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위법과 무위법의 이해: 진정한 깨달음은 유의법의 노력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무위법으로 전환될 때 찾아옵니다 [00:29].
- 의식의 본질과 세계의 존재: 우주 삼라만상은 나의 의식 바탕에서 펼쳐지는 것이며, 의식은 연극의 무대와 같습니다 [03:40].
- '나'의 재정의: 몸이 아닌 의식: 진정한 '나'는 몸이 아니라 의식이며, 의식이 곧 깨달음입니다 [06:51].
- 경허 스님의 사례와 다양한 경험의 중요성: 의식이 본질이라면 다양한 경험을 통해 무한한 가능성을 펼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11:46].
- 깨달음의 과정과 가치: 큰 의심이 큰 깨달음을 가져옵니다 [22:48].
- 영산회상과 수월 도량: 인간과 인간이 의식으로 깨어 있는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30:55].
제가 계속 안목이라고 하잖아요, 안목.
물에 비친 달을 건지는 것은 유위법
현상계에서 노력하는 것은 유위법
하늘에 뜬 달은 본질
본질을 그냥 딱 알아차리는 것은 무위법
그래서 모든 깨달음은 무위법 끝에...
여러분 과정이 이래요.
부처님도 마찬가지예요.
6년간은 유위법으로 고생했어요.
근데 실패했어요.
그리고 자기 잘못을 깨닫고
유위법을 놓아버리니까 무위법으로 전환이 되었어요.
6년간 유위법으로는 못 깨달았는데
일주일간 무위법으로 깨달았다.
이게 우리 공부예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제 경험도 유위법으로 고생하다가 되감기를 해보니까
“왜 못 깨달았지?” 하고 되감기를 해보니까
자기 잘못을 발견하고
“아차”하고 무위법으로 딱 전환되면서
저도 그렇게 깨달았거든요.
이 공부를 깨닫는 계기가 유위법을 하다가
“아, 이게 잘못되었구나” 하는 거를 되감기 하면서
복기라 그러죠.
바둑을 둔 뒤에 다시 둬 보면서
“어디가 잘못되었는가”를 다시 패착점이 어딘가, 이런 걸 찾아내잖아요.
그것처럼 우리 수행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누구나 유위법을 할 수밖에 없어요.
현상계에서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다가 잘못한 점을
“아차, 여기서 놓쳤구나” 하고 알아채는 순간
무위법으로 전환되면서 깨달음이 탁 와요.
지금 깨달음의 구조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유위법으로 노력을 해야 돼요.
그래서 ‘처음부터 하지 마라’ 이거는 저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봐요.
처음부터 안 해서는 아무것도 안 돼.
무명 속에서 아예 그냥 벗어날 길이 없어요.
아무것도 안 해 가지고는.
열심히 하다가 놓아야지
그게 아주 중요한 기점이에요.
하여튼 서동파의 여동생이 아름답게 시를 썼어요.
저는 첫 구절에서 사실은 좀 약간 매혹되었어.
그믐달에서 초생달이 싹 나왔다가
밤하늘을 돌잖아요.
돌 때 은하수를 지나면서 갈려
그래서 갈리고 갈려서 매번 갈려서 이 달이 커지다가
반달을 지나고
마침내 보름달이 딱 된다 이거예요.
밤하늘을 돌고 도는 것이
은하수에 갈려서 또 뽀얀 얼굴이 드러난다.
이렇게 표현을 했어요.
/삼천대천세계가
지금 나의 의식이 없으면
의미가 없을뿐더러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진짜 우리가 없으면 이 세계가 없어져요.
이걸 매일 우리 경험해요.
밤에 잠이 푹 들면 다 사라져 버리죠.
모든 게 다 사라지죠.
현상계가 다 사라진다.
/지금 이 우주 삼라만상이
내 의식의 바탕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의식은 하나의 바탕이에요.
바탕이라는 건 무슨 말이에요?
그라운드, 필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무대
무대가 있어야 연극이 펼쳐지죠.
연극 배우들은 가지만 무대는 그대로 있잖아요.
이게 우리 의식이에요.
그리고 무대를 장식하는 주인공의 가장 대표적인 것들이 생각들이에요.
의식에 생각이 출몰하고 있는 것
여기 무대에 배우들이 연기하는 거하고 같아요.
그래서 바탕이라고 한다.
