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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범스님_보고 듣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이 불성 [큰스님께 듣는 깨달음의 길]

Buddhastudy 2021. 2. 10. 16:38

 

 

 

그러면 자기불성을 우선 믿어야 해요.

그래서 제사 지낼 때 항상 하는 법문이 있는데,

아유일권경하니 나에게 한권의 경이 있다, 경이 한 권 있어요, 나에게.

불인지묵성이라, 종이와 먹으로 된 경이 아니에요. 종이와 먹으로 되지 않은 경이 하나 있는 거예요. 불성이라는 얘기죠.

 

경이라고 그러면 종이 위에다가 먹으로 글씨를 써서 경이잖아요.

종이나 먹이나 글자로 된 경이 아니고 형상 없으면서 항상 빛나고, 형상 없으면서 항상 움직이는 그 청정미묘한 불성이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그게 나에게 있는 한 권의 경이다.

종이와 먹으로 되지 않는 경이다.

 

전개무일자, 글로 써서 뭘 밝히는 것이 아니라

상방대광명, 항상 대광명을 비춘다.

그 대광명을 어떻게 비추냐?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고, 생각할 줄 알고, 움직일 줄 아는 이게 불성이에요.

보고 듣고 생각하는 이게 불성이에요.

그게 보배에요. 천하의 보배.

보고 듣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이게 불성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전도행위라고, 뒤 밖인 행위라고

그래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움직일 줄 아는 불성은 접어두고

보이면 보이는데 쫓아가고, 들리면 들리는데 쫓아가고, 생각나면 생각나는데 쫓아가고, 움직일 때는 움직일 때 쫓아가서

자기 불성은 항상 진흙 속에 묻힌 보물처럼 묻혀있고

생사, 생멸에만 움직이면서 사는 게 오직 모르는 범부다, 이러거든요.

 

불성을 알면 보살인데, 불성을 모를 때 범부라고 그래요.

보고 듣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그것이 종이와 먹이 없는 한 권의 경인데

항상 광명을 비추고 있다.

그래서 제사지낼 때 이 염불로 계속 제사를 지내요.

 

또 그다음에는 화엄경 십정품이라고 품이 있는데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움직이는데 쫓아가는 것은 밤과 낮으로 비유를 했고

그 불성은 태양으로 비유를 했어요, 태양.

 

그래서 태양은 경에서 일천자라고 그래요. 일천자.

화엄경 약찬계에 보면 일천자 월천자 그러거든요.

그 천자는 하늘 천, 아들 자, 그냥 하늘이라 이 소리에요.

일은 하늘에 있는 해가, 이 소리거든요.

자는 어조사, 남자 여자처럼 그냥 명사 뒤에 붙이는 말이고요,

일천자 그러면 해. 해가 항상 밝아서 항상 비추는데

이 해가 말이에요, 일출명주요, 세상에 이렇게 나타날 때 일출을 할 때는 낮이라고 그러고

일몽명야라, 어느 세상에서 해가 떡 사라져서 일몰을 하면 밤이라고 한다.

화엄경 십정품에 있는 법문이에요.

 

그런데 해라고 하는 것은 주역불생이요,

동쪽에서 해가 쏵 솟아오지만, 그 솟아오르는 해가 보이지만, 아침에 해가 생긴게 아니다, 이거죠.

주역불생이라, 낮에도 생긴게 아니다, 해가.

 

난 어릴 때요, 아침마다 해가 동쪽에서 솟아오르는데, 참 신기하더라고요.

어디 해 만드는 공장이 있는 줄 알았어요.

어디서 해를 만들어서 아침에 해를 띄워 보내고 그런 줄 알았어요.

 

그리고 나무가 흔들릴 때가 되면 바람이 불더라고.

그래서 바람이 나무에서 생기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나무가 없는 곳에 가면 바람이 없겠구나하고 넓은 들판에 가보니까 거기에도 바람이 있더라고.

그래서 이 바람이 절 넓은 데서 어디서 왔나 그랬더니

그때 생각에 저 먼 나무에서 바람이 생겨서 여기까지 왔겠지 이랬어요.

 

저 해라는 건 아침마다 보이지만 생긴게 아니거든요.

본래 해는 하나 뿐이에요.

해라는 건 저녁마다 안 보이지만 없어진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보이고 안 보이고 생멸을 하지만

불성은 보일 때는 보이는 데로 불성이고, 안 보일 때는 안 보이는 데로 불성이기 때문에

이 불성의 참 마음을 알고 나면

나고 죽고 보이고 안 보이는데, 일체 두려움이 없어요.

이걸 무유공포라고 그래요. 공포가 없다.

무유라는 말은 없다는 말이잖아요. 공포는 두려움이잖아요.

 

우리 범부들은 항상 근심걱정 두려움이 있는데

그것은 밤과 낮만 알지 밤과 낮이 없는 태양을 몰라서 생기는 일이다. 이 말씀이죠.

 

그러면 그런 불성을 찾아갈 때 어떻게 찾아가야 하나?

의외로 아주 간단해요.

그걸 전부 불교에서는 수행이라고 그러는데요,

불교에서 하는 모든 일은 이 불성을 찾는 방법이에요.

