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41. 잘못을 했을 때

Buddhastudy 2018. 12. 13. 20:18

 

안녕하세요.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원정사에 계실 때 일입니다.

여기에 살던 대중스님들 가운데에서 두 분 사이에 다툼이 생겼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사는 데는 비록 스님들이라 할지라도 티격태격 싸우나 봐요.

부처님 계시는 당시에도 이렇게 싸웠다니까.

 

사연은 이렇다고 그래요.

한 비구가 뭔가 잘못을 저질렀다. 실수를 했다. 그런데 그걸 보고 다른 비구가 그 잘못을 지적하고 비난을 했어요.

그러니까 이 비구가 그것을 받아들여서 자신이 잘못했다고 사과를 했어요.

사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비구가 계속 그 문제를 지적 했어요. 즉 사과를 안 받아줬다는 거요.

 

이렇게 그 사람의 허물을 계속 말하고 다니니까, 전체 대중의 분위기가 어떻게 됐냐?

잘못한 사람보다 잘못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더 문제가 된 거에요.

그래서 오히려 잘못한 사람은 동정을 받고, 잘못했다고 지적한 사람이 더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된 거에요. 이런 경우 가끔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이렇게 해서 대중들 사이에 약간의 분란이 생겼나 봐요.

그래서 한 비구가 부처님께 이 사실을 알리게 되고, 그래서 부처님께서 대중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비구들이여, 죄를 범하고도 죄라고 인정하지 않는 자는 잘못이다.

또한 용서를 비는데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도 잘못이다.

이 두 사람은 함께 어리석은 자가 된다.

 

비구들이여, 그에 반해 죄를 범했으면 죄를 죄라고 인정하는 것이 옳다.

또 용서를 빌면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

이 두 사람은 함께 현명한 사람이라고 불리워진다.

 

노여움에 사로잡히지 말라!

헐뜯지 않을 것을 헐뜯지 말라!

불화의 말을 입에 올리지 말라!

 

산이 사람을 압도하는 것처럼

노여움은 어리석은 자를 압도해 버린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 누구나 다 잘못을 할 수가 있죠.

그럴 때, 잘못을 해놓고도 대부분은 잘못 안했다고 빡빡 우길 때가 많아요.

그러면 잘못한 것까지는 봐주겠는데, 그걸 인정 안하고 우기면, 정말 봐주기 어렵잖아요.

그리되면 사람 마음이 어떻게 됩니까? 갉게 되요.

저거 그냥 도저히 놔둬서는 안 된다.’ 이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 내가 잘못했구나.’ 이렇게 뉘우쳐야 한다.

잘못을 잘못인 줄 알아야 한다.

잘못을 잘못인 줄 아는 게 바른 견해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거란 말이오.

 

잘못했을 때는 잘못한 줄을 즉시 알아차려야 되는 거요.

이게 깨어있음이란 말이오.

이렇게 인정을 하는 것이 옳다, 수행자는.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상대가 잘못했다고 알아차리면 그것으로 끝나야 되요. 뉘우치면 죄가 없어지는 거요. 그러기 때문에 보는 사람도

어 저 사람이 그것을 알아차렸구나.’하고 탁 놔야 되는데, 그것이 늘 기억에 남아서 그것을 놓지 못한다.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것을 놓지 못한다는 거요.

 

그 사람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놓아버렸지만 다시 또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죠. 그럴 때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또 놓으면 되요.

그런데 이때 그것을 보는 사람도 , 저 사람이 알아차렸구나.’ 이렇게 또 놓으면 돼.

 

그런데 이런 경우에 보는 사람이 더 문제가 될 때가 있죠.

, 저것 봐라, 참회 해놓고 또 한다. 저게 바로 몇 번째야.’ 이렇게 해서 보는 사람이 못 놓는 경우가 가끔 있어요.

이래서 시비가 일어나는데, 이런 시비가 일어날 때는 이 시비를 일으킨 사람은 자기 잘못을 모릅니다.

 

내가 시비를 일으키고 싶어서 일으킨 게 아니고, 저 사람이 잘못했기 때문에 내가 지적했을 뿐이다. 왜 내가 문제냐.’

이렇게 자기 잘못을 모르기 때문에 이 경우처럼 해결이 잘 안 되는 거요.