/허공은 내 의식 공간이고
만물은 내 의식이 비추인 그림자다./
의식을 많은 분들이 허공이라고 불렀어요.
의식을 허공이라고 불렀어요.
그럼, 지금 허공이 어디 있어요?
눈앞에 있잖아요.
이게 의식이라는 거예요.
제발 좀 믿으시라고, ㅎㅎㅎ
모든 깨달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허공이 그냥 맨 허공이란 없다.
허공은 신령스러운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이렇게 표현해요.
그냥 허공은 없다.
신령스러운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이때 신령스러운 기운이
바로 내 의식인 거죠.
아까 세종문화회관에 불 끄고 문 닫고 나갔으면
완전히 암흑의 공간밖에 없을 거 아니에요.
근데 거기가 그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인간이 있어야, 인간의 의식이 있어서 그런 것들이 펼쳐진다.
이 세계가.
그러니까 의미가 없을뿐더러 존재하지도 실제로 않는다는 거예요.
지금 안드로메다에 거기 먼지 풀풀 나는 먼지하고 돌덩어리가 있긴 있겠죠.
안드로메다의 어느 별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 이거예요.
아무런 그게 존재 자체가 의미가 없는 거죠.
내가 이렇게 봐줘야만이 존재로 드러난다, 모든 게.
내 의식이, 이 허공은 그냥 허공이 아니고
다시 말하면
내가 이렇게 있어주니까 내 의식이 펼쳐져 있고
내 의식의 공간 속에 삼라만상이 존재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이게 사실이에요.
당장 여러분 눈만 감아도 싹 사라지잖아요.
그냥 당장 눈만 감아도 싹 사라지잖아요.
눈만 감아도 사라지는데
의식이 없으면 이거는 아무것도 없는 거지.
존재의 근원이 내 의식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가면
의식이 나죠.
아니 깨놓고 아무개 말고
진짜로는 의식이 나잖아요.
그리고 의식의 깨달음이죠.
‘아무개가 깨닫는다’가 아니고
의식이 그 자체가 깨달음이라고요.
그러면 의식이 나고, 의식이 깨달음이고.
그러면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전체가 다 의식이면
이 세계는 나밖에 없다.
이 말도 들어옵니까?
알고 보면.
그래서 마음공부를 할 때는 그릇이 좀 커야 돼요.
그래서 화랑들은 호연지기를 길렀어.
이거를 수용하려고
자기가 의식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수용하려고
호연지기를 길렀어요.
지금 일반인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처음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는 지금 아무개고
이 몸이 나고
그리고 지금 이 세계가 있고
이 세계에서 나는 태어나서 몇십 년 살다가 지금 죽는다고
철석같이 믿고 산다 이거예요.
그런 사람들한테서 깨달은 사람이
몸이 나가 아니고
그리고 몸을 나라고 믿는 그 생각이 나가 아니고
이 멀쩡한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이 의식이 나다 하고 말을 할 때
이걸 받아들이기가 일반인들이 어렵다 이거예요.
부처님께서 깨닫고 난 뒤에 그러셨다는 거 아니에요
“야 이건 참, 사람들한테 이야기하면 못 알아듣겠다.
나만 이상한 사람 되겠다.”
그래서 세상에 나가지 말자 그랬어요, 말하지 말자.
내가 의식이다 하니까
사람들은 몸이 나라고 하는데
의식이 나인 이 깨달음을 이야기해서는
일반인들이 못 믿을 거다.
근데 그때 하늘의 범천이, 제석천이라는 신이 내려와서
“연꽃 중에는 물속에 잠긴 것이 많지만
그래도 물밖에 삐져나온 것도 있습니다.
그럼 건지면 됩니다.
부처님이 나는 몸이 아니고 의식이라고 하는 이 진실을 말할 때
알아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디 나가십시오”
해서 부처님이 전도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지금 딱 이거잖아요.
우리 각자는, 나는 몸이 아니고 의식이다.
몸은 세상이 먼저 있고, 몸이 나중에 있고, 몇 년 살다가 태어나서 죽지만
의식이 나일 때는
의식이 먼저 있고, 이 세상이 생겼고
그리고 이 세상은 의식 속에서 생겼다가 사라지지만
의식은 불생불멸이다.
이것이 지금 얼마나 큰 전환이에요. 엄청난 전환 아닌가요?
이거를 받아들이려면 우리가 그릇이 커져야 된다.
