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식의 본질과 깨달음: 의식은 존재의 핵심이며, 우리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요소입니다. 부처님께서 영산에서 꽃을 든 행위(염화미소)는 "나는 살아있다, 나에게 생명이 있고 의식이 있으며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며, 이는 의식에서 의식으로 통하는 선(禪)의 시작이라고 설명합니다. 의식은 매우 간단하고 당연한 것이지만, 이것이 깨달아지면 삶에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고 강조합니다.
- 의식의 확장과 본래 청정함: 의식은 우리 몸 안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공간에 가득 차 있으며(텅 빈 충만), 본래 청정하여 어떠한 것으로도 더럽혀지거나 훼손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큰 안도감을 얻고 안심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 현상의 본래 혼잡함과 수용: 의식은 스스로를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 현상을 생산하며, 이 현상계의 법칙은 '본래 혼잡'하다는 것입니다. 깨끗함이 있으면 더러움이 있고, 큼이 있으면 작음이 있듯이, 현상계는 항상 상대적이며 이 혼잡함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현실의 혼잡함을 바꾸려 하지 않고 수용하는 것이 지혜이며, 이는 자신과 싸우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 에고의 조작과 내려놓음: 우리는 뭔가를 해야 한다는, 특히 '마음공부를 해야 한다'는 심정을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해야 한다'는 마음 자체가 본질의 흐름을 방해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궁극적으로는 '간불용발'(머리카락 하나의 차이도 허용하지 않는다)의 경지에 이르러, 에고가 조작하려는 마음을 내지 않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 무위자연과 수류: 에고의 조작이 사라지면 '무위자연'의 상태가 되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돌아가며, 본질의 힘을 실어 살게 됩니다. 마음이 어느 한 곳에 집착하지 않고 자유롭게 열려 흐르는 '수류'의 상태가 되면, 하는 일마다 꽃이 피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이론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실력을 기르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컵을 드시네.
제가 의식이 있다는 걸 보여드리는 것이죠.
그 이상도 없고 그 이하도 없어요.
살아있다는 거
죽었으면 이 몸이 꼼짝 못 할 텐데
지금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는 거
이거 보여드리는 거
저한테 의식이 있다는 걸 보여드리는 것이
이게 부처님께서 영산에서
부처님하고 제자들이 모였을 때
부처님이 염화, 꽃을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살아 있다’ 이 말씀이시죠.
-나한테 생명이 있다.
-의식이 있다.
-혹은 나는 존재하고 있다.
그걸 보여줬으니까
그 말귀 알아들은 가섭이
“저도 살아 있습니다” 하고 미소를 지었다, 이거예요.
이게 염화미소로 해서
이심전심, 의식에서 의식으로 통하는 그 시작이다.
그 이심전심의 염화미소가
선이라고 하는, 인간 정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표현 방식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지금 우리들이 이렇게 모여서 공부하고 있을 때
뭘 배우고자 하느냐 하면
의식 하나 배우고자 하는 거예요.
근데 이게 기가 막힌 게
의식은 알고 보면 이렇게 간단한 건데.
여러분, 지금 저를 보십니까?
여러분의 의식이 눈을 통해서 보고 있는 거죠.
너무 간단하고 너무 당연한 사실인데
이거 이상의 진리는 없다는 거예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게 겨우 이것뿐인가?” 할 때
정말 좀 약간 실소를 머금지 못할 정도로 간단한 건데, 또 당연하고.
그런데 정말 이거다, 이거죠.
근데 이것이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별거인 이유는
이 의식이 분명하게 규명이 되면
의식이 분명해지면
내가 누구인지 할 때
의식이 나이일 때는 그다음부터 많은 변화가 일어나요.
지금까지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을 나라고 알고 살고 있는데
의식이 나인 것을 깨닫고
그것이 익숙해질수록 많은 변화가 일어나서
그 일련의 그 변화 과정이 마음공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아침에 한 번 떠올려보니까
저는 항상 마음공부에 자초지종을 한번 쭉 이렇게 펼쳐보는 걸 좋아하니까
아침에 여러분하고 함께 한번 잠깐 복습을 하고 시작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한번 써봤어요.