 

 

승가에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두 수행자가 길을 가다가 마침 홍수가 나서 물이 불은 강을 만났어. 옷을 걷고 강을 건너려는데, 한 여인이 물이 깊어서 강을 못 건너고 강 주변을 오르락내리락 하니까, 한 스님이

제가 건너드리겠습니다.”하고 한 여인을 기꺼이 업어서 강을 건너 줬단 말이오.

그러고는 길을 걸어서 절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일주문에 들어가기 전에 그 도반 스님이 하는 말이

 

자네는 수행자면서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

?”

어떻게 수행자가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 되는데, 그것도 여인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널 수가 있는가?”

아니 자네는 여인을 여기까지 업고 왔는가? 나는 이미 내려놓은 지 오래됐어.”

 

 

이거 다 아는 얘기죠?

그러니 형식적으로 말하면 여인을 업은 사람이 계율을 파한 사람이 되겠죠.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그걸 보고 시비심을 일으켜서 아직도 놓지 못하고 그걸 붙들고 있는 이 사람이 사실은 계율을 어긴 사람이 된다. 이런 얘기에요.

 

그래서 여기서도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이미 뉘우쳐 사과를 했는데,

그것을 본 사람이 그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붙들고 문제를 삼는다는 것은 그 사건에 집착되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람이 사실은 더 문제가 되는 거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소란이 일어난 게 아니고,

이 사람이 그것을 놓지 못하기 때문에 소란이 일어난 거란 말이오.

 

 

가정 사에서도 이런 경우가 있지 않겠나 싶은데요?

만약에 남편이 어떤 여인과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는 것을 봤다.

그래서 아내가 화가 나서 문제 제기를 했더니, 남편이 사정을 얘기하고 또는

당신에게 아픔이 있었다면 사과하겠소.” 했는데도 아내가 계속 그것을 놓지 못하고

어떻게 당신이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렇게 해서 사느니, 못사느니,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이렇게 가게 되면.

 

이때 아내는 이 불화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생각을 안 하죠.

이 불화의 원인은 누가 제공했다? 당신이 제공했다. 당신이 약속을 깼다.

우리는 서로 둘만을 서로 사랑하기로 했는데, 당신이 한눈팔았다. 약속을 깼다.

 

이럴 때 자기가 옳다는 생각이 너무너무 강하기 때문에 지금 자기가 어떤 일에 집착되어 있다는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 가정의 분란은 아내 때문에 생기는 일인데, 아내는 이 분란이 남편 때문에 생긴다고 이렇게 착각할 경우가 있어요.

 

만약에 이런 분이 있어서 지금 이 법문을 듣는다면 저 스님이 남자라고 남자 편을 들구나.’ 이렇게 또 오해할 수도 있어요.

 

집착이라고 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다 집착이에요.

좋은 일도 붙들고 있으면 집착이 된다.

가난한 사람을 보고 도와주겠다고 마음을 내는 것은 연민이면 자비심입니다.

그런 사람이 여러 명이 있는 것을 보고, 자기 힘으로 도울 수 없기 때문에 자기를 한탄하고, 그런 일을 하는 자기를 안 도와주는 세상 사람을 원망하고, 세상사람 나쁘다고 얘기한다면, 이 사람은 도와줘야 된다는 사실에 집착된 사람이오.

그래서 자기를 괴롭히고 세상을 원망하는 거요.

 

수행자는 연민(자비심)을 일으키고

자기가 할 수 있는데 까지 하는 거요.

 

능력이 부족하면

원을 세우고 다만 할 뿐이다.

 

원망하고 미워하는 시간에

한 명이라도 더 도울 수 있는 길을 찾는 거요.

 

이 세상에 보면 좋은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죠.

때로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가끔 있는데, 그 좋은 일을 하는 사람 중에

내가 좋은 일을 하니 당신 나 도우시오.” 안 도우면

내가 좋은 일을 하는데 당신은 왜 안 돕느냐? 당신은 이기주의자야.” 이러면서 세상을 원망하고 시비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어요.

 

세상에서는 이 사람을 훌륭하다고 할지 몰라도,

이것은 수행적 관점에서 보면 상에 집착된 사람이오.

이 사람은 경계에 끄달려서 자기를 괴롭히고 남을 괴롭히는 사람에 불과하다. 이런 얘기에요.

그래서 이 부처님의 말씀은 매우 중요한 겁니다.

