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이미 이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얻을 수도 없고
또 이거는 어떤 식으로 분별된 모양,
모양이라는 것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돼요.
모양으로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안미비설신의거든요.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감촉하는 것과
의라는 것은 어떤 인식작용
그게 생각의 형태, 아니면 감정의 형태, 어떤 느낌, 어떤 이미지
이런 식의 분별되는 것으로서는
그게 분별할 수 있는 모양이에요.
근데 그게 아니다라는 것이지
모양이 아니기 때문에
이거를 자극할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다라는 말은 아니에요.
그런 얘기하죠. 식스센스
이런 식의 표현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분명히 자각할 수 있는데
전오식 아니면 육식으로는 분별할 수 없다 이거예요.
근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분별로서 잡으려고 하기 때문에 안 돼요.
근데 그 분별로서 알려고 하고, 규정하려고 하고, 정의하려는 그 마음이
쉬어지면
그 모든 분별과 하나인 이것이 저절로 자각이 됩니다.
깨닫는다라는 것은
주어가 있는 그게 아니에요.
어떤 삿된 것이 사라져 버리면
이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하는 거는
모양으로서 집착하고 알려는 그 마음이
쉬어지는 인연을 만드는 것이
깨달음의 지름길인 거예요.
근데 이게 또 묘해서
그게 쉬어져야 된다라고 얘기를 드리면
어떻게 받아들이냐면
“그래 쉬어야 돼” “보지도 말아야 돼” “듣지도 말아야 돼” “생각하지도 말아야 돼” “느끼지도 말아야 돼” 내지는
“그것이 일어나더라도 그렇게 따라가면 안 돼 ”이런 식의
의도 자체도 사실은 모양이거든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는 사실은
이게 기존의 방식이에요.
모양으로서 뭔가를 취하고, 버리려는 게 기존의 방식인데
우리가 이 공부 앞에서 할 수 있는 거는 뭐냐 하면
기존의 방식이 포기되는 것
그게 어떻게 포기되냐?
“그거 쉬면 되겠지”
그것도 아니에요.
쉬어야 된다는 것도 분별입니다.
의도가 들어간 거거든요.
그럼 어떻게 되냐?
가장 가까운 때가 뭐냐 하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때예요.
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공부에 가까워지고 문 앞에 다다른다라고 할 때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들어가도 30방 나와도 30방.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아무것도 없고
마치 내가 절망스러운 상태
꽉 막힌 상태가 가장 가까운 때라는 거예요.
근데 에고, 자아의 입장에서는 가장 절망스러운 상태거든요.
그게 가장 이 공부 입장에서는 가까운 상태다 이거예요.
‘절망해야지’
사실은 ‘절망해야지’ 할 때는 절망이 안 됩니다.
그게 어떻게 어떻게 좀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근데 이 공부를 하다 보면
좌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한 번은.
좌절을 경험할 때
문득 모든 것이
탁, 뭔가 소나기에서 빠져나가는 것 같고
뭔가 의도가 삭 쉬어지는 것 같고
알려고 하는 그 마음이 그냥 너무 막막해서 탁 내려놓아질 때
눈앞에, 목전에, 이미 이게 충만해 있다라는 것을
우리가 체험하게 돼요.
체험?
이런 말도 사실은 잘못 이해하면 안 돼요.
내가 체험한다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그냥 저절로 드러나서
이해나 어떤 분별로서가 아닌
이것으로서 뭔가 실질적으로 경험된다
이런 차원인 것이거든요.
그런 차원으로 받아들여야지
내가 어떤 주인이 돼서 뭔가를 경험한다
이런 식으로 이해를 해버리면
자꾸 욕구나 의도를 갖고 뭔가 하려고 그래요.
그게 거꾸로 가는 공부라는 겁니다.
근데 이런 식으로
그런 식의 의도가 저절로 쉬워지면
뭘 하든 이거예요.
꽃을 봐도 이거고, 책을 봐도 이거고, 그림을 봐도 이거고
이렇게 그냥 아무런 의도 없이 일어나는 소리
이건 죽비를 치니까
사실은 ‘죽비 치는 게 이거구나’라고
뭔가 또 다른 식의 어떤 형태화를 시켜버리는데
이거는 그냥 죽비치는 소리나, 코 푸는 소리나
일상에서 경험하는 그 아주 지극히 일상적인 거와
아무 차이가 없는 거를 가리키는 거예요.
죽비 소리가
*!
특별하게 종을 치면서
‘이겁니다’ 하더라도
이거는 여러분이 그 벨소리나, 문 닫는 소리나, 바람 소리나
아무 차이가 없는 거거든요.
숨 쉬는 소리나
아니면 이건 소리인 것이고
어떤 감촉으로써도
거친 느낌이나, 부드러운 느낌이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느낌이나
맛도 마찬가지거든요.
단맛이나, 쓴맛이나, 신맛이나, 매운 맛이나, 그냥 맹숭맹숭한 맛이나
모든 그 맛들이 다 이겁니다.
이거를 가리키고 있어요.
모든 것이 다 이 하나의 일이라는 거.
그러면 어떻게 되냐 하면
마치 내가 경험하는 어떤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이것이 나를 경험하는 듯한
그런 식의 어떤 자각이 오거든요.
우리는 내가 체험하고, 내가 보고, 내가 들으려고 하거든요.
근데 진짜 우리가 이것이 드러날 때는
이것이 나를 체험하는 듯한
이것이 나를 경험하는 듯한
그런 식의 전환으로서
내지는 내가 대상이 아니라
이것과 내가 일체로서
탁 어떻게 보면 자극된다 해야 되나? 드러난다 해야 되나?
현상을 떠나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모든 현상에서 이게 탁 자각이 됩니다.
그게 우리가 소위 말해서 한 소식이라고 하는 것이고
체험이라고 하는 것인데
근데 그 체험이라는 것은
어떤 확연해질 때와 어떤 차이가 있느냐도 여러분은 아셔야 돼요.
사람에 따라서 체험의 경계는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냥 죽비 소리에
“어?” 하면서
이게 딱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게 탁 실감이 되고 와닿거든요.
이게 ‘이겁니다’그러면.
이거예요.
꽃을 봐도 이거고 죽비를 쳐도 이겁니다.
종을 쳐도 이겁니다.
그다음에 제가 그냥 바닥을 쳐도 이겁니다.
손을 들어도 이겁니다. 그냥 이거예요.
여기에는 아무 생각이 없고 느낌이 없고 감정이 없는데
직접적으로 이것이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의 현상을 떠나 있지 않아요.
문득 와닿는 순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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