그래서 간단하게 일단 한번 보면
제일 먼저,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의, 혹은 이 세상의 본질인 의식을 한 번 깨닫기, 자각하기.
깨닫기가 너무 거창하면
한 번 발견하기
견성이라고 하죠.
본질의 발견, 견성.
지금 이 순간에도
제가 이렇게 컵을 들은 게
저의 본질인 의식을 이렇게 자각하고 있다는 거
이것 밖에 나눌 게 없다는 거
이게 진리라는 거를 지금 저는 표시를 하고
여러분께서는 지금 끄덕끄덕 하시고
이렇게 서로 간에 교류하는
의식과 의식이 깨어서 서로 교류하는 것
요게 지금 모든 마음공부의 가장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에요.
근데 그렇게 해서
여러분도 의식이 있고
저도 의식이 있고
그리고 알고 보니까
-이거는 모든 사람한테 공통적으로 있어서
특별히 자랑할 것도 없네.
깨달았다고 해서 뭐 특별한 것도 없고
-또 남한테 과시할 것도 전혀 없네.
-이거는 너무나 모든 사람한테 공통적이고 평범하고 당연한 거네.
-그리고 알고 보니까 처음부터 있었네.
지금 여러분 의식이 있죠?
이걸 심각하게 받아들이시면 안 돼요.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생각 속으로 들어가서 안 되고
그냥 간단하게 받아들여
그냥 아주 툭 털어버리는 느낌으로
지금 의식 있죠?
그러니까 그것이 ‘아, 나한테 의식이 있구나.’
이게 지금 모든 것이 다다
본질이 의식이구나.
근데 이 의식은 크지요.
몸 안에만 있지 않죠.
큰데 어느 정도 크냐 하면 의식이 없는 곳이 있나요?
의식이 꽉 차 있죠.
‘텅 빈 충만’이라고 법정 스님 책 제목이 있네.
‘텅 빈 충만’
이게 의식을 말하고 있다.
지금 텅 빈 충만을 느낍니까?
자기 의식이, 이 모든 공간에 지금 가득 차 있는
이 텅 빈 공간에
본인이 스스로 모양이 없어서 텅 비었지만 충만하다.
그러니까 본질 의식이 충만하다는 걸 느끼면
의식이 모양이 없는데
본래 청정하다, 이 말도 들어옵니까?
깨끗하지 않나요?
이거 더럽힐 수가 없지 않나요? 이 의식은?
뭐 구부러뜨릴 수도 없고
어떻게 손댈 수가 없잖아요.
본래 청정하다.
[본질의식]이 [본래청정]하다 에서
저는 굉장히 큰 안도감을 느껴요.
안심을 느껴요.
본래청정하다
‘이 의식은 이 현상에 물들지 않는구나’
이 사실을 한번 딱 우리가 확인하면
그때부터는 굉장히 마음이 쉬워진다 할까?
안심 속에서 살아간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 본질은 훼손되지 않는다.
항상 그대로다
이렇게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로는 나하고 떨어질 수가 없지요?
본질하고 나하고 떨어질 수가 있을까요?
이 의식하고 나하고가?
없잖아요.
처음부터 있었고
떨어질 수도 없고
하여튼 마음이 좀 편안해진다.
그러면 의식이 본래 청정한 상태로 안 있고
이 의식이 육조 스님 말씀이
[能生현상]_ 현상을 능이
생_ 일으키고 있다, 만들고 있다, 생산하고 있다.
생산이 좋네.
이 의식은 의식으로 안 있고
이 현상을 능히 생산해 내고 있다.
이유는 모르겠어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하나님이 왜 여기를 창조했는지 이유는 모르겠어요.
근데 성경에는
‘창조해 놓고 보니까 보기 좋더라’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아마도 하나님이
하여튼 그냥 저의 그런 거 있잖아요.
내피셜, 이런 거 있잖아요.
내피셜에 따르면
그냥 생각해 보면
혼자 있으면 되게 하여튼 심심할 것 같아
혼자 있으면 무척 심심할 것 같아.
온 세상에 혼자만 딱 이렇게 있으면.
