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탐구하며, 진정한 자아는 노력 없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무위자연'의 상태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00:30].
- 진정한 자아와 의식: 우리가 흔히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심(無心)할 때 사라지며, 객관과 주관이 함께 고요해지는 상태를 '공산무인(空山無人)'으로 비유합니다 [03:11]. 물은 흐르고 꽃은 피듯이, 마음이 집착하지 않고 흘러갈 때 존재의 아름다운 작용이 드러납니다 [16:29].
- 시간의 본질: 시간은 만물 속에서, 특히 '나' 자신을 통해 흐르며, 나의 본질이 곧 시간이라고 강조합니다 [23:50]. 시간은 의식이자 생명이 펼쳐지는 현상으로, 우리가 '현재'라고 느끼는 순간은 의식, 시간, 공간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15:14].
- 깨달음과 현재: 모든 인간은 이미 현재를 살면서도 '새로움'을 찾아 현재를 찾으려 하는 모순을 지니고 있습니다 [19:28]. '현재를 잡으려고 하는 시도를 멈출 때' 비로소 자신이 곧 현재이자 의식,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31:14]. 이는 성경 구절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고요히 있어라, 그러면 내가 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와도 연결됩니다 [04:00].
- 욕심을 내려놓는 것: 깨달음은 무언가를 쌓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잡으려는 욕심을 자각하고 내려놓는 것입니다 [36:27]. 마음을 비우고 물처럼 흐르게 하면, 하는 모든 일에서 '존재의 꽃'이 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34:57].
우리가 모여서 공부하는 목적은
‘나는 누구인가’를 밝히는 거죠.
‘나는 누구인가’ 할 때
지금 한쪽 창문을 열었는데
마침 여기가 길가라서, 저기 골목이고 그래서
소리가 저리로 다 들어와서
이제 수업 시작하면서 ‘닫아야겠구나’ 하고 느꼈죠?
그게 나예요.
근데 이 모든 것은
제가 노력해서 한 게 아니고
자동적으로 지금 계절이 바뀌었고 또 날씨가 더워졌고 문을 열었고
또 소리가 나니까 닫고
이 모든 행동이 저절로 된 거죠.
무위자연_ 노력하는 바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
그 일을 하는 게 본래 나라고 할 수가 있어요.
이렇게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우리 마음이
저절로 알아서
물 흐르듯이 흐르고 있거든요.
이 시가 생각이 나네요.
공산무인(空山無人) 수류화개(水流花開)
흔히 공부를 나타내는 참 좋은 시가 많아요.
그중에 하나가
공산무인_ 텅 빈 산에 사람이었다.
이 말은 입정할 때, 가만히 있을 때
가만히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을 때
마음이 가라앉는 그 효과가
주관과 객관이 같이 가라앉아요.
우리 마음이 욕심이 있으면
주관하고 객관이 함께 일어나고
그 욕심이 무심이 되면
주관하고 객관이 함께 가라앉아서
객관이 가라앉았다는 것은 ‘공산’_ 산이 텅 비었다.
그리고 주관이 함께 또 가라앉았다_ ‘무인’
텅 빈 산에 사람이 없는데
근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있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자기 마음이 무심해졌다, 그런 뜻이겠죠.
이렇게 무심할 때는
우리가 말하는 ‘나’라고 하는 것은 사라지거든요.
공산무인_ 객관과 주관이 함께 고요해졌을 때
수류_ 물은 흐르고 꽃은 핀다.
소리는 나고, 수업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서
“저 문을 닫읍시다” 하고 한 우리들의 행동이
물은 흐르고 꽃이 핀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네요.
영어로 하면 성경 구절에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still은 고요하다는 뜻이에요.
우리 마음 하나가 고요해지면
Be still, 마음이 고요해지면
and know that I am God_ 우리가 순수한 우리의 본질이 된다는 것을
자기의 순수한 본질을 알게 된다.
순수한 본질은 뭐냐 하면
여러분 우리의 순수한 본질은
여기서는 서양 전통에서는 갓, 신이라고 했는데
우리한테는 자연이라고 할 수가 있죠.
“고요하면 나는 자연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무튼 지금 간단한 그 말씀을 시작하면서
여기서 ‘갓’이라고 하고, ‘자연’이라고 하고
혹은 지금 우리들이 ‘본래면목’이라고 하는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걸로 표현하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이 현상의 모습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다, 이거예요.
