밖에 없는 그런 집 아이가 없어진다면 그 부모가 얼마나 가슴 아프겠느냐. 그런 생각을 하니까, 뉘우쳐지는 거요.

 

자기는 지금까지 남의 집 아이들을 훔쳐서 죽이고 했지만, 그 부모의 아픈 심정은 한 번도 생각 안 해 본거요. 자기 생각만 했지. 그런데 자기가 이 경우를 당해보니까, 정말 그 부모가 마음이 아프겠다. 이렇게 해서 자기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법에 귀의해서 아주 진실한 불자가 되었다.

 

우리 부처님의 교화 사례에서 보면 사람을 99, 또는 999명이나 죽인 앙굴리 말라 같은 그런 살인자도 부처님을 만나 교화가 되어서 훌륭한 수행자가 된 얘기도 나오죠. 마찬가지로 이 여인도 한마디로 말하면 살인자 아닙니까. 그죠?

그런데도 부처님을 만나서 법을 듣고 크게 뉘우치고 해서 훌륭한 재가 신자가 된 경우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1. 사람들은 대다수 자기 밖에 모른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옛날부터 어떤 얘기가 있어요?

과부 심정은 과부만이 알고, 홀아비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

남을 이해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거요.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둘이 서로 사랑해서 부부가 되어서 한 이불 밑에서 잠을 자면서도 아내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에 빠지고, 남편도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에만 빠지기 때문에, 부부간에 갈등이 생기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나아가서는 원수가 되고, 못살겠다고 헤어지게 되고.

둘만 헤어지는 게 아니라 부모를 가슴 아프게 하고, 그 둘 사이에 낳은 자식들이 평생을 가슴앓이 하게 하는 이런 일도 비일비재하지 않습니까?

 

이런 걸 볼 때 사람은 자기밖에 생각할 줄 모른다. 자기 밖에 생각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갈등이 생깁니다. 이렇게 사람이 자기밖에 생각할 줄 모르게 되면 사랑하는 부부도 서로를 미워해야 되고, 천생 연분이라고 만난 부부가 결국은 철천지원수가 된다.

또 자기밖에 모르게 되면 자기를 낳아서 키워준 부모를 원망하게 되고, 또 자기가 낳아서 키운 자식을 또 원망하게 되지 않습니까?

 

또 우리는 서로 의가 맞아서 의기투합했던 친구지간에 원수지간이 되기도 하고, 또 뜻이 맞아서 함께 사업을 했던 동업자간에 원수가 되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하고도 이렇게

 

철천지원수가 되는 것은

전생에 지은 죄 때문도 아니고,

어떤 신의 그런 벌 때문도 아니고,

이것은 오직 자기가 자기 밖에 모르는

이러한 아집, 아상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 이거보다 더 한 불행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가 너무너무 좋아했던

그래서 함께 살기를 언약했던 남편이나 아내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원수같이 여긴다면

이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한 불행이 어디 있느냐. 이거야.

 

자기가 낳아 키운 자기 자식보고

내가 전생에 얼마나 못된 짓을 했으면

, 저 자식과 원수 간이었느냐.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자기 자식을 미워하면

자기를 낳아서 키워준 부모를 원망하고 미워한다면 이 세상에 이보다 더한 불행은 없습니다.

 

아무리 지옥이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어쩌면 지옥의 고통이 낫지, 이보다 더하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는 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서 살면서 좋은 차를 타고 다닐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이것이 다 자기밖에 모르는 그런데서 빚어진 거다.

마치 귀자모가 자기 자식만 귀한 줄 알고 남의 자식 귀한 줄 모르기 때문에, 남의 부모 가슴에 비수를 꽂고 그러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죠.

 

그것처럼 우리는 아내가 한두 마디 한 것이 남편에게 큰 아픔이 되고, 남편이 한두 마디 하거나 이런 저런 행동을 한 것이 아내에게 큰 아픔이 되고, 자식이 자기 나름대로 행동한 것이 부모에게 큰 근심거리가 되고, 부모기 자식을 위해서 한두 마디 타이른 것이 자식에게는 오히려 큰 고통이 되는 이런 경우가 많아요.

 

그러니까 이런 부처님 당시에 귀자모만이 아니고, 현대에도 이런 귀자모와 같은 상황에 놓인 이런 사람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이런데서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는 것, 내 자식이 없었을 때 내가 얼마나 가슴 아픈가를 견주어서

내가 다른 자식을 헤쳤을 때 그 부모가 얼마나 가슴 아플까?’

