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2만 명 관중의 함성
1933년 평양 공설 운동장
평화를 상상하다 2
평양에 응원간 붉은 악마
1934년 4월 5일
평양역에서 출발해
경성역(서울역)에서 내린 사람들
‘평양’ 축구단
‘제 바닥(홈팀) 경성이 이길 것인가
아니면
원래(원정팀) 평양이 이길 것인가
-1934년 4월 6일 동아일보
도쿄 상하이 베이징 천진을 주름답던
조선의 축구선수들이
각각
빨간 유니폼에 V자 ‘경성팀’과
파란 유니폼의 ‘평(平)’자 ‘평양팀‘으로 맞붙은
‘경성과 평양 누가 더 센지 붙어보자’
경성 평양 축구 대항전
경평전
1929년 10월 8일
첫 대결
관중 7천 여명
경기장소 원서동 휘문고보 운동장
“넓은 운동장에 빽빽이 드러찬 수천 관중은
일진일퇴하는 백열된 육박전에 열광되어
우레가튼 박수 소리가 수시로 그라운드 일대를 진동하였더라”
-1929년 1회 경평전 보도 기사 중中
2승 1무
평양군(팀) 승리
-1929년 1차 경평전
설욕을 다짐한 경성군(팀)
일본이 탐냈던
축구 천재 김용식 선수도 영입
1930년 2회 대회 결과2승 1패로 경성팀이 승리한다
1933년엔
4월 평양, 9월 경성, 10월 평양
두 도시를 자유롭게 오간 축구
경성역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원정을 간
‘경성팀’을 기다린 건
평양 공설 운동장을 가득 매운
2만 여명의 관중
경성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경성과
평양
서양문물을 거침없이 받아들인 평양
두 도시의 자존심이 격돌한
‘조선의 엘 클라시코’
(* 엘 클라시코: 스페인의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라이벌전)
“경평 대항 축구전을 통해 두 도시의 시민 뿐 아니라
전 조선 민족이 축구의 재미를 알게 되었고
자기 고장, 자기 팀에 대한 자부심도 느꼈다.”
- 경성팀 김용식 선수, 1985년 별세
그리고
“상대팀을 상대로 이기기 위해 경기를 했지만
선수들의 마음속에 적은
오직 일제였다.”
-경성팀 이유형 선수, 2003년 별세
‘불온한 대회’
일제의 불안에 중단과 재개가 반복된 경평전은
해방 1년 후인 1946년 재개된다.
하지만 이미 남과 북을 갈라놓은 38선
(1945년)
그럼에도 평양팀은
38선을 넘어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서울(경성)에 도착한다
1차선 경성 승리
2차전 평양 승리
1946년 경평전(서울 운동장)
경기 후, 육로가 아닌
뱃길로 돌아가야 했던 평양팀
‘내년엔 평양으로 원정 오십시오’
하지만
다음 경평전은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상상해본다.
상상이라서 우울하지만 상상의 가능성마저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전쟁과 분단으로 인하여
남한은 지리적으로 고립되고
북한은 체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자동차로 서너시간이면 오가는 거리면서도
상상력의 완전한 고립상태가
수십년 동안 지속되었다.
공 하나로 짐짓 으르렁대면서도
다함께 함성을 지르는 풍경이 벌어져야 된다.
강슛으로 골이 터지면 미안 해 할 거 없다.
끝난 후 서로 안으면 된다.
심한 몸싸움으로 넘어지면 가서 일으켜주면 된다.”
-스포츠 평론가 정윤수 ‘경평전 부활을 상상하며’
20XX년 X월 X일
자전거로, 버스로, 기차로 걸어서
평양에 도착한 붉은 악마는
평양냉면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김일성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경기가 끝난 후
그들 중 일부는
평양역에서 러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
여름 휴가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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