 

틀렸을 때 틀린 줄을 알아차리고,

모르면 모르는 줄 알아차리고,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잘못한 줄을 알아차린다.

이게 현재에 깨어있는 거요.

 

알아차리면 어떻게 해야 될까?

틀리면 고치면 되요.

그게 무슨 큰 흠이 아니에요.

 

모르면 물어서 알면 되는 거요.

잘못했으면 뉘우쳐서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쪽으로 가면 되는 거요.

 

또 물으면 어떻게 하느냐? 또 물으면 돼.

또 틀리면 어떻게 하느냐? 또 고치면 돼.

또 잘못을 저지르면 어떻게 하느냐? 다시 뉘우치면 되요.

이렇게 다만 할 뿐이어야 되요.

그럴 때 천하에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모르는 것이 두려움이 아니에요.

모르는 것은 죄도 아니에요.

모르는 주제에 아는 척 하는 이게 죄에요.

이게 허물이에요.

 

틀렸을 때 틀린 줄을 모르고

맞다고 우길 때, 이게 문제에요.

잘못해 놓고 잘못한 줄을 모르고

잘했다고 우길 때, 이게 문제에요.

 

이 세상 사람은 누구나 다 틀릴 수가 있고, 모를 수가 있고, 잘못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고,

잘하기 보다는 잘못하기가 쉽고,

맞게 하기보다는 틀리게 하기가 더 쉽습니다.

횟수가 어쩌면 많다고 할 수 있죠.

 

그럴 때 모르는 것을 물어가는 것이 배움이고,

틀린 것을 고쳐가는 것이 이게 발전이에요.

 

그래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잘못을 저지르고 뉘우쳐서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또 저지르고 알아차리고, 또 뉘우치고.

이렇게 해 가는 게 수행이에요.

그래서 이 잘못을 알아차리고 뉘우치는 데는 수행자 집단에서는 3가지 방법이 있다.

 

1. 스스로 뉘우치고, 알아차리고

이렇게 나아가는 것, 이것을 참회라고 그래요.

 

그래서 매일 아침에, 사실은 순간순간 참회를 해야 됩니다.

순간순간 놓치게 되더라도 하루를 넘기지 말고 알아차리고 참회를 해야 되요.

 

순간에 알아차리고 놓아버리면 마치 허공에 금을 그은 것과 같다.

금을 그었지만 흔적이 없습니다.

 

잘못을 저지르고 금방, 그 즉시는 아니지마는 조금 후에 알아차렸다.

그것은 물에 선을 그은 것과 같다.

선이 그어졌지마는 금방 허물어져버립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잘못인 줄 모르고, 그러나 그날 저녁이나 이튿날 아침에 하루 안에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모래에 금을 그은 것과 같다. 지우려면 금방 지워진다.

그래서 수행자는 하루를 넘기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이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어갔다.

그러면 그것은 바위에 금을 새겨놓은 것과 같다.

 

세월이 흘러서 잊어버렸어.

아이, 나는 아무것도 맺힌 게 없어.”

이래도 바위에 생긴 금은 먼지가 앉아서 금이 없는 것 같지만

빗자루로 쓸면 금이 그대로 남듯이

마음속에 맺힌 상처가 톡톡톡톡 건드리면 다 튀어나와요.

30년 전 꺼, 20년 전 꺼 건드리면 눈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다시 한이 나온단 말이오.

이거는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미 과거에 맺혔던 것은 어떻게 한다? 다 지워버리고,

앞으로 다시는 이런 바위에 세긴 금은 안 만들어야 되기 때문에

매일매일 정진해야 된다는 거요.

그래서 하루 1시간은 눈뜨자마자 정진할 것.

 

2. 그런데 이렇게 스스로 돌이켜 참회하는 법이 있고, 대중과 같이 살 때는 나는 돌이켜 참회를 했는데, 내가 그런 실수, 잘못을 반복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그 영상이 맺혀 있어요.

 

나는 잘못을 뉘우치고 알아차렸어.

그런데 또 잘못을 저질러서 또 알아차리고 놨어.

그래서 내 마음 속에는 이 상처가 없어.

그런데 그것을 본 다른 사람에게는 선입관이 박혀 있어.

 

대중이 같이 살 때는

대중 앞에서 참회를 합니다.

 

스스로만 참회하는 게 아니고, 상대에게 말로 행동으로 구체적으로 참회하는 거요.