하루아침에 안 커지니까
우리끼리는 모여서 이 사실을 자꾸자꾸 이야기를 해서
이게 자꾸자꾸 들어오게끔
우리 그릇이 커지게끔 만드는 과정이에요.
이 세상은 나밖에 없어요.
그리고 이 현상은 뭐냐?
나의 꿈이에요.
엄밀히 말하면
본질이 현상을 경험하고 있어요.
의식이
이 현상이라고 하는 꿈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러면 이게 꿈이니까
의식 입장에서는, 본질 입장에서는 현상은 꿈이니까, 실체가 아니니까
기왕 태어난 거 다양한 경험을 마음대로 해도 되죠.
아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 몸을 보존하기에 급급한데
몸을 보존하고 남의 눈치 보고, 체면 차리고 하면서
이 몸이 자기니까 급급한데
의식이 자기인 사람은 기왕 태어나서 이 사실을 깨달았다면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거죠.
그러면 기왕이면 다양한 체험을, 다양하게 해도 나는 물이 안 드니까
본질은 정말 내가 본질이라면
이 현상에서 다양한 체험을 하면 할수록 좋잖아요.
왜냐하면 이 현상을 지금 만들어내는 이유는
경험하려고, 다양한 경험을 하려고 만든다는 거죠.
그러면 경허 스님이
왜 만년에, 그 큰스님이 승복을 벗어 던지고
그리고 그냥 재가거사가 되어서
저 함경도 갑산에, 저 꼭대기 변방에 가서
그 큰스님이 거기 가서 훈장이 되어서
박난주라고 하는 이름을 써서 훈장이 되어서
애들 가르치면서 거기서 살았다 이거예요, 마지막을.
그리고 그전에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많아요.
술도 마시고, 이런 에피소드가 많아요.
그럼 그 큰 스님이, 그 깨달은
사람이 왜 그렇게 했을까? 하고
눈물이 글썽글썽하셔서 쉬는 시간에 와서
저한테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근데 그 말 듣고, 제가 순간적으로 그 말을 듣고
저도 푹 한 번 뭐가 반짝 반짝 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경허스님이 정말로 자기가
경허가 아니고, 스님이 아니고, 남자가 아니고,
정말로 의식이라면, 정말로 본질인 의식이라면
기왕 이번 생에 경허라는 이름으로 이 현상을 경험한다면
스님으로서만 경험하기에는 아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승복을 벗어버리고 변복하고
그리고 자기를 모르는 저 삼수갑산 있잖아요, 함경도에
거기 가서 어느 외딴 시골에서 글은 잘하시니까
훈장을 하면서 애들을 가르치면서
당신은 정말 자유를 맛봤지 않았을까?
정말로 자기가 의식이라는 것이 깨달음이 투철하다면
그런 자기를 또 오히려 벗어버리는
그 완전히 인두껍을 벗어버리는
그런 경험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 번 태어난 인생을 진짜 자유가 아니고
정말로 가치 있게, 보람 있게,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사는 게
정말 좋은 거다.
왜냐하면 의식이니까, 나는.
그리고 경험하러 나왔고
내가 어떤 경험을 해도 나는 물들지 않아요.
본질은 차원이 달라.
하늘의 달하고, 물에 비친 달하고, 차원이 달라요.
물에 비친 달은 수많은 물에 비치겠지만
하늘의 달은 변함이 없잖아요.
그러면 물에 비친 달로 나왔으면
수많은 경험을 하기 위해서 왔으면
경험을 다양하게 하는 게 낫지 않나?
그러면 이 조건을 잘 활용해서
좀 더 많은 일을, 좀 더 과감하게
남 눈치 보지 말고, 좀 더 과감하게 펼칠 수도 있구나.
그러면 그 펼치는 것은 개인의 소질에 또 달렸죠.
역량에 달렸고.
타고난 걸 가지고 오히려 발휘를 실력 발휘를 하면서
잘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
너무 위축되고 쪼그라들어서 살지 말자.
경허는 정말 다 던졌구나.
경허가 깨닫고 난 뒤에 보림이라고 있잖아요.
그 보림을 천장사에서 했어요.
천장사가 지금 서산에 조그마한 절이에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습관을 가라앉히는
그 경허가 보림했던 방이 지금도 있어요.
자기를 그 작은 방에 한 번 가두어 본 거예요.
그래서 얼마나 끓어오르겠어요?
깨달았지만 그 업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거 아니에요.