자기가 혼자 있으면
자기가 있는지도 못 느끼잖아요.
그래서 뭔가 자기를 느끼고 싶어서
자기를 둘로 나눈 것 같아요.
이 의식이 자기를 스스로 둘로 나누어서
주관과 객관을
왜냐하면 느끼려면.
어떤 제가 살아있다는 거
또 여러 가지 이런 걸 느끼려면
주관 객관을 나누어서 드러나야만 느껴져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여러분이 안 계시면 이 객관 현상도 없죠.
그러면 객관 현상을 느끼려면
내가 꼭 있어야 되죠.
그래서 주관과 객관이라고 하는
스스로를 주관 객관으로 나누어서
주관을 통해서 이 객관 현상이 이렇게 드러나는걸
감각적으로 수용하게 하니까
‘의식은 스스로를 주객으로 나누어서 현상계를 펼쳤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을 것 같아요.
근데 의식 입장에서는
주관도 지각이 되고 객관도 지각이 돼요.
주관이라고 하는 거, 우리가 말하는 주관
이 객관 상대를 인식하는 감각기관이 달린, 지금 몸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것도 인식이 된다.
몸이 인식되죠?
의식은 주관도 지각하고, 객관도 지각하고 있어요.
언제 하느냐?
항상 인식하고 있어요.
본질인 의식이 이 현상계를 펼쳐내는 방식이
주관 객관을 만들어야만 지각이 되니까
그래서 요 주객을 연기시켜서 펼쳐냈다.
연기란 말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하는 이 현상계의 존재 방식이에요.
그래서 재밌는 것은
주관 객관이 항상 동시에 출연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나 없이 객관세계만은 불가능하고
또 객관세계 없이 나만 있는 것도 불가능해요.
항상 동시에 출연하고 있다.
서로 연기하고 있다.
그리고 나와 객관이 연기하고 있는데 알고 보면
객관과 객관의 만물들도 서로 연기하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하여튼 뭐 하나가 따로 존재할 수는 없어요.
이 전체에 다 연결되어서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게 하나의 존재 방식이다.
그래서 이 연기가 깊어지면
현상과 본질도 서로 연기하고 있어요.
현상과 본질도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고
서로 지금 연기하고 있다.
둘이 아니다.
함께 있다.
뭐 표현은 다양한데.
그래서 [주객이 연기]해서 이 현상계가 펼쳐지는데
현상계의 법칙은
아까 본질의 법칙은 본래 청정하지요.
그거는 청정하거든요. 더럽혀지지 않아요.
근데 현상계의 법칙은 [본래혼잡]해요.
항상 상대적이에요.
-깨끗한 게 있으면 더러운 게 있고
-큰 게 있으면 작은 게 있고
-높은 게 있으면 낮은 게 있고
-아름다운 게 있으면 추한 것이 있고
이건 본래 그래요, 이 현상계의 법칙은.
그래야 온갖 경험이 성립하니까.
절대는 경험이 없어요.
절대만 있으면
절대에는 경험이라는 것이 없다.
그렇잖아요, 상대가 없으면.
근데 상대에서 온갖 경험이 일어나니까
이 상대가 혼잡해야 돼요.
그러니까 이것이 상대의 법칙이에요.
상대 세계는 본래혼잡해요.
이것도 중요해요.
근데 절대는 본래 청정하고
상대는 본래혼잡하다는 것을 모르면
상대를 청정하게 하려고 애쓰게 돼요.
이해되시나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에요.
그래서 이 세계를 조작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건 불가능하다.
있는 그대로 그냥 깨닫는 거예요.
본질은 청정하고 현상은 혼잡하다.
그리고 이걸 그대로 수용하기
딱 깨닫고 수용하기
/본래혼잡을 알게 되면
현실을 수용하게 된다./
[현실을 수용]한다, 이 말도 굉장히 어려워요.
현실은 혼잡해요.
나나 가족이나 이 사회나 혼잡해요.
이거를 수용하는 것이 지혜예요.
근데 보통 사람은
이것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이걸 바꾸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하여튼 제가 20년간 사회 고전을 통한 사회 교육을 하면서
그 모토가 의식교육이었어요.
