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입니다. 부처님께서 어느 날 제자 되는 가미니라고 하는 아주 젊은 수행자가 부처님께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부처님, 저 브라만들이 말을 하기를, 사람이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저 성스러운 강가강에 가서 그 성스러운 목욕을 하면, 마치 몸에 때가 다 씻어지듯이 우리들의 업장이 다 녹아서 하늘나라에 이를 수 있다. 즉, 성천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이렇게 질문을 했어요.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강가강에 가서 목욕 한번 해서 하늘나라에 날 수 있다면 얼마나 쉽습니까? 그런데 그 바라문보다도 훨씬 더 위대하신 우리 부처님께서 왜 그런 쉬운 길은 가르쳐주시지 않고,
계율을 청정히 지켜라.
그 마음을 고요히 닦아라.
그리고 지혜를 증득하라.
어떻게 보면 좀 힘들고 어려운 수행의 길을 가르치고 계신단 말이오. 그러니 그것이 사실이라면 훨씬 더 쉽지 않느냐. 이런 생각이 들어서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가미니의 질문을 받고는 빙긋이 웃으시면서
“가미니야, 만약의 그들의 말이 맞는다면, 강가강에 사는 물고기들이 가장 먼저 하늘나라에 나겠구나.” 이렇게 말했어요. 무슨 얘기인지 알아듣겠어요?
이런 말씀을 듣고 가미니는
“잘 알았습니다, 부처님, 잘 알았습니다, 부처님. 잘 알았습니다, 부처님.” 이렇게 하면서 마음속에 일어났던 의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요. 이게 부처님과 제자들의 문답의 한 형식입니다.
[부처님의 설법에서 볼 수 있는 첫 번째 특징]은 질문하는 사람에게 이것이 옳은가? 저것이 옳은가? 옳고 그름을 판정해 주는 게 아니다. 예를 든다면 저희들 같으면 어떻게 대답을 하겠습니까?
“그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건 틀렸어.” 이렇게 얘기를 하게 되면 남의 사상을 비방하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다른 종교를 존중한다고
“어, 그럴 수도 있을지 몰라.” 이렇게 말한다면 사실이 아닌 것을 옹호하는 게 된단 말이오.
그러니 간단한 질문 같지마는 어떻게 대답을 하느냐. 이건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이 아니야. 그건 틀렸어.” 이렇게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그런가 보다” 하고 결론을 내고 갔는데,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니까
“아니야, 그건 부처님이 틀렸어. 강가강에 가서 목욕하면 정말 하늘나라에 가.” 이렇게 얘기하면 또 “그게 맞나.” 이렇게 또 마음이 흔들린단 말이오.
이러한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게 불교가 아니라는 거요.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깨달음이에요. 그들의 말이 맞는다면 이것은 그들의 주장을 반대하거나 부정한 겁니까? 받아들인 겁니까? 받아들였죠. 그들의 말이 맞다면, 정말 그들의 말처럼 된다면, 이것은 그들의 주장을 비난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인 거란 말이오.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거기에는 이런 모순이 있다. 만약에 그렇다면 강가강에 가서 목욕을 한다고 모든 죄업이 소멸되고 하늘나라에 난다면, 그 강물에서 태어나서 자란 물고기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먼저 하늘나라에 가지 않겠는가. 그 논리대로라면, 그 주장대로라면.
그런데 질문한 사람이 듣기에 “그건 말이 안 된다.” 부처님이 그건 틀렸다고 정해줘서 본인이 그렇게 받아들인 게 아니고, 본인 스스로가 생각해도 “오, 그 말이 안 되는 얘기야.”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스스로 알아버렸다. 답을 누가 정해주는 게 아니고, 스스로 모순을 알아버렸어.
그렇기 때문에 “잘 알았습니다, 부처님. 잘 알았습니다, 부처님. 잘 알았습니다, 부처님.” 이렇게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있었던 거요.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깨달음입니다. 이렇다. 저렇다. 옳고 그름을 가르치는 게 아니고, 맞고 틀림을 말하는 게 아니고, 의문이 있는 사람이 의혹이 있는 사람이 무지가 있는 사람이 확연히 알아버리는 거요.
그래서 그 사실에 대해서 다시 질문할 필요도 없어지고, 천하 누가 그 문제에 대해서 얘기해도 본인이 흔들리지 않게 되어버린다. 스스로 알아버렸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가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비유를 들어서 말한다면 악몽을 꾸고 있다가 즉, 꿈속에서 강도에게 쫓기고 있던 사람이 강도로부터 도망가려고 아무리 애를 애를 써도 벗어나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에 눈을 딱 뜨니까, 그 모든 고통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과 같다.