그거를 그 작은 방에서 1년을 견딘 거예요.
그래서 그 보림을 마치고 나와서 큰 법회를 열었어요.
그래서 경허 스님의 어머님이
당신 아들이 큰 스님이 되어서
처음으로 깨닫고 난 뒤에 법회한다고 해서 정말 어머님이 오셨어요.
어머니를 불렀어, 초청했어.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왔어요.
큰스님이 나와서 보림도 마치시고 처음으로 하는 법회다.
다 모인 자리에서 법상에 올라가서
경허 스님이 뭐라고 뭘 하셨느냐 하면
옷을 하나씩 벗었어.
“어머니 당신이 낳아주신 이 몸 그대로입니다” 하고
어머니는 질겁하고 도망가셨어요.
자기는 다 벗어 던졌다는 그런 표시를
첫 법상에서 옷을 다 벗었어요.
참 용감한 사람이었지.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냥 승복까지도 다 벗어 던지고 그랬는데.
어쨌든 이거를 방금 질문을 하셨기 때문에
생각해 보면
“아 본질 입장이라면
그렇게 위축되어 살지 말고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고
나는 이 소질을 최대한 발휘해서 활용해서
모든 가능성을 다 쓰고 가는 게 맞지
그렇지 않나요?
근데 그 심정은 당사자가 아니면 모르지.
모르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 본다면
하늘에 뜬 달이라면
정말로 수많은 땅에 월인천강에 다 찍히잖아요.
수많은 경험을 할 수 있는데
그게 아무튼 그런 사고방식도 가능하겠다.
그러나 나 같으면 개체는 한계가 있잖아요.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지만 개체는 한계가 있잖아요.
그러면 이 한계 안에서 최대한 진- 선- 미를 구현하겠어, 저 같으면.
그럼 수행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런 유위법을...
지금 달그림자가 무슨 말이냐면
지금 자기가 이렇게 있잖아요.
근데 자기를 두고 자기를 찾는다 이거예요.
이 대목
자기를 두고 자기를 찾으면 영원히 못 찾는다 이거예요.
근데 저는 제가 찾았어요.
왜냐? 성질이 못 돼서
못 돼서 이거 찾지 않으면 못 살겠어 그냥
그래서 딱 결심하고
“좋다, 난 찾는다” 해서, 나를 찾기 위해서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때 나를 찾는 방법이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 누구인가?”
“송장을 끌고 다니는 것이 무엇인가?”
화두가 있어요.
타사시구(拖死屍句) ‘송장을 끌고 다니는 놈’ 이게 화두에 있어요.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 누구인가?
이거 나는 풀겠다’ 하고 결심하고
걸으면서
이 송장을 끌고 다니면서 누구인가를 찾았다니까
죽기 살기로 찾았다니까.
집중해서 막 그냥 초집중 해서
딱 2시간을 계속 움직이면서 찾았는데
결론적으로는 못 찾았다, 안 찾아지더라고요. 아예 못 찾았어요.
그래서 진짜 절망스러웠어요.
그리고 그 순간 복귀를 해봤어.
왜 못 찾았을까?
그렇게 열심히 더 이상 진지하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하게
간절하게 딱 초집중해서
나를 보면서 움직이면서 이렇게 찾았다니까요.
근데 못 찾았다는 거예요.
‘왜 못 찾았을까?’ 하고 실패한 뒤에 복귀를 해 보니까
되돌아 가만 보니까
매 순간순간 찾았잖아요.
매 순간순간 찾았는데
찾는 그놈이 매 순간순간 있었는데
찾는 그놈이 또 자기를 찾으려고 하니까
“아, 이거 못 찾았구나”
그러면 2시간 내내 매 순간순간 찾았다 이거지
“아, 그 놈이구나” 이거예요.
그러니까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 그놈이구나 이거야.
매 순간순간 찾았다, 확실하다 이거는.
그럼, 그놈이라는 거죠.
그래서 진짜 기가 막혔던 거죠.
그리고 돌아보니까 내가 유위법을 했는데 실패했어.
그리고 깨달은 것은
“이거는 찾을 필요가 처음부터 없었던 거구나” 하는 거를
헛수고를 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공착영
공_ 헛되이
착_ 건진다
영_ 그림자를
달그림자, 이때 공을 깨달은 거죠. 공착영.
헛되이 이걸 했구나.
그러고 나니까 있잖아요.