이게 바로 타인의 심정을 이해하는 거죠.

 

그래서 아내는 남편의 입장이 되고 남편의 마음이 되어서

그가 원하는 것, 그가 바라는 것, 그의 고뇌가 무엇일까, 이것을 헤아려 보고,

남편 또한 아내 입장이 되어서

그의 외로움, 이런 것들을 우리가 헤아릴 수 있다면,

사회적으로 말하면 여당은 야당의 입장을,

야당은 여당의 입장을,

사용자는 노동자의 입장을, 노동자는 사용자의 입장을,

호남 사람들은 경상도 사람의 입장을, 영남 사람들은 전라도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

 

그의 입장에 서서 살펴본다면

그 귀자모가 깊이 뉘우치고 좋은 불자가 되는 것처럼

부부지간에 원수라기보다는 천생연분의 그런 아름다운 관계를 맺을 것이고,

부모자식 간에도 그렇고, 친구지간에도 그렇고,

전생에 내가 무슨 복을 지어서 이런 남편을, 이런 아내를, 이런 자식을, 이런 부모를 이런 친구를 만났나. 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인간관을 형성할 수가 있다.

 

사람이 본래부터 나쁜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어리석으면 나쁜 인간이 됩니다.

 

사람이 본래부터 착한 것이 아닙니다.

잘못을 뉘우치게 되면 바로 선한 사람, 착한 사람이 된다.

 

인간의 귀천이 본래 정해져 있는 게 아니고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서

귀한 사람이 되고 천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우리 부처님께서 항상 하신 말씀 아닙니까?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

여기에 우리 인생의 미래가 열리게 된다.

 

마치 무거운 동리 물밑으로 가라앉고,

가벼운 돌이, 가벼운 기름이 물위로 뜨듯이

이렇게 우리들이 어떻게 마음을 쓰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지옥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천상으로 오르기도 한다.

 

* 두 번째는 오늘 우리들은 북한 사람들의 마음을 북한 관리들, 그 사람들의 심정이 좀 되어 보는 게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내는 남편을 보면 답답하고 남편은 아내를 보면 답답하고, 자식은 부모를 보면 왜 저러실까?” 답답하고, 부모는 자식을 보면 왜 저렇게 공부를 안하 애를 먹일까답답하지 않습니까?

 

백성은 정치인들을 보면 답답하잖아요?

우리는 이런 식으로 자기 입장에 서서 다른 사람을 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행동을, 말을 보면 너무 마음이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그처럼 남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북한 사람들을 보면 신문지상에 나오는 글들을 보면 얼마나 답답합니까? “왜 저렇게 밖에 못할까? 꼭 저래야 되나?” 그래서 때로는 분노하고, 욕하고, 그래서 막말까지 하죠. 나쁜 말까지, 악담까지 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의 입장이 한번 되어 봅시다. 민중들의 입장이 되어 본다 그러면, 요즘 같은 이런 소위 보릿고개죠. 식량이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식량을 구하러 헤매고 다니고, 농민이 농사를 지어야 되는데, 비료가 없어서 온갖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똥이 거름이 되니까, 도시 사람들도 다 똥을 모아 농촌에 보내기 운동을 하고, 거기 할당량까지 주어지고, 그러다보니까 똥을 훔치는 웃지 못 할 일까지 벌어지는.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친다.

 

자동차가 없기 때문에 100리길을 걸어서 다녀야 하고, 설령 타를 탔다 하더라도 너무나 비좁아서 고통스럽고. 우리도 20~30년전에 다 겪었던 일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옛날 20~30년 전에 우리가 겪었던 그때의 심정에 돌아가 본다면, 그들이 겪는 고통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조금만 노력한다면 우리가 버린 음식을 아껴먹고 버린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낭비하는 것들을 조금만 절략한다면 비료가 간다면 농민들에게 기쁨이 되고, 농기가구 간다면 그들의 노고를 덜어줄 수 있게 되고, 식량이 되어 간다면 그들의 배고픔을 달래줄 수 있고, 약이 되어 간다면 그들의 아픈 몸을 치료할 수 있게 되고, 학용품이 간다면 아이들에게 큰 기쁨이 된다.