이때 꿈속의 차원에서 말할 때는 “강도가 어디 갔는가? 누가 강도를 잡았는가? 누가 강도를 막아줬는가? 누가 강도로부터 당신을 피신시켰는가? 그래, 그게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해서 너 그 어려움에서 벗어났지?” 이런 질문은 꿈속의 얘기에요.
꿈을 깬 자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눈을 딱 뜨는 즉시, “오, 꿈이잖아.” 그거로 끝이에요. 꿈속의 얘기를 논하지 않는다. 꿈속의 얘기를 논한다는 것은 아직도 잠이 덜 깼다는 얘기요. 이것이 깨달음이다.
그래서 깨달음은
옳고 그름, 주의 주장, 이런 것이 아니다.
확연히 알아버림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눈 있는 자 와서 보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내 가르침의 특징은 어떤 거냐? 눈 있는 자 보라. 스스로 눈을 감고 있으면 안 보이지만, 눈뜬 자는 누구나 다 훤히 보고 알 수 있는 거다.
[두 번째 부처님의 가르침의 특징]은 그 가르침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비주의적이거나 비합리적이거나 그런 게 아니다. 그것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라고 하니까, 어떤 관념의 틀에 매여 있다는 뜻이 아니에요.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면서도 그 어떤 관념의 틀에도 매여 있지 않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라는 얘기는 누가 들어도 합당하다. 이거요.
불교인만 들으면 고개 끄떡끄떡하고, 딴 종교인들이 들으면 옆으로 고개를 흔드는 게 아니고, 남자든 여자든, 늙은이든 젊은이든, 불교인이든 불교인이 아니든, 처음 온 사람이든 오래 다닌 사람이든, 그 부처님의 법을 들었을 때, 그냥 고개가 끄떡끄떡 할 수 있는 그런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불교의 특징이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상대의 눈높이에 맞춥니다. 비유를 들 때. 이런 젊은 수행자가 비유를 들었는데 노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를 든다든지, 학교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지식이 없는 사람이 어떤 질문을 했는데, 박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를 든다든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가장 잘 알 수 있는 어떤 비유를 들었어. 즉, 그 사람의 눈높이에 맞게 설법을 하신다는 거요. 그래서 중도를 설법하실 때도, 그 사람이 강가에 사는 사람이면 강가에 떠내려가는 나무토막을 비유를 들어서 중도를 설명하시고, 그가 거문고를 켜는 사람이라면 거문고 줄이 탱탱하냐? 느슨하냐? 어떨 때 소리가 잘나느냐? 이런 비유로 중도를 설명을 하신다. 그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그런 식으로 설법을 하신다는 거요.
이렇게 해서 상대편의 마음속에 있던 의혹, 또는 번뇌, 또는 고통, 초조 불안, 이런 것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도록 도우셨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깨달았다. 하는 것은 그 마음속에 있던 그런 불안한 심리, 의혹, 이런 것들이 사라져버리는 거요. 이 고뇌가 사라졌다. 번뇌가 사라졌다. 그것을 뭐라고 그래요? 열반이라고 그럽니다.
우리는 법을 듣고
깨달아서
열반을 증득한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어요.
여기에서 우리가 작은 깨달음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분 부분의 번뇌가 사라지는 거고,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번뇌가 사라져버리는 것을 말한다.
그런 차이가 있죠.
그러나 수행 정진하는 사람은
늘 작은 깨달음을 순간순간 얻어가면서
인생에서 일어나는 그때그때의 번뇌가
법을 만나서 사라져 가는 거요.
그것은 마치 어둠이 등불을 켜면 사라지듯이
우리들의 번뇌는
깨달음을 통해서 사라지게 된다.
이번에 저희들이 이런 교화사례를 중심으로 해서 불교를 다시 한 번 공부해 보자. 하는 것은 우리 불자들이 가장 중요시해야 되는 것은 삼보에 귀의하는 겁니다. 삼보라고 하는 것은 불법승 즉,
불: 스스로 깨달은 이 부처님
법: 다른 이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설하신 진리의 가르침
승: 그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이
이 3가지를 불법승이라고 그래요. 해탈을 향해서 수행하는 사람은 이 3가지를 가장 중요시해야 됩니다.
