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39.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Buddhastudy 2018. 11. 30. 20:53


오늘은 부처님께서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하는 이런 말씀이 있으셨는데요, 거기에 대해서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

 

8대 성지가운데 바이샬리라는 곳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이 룸비니, 부처님께서 도를 이룬 곳이 부다가야

부처님께서 처음 설법하신 곳이 사르나트,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곳이 쿠시나가르.

이걸 4대성지라 그러죠.

 

부처님께서 오래 머무시면서 교화 활동을 많이 하셨던 4곳을 첨가해서 8대 성지라 그래요.

첫째가 왕사성, 라자기르

두 번째가 사위성, 슈라바스티

세 번째가 바이샬리, 비아리성

네 번째가 산카샤

4개를 추가해서 8대 성지다.

 

또 거기다 2곳을 더 추가하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29년이나 살았던 카필라 성, 그리고 부처님께서 6년 고행했던 전정각산. 이렇게 되면 10대 성지가 되는데요, 8대 성지가운데 바이샬리, 아주 유명한 곳입니다.

부처님께서 가장 사랑했던 도시다.

 

이 도시는 절대 왕국이 아니고, 부처님 당시에 공화제였습니다. 아주 민주적인 국가였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늘 이 바이샬리를 아끼고 사랑한 그런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이 바이샬리를 이루는 왕족 가운데는 리차비족도 있고 밧지족도 있습니다. 여러 종족이 아주 민적으로 그렇게 하나의 도시국가를 형성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이 리차비족은 아주 화려하고 상업이 발달하고 진보적이었던 것 같아요. 반대로 이 밧지족은 굉장히 민주적이고 아주 성실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 리차비족을 칭찬한 얘기도 나오고 이 밧지족을 칭찬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 밧지족들은 잘 때 볏단을 베고 잔답니다. 잘 때. 왜 리차비족은 볏단을 베고 자는가? 그것은 이웃에 큰 나라인 마가다국, 이 나라로부터 이웃이 강대국이 있으니까, 늘 침공을 받는 그런 어떤 위협을 느끼고 살아가는 거요.

 

작은 나라지만 큰 나라에 굴복도 안하고, 자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주 깨어있는 자기 나라를 아끼는 그런 부지런한 정진이 있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이 밧지족은 나라가 망하지 않는 7가지 법, 부처님께서 설하신 그것도 지켰잖아요.

 

그러듯이 이 사람이 볏단을 베고 잔 이유는, 즉 볏단을 베고 잤다는 건 뭐요? 잠을 적게 잤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그러니까 우리가 인도에서 깃털을 넣은 베개를 베고 잤다. 이 말은 생활이 굉장히 호화스럽다는 거요.

 

깃털을 넣은 베개를 베고 해가 뜨도록 잤다.

이것은 게으른 것을 상징합니다.

 

그 다음에 볏을 베고 자고,

이 말은 볏짚을 베고 해가 뜨도록 안 잔다는 거요.

이것은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난다는 거요.

 

이것이 무얼 상징하느냐?

不放逸불방일.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함을 상징한다. 이런 얘기에요.

 

왜 그렇게 했느냐? 그들은 그렇게 부지런하지 않으면 벌써 이웃 나라 강대국에게 먹히고 말은 거요. 그런데도 이 작은 나라, 작은 종족이 그 강대국에 먹히지 않고 아주 부유한 행복한 나라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굉장히 근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지런했기 때문이다.

 

마치 요즘 세계에서 스위스같이. 스위스는 전쟁에 휘말리지 않고 강대국들 속에, 강대국이 누구에요? 한쪽에는 독일이고, 한 쪽에는 프랑스고, 한 쪽에는 이탈리아고. 3나라가 시간을 두고 유럽대륙을 제패하지 않습니까. 그죠?

 

로마가 유럽을 제패했죠. 나폴레옹이 유럽을 제패했죠. 히틀러가 제패했죠. 이런 걸 보면 늘 그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간단 말이오. 그러나 그들은 아주 자존심이 강하고 그러기 때문에 수백 년 동안 평화를 유지하고, 경제적인 부를 유지하고 살지 않습니까. 자연 조건은 사실 악한 편입니다.

