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4. 행복과 불행은 내가 만드는 것

Buddhastudy 2018. 4. 4. 20:25


안녕하세요.

부처님이 어느 날 명상을 하고 있는데,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아주 젊은 제자, 출가한지 얼마 안 되는 한 젊은 제자가 부처님을 찾아와서

 

여쭐게 있습니다.”

물어봐라.”

 

부처님, 저 바라문들이 말하기를요, 사람이 죽었을 때, 저 바라문들이 제를 지내주면, , ‘죽은 사람이 좋은데 태어나라고 기도를 해주면 그 사람이 좋은데 태어난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이렇게 물었어요. 여러분들도 이런 생각 많이 해 봤죠. 그러면서 덧붙여 하는 말이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나쁜 짓을 설령 좀 많이 했다 해도, 이렇게 재를 잘 지내면서 바라문들이 와서 빌어주면, 죄가 없어지고 저 하늘나라에 태어나고요, 설령 그 사람이 착한 일을 하고 살았다 하더라도 이 바라문들이 죽은 뒤에 제를 성대하게 지내고 빌어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하늘나라에 못 태어난다고 그럽디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우리 주변에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믿으면 천당, 안 믿으면 지옥.’ 원효대사도 어디로 간다? 지옥가고, 세종대왕도 지옥가야 됩니다. 예를 들면 그런 것에 대해서 의심이 일어나죠.

 

그래서 부처님이 이 젊은 수행자가 묻는 질문에 대해서 자상하게 일러줍니다. 저는 안 그런 거 같아요. 이렇게 누가 물으면 죽비로 머리통을 때리면서 쓸데없는 거 묻고 있다. 가서 공부나 해.” 아마 이럴 거 같아요. 그런데 부처님은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더니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는 제자를 데리고는 뒤에 연못가로 갔어요. 연못가로 가서는 부처님이 돌을 하나 집더니 물에다 집어 던지시는 거예요.

 

가미니야, 어떻게 됐느냐?”

, 돌이 물 밑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렇다면 즉, 그들의 말이 맞는다면 이 연못가의 바라문들이 쭉~ 둘러서서

돌아 물위로 떠라. 돌아, 물위로 떠라. 돌아, 물위로 떠라.’

이렇게 빌어준다면 돌이 물위로 뜨겠느냐?”

 

안 뜹니다.”

왜 안 뜨니?”

, 그야 돌이 물보다 무거우니까 밑으로 가라앉는 게 당연하죠.”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그렇다. 무거운 것이 밑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처럼 어떤 사람이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죽이고,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을 함부로 훔치고, 삿된 음행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삿된 소견을 갖게 되면, 이 언행에 의해서 지어지는 업은 검고 무거운 것이어서, 마치 무거운 돌이 물밑으로 가라앉듯이 저절로 저절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서 지옥에 가느니라.

 

그 사람이 죽었을 때 바라문들이

이 사람은 평소에 살생도 많이 했고, 도둑질도 많이 했고, 이러저러한 행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가 빌어 줄 테니 이 분은 천국에 나게 해주십시오.’ 그런다고 천국에 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이번에는 이런 항아리에다가 기름을 넣어서 연못에 던졌어. 그러니까 그 항아리 무게 때문에 물 밑으로 가라앉았어. 그러자 부처님이 긴 장대로 그 항아리를 깨뜨렸어. 그러자 항아리가 깨지자 기름이 항아리 밖으로 나와 다 물위 떴어.

 

가미니야, 어떠니?”

, 기름이 물위로 떴습니다.”

왜 기름이 물 위로 뜨느냐?”

그야 기름이 물보다 가벼우니까 물 위로 뜨죠.”

그렇다면 바라문들이 연못가에 둘러앉아서

기름아, 물 아래로 가라앉아라. 기름아, 물 아래로 가라앉아라.’ 이러면 가라앉겠느냐?

안 가라앉습니다.”

왜 안 가라앉니?”

그거야 가벼운 게 뜨는 게 자연의 이치인데 그게 빈다고 가라앉습니까?”

 

그렇다. 그것처럼 사람도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않고,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을 갖지 않고, 삿된 음행을 행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삿된 소견을 갖지 않는다면 즉, 죽어가는 생명을 보면 살려주고, 방생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베풀어주고, 보시하고, 괴로운 사람을 보면 오히려 기쁘게 해주고, 진실을 말해주고, 바른 소견을 갖는다면 그가 지은 업은 희고 가벼운 것이어서 마치 기름이 물위로 떠오르듯이 저절로 저절로 위로 가서 천상으로 가게 되느니라.

 

바라문들이 그 사람이 죽었을 때, ‘그는 살아있을 때 죽어가는 생명도 많이 살려줬고, 남에게 많이 베풀었고, 그 몸을 청정히 했고, 진실한 말을 했고, 바른 소견을 가졌습니다. 그러니 그를 저 지옥에 가게 해주십시오.’ 라고 저주한다고 그가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란다.”