스스로 깨달은 이, 그래서 완전한 열반에 이르신 부처님에 대해서 알아야 됩니다. 그 부처님의 인격 즉, 그 분은 어떤 마음씨를 가지고 계시고, 그 분은 어떻게 말씀을 하시고, 그분은 어떻게 행동하셨느냐? 이것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알게 되면 내 마음속에서 저절로 “아” 이렇게 그분에 대한 존경심이 나온다. 두 번째는 그분을 좋아하게 돼.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부처님을 존경하고 부처님을 좋아하느냐?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 부처님은 어떤 능력자고, 그 분한테 빌면 그분이 우리에게 뭘 주신다. 그래서 내가 답답할 때는 매달리다가, 내 뜻대로 안 되면 “믿어도 아무 소용없더라.” 이렇게 되거나, “30년 절에 다녔는데 얻은 게 뭐 있노?” 그때 뭘 얻고자 하는 거요. 그게 바로 우리가 말하는 지극히 세속적인 거요.
그런데서 우리가 부처님에 대한 인격을 모르기 때문에 부처님에 대한 귀의가 안 되고 있습니다. 그 부처님에 대한 인격을 알려면 부처님과 다른 사람이 만났을 때 그분이 어떤 태도를 보이셨느냐, 이것을 알 때 우리가 그 분의 인격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부처님을 욕했을 때,
그때 부처님의 마음이 어떠셨느냐.
그때 그 분을 보고 부처님이 뭐라고 말씀을 하셨느냐.
그분에 대해서 어떤 행동을 하셨느냐.
제 수준 같으면 누가 날 욕하면 마음이 언짢죠. 짜증이 나죠. 같이 욕설이 나오죠. 더 심해지면 주먹이 올라가죠. 이게 우리들의 마음과 말과 행동 아닙니까.
그런데 그 분은 마음은 고요하고 평화로우시고, 그분의 말씀은 자비로우시고 진실하고, 그 분의 행위는 죽어가는 것을 살려주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이런 거요. 살아있는 것을 죽이고, 남의 물건을 뺏고,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어가는 생명을 보면 살려주고, 가난한 이를 보면 백프로 돌보는 그런 행동을 하셨다.
우리가 그런 마음씨,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 그런 행동을 보고 그 분의 인격을 알 수 있고, 그 인격에 우리가 감화를 받고, 그래서 우리가 존경을 하게 됩니다. 나아가서는 “나도 저 분처럼 되고 싶다. 나도 저 분처럼 되고 싶다.” 이게 불에 대한 귀의입니다. “그 분은 위대하다.” 이게 불에 대한 귀의가 아니고 “나도 저 분처럼 되고 싶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부처님처럼 될 수 있는가?
바로 그 분의 가르침에 따라서
마음을 이렇게 쓰고
말은 이렇게 하고
행동은 이렇게 한다.
따라서 해보면
나도 그분처럼 마음이 편안해지고,
말이 진실 되고,
행동이 자비로워진다.
그래서 행복해진다는 거요.
여기서 승은 왜 필요한가? 그 분의 가르침을 듣고 그분처럼 된 사람들이 승입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우친 자, 이것을 승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그 분처럼 된 사람. 그 분을 닮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어야 나도 희망을 가질 수 있죠.
“부처님은 그렇게 되셨지만 아이고, 우리 같은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나?” 이러면 아무리 우리가 그분을 존경해도 나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아, 저 분도 그렇게 괴로워하던 저 분도, 못된 짓 하던 저 사람도, 즉, 사람을 95명이나 죽인 저 앙굴리말라도, 천하 바보 주리반특도, 오랫동안 유녀생활을 했던 기생연화생녀도, 부처님의 법을 듣고 깨달아서 부처님을 닮아가는 부처님과 비슷한 인격을 가졌다. 이것을 우리가 알게 되면 ”와, 나도 될 수 있겠다. 나도 될 수 있어.” 이런 확신이 든단 말이오.
그래서 수행자는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부처님의 제자들께 귀의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경하고, 부처님 법 만난 것을 기뻐하고, 내가 불법을 만나 불자가 되었다는 거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있다.
이런 것은 우리가 부처님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와 그것에 대한 나의 경험, 체험이 동반될 때 마음속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겁니다. 바로 우리가 그런 불자가 되어보자. 이것이 이번 법문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가 되겠고요, 앞으로 한 사례씩 들어서 그렇게 공부 해 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법륜스님 > 부처님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6. 비난에 대한 수행자의 자세 (0) | 2018.04.20 |
---|---|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5.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것 (0) | 2018.04.12 |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4. 행복과 불행은 내가 만드는 것 (0) | 2018.04.04 |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3. 불법에는 차별이 없다 (0) | 2018.03.29 |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1. 상대가 욕을 해도 빙긋이 웃을 수 있는 여유 (0) | 2018.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