그 찾던 놈이 지금은
“아이고, 헛되이 찾았구나” 하고 있잖아요.
그때 제가 발견한 게 이거지
즉심(卽心)을 발견한 거지
즉심은 심은 의식이잖아요.
즉_ 이 순간의 의식이야, 이 의식.
매 순간순간 고 의식
그리고 “못 찾았구나” 하고 한탄하고 있는 지금 이 의식
그러니까 즉심을 발견한 거예요.
그러고 보니까 마조가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 또 했네.
‘즉심이 부처’라고 마조가 또 이야기를 다 해놨더라고요.
지금 이 순간에 있어요? 없어요?
이거라고.
항상 현재만 있다.
항상 현재에만 있다, 이거야.
의식은 항상 현재에만 있어.
현재 내가 찾았다면 찾는 그놈이지.
다시 한 번 보세요.
서산대사가 소요태능을 깨닫게 할 때
소요태능이 찾아왔어.
서산 대사한테
“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그럼 내 옆에 있어서 “나무 하라”
그래서 나무하고 내려오면 서산대사가
가만히 있다가 저기서 소요 태릉이 나무하고 내려오면
자기를 보면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수첩을 딱 꺼냈어요.
그래서 싹 봤어.
그러다가 자기를 딱 보면 탁 닫았어.
그래서 탁 넣었어.
그래서 보고를 채우는 거예요.
나타나면 봐.
그리고 딱 보면 가까이 오면 탁 닫아서 황급히 탁 넣어버려.
3년간 매일 이 짓을 했어요.
그러니까 그 소요태능은 얼마나 보고 싶겠어요
그 내용이 얼마나 보고 싶겠어요
하여튼 서산대사는 공부를 가르쳐 준다 해놓고
나무 해오기만 하고 3년간이나 숨겼어.
그래서 더 이상 못 참고 소요 태능이
선언, “잘먹고 잘살아라” 스승이고 뭐고 개나발이고
지금 3년간이 내가 이 고생했는데.
여러분, 뿔 나면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에라이”하고 지게를 패대기 쳐버리고 떠났는데
“야야” 하고 불러서
“이거 보고 싶었지, 지금 보지 말고 저기 가서 봐라” 하고 줬어요.
그래서 소요태능이 보니까 뭐라고 쓰여 있느냐 하면
“소 타고 소를 찾는구나” 이게 있었어요.
그래서 깨달았어요.
소요태능이 그 대목에서 깨달았어.
같은 깨달음도
3년간이나 애를 태우게 하고 깨닫게 하면
그 깨달음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큰 깨달음이 되는 거예요.
‘큰 의심에 큰 깨달음이 온다.’
지금 이해돼요?
‘크게 궁금해야 큰 깨달음이 온다.’
그 맥이 지금 오는 거예요.
지금 우리들도 의식이라는 말을
의식이 소잖아요.
소를 타고 소를 찾는다.
의식을 타고 의식을 찾는다.
이해돼요?
이건 작은 깨달음이야.
너무 쉽게 깨달으니까 귀한 줄을 몰라.
법이 귀하지 않나요?
저는 이 세상에 법만큼 귀한 게 없다고 봐요.
법이 귀해요.
귀한데 깨닫고 나면
이 법이 똥보다도 흔해. 이해돼요?
깨닫기 전에는 법이 너무 귀해요.
근데 깨닫고 나면
그냥 이거 아닌 게 없어.
그냥 온 천하에 이거 아닌 게 없어서 너무 흔해요.
근데 똥 같다, 그래.
그렇지만 똥같기 때문에 또 귀한 거예요.
법이 귀한 줄 모르면 이건 싸구려예요.
이건 뭐냐 하면
자기가 싸구려니까 법을 싸구려로 대하는 거야.
아예 법을 들을 준비도 안 돼 있고
어수선하고, 그런 거 있잖아요.
그러니까 가보면 법을 말하고 싶지가 않지. 그죠?
그래서 이 법이 귀한 줄 알면
정말 여기에 정성을 들이게 돼요.
그리고 법을 귀하게 여겨야 내가 귀한 사람이 돼요.
안 그래요?
법을 싸구려로 여기면 자기가 싸구려인 거예요.
제가 이 공부를 배울 때 이것부터 배웠어.
“절대로 법을 귀하게 대하지 싸구려로 대하지 마라.
너가 싸구려다.”
정말로 이 말부터 배웠거든요, 저는 이 공부할 때.