 

이런 것은 근면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했기 때문에 그렇다. 마치 밧지족이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 밧지족을 항상 칭찬했던 거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 밧지족을 칭찬하면서 그들이 볏단을 베고 자는, 그 정신. 우리도 중국 옛날 속담에 비슷한 말이 뭐요? *와신상담, 이런 말도 있잖아요. 그런 위험을 잊지 않고 항상 경계하면서 살아가는 거죠.

*와신상담(臥薪嘗膽)[:누울 와 , :섶나무 신 , :맛볼 상 , :쓸개 담]이며 장작 위에 누워서 쓰디쓴 쓸개를 맛본다

 

우리나라도 지금 비슷하지 않습니까? 주위에 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 소위 4대강국이라고 하는 경제력 군사력 1위인 미국과, 잠재적 최대 인구국에다가 미국의 경쟁국가인 중국에다가, 경제력 2위인 일본에다가, 군사력 2위인 러시아, 4나라가 우리의 주위에 있죠.

 

우리는 이 4나라로 인해서 이미 100년 동안 고통을 겪었지 않습니까?

한번은 미국과 일본이 짝짝궁해서 일본은 우리나라를 차지하고, 미국은 필리핀을 차지하고 소위 가쓰라-테프트 협약이죠.

 

그 다음에 미국과 러시아가 또 협위를 해서 38선을 갈라서 한쪽을 차지하고,

이제 남은 게 미국하고 중국이 또 지금 북한 핵 문제를 갖고 대립하는 것 같지만 앞으로 어떻게 또 협상할지 모르겠죠.

북한 핵을 완전하게 폐기를 중국이 한다면 북한 관리를 중국이 해도 좋다. 미국이 이렇게 나올 가능성도 있다. 이 말이오.

이렇게 되면 우리는 통일이 아주 어려워진다.

 

이러 어떤 어려움 속에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어떤 어려움 속에 놓여 있는지를 잘 몰라.

 

과거 100년이 역사를 돌아보면서 우리가 수구파니, 개화파니, 친노파니, 친청파니, 친일파니, 이렇게 논쟁을 하면서 결국은 이 강대국에 분할정책에 휩쓸려서 식민지를 겪고 또 분단의 아픔을 겪었지 않습니까.

 

올해(2005년 활영 당시 상황)가 국권을 상실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지 100년째고, 또 남북이 분단된 지 60년째가 된다는 거요.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런 나라를 되찾고,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고, 그리고 남북이 하나 되는 통일로 나아가기 위한 그러한 과제를 달성하려면

 

정말 국민이 단합하고, 정파나 개인의 이익을 좀 뛰어넘고, 경제가 여유가 있다고 해서 더 방만하지 말고 더욱더 노력을 해야 되는데,

 

돈쓰기 바쁘고

조금 힘든 일은 안하려고 그러고

외국의 노동자 데려다 하려고 그러고

돈 좀 안 벌린다고 공장은 다 외국으로 가져가고

북한에는 내 동포 굶어죽는다 해도 쌀 한 톨 지원하는 것을 꺼리고

배가 남아서 이쪽에는 폐기처분한다.

저쪽에는 배가 없어서 고기를 못 잡고, 어장을 전부 중국에다 내주고.

어떻게 보면 참 어리석기 이를 데가 없단 말이오. 이게 우리의 현주소요.

 

만약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는 이 밧지족처럼 독립성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머리를 맞대서

미국 친한 사람은 미국을 설득해서 우리 민족의 통일로 가도록

중국하고 친한 사람은 중국 사람을 설득하고

일본하고 친한 사람은 일본 사람을 설득하고,

북한 사람하고 친한 사람은 북한을 설득을 해서

 

남북이 화해하고 통일로 나아가도록

미국이 한반도에서 어떤 경우에도 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중국이 한반도를 넘보지 않도록

일본이 과거사를 반성하도록

북한이 핵문제를 갖고 이렇게 한반도 위기를 조성하지 않도록

 

오히려 이렇게 설득을 하고 이렇게 힘을 모아서

화해와 협력의 길로 나아가고 통일의 길로 나아가야 된단 말이오.