 

그러자 가미니가

알았습니다, 부처님. 알았습니다, 부처님. 잘 알았습니다, 부처님.” 이렇게 하신 거요.

 

여러분들 이 말씀에 동의합니까? 이게 불교인이고 기독교인이고, 남자고 여자고, 한국사람이고 일본사람이고 이 얘기를 들으면 다 동의가 됩니까? 안 됩니까? 동의가 되죠. 이해가 되고 동의가 되는 거요. “, 그러겠다.” 이게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들의 말이 옳으니 그르니 하지 않고, 이렇게 그에 맞는 적절한 비유, 그렇지 않으면 실험을 통해서. 그들의 말을 받아서 그것이 모순임을 깨우치고, 그리고 그 가르침이 합리적이라서 논리적으로도 모순이 없고, 누구나 들었을 때 합당하다. 그래서 우리가 최상의 깨달음을 뭐라고 그래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그러죠? 이것을 번역하면 무상정등정각. 무상정등각.

 

_바르다. 타당하다.

_같다. 보편적이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보편타당하다.

 

타당하다는 것은 객관적이다. 이런 얘깁니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 이건 객관적인 사실이죠. 지구가 스스로 돈다. 이것도 객관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태양이 지구를 돈다. 이건 객관적 사실은 아니에요. 그리고 이건 타당하지 않다. 타당하다. 이럴 때 이런 말을 씁니다.

 

그리고 보편적이라는 것은 무슨 얘기냐?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이게 보편적입니다. 대학 나온 사람만 안다든지, 남자만 알 수 있다든지, 높은 계급만 안다든지, 늙어서야만 안다든지. 이게 어떤 제한이 있을 때 이것은 차별이 있는 것이고, 보편적이다 할 때는 남녀노소, 성별, 종교 이런 데 관계가 없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진리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첫째 타당해야 되요. 정해야 돼. 그런데 정하더라도 보편적이지 못하면 그것은 온전한 진리가 아니다. 그래서 타당할 뿐만 아니라 뭐라고? 보편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정등이라고 말하는 거요.

 

그런 것 가운데서 가장 높은 것이다. 그래서 무상, 이 말이오. 이거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 무상정등각. 이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게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깨달음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부처님은 늘 이렇게 가장 바른 길을 누구나 다 알기 쉽게, 그리고 경험할 수 있도록 설하신 거요. 그렇기 때문에 그 법문을 듣고 우선 이해하고, 그리고 자기가 실제로 해보고, 체험적으로도. 그러니까 사고로 사색으로도 이해가 되고, 체험적으로도 경험이 되어지기 때문에, 승복이 되는 거요.

 

그래서 제자들이 부처님께 승복, 또는 절복이라고 그러죠. 복종이 아니고, 마음에서 흔쾌히 받아들여져서 기꺼이 굽히는 것을 우리가 절복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렇게 되어야 우리가 이것을 뭐라고 할 수 있다? 귀의라는 말을 쓸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귀의가 아니에요.

 

하극상이 있다. 이런 말 들어봤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치고 올라가는 것을 하극상이라고 그러죠. 하극상이 제일 많은 데가 어딥니까? 군대입니다. 그런데 복종이 제일 많은 데가 어디에요? 군대지. 그러니까 억압된 심리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거기에는 보복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폭발하는 거요.

 

그래서 저는 늘 내가 말하는데, ‘착한 여자 무서운 줄 알아야 된다.’ 이런 말을 합니다. 왜 그런 말을 할까?

 

착한 여자는 참거든요.

참는다는 것은 내가 옳다는 거요?

상대가 옳다는 거요?

내가 옳다는 거요.

 

내가 옳다고 화를 내면

약간의 인격이 깎입니다.

내가 옳은데도 불구하고 참으면

내가 더 옳아집니다. 아시겠어요?

 

그래서 참는 사람들은

너무너무 옳기 때문에

자기 문제점을 모릅니다.

 

그 옳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상대로부터 억압을 받게 되면,

그 옳음에 의해서 상대가 100% 그름이 되죠.

저건 인간이 아니다.” 이렇게 되는 거요.

 

그래서 터지면,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 하는

이런 무서운 폭발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사람이 독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옳음의 극치가 빚어지는 일이에요.

 

그래서 이 종교인들이 좋은 일도 하지마는, 종교인들이 사회에 끼치는 해악도 많습니다. 왜 그럴까? 자기가 옳다는 생각에 100% 빠져있거든요. 그래서 유교 같으면 제사를 안 지내는 사람은 저건 인간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니까, 천주교가 제사 안 지낸다고 죽이는 이런 일이 있죠.