그걸 어려운 말로 수행이라고 그러고,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단행과 융행이 있는데

단행은 홑단, 한 가지만 하는 거예요. 홑으로, 홑으로 한 가지만.

융행이라는 건 원융할 융, 온갖 거 다 아는 거에요. 온 갖거.

 

그러니까 이 불성을 찾는 방법은

절하는 것도 불성을 찾는 방법이요

기도하는 것도 방법이요

보시하고, 공양하고 선행을 하는 것도 불성을 찾는 방법이요

일체 그 공덕행이 전부 불성을 찾는 방법이다.

 

그래서 그걸 백천수행방편문이라. 이래요.

방편이라는 건 가까이 간다 이 소리거든요.

그러면 수행방편문이 얼마나 많으냐?

백천수행방편문이라고 백 가지 천 가지 수행방편문이다.

우리가 절에 한번 이렇게 오는 것도 불성을 찾는 방법이에요.

경을 보는 것도 그 불성을 찾는 방법이에요.

경을 보는 게 아니라 불성을 보는 거거든요.

 

우리가 거울을 보면 거울 보러 가는 게 아니에요.

그럼 뭘 보러 가죠? 자기 얼굴 보러 가는 거예요.

거울 앞에 가 있어면 거울은 없고 자기 얼굴 뿐이에요.

경을 뭐하러 봐요. 자기 불성을 보는 거지.

 

그러니까 모든 게 다.

공덕을 짓는 것은 전부 불성을 위한 것이고,

모든 원력이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개공성불도

그 불성의 도를 이루기 위해서 모든 공덕을 행하도록 가르치는 게 불교에요.

 

그러니까 불교는 어떤 방법을 가르쳐도 불성에 대한 깨달음을 위해서 가르치는 거것이지

다른 거, 생사의 고통을 받으라고 가르치는 게 아니에요.

그게 불교의 기본 가르침이고, 기본 구조입니다.

 

그럼 불성을 보면 뭐냐?

박수치고, 조용하고, 말소리 들리고, 이걸 신통이라고 그래요.

불성을 보면 일체 행위가 다 신통인데, 신통이라는 거 알죠? 신비롭게 통하는 거.

여기서 움직이지 않고 저쪽으로 가는 행위가 신통이잖아요. 그게 불성이에요.

 

그런데 불성을 모르면

이것은 바람이다. 이것은 꽃이다, 이것은 말소리다. 요렇게 구분만 해요.

이걸 분별이라고 해요. 나눌 분, 가를 별. 나눠서 가르기만 하는 거예요. 아주 재미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모든 게 불성인데,

그 불성을 찾아가는 방법이 수행이다.

그럼 수행은 여러 가지, 한길만 가는 것도 수행이고, 온갖 것을 다 함께 하는 것도 수행인데

단행과 유행이 있는데, 단생수행 유행수행이 있는데, 그 원리는 모두 똑같은 것에요.

 

원리는 뭐냐?

반조, 회심,

또 의상스님은 도리킬 반, 감정이라는 정, 반정이라고 그랬어요. 반정.

모든 감정을 돌이킨다. 돌이켜보면 해탈이 있어요. 쫓아가면 생멸이 있어요.

우리 범부의 삶이 전부 쫓아가는 삶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생활의 절대 근심걱정 안 하고, 즐겁게 자기 근본에 돌아가서 행복한 분들을 다 성인이라고 그래요.

자기 근본에 돌아가서 행복하면 성인이에요.

 

만날 취직 걱정하고 먹고살 거 걱정하고

이러다가 걱정하다 죽고, 헤매다 죽는 걸 범부라고 그래요.

병나면 죽는 거고요, 늙으면 죽는 거예요.

가만히 그래서.. 늙음을 알고 죽음을 아는 이놈이 뭔고?...

거기에 늙음도 죽음도 없어요.

그게 극락이에요.

 

그러니까 돌이키는 방법이 그게 수행의 근본이에요.

돌아가는 거예요. 기원, 돌아갈 기, 기원 원, 기원

반조, 돌이켜 본다.

회심, 마음을 돌이킨다. 감정을 돌이킨다.

돌이켜보면 수행이에요.

 

그런데 왜 여러 가지 공덕을 닦냐?

공덕이 많으면 많을수록 돌이켜보는 힘이 강해요.

몸이 건강해야 달리기를 잘할 수 있듯이, 공덕이 많으면 돌이켜보는 힘이 강해요.

여러 가지 그 공덕이 부족하면 장애가 많아서 여러 장애가 뒤따라와서 잘 안 돌아봐 져요.

그래서 그걸 조행이라고 그래요.

공덕은 돕는 행위이고, 돌아보는 행은 정행, 바로보는 행이다.

돌이켜보면 돼요.

돌이키는 게 수행이에요.

 

그리고 생활에 막 얽매이는 건 그건 생멸고통이에요.

그러니까 아직까지 먹고 살만한데, 20년 걱정하고, 30년 걱정하고 걱정하다 죽더라고. ...