우리가 2시간 공부를 하는데
공부의 가장 주된 목적은
어떤 지식을 알려고 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본래면목인
지금 이 순간 이렇게 멀쩡하게 깨어서
더우면 문을 열고, 그리고 소리가 나니까 문을 닫고 하는
멀쩡하게 깨어 있는 이 한 물건.
모든 인간한테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는
모든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다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이 한 개의 한 물건을 가장 가깝게 표현해 본다면
누구나 다 알 수 있게 표현해 본다면
‘생명’이라는 말로 쓸 수가 있겠네요.
‘생명이 있다’ 그리고 ‘생명이 지금 살아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 생명이 자기 본래면목이에요.
그런데 이 생명이
우리들은 자기 생명을 발견하게 되면
그 생명이 낱생명인 줄 알았는데
낱, 개인의
낱. 이런 말 좀 생소하시죠?
근데 우리 말이니까 어떤 분이 이런 말을 썼더라고요.
그래서 ‘낱생명’인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온생명’이더라.
우리한테 지금 주어져 있는 이 생명이
‘낱생명’인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이게 ‘온생명’이더라.
왜냐하면 생명은 낱이니, 온이니 하는 말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개체한테 주어져 있는 생명이
알고 보니까 우주 전체에 꽉 차 있다.
이 생명 하나가
이렇게 알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매개체가
지금 이 순간 깨어 있는
우리의 이 의식인 거예요.
그래서 지금 ‘생명이 작용하고 있다’, 이 말이나
‘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생명= 의식= 존재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죠.
그리고 그것이 지금 이렇게 작용하고 있다
‘작용한다’, 이 말을 ‘시간’이라고 이야기하고
오늘의 주제는 시간이에요.
그래서 지금 항상 이 질문부터 하고 시작하고 싶네요.
정신이 있어요? 나갔어요?
정신이 있습니까? 나갔습니까?할 때
정신이 있죠.
그러니까 이 정신, 지금 나 한테 있는 이 정신
문제는 여러분께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정신을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자연이지, 자연스러운 거지
이것을 특별한 상태라고 생각하시면 안 된다.
그래서 지금 의식은 있는데
이 의식이 그냥 자연스러운 상태의 의식
이게 우리들의 본래면목이에요.
본래면목을 다른 말로 하면
본지풍광(本地風光)이라는 말도 많이 썼어요.
본지(本地) 할 때 지(地)는 스페이스란 뜻이죠. 땅 지(地)자니까.
번역어로 할 때 ‘자리’라고 해서
본지는 본래자리예요.
무엇의 본래자리인가?
의식의 본래자리.
그러면 여러분 의식의 본래 자리가 어디예요?
지금 이렇게 있는 지금 이것이
우리 시야가, 우리 시야 전체가
본지_ 의식의 본래 땅, 본래자리
그리고 이 의식의 본래자리에는 항상
풍은 바람 풍(風)자죠. 광은 빛 광(光)자니까
항상 바람이 불고, 빛이 비추고 있다.
지금 눈앞에 이 시야에
여기가 의식의 자리
의식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의식의 공간에
텅 비어 있는 물리적인 죽은 것이 아니라
항상 생명의 바람이 불고
빛이 비추고 있다.
그래서 하여튼 이거를 빨리 알아차려야 돼.
이 방법 저 방법 다 소용없고
무조건 ‘꿩 잡는 게 매다’는 그런 말처럼
무조건 방법 없어, 그냥 알아차려야 돼요.
지금 이 순간에 의식이 여러분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거예요.
그냥 그거.
그냥 그거를 두고
그거를 가지고 특별한 걸 찾는 것은 어리석음이에요.
그러면 특별한 걸 찾을 때 찾는 그것이 뭐겠어요?
지금 이 의식을 가지고 찾겠죠.
‘의식을 가지고 의식을 찾는다’, 이 말은
어리석다는 말이다.
그럼 풍광은 뭐냐?
본지에는 의식 공간에는 죽어 있는 게 아니라
항상 바람이 불고 빛이 비추고 있다.
오늘 같은 날씨네.
본지풍광에, 이 시가 생각나네요.
신광불매 만고휘유(神光不昧 萬古煇猷)
중국의 소주, 황주 들어보셨나요?
중국 정원은 소주에 주로 많아요.
절정원이나 이런 것들이 있는데
그 소주에 아주 그 아름다운 정원을 만든
중봉이라고 하는 스님이 있었어요.
중봉 명본이네요.