그런데 지금 우리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 우리는 부처님처럼 먹는 걸 좀 적게 먹어야 됩니다.

부처님 하루 한 끼 드셨고, 얻어 드셨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는 못하더라도 음식 좀 적게 먹고 남기지 말고,

그래서 버리지 않으면 환경이 오염이 안 되고

식량을 아끼니까 경제적으로 이롭고

남은 식량을 북한에 배고픈 사람들에게 보내서 그들의 건강을 회복하도록 하고

또 제3세계에도 보내고

 

내 건강도 좋고, 경제적으로 이익도 되고, 환경도 아끼고, 남한도 돕고.

이런 일석 4조의 일이 있단 말이오.

 

그런데 그게 먼 게 아니에요.

밥 먹을 때 잠깐 방심하느냐 안 하느냐.

여기에 달려있는 거란 말이오.

 

그리고 입는 것도 부처님을 좀 닮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남이 입다가 버린, 시체를 싸서 버린, 그 분소의 한 벌 입고 사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가 부처님처럼은 못산다 하더라도

지금 남 입다가 안 입는 중고 옷도 딴 나라 옷에 비하면 고급에 속합니다. 딴 나라는 이게 가서 다 팔리지 않습니까. 비싼 값으로.

지금 있는 옷만 해도 죽을 때까지 다 못 입을 거요.

 

옷장을 열어보면 그저 자기들은 옷장이라는데, 내가 보기에는 쓰레기장이에요. 꽉 쓰레기를 쌓아놓고, 매일매일 입을 때마다 어느 거 입을까? 머리 아프게 고르고.

그렇게 하지 말고, 좀 간소하게 하고,

 

그리고 안 입는 옷이 있으면 공연히 그렇게 쌓아두지 말고, 깔끔하게 정리해서 지금 북한에 옷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옷을 보내고, 또 북한이 아니라도 옷 없는 나라에 옷을 보내고.

이렇게 우리가 입고 사는 것도 좀 간소화하는 게 필요하다.

 

그 다음에 자는 것, 지금 아파트를 서울 근교에 엄청나게 짓고 또 짓고, 또 지어도 모자라잖아. 그죠? 값은 자꾸 오르고. 왜 그럴까요? 한 사람, 두 사람 사는데 그저 1020평만 해도 되는데, 30, 50, 80, 100, 이렇게 늘려가니까

내 집이 없는 사람은 그대로 있어요. 아파트는 수도 없이 지어지는데.

 

그래서 늘 텅텅비워 놓고, 거기 난방비 들죠, 에어컨비 들죠, 관리비 들죠. 쓰지는 거의 않죠. 그것도 한집만 안 갖고, 그것도 2개씩 3개씩 가지고 있고.

이런 생활이 좋은 생활이 아니다.

 

이것은 많은 자원을 낭비하고, 빈부격차로 인해서 가난한 사람에게 아픔을 주고, 또 환경을 많이 파괴하게 됩니다.

이런데서 우리가 생활을 조금 간소화하는 게 좋다.

일본에 가보시면 알지마는 정말 집들을 다 조그맣게 해서 아주 깔끔하게 해서 살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들의 소비풍조는 우리보다 경제력이 34배드는 일본을 능가하고 있는 거요.

그러기 때문에 虛張聲勢허장성세에요. 거품이란 말이오.

 

그러니까 늘 경제적 위기에 봉착하고 있는 거요. 알뜰해야 된다. 그런데서 우리가 의식주 생활을 좀 간소화해 가는 게 필요하다.

오히려 전기도 좀 아껴 쓰고, 그 전기를 북한에 보내서 전기 없는 사람도 좀 쓰게 하고, 옷도 좀 보내고, 이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속에는 적대의식만 가득해 있단 말이오.