그렇게 함으로 해서 내 속에 있는 상처만이 치유하는 게 아니고

상대에 마음속에 맺혀있는 것 까지도 지워버리는 거요.

이런 걸 뭐라고 한다? ‘포살이다. 이렇게 말해요.

 

참회는 매일매일 해야 되고,

포살은 대중이 같이 살면서 보름마다 합니다.

 

그러니까 같이 안 사는 사람은 포살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공동체, 같이 사는 사람사이에 하는 거요. 보름마다 한다.

 

지름 우리 정토회에서는 한 달마다 한 번씩 하죠. 대중포살을 한다. 계본에 따라 스스로 뉘우치고 대중 앞에 고백하고. 그래서 내가 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것을 더 견고히 하고. 대중의 마음속에 있는 그 흔적을 지워버리는 거요.

그래서 수행자 그룹은 포살을 해야 됩니다.

 

3.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 포살을 할 때는 내가 내 잘못을 스스로 알아차려야 포살이 되죠.

내가 내 잘못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경우에는 포살할 때, 스스로 뉘우치지를 못하는 거요.

 

그러면 도반이 볼 때,

쟤가 계율을 어겼는데, , 쟤 봐라. 참회도 안 한다. 참회하려면 봐주려고 그랬는데, 저것 봐라. 참회도 안 해.”

그런데 이 사람이 스스로 숨긴 게 아니고, 본인이 몰라. 이런 경우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그래서 내 스스로 알아차림이 부족하기 때문에 도반들에게 요청을 하는 거요.

도반들이여, 저를 위해서 계율을 어긴 것이 있으면, 잘못을 듣고 본 것이 있으면, 지적 좀 해주십시오.” 이렇게 청을 해서 그 지적을 받아서 뉘우치는 것.

이것을 자자라고 한다.

 

부처님 당시에는 안거, 3개월간에 안거가 끝나는 마지막 날에 했습니다. 우기가 끝나는 마지막 날. 우안거가 끝나는 마지막 날에 했다 이 말이오. 3개월 만에 했다고도 말 할 수 있지마는, 안거를 1년에 한 번 했으니 1년에 한 번 한 거요.

그래서 우리 수행자들은 최소 1년에 한번, 아니면 우리는 동안거 하안거가 있으니까, 1년에 2, 자자를 행해야 한다.

 

그런데 자자를 하려면 쉬운 일은 아니에요. 자기가 알아서 고백하는 것 까지는 되는데, 혼자서 뉘우치는 것은 그래도 되는데, 남한테 말하기는 어렵죠. 고백하기가.

 

남한테 자기가 알아서 고백하는 것까지는 되는데

상대로부터 지적받으면 기분이 나빠지는 거요.

그래서 이것은 어느 정도 공부수준이 된 사람끼리 해야 됩니다.

 

안 그러면 자기가 정해놓고도 속으로는 아무 지적이 없었으면이런 바람이 있단 말이오.

자기가 청을 해놓고도 하면 기분이 나쁜 거요.

그래서 다음에 보자, 니 차례가 되면 보자.’ 이렇게 악심을 품게 됩니다.

 

다음에 시작할 때 정말 그를 위해서 지적 안하고 악심으로 지적하니까 그 사람도 또 기분이 나빠지는 거요. 그래서 시비로 흐르기 쉽다. 이렇게 되면 이 수행자 사이에 불화가 생기죠.

 

그래서 자자는 정~~~말 진솔하게 청해야 되고 받아들여야 되고, 오해가 되면 해명해야 되고, 또 상대에게 지적을 할 때도 정말 그를 위해서 지적해야 된다.

내 분별심 때문에가 아니고, 정말 그를 위해서 지적해 주는, 이런 도반의 관계가 되어야 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좋은 도반은 수행의 전부다.

이렇게까지 말씀을 하셨지 않습니까? 이것이 자자입니다.

 

 

여러분들은 매일 참회하고

앞으로 여러분들 각각 단체에서 포살로 나아가고,

더 나아가서는 자자까지 할 수 있다면

머리를 기르고 살아도 수행자다.’ 라고 불리는데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이 부부가, 매일 스스로 참회하고, 한 달에 한 번씩 포살하고, 6개월에 한 번씩 자자하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이 좋은 부처님의 법을 여러분들이 생활 속에서 잘 행해나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