그분이 하여튼 아주 미적인 감각도 뛰어나서
소주에는 그분이 만든 정원이 있어요.
그분의 시예요.
중봉의 시에
신광(神光)_ 신령스러운 빛이
여러분 지금 저 보십니까?
여러분이 신령스러운 빛으로
저를 이렇게 만들어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본인이 신령스러운 빛으로, 의식의 빛으로
본인의 의식의 빛으로 비추어서
이 삼라만상을 저를 포함해서 지금 이렇게 보고 계세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식이
신광(神光)_ 신령스러운 빛이라고 해요.
그것이 휘유(煇猷)_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불매(不昧)_ 잠든 적이 없어서
매(昧)_ 잠들 매 자죠. 오매할 때 어둡다, 이런 말도 쓰는데
신광은 여러분 의식이 빛이, 신령스러운 의식의 빛이
불매_ 잠든 적이 없어서
만고(萬古)_ 옛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영원히 만고에
휘유(煇猷)_ 아름다울 휘(煇)에 빛날 유(猷)자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입차문내막존지해(入此門內莫存知解)
저 뒤에 문구가 뭐냐 하면
입차문내(入此門內)_ 이 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막존지해(莫存知解)_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뭐지? 하지만 말라
그러니까 be still, 고요히 있어라.
이때 still은 생각이 고요하다, 이 말이죠.
근데 이게 어렵네.
근데 아무튼 수업을 시작하면서 항상 중요한 것은
수업의 내용보다도
이 수업 시간 동안에
우리가 이걸 공유하는 이게 중요한 거예요.
지금 깨어 있는 이것을
함께 깨어 있기, 이게 수업의 목표예요.
그리고 함께 깨어 있는 순간만큼
인생에서 아름다운 순간은 없어요.
왜냐하면 이것이 영혼이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영혼을 맛보는.
영혼이란 말은 간단해요.
영혼을 당장 증명할 수 있는 게
생각만 없으면
의식이 깨어 있으면 생각이 be still 해져요.
의식이 깨어 있으면 생각은 고요해져요.
그럼 생각이 고요해지면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과거와 미래는 함께 still 해져요.
과거 미래가 함께 사라져요.
그러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오롯한 지금 눈앞에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이 현재밖에 없어요.
현재가 의식이에요.
그러니까 완벽하게 이코르(=)예요.
현재가 의식이고
그리고 지금 눈앞에 여기
시간과 공간과 의식이 항상 딱 만나고 있다.
어디서?
이걸 뭐라고 표현하지?
많은 분들이 목전이라고 불렀어. 눈앞에서.
지금 눈앞에서 시간, 공간, 그리고 인간의 의식이 이렇게 지금 만나고 있어요.
여기에 한번 눈을 떠서
그리고 이 상태를 살게 되면
생각에 빨려들지 않게 된다.
텅 빈 산에 무인
사람이 없어서 물은 흐르고 꽃이 핀다.
아이고 아름답네.
물이 흐른다_ 우리 마음이 소리가 나면 ‘아 조금 시끄럽구나’ 하고 문을 닫는
이때 수(水)는 우리 마음이에요.
항상 물 수(水)자는 마음 심(心)자랑 동의어예요.
한자에서 물 수(水)자는 심방변(심(忄)이라고 해서 마음 심(心)자하고 동의어예요.
그래서 물이 흐른다. 마음이 흐른다.
이때 ‘마음이 흐른다’ 이 말은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렇게 깨어 있으면 깨어 있는 그 자체로 지족하게 돼요.
이렇게 깨어 있으면, 생각이 없으면
이 상태 이대로
일종의 인간한테는 영혼처럼 느껴져요.
생각이 없으니까.
생각이 없으니까 과거 미래가 없어서
요 깨어 있는 이 시간은 영혼처럼 느껴져요.
이때 영혼처럼 느껴질 때 가장 만족스러워.
인간의 마음이.
마음이 만족스러우니까
어딘가에 가서 이렇게 집착하지 않아요.
수류(水流)_ 마음이 흐른다, 집착하지 않는다.
마음이 집착하지 않는 그곳에는 꽃이 핀다.
그 모든 인간의 작용이 아름답게 이렇게 드러난다.
존재의 꽃이 핀다_ 수류화개
우리 마음이 어디엔가 집착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존재의 꽃이 피는 거예요.
수류화개(水流花開)
마음이 어딘가 집착하지 않고 흐르고 있으면 존재의 꽃이 핀다.