그래서 정말 이게 귀하다는 걸 알아요.
왜냐?
목숨보다 귀하지 않나?
정말로 이 세상에 가장 귀한 게 목숨인데
목숨보다 귀한 것 같아요.
근데 알고 나니까 이거는 흔한 거야.
그렇지만 흔한 그것을 지금 몰라서
이 많은 사람들이 이 고생을 하고 있으니까
이건 정말 귀한 거예요.
그래서 항상 이걸 귀한 줄 아는 사람하고만
이 법을 나누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그래서 제가 지난번에 소개한 선자 덕성 같은 뱃사공 스님은
딱 한 명만 제자를 뒀잖아요.
그리고 모습을 감춰버렸거든.
그러니까 정말 이 귀한 거예요.
지금 서산대사가 이 귀한 법을 물려주기 위해서
법을 귀하게 여기게 만들려고
3년간 나무 해오게 한 거야.
이해되세요?
우리 옛날에 보면
3년간 물 떠오게 한다고 그러잖아요.
공부할 때
이게 법을 귀하게 여기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야 이 법이 이어지지.
지난 시간에 여러분 보셨지만
지금 긴팔원숭이가
달그림자, 여기 달이거든요.
달그림자를 건지는 이 그림
이게 지금 우리로 하여금 각성을 시켜서
찾는 이거를 돌아보는 찾는 이거거든요.
지금 이 순간 저 보시죠?
보는 그거예요.
근데 거기에 한 번 딱 이렇게...
보는 자기를 한번 딱 자각하는 것, 돌아보는 것
이게 깨달음이라는 거예요.
이건 귀한 거예요.
그러니까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걸 알아채고
여기 한 분이 지지난 시간에 끝나고 가면서 저한테 와서
“알았어요” 하고 갔어요.
제일 반가웠어, 그 말이.
듣다가 듣다가
10년 전에 와서 수업 듣고 갔는데
거의 한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다음에 이분이 다시 오셨어요.
그래서 지금 수업을 다시 들었는데
저는 10년 전에 본 사람이 10년 만에 왔으면
제가 얼마나 반갑겠어요.
그리고 10년간 궁금했겠죠.
그러다가 다시 왔어.
그런데 얼마 전에 수업 끝나고 그냥 딱 한마디
“알았어요” 하고 갔는데
저는 그런 말이 제일 기쁜 거예요.
그러니까 ‘알았어요’라는 말이 ‘이거 알았다’는 거잖아요.
이렇게 법문 듣다가 듣다가 10년 만에 ‘알았어요’라는 한마디
이게 귀하다 이거예요.
이렇게 ‘알았어요’ 하고 한 번 딱 알고 이제 다져가는 것.
‘알았어요’ 해도 옛날 습관은 다시 또 생각에 또 딸려간다 이거죠.
그거를 이제 버티기 위해서
그다음부터는 더 열심히 오게 되죠, 사실은.
이 시간이 귀하다는 것은
이 시간에 여러분이 제 말 듣고 있는 동안에는
생각따라 안 가잖아요. 같이 깨어 있잖아요.
제 말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가 이렇게 공유하는
이심전심으로 깨어 있는 이 시간이 귀한 거예요.
그래서 이 시간을 가지면서
우리가 계속 깨어 있는 이 힘이 길러지는 거지
이게 지금 수행이에요.
이런 목적이에요.
우리 수업의 목적이
이렇게 말, 지식을 전달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깨어 있는 시간을 함께 공유하면서
서로 간에 소통하는.
그래서 영산회상(靈山會相)이라는 말이 있죠.
영산에서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한 그 회상, 모인 자리
국악의 이름도 영산회상이라는 국악 노래도 있고
여러모로 사람들이 이 말을 해요.
이 말이 뭐예요?
영산회상이라는 말이 가지는 뜻은
의식과 의식이
이심전심으로 같이 깨어 있었던...
아름답지 않나요?
인류사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영산회상이 꼽혀요.
그래서 그걸 노래를 하는 거예요.
우리 춤에도 영산회상무가 있고
국악 노래에도 영산회상이 있고.
이걸 무엇을 표현하는가?
인간과 인간이 모여서 의식으로서 깨어 있는
이거 이상은 없다 이거예요.
부처님이 꽃을 들었을 때
가섭이 웃었다는 그 이심전심
그게 지금 다시 부활하는 게 지금 그런 예술인 거예요.