이런데서 꼭 북한뿐만 아니라, 그곳은 우리 민족이니까 그렇다 치고, 그걸 넘어서서 우리가 인류 전체에서 자원을 한쪽에서 너무 써서, 한쪽에서는 없어서 못 쓰는 그 사람과 나눠가져야 하고, 또 지금 우리가 많이 쓰게 되면 미래 세대는 쓰레기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껴써서 미래세대도 우리 자손들도 영원히 지속적으로 쓸 수 있도록 남겨둬야 한다. 이런 데서 우리는

 

바이샬리 사람들이 밧지족들이

볏단을 베고 자는 그런 불방일,

근면한 이런 삶을 본받아야 된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상가가 바로 이런 정신으로 살아가야 된다. 수행자가 이런 정신으로 살아가야 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상가의 얘기가 나와서 한 말씀 더 드린다면, 어느 날,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부처님, 좋은 벗은, 좋은 도반은 우리가 해탈로 나아가는 이 수행의 길에 있어서 절반은 되겠죠. 좋은 도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수행의 반은 된다고 말해도 안 되겠습니까?”

아난존자는 자기가 그런 말을 하면서 조금 자기가 과장을 하나, 부처님이 그걸 너무 높이 평가한다고 생각할까? 이런 마음에서 이렇게 말씀을 드렸어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아니다. 아난다여, 그런 말을 하지 마라. 수행하는데 있어서의 좋은 도반은 수행의 전부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여기서 좋은 도반이라는 것은 누구를 말합니까? 바로 상가구성을 말합니다. 그냥 친구들, 이런 얘기가 아니에요. 여기서 말하는 좋은 벗은 상가구성원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 할 때 이 승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는 거요.

여러분들은 승보를 그냥 스님들이다. 사제 계급 같은 스님들이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여러 가지 마음에 안 드는 것도 많이 있으니까, 뭐라고 그래요?

삼보에 귀의하지 말고, 이보에만 귀의하자.’ 이런 말을 하는데, 그건 옳지 않는 말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깨달은 이 부처님과

또 우리를 깨닫게 해주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이, 이게 승이거든요.

이 승보가 있어야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거요.

안 그러면 부처님만 깨닫고 우리는 못 깨닫는 결론이 나온단 말이오.

 

그러니까 스스로 깨달은 이 부처님, 우리에게 좋은 법을 가르쳐 준 부처님을 우리가 존경하고 부처님께 귀의해야 됩니다. 또한 오늘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이 아니라 부처님의 법이란 말이오. 우리를 깨닫게 해주는 그 좋은 법을 우리는 존중하고, 법에 귀의를 해야 됩니다. 온전하게 믿고 따라야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 법을 받아 지녀서 깨달은 이, 그래서 자기 운명을 바꾼 사람. 이 수행자들, 이 승보가 있기에 나도 가능한 거요. 그래서

 

우리가 수행을 하는 길에 있어서 등산에다 비유한다면

우리가 올라야 할 목표, 그게 붓다란 말이오. 정상.

그 정상으로 나아가는 길 안내도, 지도, 이게 뭐냐? 이게 법이란 말이오.

함께 등산을 가는 사람들이 승이에요.

그때는 좋은 안내자, 경험 있는 안내자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서 우리는 스승이 필요해요.

 

또 등산을 하다보면 어떤 사람이 처음에 앞서고, 나머지가 뒤서고, 앞에 사람이 안내하지만 때로는 그 사람이 지치게 되면 뒤에 가던 사람이 그 사람을 밀어주고, 다시 또 끌어주고, 이렇게 함께 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같이 가는 등반하는 도반들, 서로 의논해서 지도를 잘 보고 정상에 이르러서 우리가 야호하고, 고함도 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승보가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을 알아서 혹시 여러분들이 조금이라도 마음 상했다고 삼보에 귀의하지 말고 이보에 귀의하자, 승보는 빼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됩니다. 그건 승보의 의미를 몰라서 그렇다.