이게 인간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들이죠.
이런 걸 실천하는 그게 지금 우리들의 공부예요.
제가 돌아봐도 제 인생은 참 아이러니해요.
저를 찾아서 평생을 이렇게 순례를 온 그런 느낌이에요.
이게 모순이다.
자기가 자기면서
자기를 찾아서 평생 순례를 한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 같아요.
제가 학위 논문을 쓴 그 시인이
노벨문학상을 받아서
노벨문학상 시상식 전날, 갈라쇼 이런 거 있죠?
그 해에 노벨상 수상자가 전부 연미복을 입고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국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그때 파티를 해요.
시상식 전날 저녁에.
근데 그 자리에서 문학상을 수상한 사람이 연설을 해요.
근데 그 연설의 제목이 <현재를 찾아서>입니다.
그 내용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뭐냐 하면
“참 아이러니합니다.
모든 인간이 현재에 살면서
한 번도 현재를 떠난 적이 없으면서 현재를 찾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현대문학의 영원한 주제는 ‘현재를 찾아서’라는 거예요.
그분이 볼 때는.
왜냐하면 현대라는 말 자체가 모던이잖아요.
모던이라는 말 자체가
‘새로운 것을 찾아서’라는 뜻이에요.
라틴어로 ‘모데르노’라는 말이 ‘새로움을 찾는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현대인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선 인간들, 이런 뜻이에요.
현대라는 말 자체가.
현대문학은 새로움을 찾아 나서는 게
모든 현대문학의 공통된 주제다.
근데 이거는 너무나 모순적인 사실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현재를 살면서...
여러분, 현재는 새롭지 않나요?
현재는 난생처음이에요. 매 순간순간.
모든 사람이 난생처음을 살면서 구태의연하게 산다, 이거예요.
거기서 벗어나려고 어떤 새로움을 찾는데,
현재에 살면서 현재를 찾는 것이 현대문학이었다.
근데 이 말이 얼마나 모순적인 것인가 하는 걸 알아채는 게
우리가 인간적으로 성숙하는 길이다.
그런 내용이었어요.
그걸 그 작가는 자기의 일생을 통해서
자기가 평생 현재를 찾아서 노력했다.
그리고 자기가 돌아보니까
모든 위대한 현대문학의 주제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자기가 존경하는 선배 작가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을 ‘시간의 광부’라고
시간을 캐는 것, 시간을 캐는 ‘시간의 광부’라고 불렀다.
그 전통을 나도 이어받고 있다.
거기에 내가 충실했기 때문에
아마도 오늘 노벨문학상을 내가 받는 것 같다.
하여튼 이런 식으로 그 연설을 했어요.
문학이라는 걸 가지고
우리가 이 존재, 혹은 예술을 통해서 이 존재로 들어가는데
그 핵심적인 포인트가
시간이라는 거고
그 시간은 언제나 지금 눈앞에 있는 이 현재
그러니까 하나의 문이라고 하는 거예요.
‘시간은 존재의 문이다.’
이게 인문학의 모토예요.
특히 현대인문학에.
시간은 존재로 들어가는 문이다.
지금 이 순간 깨어 있는
현재를 자각하는 것 자체가 깨어 있는 의식이죠.
의식이 이 세상에 드러날 때
현재를 통해서 드러난다 이 말이에요.
존재인 의식이 이 세상에 작용할 때, 나타날 때
지금 현재라고 하는 걸 통해서 나타난다.
우리는 누구냐 하면
시간이 이렇게 나타난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저도 지금 평생 문학을 공부한 사람이라서
시간이 무엇인지 저의 주제였거든요. 논문의 주제였고.
‘시간이란 무엇인가?’를 평생동안
저도 그러고 보니까 시간의 광부네.
계속 시간을 파왔어요.
근데 제가 한 번 이런 생각한 적이 있거든요.
“시간이 흐르는데 과연 어디서 흐를까?”
여러분, 시간이 흐르는 건 맞죠?
어디서 흐를까요?
시간이 어디서 흐를까?
시간이 어디 저기서 흐르는 건 아니죠?
여러분 시간이 어디 저 하늘에서 흐르고
저 강에서 흐르고 그런 건 아니죠?
“시간이 어디서 흐르느냐?” 할 때
시간은 만물 속에서 흘러요.
“시간이 어디서 흐르는가?”
만물 속에서 흘러.
그 만물 중에 대표적인 것이 ‘나’잖아요.
