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이 격식을 벗어난 선에 통하려면
‘이것이 장애가 되고 있다’라는 거를 깨달아야 돼요.
그래서 뭐가 장애가 되냐?
대부분의 사람들은
체험을 해야 돼
아니면 깨달아야 돼
아니면 뭘 어떻게 의지해서 앉아야 돼
명상해야 돼
이런 식의 어떤 자기만의 어떤 마음의
어떤 생각을 이렇게 쥐고 있거든요.
이것까지 다 내려놓아버려야 됩니다.
그래서 완전히 마음이 어떤 거에도 의지하지 않은 상태, 이완된 상태
어디에도 머물지 않은 상태,
어떤 경험이 일어나든 간에 그것을 붙잡고 있지 않고 의미 부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문득 이 본성을 자각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때 이렇게 죽비를 탁 친다거나
*~! 이겁니다.
아니면 뭐 이렇게 손을 든다거나
이겁니다 할 때
저절로 자각이 되죠.
그러니까 이때도 상당히 미묘한 어떤 차이가 있어요, 이때도.
그러니까 만약에 이겁니다 할 때 우리의 마음이
이런 식의 죽비나 어떤 죽비 소리에 와 있으면
어떤 지견에 사로잡혀 있는 거랑 구조는 똑같아요.
대상화에 빠져 있기 때문에.
생각의 어떤 내용에 들어가 있는 거나
드러나는 이 사물에 들어가 있는 거나
구조적으로는 똑같아요.
왜냐하면 대상에 마음이 떨어져 있는 거거든요.
근데 감이 잘 안 열려요.
이걸 아셔야 돼요.
나중에 어느 순간 딱 알게 되거든요.
공부를 하다 보면
“이겁니다” 직진할 때 여전히 내가
자기 마음 이 자리에 있지 못하고
“자꾸 어떤 대상을 따라갔구나” “경계에 떨어졌구나”라는 거를 알게 되는 거거든.
근데 그런 마음이 딱 멈춰졌을 때
그게 분별 집착이죠.
왜? 이거.
“저 사람이 죽비를 치고 있다”라는 건 분별이죠.
분별되면 우리는 분별에 확 들어가요.
마음이 분별에 확 떨어져 버리고
이것이 객관적인 사실인 것처럼 딱 취해버려요.
이런 식의 어떤 분별 작용이
순식간에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눈치를 못 채고 있을 뿐이거든요.
너무도 짧은 순간, 찰나 간에
“저 사람이 죽비를 치고 있다”라는 세계를 딱 창조해 버려요.
객관적인 사실인 것처럼.
근데 만약에 여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여기에 마음이 떨어지지 않으면
그냥 어떤 시간과 공간이 없는 데서 저절로 비추고 있는 이 성품이
딱 자각이 된단 말이에요.
이거는 나와 떨어져 있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체험이 올 때
“저거구나” 이렇게 안 합니다.
‘저거구나’ 하면 뭔가 여기와 떨어져 있는 분리돼 있는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체험이 올 때의 말이
“이거구나” 하는 거는
나와 떨어져 있지 않다라는 얘기거든요.
그런 식의 표현을 하는 이유도 있는 거예요.
물론 ‘이것’이라는 어떤 분리된 대상을 가리키는 건 아니지만
그 순간, ‘저거구나’라는 말 대신에 ‘이거구나’라는 말이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이유는
나의 지금, 이 자리에, 여기에서 전혀 떨어져 있지 않다 이거예요.
분리돼 있지 않다 이거예요.
여기에 딱 통하고 나면 알죠, 스스로가.
“모든 것이 이게 소리, 생각, 느낌, 사물, 빛깔
모든 것이 다 여기서 저절로 비추고 있구나.
이 하나의 어떤 깨어 있는 성품에서
온 세상이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다 드러나고 있구나”라는 것을
누가 얘기해주지 않아도 알게 돼요.
그래서 그런 체험이 오면은
막 순식간에 우리가 그 소화되지 않았던 말들이 확 소화가 되고
자기 입으로 또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거를 경험하게 되죠.
이 드러나는 게
우리가 말하는 이 “공부의 시작이다, 시작일 뿐이다.”
지금 여러분이 지금 저를 잘 보고 계시죠?
잘 보고 계시고
보통 사람들은 이걸 ‘보고 있다’라고 해석을 하는데
그거는 지금 바로 이런 드러남에 대한
순간적으로 생각이 해석하고 있는 거예요.
‘저를 보고 있다’라는 거는 생각이에요. 생각.
진짜 보는 이 직접적인 경험에는
‘본다’라는 그런 소리가 없어요.
그냥 그냥 저절로 드러나고 있을 뿐이거든요.
가장 가장 먼저의 경험이 중요한 거예요.
첫 경험, 첫 경험이 중요한 거예요.
첫 경험이 뭐냐?
지금 여러분은 저를 보고 있고 꽃을 보고 있고
이런 식의 언어적으론 표현할 수 있는데
첫 경험은
‘여러분이 나를 보고 있다’라는 이 언어가 없고, 이런 상황이 없어요.