 

승보가 있으므로 해서 우리가 붓다가 될 수 있는 희망이 있는 거요. 우리도 다 그 법에 귀의해서 수다원과 이상이 되면 다 승보의 일원이 되는 거고, 이런 도반들이 있기에 우리가 깨달음의 길로 한발 한발 나아갈 수 있다.

 

좋은 스승 만나고 좋은 도반을 만난다는 것은 바로 수행의 전부다. 이렇게 말한 부처님의 말씀을 우리가 꼭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뭐라고 하셨느냐?

 

이 좋은 벗과 함께 있으므로 해서, 즉 도반들과 함께 수행 정진함으로 해서

우리는 늙지 않으면 안 되는 이 몸을 가지고

늙을 수밖에 없는 이 몸을 가지고

늙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상태에 이를 수가 있다.

 

우리는 병들지 않으면 안 되는 이 몸을 가지고

좋은 도반들과 수행함으로 해서 병듦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우리는 죽지 않으면 안 되는 이 몸을 가지고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게 우리가 생로병사를 벗어나는 길이에요.

 

우리가 늙고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이런 유한한 육신을 가지고 있지마는,

부처님 법에 귀의해서 수행정진하게 되면,

우리는 늙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병듦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늙음이 나를 도무지 괴롭힐 수가 없고

병듦이 나를 괴롭힐 수가 없고

죽음이 나를 두려움에 빠뜨리지 않게 된다.

 

이루어진 것은 다 흩어진다는 그러한 무상의 원리를 우리가 안다면

태어나는 것은 죽기 마련이라 하는 이런 자연의 이치를 우리가 안다고 그러면

이 몸이 늙고 병드는 것은 하나의 현상이다.

 

다만 내가 집착하기 때문에

진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늙음을 괴로워하고

병듦을 괴로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니까 수행자는

몸이 늙음을 하나의 현상으로 봐야 하며

몸이 병들었을 때도 하나의 현상으로 봐야 합니다.

괴로움으로 보지 않는다.

 

유마거사 같으신 분은 몸이 병드니까, 그 병든 몸을 가지고 숫제 교화의 방편으로 써버렸잖아요.

건강해야 교화하는 게 아니에요. 병들면 병듦으로 교화한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어려움을 극복해야 다음에 편안할 때 교화하는 게 아니고, 그 어려운 가운데 어려움을 극복하는 그 모습을 가지고 세상 사람을 교화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물에 빠진 김에 진주조개를 줍는다. 하는 원리에요.

넘어진 김에 동전을 줍는다.

돌에 걸려서 넘어진 김에 다른 사람이 또 걸려서 넘어질 그 돌을 뽑으므로 해서 내 하나가 넘어지므로 해서 무수한 아이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 넘어진 것은

도리어 잘된 결과를 만드는

이것이 수행이고 보살행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법에 귀의하고, 좋은 도반들과 우리가 힘을 모아서 함께 정진해 나가므로 해서 이 땅을 정토화 시킬 수 있고, 바로 이 어려운 가운데서 즉, 지금까지 비난했던, 친일파, 친미파, 친중파, 친러파, 친북파. 나쁜 게 아니고, 이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면 어때요?

이런 사람이 있음으로 해서 미국을 설득하고, 이런 사람이 있음으로 해서 미국을 설득하고, 이런 사람이 있으므로 해서 중국을 설득하고, 이런 사람이 있음으로 해서 러시아를 설득하고, 이런 사람이 있으므로 북한을 설득하고. 다 재료가 되어 버려요.

 

아까 밭에서 못 쓰는 돌멩이라고 버림받던 것들이

이제는 공사장에 와서 좋은 건축자재가 되는

이런 원리가 바로 이 불법이다.

 

그래서 우리가 상가에 귀의해야 합니다.

법에만 귀의할 게 아니라, 그 법을 믿고 따르는 수행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그런데서 좋은 벗의 만남은 수행의 전부다.’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가 다시 한 번 새겨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