나의 본질이 지금 시간이야.
다시 말하면
시간이 어디서 흐르는 게 아니고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시간이 흐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만 크게 생각해 보면
아무개, 김 아무개 이 아무게가 살아간다고 하지만
조금만 크게 생각해 보면
이 아무개가 산다고 하는 건 하찮은 거고
시간이 지금 나를 통해서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그래서 지금 아무개는 화신이고
이 아무개를 통해서 살아가는 시간은 보신이고
그리고 그것의 본질은 변치 않는 의식이
지금 이렇게 있는 거예요.
그런 문학가들은 그런 깨달음을 가지고 있어요.
-내가 산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시간이 나를 통해서 사는 거구나.
-따로 시간이 있는 게 아니고
지금 나를 통해서 나오는 이것이 시간이구나.
-그리고 시간은 의식이 생명이라서
생명이 펼쳐지는 생명이 펼쳐지는 게 시간이구나
이런 깨달음들이 인문학적인 깨달음이에요.
근데 이것이 선에서도 사실은
그런 표현을 똑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다 통하는 거죠.
그래서 지금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사실은.
“모든 사람이 자기이면서 자기를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지금 이 순간에서 여러분이 깨달을 수가 있어요.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은
저처럼 자기를 찾지 않나요?
저만 이상한 사람인가?
여러분도 나름대로 자기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찾는 그것이 자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깨달아야 돼요.
지금까지 내가 나를 찾았다면
매 순간순간 찾던 그것
계속 나를 찾아왔는데
알고 보면
매 순간순간 나를 찾던 그것이 나였어요.
지금 이 순간 작용하고 있는 자기를 돌아보는 것
그래서 이런 말을 쓰죠.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일초_한 번 초월해서, 한 번 뛰어서
뛴다는 말이에요. 한 번 탁 도약을 해서
직입_ 곧바로 들어간다.
여래지_ 여래의 경지에, 여래의 그 의식 상태로 바로 들어간다.
한 번 뛰어서 곧바로 들어간다.
이때 한 번 뛴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탁 돌아보는 거예요.
지금 이 순간 제가 말하잖아요.
이 순간 말하는 이거거든.
근데 지금 자기가 자기를 못 깨닫는 이유는
이것을 깨달아야 되는데
자기도 모르게 이거를 밖에서 구하기 때문에.
자기를 찾는데
자기를 찾으려면 이렇게 해서는 영원히 못 찾는 거예요.
자기를 찾는 순례를 떠났다가
어느 순간 이걸 탁 뒤집는 거
지금 이 순간 자기.
그래서 지금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리면
‘현재를 잡아라’는 말은
‘현재를 잡는 법’은
보세요.
눈앞에 지금 현재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재는 지나가죠?
그럼 이 현재를 잡는 법은
현재가 눈앞에 있잖아요.
이 현재를 내가 잡으려고 하면
잡으면 벌써 지나가 버리죠.
현재를 잡으려고 하면
그 현재는 벌써 과거가 되어 버린다.
현재를 잡으려고 하면 영원히 못 잡는다.
일초직입여래지하는 방법은
여래지를 대상으로 삼아서 내가 들어가려고 하면
영원히 못 들어간다.
여래지가 어디 있는가?
여기 있다, 이거예요.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여러분 현재가 자기예요.
현재가 대상이 아니고
지금 자기를 통해서 현재가 지금 흐르고 있다.
아이고, 제가 말해놓고 보니까
결론이 아까 이야기한 그거네.
여러분, 시간이 어디서 흐르는가?
어디 저 허공에서, 저 하늘에서, 산에서 흐르는 게 아니고
시간이 지금 나를 통해서 흐르고 있죠.
이걸 대상으로 삼는 게 아니라
“아, 내가 시간이네, 시간과 나는 완전히 하나네.
시간과 나는 분리될 수가 없는 거네”하는 그 깨달음
그게 도약이다.
초과, 이렇게 탁 깨닫는다 이거야.
깨닫는 방향은 자기한테.
깨닫는 거다.
시간을 대상으로 잡을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놓아버리면
Be still, 모든 시도가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know that I am God
God_ 의식이, 시간이 지금 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거다.
뭘 돌아봐야 하는가?
나도 모르게 의식을 대상으로 잡으려고 하는구나.
이걸 빨리 깨달아야 돼.
Be still을 멈출 지(止).
‘고요히 하라’ 이 말은 멈춰라.
현재를 잡으려고 하는 시도를 멈춰라.