헤매다 죽고. 구하다 죽고,

언제 다 구해? 다 구하는 사람 제가 한 사람도 못 봤거든요. 구하다 죽어요.

 

그래서 이 생활 속에서 걱정을 적게 하는 방법이 있는데요

삶이라는 것은 소비거든요. 소비.

이 소비를 생각을 가지고 소비하는 게 중요해요.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은 돈을 많게 쓰는 것도 중요해요.

적은 돈을 많게 쓰는 방법이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소비를 할 때, 그냥 생존소비로 만족할 수가 있어요.

먹고 입고 자고 하는 것만으로도 소비를 아주 적게 하는데 그냥 만족해요.

이게 생존소비에요.

 

그저 집에 가스 있으면 되고, 쌀 있으면 되고, 소금 있으면 되고, 수돗물 나오고 그러면 사는 거예요.

아무 걱정 없어. 이걸 생존소비라고 그래요.

 

그다음에는 향락소비가 있어요.

향락은 즐거워야 해요.

옷을 입어도 명품을 입어야 만족하는 거예요.

머리를 해도 돈을 많이 들여야 기분이 좋고, 자동차도 아주 좋은 걸 타야 하고, 신발도 좋아야 하고

이렇게 고가품으로 고소비를 할 때 만족을 느끼는 그것을 향락소비라고 그래요.

 

그래서 자기의 소비가 자기 인격을 결정한다.

이래서 명품든 사람하고 보통 물건 든 사람하고 나란히 가면

명품든 사람을 인정하고 명품 안 든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게 향락이에요.

이렇게 하다 보면 명품만 명품만 찾다가 그냥 죽어요. 답이 없어요.

 

그다음에 만족소비에요.

만족이라, 그냥 만족하면 되는 거예요.

소비의 물량에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물 한 잔 마시면 만족하면 그만이에요. 커피 안 마셔도 돼요.

그냥 뭘 하든지, 만족하면 그만이고요.

그냥 밥을 못 먹으면 못 먹는 대로 만족하면 그만이에요.

그러면 그 만족이 행복이거든요.

그걸 만족소비라고 그래요.

 

그리고 목적소비가 있어요. 목적소비.

무슨 목적을 하나 이루기 위해서는 거기에다 모든 걸 집중하고

내가 먹고 입고 쓰고 활동하는 데는 최대한 아끼고 줄인다. 이게 목적소비에요.

무슨 하나의 뜻하는 바가 있으면 그 뜻하는 바에 맞추어서 삶 전체가 통일이 되어야 해요.

그래야 수행이 그냥 한 가지만 되는 게 아니라

그 한 가지를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다 거기에 합쳐져야 하거든요.

그게 융행과 단행이에요. 융행.

융행은 여러 가지가 함께 하는 것이고 단행은 한가지고 하는 거거든요.

 

그럼 우리 모든 게 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물질을 통해서 우리 불성으로 돌아가고, 행동을 통해서 불성으로 돌아가고

또 무슨 경을 본다든지,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하고 생각으로 집중하는 그런 걸 통해서 불성으로 돌아가고.

이게 전부 원리가 똑같거든요.

 

그래서 돌아가고 돌아가고 보면 점점 밝아지고 밝아지고 밝아져서

바로 통하게 돼요.

이런 것을 원통이라고 그래요. 원통.

둥글 게 다 통한다고.

둥글게 다 통한다.

 

그러면 그걸 정진이라고 그래요.

정진인데, 처음에는 믿고 하는 거예요. 믿고.

믿고 하는 정진을 신행정진이라고 그러고, 점점 신행정진이 깊어지면 눈으로 불성을 보게 되요.

그걸 나타날 현, 볼견, 현견불성이라고 그래요.

현견불성이 되면 그걸 십지 중에 초지보살이라고 그러거든요.

 

눈으로 불성을 봐요.

우리가 이렇게 보면 이게 책이잖아요. 화엄경인데.

이걸 책이라고 보면 책이라는 분별이 앞을 가려서 이게 불성인줄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십지보살이 딱 되면 책이라는 분별은 없고 바로 불성을 바로 보는 거예요.

이게 책이면서 바로 불성이에요.

두두물물이 불성이다, 이 책을 없애야 불성이 아니라

두두물물이 개시불성이다, 책은 책대로 불성이고 꽃은 꽃대로 불성이고, 죽으면 죽는대로 불성이고 살면 사는대로 불성이고, 이런 거죠.

 

이렇게 딱 되면, 이 가운데서도 점점 깊어지고 깊어지고 깊어져서

가장 높게 되면 그걸 무상각(그 위에 더 없는 바르고 원만한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 그러거든요.

위없는 깨달음이라고.

 

불성을 본 후에도 계속 정진하는 것을 정행정진(증득한 행위로 계속 닦아나간다)이라고 그래요.

증득할, 영수증할 때 증, 몸으로 체험한다는 말인데,

정행정진. 증득한 행위로서 계속 닦아 나간다.

 

불성을 보기 전에 믿고 하는 정진을 신행정진

보살지 위에 올라가면 다 정행정진이에요.

항상 눈으로 불성을 보면서 닦고 닦고 또 닦고

그게 성불이거든요.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