그러면 우리 수업의 목적은
여러분 영산회상이 어디 있어요?
지금 이거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것보다 아름다운 시간은 없다 이거죠.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시간
자아가 무너진 인간과 인간이
의식이 깨어난 인간과 인간이 서로 소통하면서 이렇게 이걸 나누고 있는 것.
중중무진으로 이걸 나누고 있는
이 시간보다 더 소중한 시간은 없다.
그게 지금 우리의 목적이다, 이거예요.
근데 그거를 지금 달그림자로서 이렇게 표현을 하면서
달을 건진다.
수월(水月).
자 하늘의 달이 땅에 비친 물에 비친 달
이거를 압축하면
하늘의 달을 땅으로 끌어내리면
하늘에 비친 달을 땅으로 끌어내리면 어떻게 되느냐면
하늘에 비친 달도 재료는 이거죠.
물도 재료는 이거죠.
모든 현상이 공통적으로 본질이 드러난 거죠.
그러면 하늘의 달을 땅으로 가져오면 물이 돼요.
그리고 물에 달그림자가 비췄어.
그러면 물에 달그림자를 비췄을 때 그것만 가지고 본다면
물이 본질이고, 달그림자가 현상이죠.
그래서 지금 본질과 현상을 딱 한마디로 말하면 수월(水月)이에요.
그래서 기도문에 ‘수월도량’이라는 말이 진짜 많이 나와요.
청정수월도량_ 본질과 현상이 하나 되어서 소통되고 있는.
우리가 몸은 현상이지만 우리들의 본질은 하나지요.
그 하나가 이렇게 드러나는
지금 수월도량, 청정수월도량 이거잖아요.
우리 수업이 이걸 우리가 재현하고 있다.
이해되나요?
영산회상을 우리가 재현하고 있다.
이 모든 불교수행을 집대성한 사람이 천태지자대사예요.
천태지자의 오도송에
‘눈앞이 영산회상이다.
지금도 영산회상은 이어지고 있다.
근데 사람들이 이걸 모를 뿐이다.’
그러니까 법안종이 천태 스님의 맥을 상당히 받아들였거든요.
천태 대사의 오도송이
‘눈앞이 영산회상’ 느낌은 옵니까?
얘가 옳다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죠.
눈이 뜨인 사람한테는
모든 게 지금 이심전심이 이루어지고 있는
그거를 또 부처님이 꽃을 드니까 가섭이 웃었잖아요.
법화경에는 그때 하늘에서 꽃비가 또 쏟아졌다.
그리고 다보 부처님이 땅에서 솟아서 찬탄을 했다.
보세요.
석가가 꽃을 들었고
가섭이 웃었는데
그때 꽃비가 떨어지고
땅에서 다보, 부처님이 솟아서 찬탄하는 모습이
불국사 대웅전 앞에
석가탑, 다보탑이 지금 그걸 구현하고 있는 거예요.
영산회상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탑 2개
가장 단순 명료한 석가탑
가장 아름다운 화려한 다보탑
그게 영산회상을 재현하고 있는 것.
그게 불국사.
상황이 지금 어디가 불국사예요?
지금 이거라고.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이 인연은
정말 시공을 뛰어넘어서
영산회상이 펼쳐지고 있는 이 현장
그러니까 이 법이 귀한 거예요.
인간의 가장 귀한 시간이에요.
인간이 한 생에서 체험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시간.
여러분, 이게 진리 아닌가요?
그리고 인간이 가장 착한 순간이 아닌가?
인간이 사라진 것만큼 더 착한 게 어디 있어요?
그리고 아름답다 이거예요, 소통하니까.
너와 내가 정말로 진면목으로 하나 되는 이 순간
진선미가 하나 된 순간
이게 지금 우리가 이렇게 모인 거예요.
모일 때마다 이것이 펼쳐지고 있어.
그러니까 이건 귀한 거예요.
오늘은 마지막 주제는 수월이네.
수월도량,
내가 깨어 있는 곳이 수월도량이다. 이해되세요?
내가 깨어 있는 곳이 본질의 현상이 드러나고 있는 곳이다.
이 청정수월도량이
내가 가는 곳마다
내가 깨어 있는 한은 이루어지고 있다.
수처작주
이때 주_ 의식이에요.
가는 곳마다 의식이 깨어 있으면
입처개진_ 그 서 있는 곳마다 영산회상이 된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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