이거는 생각이
이 두 번째 이 경험 뒤에 일어난 생각이
이렇게 설정하고 있는 것이고
또 그것이 되려면
그런 생각을 믿어버리는
세 번째 단계는 뭐냐? 믿어버리는 거예요.
두 번째 일어난 생각을 믿어버리면
믿는 것이 세 번째 단계죠.
지금의 여러분이 저를 보고 있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인 것처럼 느껴지시는 분 있죠?
있습니까? 있잖아요. 솔직하게 얘기를 해 보세요.
여러분이 저를 보고 있잖아요.
제 말을 듣고 있고.
보통 사람은 이런 식의 생각을 한단 말이에요.
근데 이게 가능 하려면
크게 거칠게 나눠서 3과정이 들어가야 돼요.
-눈을 떠서 어떤 상이 탁 드러나야 되고
그다음에 일단 어떤 시각적인 상이 드러나야 되고
그다음에 어떤 청각적인 어떤 경험이 딱 이루어져야 돼요, 즉각적으로.
-여기에다가 이 상황에 대한 해석이 두 번째 단계로 들어갑니다.
생각이 그동안에 살아오면서 익힌 언어와 어떤 이해의 구조 속에서
“저 사람이 지금 설법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일어나요.
근데 거기에서 끝나지 않아요.
이 객관적인 사실이 되려면
그 일어난 생각을 믿어야,
그걸 취착이거든요, 취해야지 믿어야지
“무슨 소리야 저 사람 저기 앞에서 얘기하고 있는 게
이게 객관적인 사실이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그러니까 그 과정을 거쳐야지
제가 여러분 앞에서 법문하고 있는 그 사실이 객관적인 사실화 된다.
그럼 자기가 지금
그런 것처럼 느껴지고 받아들여지고 있다면
벌써 분별이 몇 번은 작동된 상태인 것이다 이 말이에요.
근데 이거는 뭐냐 하면
그런 식으로 떨어져 버리면
이상하게 저절로 깨어서 비추는 마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밀밀하게 다 어떻게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게 자각이 안 돼요.
그것이 이상하거든요.
분별심은 너무 미묘해서, 분별심에 탁 갇혀버리면
그것밖에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런 식의 어떤 경험적인 일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이게 뭔가 의심스러워.
만약에 내가 여기에서 뭐 생각이 없으면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하나씩 하나씩 조건을 달리해 보면
이거는 어떻게 보면 조건이 어우러져서
객관적인 사실처럼 드러난다라는 걸 스스로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어떻게 되냐?
지금 내가 고정시킨 이 사실을 믿으면 안 돼요.
공부를 하려면.
그런 거를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어”
“아니야 나는 몰라. 이거는 내 분별의 결과일 뿐이야.”
나는 그동안에 살아온 어떤 경험이나
그런 걸로 봐서 분명히 저 사람이 앞에서 얘기하고 있는데
근데 조건을 달리해 보면
그런 일이 불가능하겠네라는 거를 납득을 하게 되면
자기가 지금 이거는 공부가 안 돼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구나라고
이게 받아들여야 돼요.
그럼 어떻게 되냐?
그런 생각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그거를 의미 부여한다거나 믿으면 안 되죠.
그게 공부 지금 2단계의 공부라는 거예요.
근데 자꾸 습관은 일어납니다.
습관은 일어나면 이제 그냥 놓아버려야 돼.
이거는 내가 몰라서 이러는 거야.
내가 실상을 보는 눈이 열리지 않아서 이런 것이기 때문에
“나는 틀렸어. 내 생각은 틀렸어.
내 앞에 펼쳐진 이 세계는 객관적이라고 할 수가 없어.”
그래서 그걸 딱 그런 생각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내려놓으셔야 돼요.
내려놓다 보면 어떻게 되느냐?
점점점점 분별이 작동하는 게 멈춰져요.
멈춰지는 거예요.
믿지 않다 보면 분별이 힘을 못 쓰게 되거든요.
그럼 멈춰지게 되는 거예요.
믿는 마음도 내려놓아지고.
그렇게 생각이 일어나도
“이거는 또 내가 몰라서 이런 것이지” 해서 내려놓게 되고.
그러다 보면
이상하게 객관적인 사실인 것이
흐릿해지고. 아닌 것처럼 자기한테 다가오거든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탁 마음이 이렇게 분별이 작동되는 마음이 탁 멈추게 되면
그때서야 가장 어떻게 보면 분별에 가리고 있던 그 각조심
저절로 비추는, 깨어서 저절로 비추는 마음과
딱 조우하게 된다. 해야 되나요?
딱 체험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그냥 어떻게 표현할 수 없지만
스스로가 부정할 수 없는 어떤 사실과 만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일이 이 일이었구나.
내가 하는 일도 아니고
내가 듣는 일도 아니고
내가 보는 일도 아니고
이것으로 인해서 모든 것이 생겨나고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구나”라는 걸 스스로 알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의법 출생]이
법에 의지해서 생겨났다.
이게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위법 출생이라는 건.
이거에 의지해서 생겨나고 있다, 이거예요.
지금 이 제목이 이겁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우리가 마음을 깨닫는다.
부처, 불심, 불심을 깨닫는다.
이때부터 공부의 시작이라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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