 

또 기독교도 하나님을 안 믿는 것, 주님을 모시지 않는 것은 저건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였지 않습니까. 이런 것은 옳음의 극치입니다. 자기만이 옳다는 게 100% 확신에 차버리기 때문에 그래.

 

깨달음은 이런 옳음의 극치가 아닙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열린 마음이에요.

눈을 감고 고집하는 게 아니고,

눈을 뜨고 환히 보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법, 바른 법이라고 하면서도 왜 불교는 옳고 그름이 없다고 그러냐? 옳다 그름이 없다고 그러면서 왜 또 바른법이라고 하느냐? 이런 것 때문에 헷갈리는데,

 

옳다. 그르다하는 분별의 문제가 아니고,

눈을 떠서 환히 보는.

그와 같은 것을 우리가 부처님이 가르치신 바른 법이다. 정법이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우리가 중요한 것은 지금 말씀하신 이 가미니의 비유에서 이게 인연법입니다. 나쁜 인연을 짓게 되면 나쁜 과보가 일어나고, 좋은 인연을 짓게 되면 좋은 과보가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지은 인연의 과보는 피할 수가 없다. 깊은 바다 속, 깊은 산속에 가도 피할 수가 없다.

 

그러니 누구에 의해서 천상가고, 누구에 의해서 지옥가고, 누구에 의해서 괴로워지고, 누구에 의해서 기뻐지는 게 아니고, 자기 지은 인연에 과보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진실로 그 행복과 불행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 아니네.

 

그런데 인연과보를 확실히 믿으면

인연과보를 뛰어넘습니다.

 

이게 묘한 소리인데, 오늘 우리는 인연과보를 안 믿어요. 불자가 입만 열면 하는 소리가 뭐요? 인과법 아니오. 그죠? 그런데 인연과보를 정말 믿는다면, 여러분들처럼 이렇게 빌 일이 있을까? 없을까? 없겠지.

 

복은 지어놓지 않고

복을 받으려고 하는 건

인연과보에 어긋나잖아.

 

나쁜 인연을 지어놓고

나쁜 과보를 안 받으려는 건 뭐요?

이것도 인연 과보에 어긋나죠.

그래요? 안 그래요?

 

정말 인연 과보를 믿는다면

과보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되요.

 

, 나쁜 과보가 나한테 일어났을 때,

감사합니다.” 이렇게 받아들여야 돼.

지었으니까 일어나지, 짓지 않았는데 일어날 이가 없잖아. 그죠?

 

그 다음에 좋은 인연을 지었을 때는

과보를 바라지 않아야 돼.

? 당연히 일어나니까 바랄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내가 공을 벽에다 던졌을 때, 저게 벽에 가서 튀어나올까? 안 나올까? 이렇게 의심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 ? 던지면 바로 튀어나오니까.

 

그것처럼 좋은 인연을 지으면 좋은 과보가 일어나니

좋은 과보를 바랄 필요가 없는 거요.

그건 당연히 일어나기 때문에.

지으면 일어나기 때문에.

지금 안 일어나면 내일 일어나든,

이 생에 안 일어나면 내생에 일어나든.

 

그래서 은행에 저축을 해놓거나, 집에 쌓아놓거나 하는 것은 불타서 없어질 수 있지만, 지은 인연의 과보는 어때요? 없어지는 게 아니니까, 우리가 좋은 인연을 짓는 것이야 말로, 복 짓는다 그러잖아. 복은 저절로 오는 거요. 그래서 바라는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어.

 

또 반대로 나쁜 인연을 지었을 때도

그 나쁜 과보가 반드시 일어나기 때문에

나쁜 과보가 나에게 일어났을 때

원망하거나 회피하려고 할 필요가 없어.

기꺼이 받아들이면 되는 거요.

 

살생한 인연, 살생의 인연을 지으면 거기에 따른 과보가 따르는데, 첫째가 내가 다른 생명을 죽이니까 그 생명도 보복을 할 거 아니겠어요. 그죠. 그럼 나도 또 죽임을 당하겠죠. 그게 나한테 일어날 때는 뭐로 나타난다? 단명으로 나타나는 거요. 그러니까 살생을 하게 되면 과보가 단명이다.

 

그럼 단명 안하려면, 그거보다 낮은 과보가 뭘까? 병고요. 그러니까 내가 원수를 갚을 때, 내 가족을 죽였으니까 나도 죽여 버리면 첫 번째 되죠. 그런데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찔렀는데 안 죽었다. 그럼 병신 되겠죠. 그죠. 그거보다 낮은 과보가 뭐라고? 병고에 시달리는 거요.

 

그런데 찌르지도 못했다. 그러면 평생 비난하고 다니겠죠. 죽일 놈이라고. 그거보다 더 낮은 과보가 뭐다? 비난이오.