그러면 and know_ 알 거다,
that I am God_ 내가 바로 현재라는 거를
know_ 관(觀)
지(止)관(觀)_ 멈추면 안다, 멈추면 본다.
무엇을 보는가?
영어에 참 그 말이 재밌네.
영어에 I see 하는 게 ‘본다’는 말도 되고, ‘안다’는 말도 있죠.
상대방이 뭐라 뭐라 그러면 ‘I see’ 그러잖아요.
‘본다’는 see를 가지고 ‘안다’는 말로 쓰네요.
맞아요?
지금 ‘멈추면 본다’ 이 말이
‘멈추면 안다’
‘본다’ 하고 ‘안다’는 말이 =가 되는
그게 초다 이거야, 깨달음이다 이거야, 깨달음
‘의식이 뭐냐?’ 할 때
이게 의식이에요.
알아듣겠습니까?
의식이 뭐냐? 할 때
잠깐 멈추고 있으면 이거다 이거예요.
다시
의식이 뭐냐?
잠깐 멈추면 이거다 이거예요.
그러면 내가 지금 의식으로서 깨어 있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는
졸지 않고 있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이 꽃을 한 송이를 들었다.
염화를 했다. 꽃을 들었다.
그러면 상대방이
“저도 깨어 있습니다.”
저도 어디 생각 속에 빠져 있지
생각 속에 빠져 있으면 이걸 놓치죠. 자기 정신을.
생각에 빠지지 않고, 한눈 팔지 않고
“저도 깨어 있습니다”라고 응답하는 것이 미소를 지었다.
염화미소가 선의 출발이에요.
의식은 불식_ 쉬지 않는다.
나를 통해서 이 순간에도 이렇게 작용하고 있죠.
나는 누구냐?
작은 나는 아무개지만
나의 본질은 생명, 의식,
그것이 쉬지 않는다, 쉬지 않는다를 시간이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항상 생명은 활발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게 지금 우리들의 영원한 주제예요.
이걸 알면 이걸 알면
이 생명을 타고 사는 거야.
개인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나를 통해서 이미 생명이 작용하고
이렇게 활발하게, 활발발하게 이렇게 살고 있으니까
그 생명이 살아가는 흐름에 개인이 타면 되잖아요.
이게 지혜라고 하는 거예요, 지혜.
개인이 탄다. 이 말을
개인이 타려면 욕심이 좀 없어야 되잖아요.
욕심이 없다는 말을 공산무인(空山無人)이라고 표현을 했어.
내가 가급적이면 마음을 비우고
be still_ 마음을 비우고
수류화계(水流花開)를 타고 산다.
나도 내 마음도 물처럼 흐르고
그러면 내가 하는 모든 일에서 꽃이 핀다.
내가 마음을 비우고 하면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꽃이 핀다.
그래서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이란 말이나
지관(止觀)이란 말이나
공산무인(空山無人) 수류화개(水流花開)란 말이나
지금 현재를 어떻게 잡는가
현재를 잡으려고 하는 그 욕심을 거둬드리면
마음을 비워버리면
내가 현재다.
내가 현재고
내가 의식이고
내가 생명이고
이거를 넓게 말할 때는
내가 신이다, 하는 쪽으로까지 확장이 되는 거예요.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도 나를 깨닫고 싶어요”라고 말씀하시거든요.
그러면 제가 뭐라고 하냐 하면
“선생님은 이미 당신이 선생님입니다” 하고 말을 해줘도
“그건 알아들어요. 그 말은 나도 알아요.
그런데 나는 나를 잡고 싶어요” 하는 그 욕심 때문에 지금 못 잡는다.
진리에 대한 욕심, 이것 때문에 헐떡인다.
이거를 알아채는 게 공부다.
따라서 공부는 무언가를 막 쌓아 올라가는 게 아니라
나의 욕심을 드러내는 것
나의 욕심을 자각하고 손을 놓는 것
욕심은 뜨거운 감자라 해요.
뜨거운 감자를 놓으면 되는데
쥐고
“뜨겁다 뜨겁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라고
저는 요즘 하여튼 좀 곤혹스러워
모든 사람이 와서 뜨거운 감자를 쥐면서
“어떻게 놓습니까?”라고 물어
“그거 놓으면 된다”고 이야기를 하는데도
“어떻게 놓습니까?”라고 물어요.
참 기가 막혀.
본인이 놓아야지.
자, 일단 이것으로 정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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