그래서 좀 더 ‘한국인들을 바꾸자’ 하는 그런 뜻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도 열심히 했는데
고전교육을 통해서 사람을 바꾸려고 했는데
참선을 해 보니까
그 뜻은 좋았지만 조금 더 깊어져야 되더라고요.
인간에 대한 통찰이.
인간을 교육을 잘시켜서 좋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지금은 ‘아 그것이 아니다’는 걸 지금 알아요.
잘 안되더라고요, 그렇게.
교육을 통해서 인간을 좋은 사람으로 바꾸려고 하는
소위 말하는 공자 맹자의 사상
그것을 따라서 열심히 해봤는데
뭔가가 아닌 거예요.
그래서 참선을 해서 이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왔더니
[본래청정]하고 본질은
그리고 상대세계는 [본래혼잡]한 거예요.
근데 그 본래혼잡한 세계를
본래 청정한 세계로 바꾸려고 했던 노력이었어요.
제 말 이해되나요?
무언가 나는 불만족이었어요.
그 좋은 교육을 받았어도 뭔가 불만족이었어.
근본적으로 해결이 안 됐어요.
그래서 이제는 해결했어.
해결하고 보니까
그 교육을 통해서 사람을 바꾼다고 하는 것 자체가
그게 이 세계에 대한 잘못된 관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바른 관점은
이 세상은 의식 하나인데
의식이
-본질로서는 본래청정하고
-현상으로서는 본래혼잡해요.
그래서 이 본래혼잡한 이 세계를 수용해서
수용해서 잘 흐름 따라가는 것이지
이거를 바꾸려고 했던 거.
본질은 현상이 아무리 지지고 볶아도
조금도 상관없이 청정해요.
그럼 나는 본질이면서 현상인 거죠.
본질로서는 청정하고, 현상으로서는 혼잡해.
그 혼잡한 나를 청정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아.
이게 하나의 전기라고 할 수 있어요.
그전에는 이 혼잡한 나가 마음에 안 들어서 항상 불만족스러웠어요.
그래서 이걸 좀 잘해보려고 막 애를애를 쓰는 시절을 보냈는데
그런 과정을 통해서 좀 더 성숙하게 된 거죠.
‘본래혼잡’이란 말이 또
굉장히 나를 위안을 주는 말이에요.
여기에 대해서 내가 막 바꾸려고 하고...
여러분, 내가 나를 바꾸려고 했는데 안 바뀌더라고요.
옛날에는 바꾸려고 했어요, 진짜로.
나를 바꾸려고 했어요.
바꿔야 되는 줄 알았어요.
정말 노력했는데 안 바뀌더라, 안 바뀐다.
그러고 모든 사람이 결혼하면
처음에는 배우자를 좀 바꾸려고 하지 않나요?
내 식으로 배우자를 바꾸려고 다 노력하지 않나요?
그래서 갈등이 좀 있는데
결과는 어때요? 바뀝디까?
절대 안 바뀌는 거죠.
바뀐다는 것은
내가 그걸 수용하는 거예요.
하여튼 인간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계속 혼잡한 이것이 당연한 거예요.
이게 법칙이에요.
현상계의 법칙.
‘본질과 현상에서
청정과 혼잡이 이렇게 되는구나’ 하고 알고
현실을 수용한다.
그러면 성숙해져서 현실을 수용하게 돼요.
현실과 싸우지 않아.
‘현실과 싸우지 않는다’ 이 말은
자기하고도 안 싸운단 말이에요.
자기의 모자란 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얘가 약간 그날따라 보름달이 뜨고 늑대가 울부짖는 느낌이 오면
잠깐 “그래 뭘 원하니?” 해서
“뭐 술 마시고 싶냐?” 그래서 술도 한잔 먹이고
이러면서 달래고.
이렇게 막 그걸 안 하고
순리대로 그때그때 이렇게 잘 산다.
현실을 수용한다.
그러면 현실을 바꾸려고 하지 않게 되죠.
맞습니까?
근데 그 새를 못 참고 이 에고는
현실을 또 바꾸려고 뭔가 또 움직여요.