 

저도 어릴 때 도시 사람들이 와서 요즘 생각해보면 휴지죠. 이 휴지를 쓰다가 남긴 걸 주어가면 그게 너무너무 아까워서 그걸 늘 글씨 쓰는데 썼습니다. 구멍이 뚫리고 찢어지기는 하더라도, 그걸 한번 쓰고 버리는 게 너무너무 아까워요. 똥 묻어서 그것을 못 주워 쓰지, 코만 풀어서 버렸다하더라도 말려서 쓰고 싶을 만큼, 실지로 북한에 종이가 이렇게 귀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 관리들을 만나보면 그들은 지금 우리가 볼 때는 핵문제로 답답한 사람들이지마는, 그들 얘기를 들어보면 58년도 이후로 미국은 핵을 한반도에 가져와서 배치를 했고, 그래서 늘 핵위협에 공포를 느꼈고, 또 미국과 한국의 막강한 이런 군사력 앞에서 그들은 늘 두려움을 느꼈고,

지금도 마찬가지요. 그래서 늘 준전시 상태다.

 

그런데서 우리가 생각할 때는

, 미국 사람이 뭣 때문에 너희를 침공하겠느냐?”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오늘이나 내일이나 불시에 쳐들어올 것 같은 그런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다는 거요.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제가 얘기하는 게 나에요. 그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거요. 그런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다 땅굴을 파고, 터널을 뚫고 모든 사람들이 그 속으로 숨을 수 있는 이런 일들을 매일 하고 있으니까, 소위 경제가 궁핍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너희들이 평화적으로 나오면, 국제적으로 원조를 받아서 잘 살 수 있는데, 왜 그러냐?”

이렇게 얘기하면, 그들은 나 같은 사람이 자기들 속을 모른다는 거요.

 

우리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자주권을 갖기 위해서 지난 50년 동안 온갖 고통을 겪고 굶주림을 겪으면서도 지켜왔는데, 지금 돈 좀 준다고, 굴복을 해서 그렇게 한다면, 지난 50년 동안 왜 이렇게 했겠냐, 당신들이 생각할 때는 돈 좀 더 울거내려고 이렇게 하지 않냐, 이렇게 하는데, 그런 얘기 들으면 우린 속 탄다는 거요.

 

그러니까 우리 입장에서 보면 참 어리석지마는,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저는 그들이 옳다든지, 그르다든지, 이런 얘기가 아니에요. 그러니 우리가 그들의 아픈 심정을 그들의 초조와 불안을 이해하는 관점에 서서 대화를 한다면, 어떤 관계를 풀어나간다면, 훨씬 더 좋은 관계로 풀어나가지 않겠느냐.

 

또 조금 더 시야를 넓힌다면, 지금 제3세계라고 불리는 가난한 나라들에는 식량이 없어 사람이 제대로 먹지를 못하고, 약이 없어서 치료받지를 못하고, 수많은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어느 부모치고 자기 자식이 굶주리고, 자기 자식이 병났는데도 치료하지 못하고, 자기자식이 학교 못가는 걸 보고 가슴 안 아픈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자기 자식도 학교에 보내지 못한 그 부모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자식을 낳아 학교도 못 보내느냐?’ 이렇게 남 속 모르는 소리 하지 말고, 비록 내 자식이 아니라 하더라도, 내 자식 같은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들이 병이 났을 때 치료하고, 그들이 굶주릴 때 밥을 주고, 아이들이 학교 다니지 못하면 최소한으로도 배울 수 있도록 기회를 베풀어 내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해야 할 일이다.

 

그들의 마음,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자.

이것이 우리가 가족 간에 화목해지는 길이고,

이것이 남북 간의 협력 통일로 나가는 길이고,

이것이 인류평화의 길로 나가는 길이다.

 

비록 우리가 지금까지는 내 생각만 하고 살아서

내 가슴 답답하게 하며, 세상을 원망하고 살았지마는,

이제 우리가 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된다면,

우리도 부처님 같은 보디사트바가 될 수가 있다.

 

배고픈 사람은 배부른 사람이 돌봐야 하고,

병든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 돌봐야 하고,

늙은이는 젊은이가 돌봐야 하고,

어린아이는 어른이 돌봐야 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은 배운 이가 가르쳐야 하고,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도와줘야 합니다.

장애인은 육신이 건강한 사람이 보살펴야 하는 거요.

 

그럴 때 우리 인류는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삶,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그런 사회가 정토사회가 아니겠나,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