그래서 각찰이라는 말은
현실수용한 다음에 우리의 공부가
각_ 깨어서
찰을 살핀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의식이 [각찰휴헐](覺察休歇)
각_ 깨어서
지금 본질과 현상이 이렇게 잘 굴러가고 있는데
여기에 내가 간섭해서 이걸 바꾸려고 하는
그 에고의 어떤 준동, 이런 거를
각찰_ 깨어서 살핀다.
그래서 휴헐_ 쉴 휴, 쉴 헐, 쉬고 쉰다.
의식이 깨어나고 이런 이치를 안 다음에는
기존의 에고가 여전히 뭔가를 하려고 자꾸 이렇게
세간적인 욕심도 부리고
출세간적인 욕심도 부리고
-뭔가를 자꾸 이대로 있어서는 안 돼
-뭔가를 해야 돼
하고 자꾸 이상에 속는다고 할 수 있어요.
그 이상에 속는 것을
각찰_ 깨어서 살펴서 쉰다.
뭔가 하려고 하는, 조작하려고 하는 그것을 쉰다.
각찰하고 휴헐하면
저절로 에고는 힘이 빠져요.
이거를 그 생각을 항복기심(降伏其心),
그 생각을 생각하는 마음을 항복 받는다, 이렇게 표현하죠.
그래서 이렇게 쉬어진다.
그리고 각찰휴헐을 하고 상견기상(相見其相)
이 말도 육조 혜능 스님의 말이에요.
이 말도 참 좋은 말이에요.
상견_ 항상 본다.
각찰하고 쉬면서 항상 뭘 보느냐?
상견_ 항상 본다
기_ 자기의 상을 본다.
마음공부는 이런 원리를 한번 안 다음에는
자기 상을 보는 거
상_ 언제나
견_ 본다
기_ 자기의 상을, 나의 허물, 나의 지나침, 나의 상.
오늘은 나의 상에 대해서 공부를 좀 할 거예요.
자기 상을 보는 것이 마음공부의 핵심이다.
의식을 깨달은 다음에는
의식을
-지금 이거
-지금 깨어 있는 이거
그러니까 의식을 ‘아, 이거구나’ 하셔야 돼요.
그냥 이렇게 이해하는 거 하고
‘인간은 누구나 의식이 있지’ 하고 이해하는 거 하고
지금 이 순간 깨어서 이렇게 있는 자기 의식을
‘아, 이거구나’ 하고 한 번 이렇게 확인하는 거
알아차리는 거 하고는 달라요.
이걸 한 번 확인을 해야지 깨어나요, 의식이.
그래서 의식이 한 번 깨어나고 난 뒤에는
그다음에는 뭘 하느냐?
언제나 자기 상을 보는 거예요.
옛날의 습관.
불교에서는
‘저 사람은 상이 있어, 상이 높아’ 이런 말 쓰는 거 아세요?
그 말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이 있어요.
상은 다른 말로 하면 분별심
분별심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비심, 시비하는 마음이 있어요.
옳다 그르다 하는
옳다 그르다고 고집하는 마음이 사람마다 있어요.
하여튼 그래서
‘저 사람은 상이 높아’ 이런 말을 해요.
그래서 상을 치유하는 좋은 방법은
상과 상끼리 서로 부닥치는 거예요.
서로 깨지는 거예요, 부닥쳐서.
깨지는 게 상을 치유하는 방법이에요.
그래서 그 옛분들은 그렇게 말했어.
감자 껍질을 벗길 때는 망태기에 넣어서 물에 넣어서 서로 비빈다.
감자와 감자를 서로 비비면 그 껍질이 벗겨진다
그렇게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그래서 이런 집단생활이 상을 깨는 좋은 방법이에요.
그래서 스님들이 출가해서
독살이_ 혼자 사는 것보다
집단생활을 하는 걸 기본적으로
그 독살이를 좀 공부가 성숙한 사람이 아니면
그 혼자 살면 위험하다고 이야기를 해요.
같이 살면서 상이 벗겨져야 되니까.
살면서 서로 간에 하여튼 서로 부닥치죠.
우리는 집에서 서로 간에 부닥치는 게
서로 상이 깨지는 과정이라고 이렇게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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