 

그래서 살생의 인연을 짓게 되면

그 과보는 단명의 과보,

그 다음에 병고에 시달리는 과보,

그 다음에 좋은 일 하고도 비난받는 과보가 따르는 거요.

 

그럼 만약에 자기가 살생한 인연을 지은 것을 모르면 어떨까? 이런 과보가 일어나면 억울하고 분하겠죠. 그래서

 

우리가 억울하고 분한 것은

지은 인연을 모르기 때문이오. 이래요.

여러분들 지금 인생 살면서 억울하고 분한 일 많죠. 그래서 늘 하는 게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일을 겪어야 되나.”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되나.”

이렇게 억울하고 분한 것은

지은 인연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오.

지은 인연을 알게 되면 그 과보를 기꺼이 받게 되는 거요.

 

그러니 내가 좋은 일을 했는데 늘 비난이 따른다. 그런데 살생한 인연을 모를 때는 엄청난 원망이 되는데, 내가 만약에 살생한 인연이 있다는 것을 내가 알았다. 어떤 원인을 지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비난의 과보는 갚음을 다 받는 거요? 조금 받는 거요. 조금 받는 거니까 기쁘게 받아들이는 거요. “감사합니다.”

 

그래서 욕 얻어먹으면 오래 산다.’ 그런 말 들어보셨어요. , 그게 그래서 나온 거요. 아시겠습니까? ‘욕 얻어먹으면 오래 산다.’ 이게 사실은 단명해야 되는데 어때요? 이 비난을 통해서 갚아 나가기 때문에 명이 길어지는 거요.

 

그러니까 욕을 얻어먹을 만 한 일에 욕을 얻게 되면 이거는 빚이 안 갚아집니다. 이거는 칭찬받을 일인데 비난을 받으면 이것은 과거 것을 뭘 갚는 중이다? 빚 갚는 중이오. 그럼 빚을 갚는 다는 것은 뭐가 길어진다? 명이 길어지니까 기분이 좋아? 안 좋아? 좋은 거요. 그래서 이번에 스님도 명이 많이 길어졌습니다.

 

그럴 때 그 비난이 나에게 뭐가 되지 않는다? 고통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인연과보를 확연히 알면 인연과보의 도리를 벗어난 해탈의 길을 갈 수가 있는 거요. 그래서 인과설과 인과를 넘어서는 해탈의 길이 모순이 안 됩니다.

 

중생은 인과에 따르고,

깨달음은 인과를 벗어난다. 이렇게 말하는데,

인과를 확연이 알고

인과를 확실히 믿어버리면

인과에 매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한번 웃음으로 해서

전생의 업까지 소멸한다고 하는

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는 거요.

이게 논리를 벗어나면서도 논리적이에요.

 

이치적으로도 아무 모순이 없는데도

이치마저도 넘어서 있어.

그래서 이것을 뭐라고 한다?

무상심심미묘법이다. 이렇게 부르는 거요.

이게 세속법과 다른 거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인과법을 믿으셔야 됩니다. 인과법을 믿는 자는 이렇게 작은 나쁜 인연을 지어서 큰 과보를 받는 줄을 알면 이 나쁜 인연은, 그러니까 10원 빌리고 만원 갚아야 되면 빌릴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 현명한 사람은. 그래서 계율을 누가 지키지 마라. 어쩌라 해서 지키는 게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해서 계율을 지키는 거요.

 

부처님이 이런 거 하지마라.” 하는 것은

그런 것은 돈 10원 빌리고 만원 갚아야 될 일이다.

바보 같은 사람이나 할 일이지,

현명한 사람은 할 일이 아니라는 거요.

 

그 다음에 또 요런 인연을 짓는 것은 즉, 선행을 하는 것은 엄청난, 10원 투자하고 만원을 벌 수 있는 일이다 할 때는 현명한 사람은 기꺼이 누구나 다 하는 일이다. 이 말이오.

 

그래서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은 작은 행위 같지만

그 재앙이 크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주는 것은 작은 행위 같지만

그 과보는 그 복은 매우 크기 때문에

 

죄 중에 첫 번째가 살생죄요,

복중에 첫 번째가 뭐다? 방생 복이라는 거요.

그래서 방생 다니는 거요. 아시겠어요?

 

그런데 이 방생 다는 것은 조금 심보가 좀 이상해. 정말 죽어가는 것을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복이 많다니까 멀쩡한 놈 잡아다가 내 복 빌려고 살려주면서 너 복 안 가져 오기만 해봐라.” 누구하고 비슷하다? 놀부하고 비슷한 거요. 그죠?

 

흥부가 살려주는 것은 방생이고,

놀부가 살려주는 것은 방생에 집착한 기복적 행위죠.

그래서 재앙을 자초한다는 거요.

이것이 다 인과도리를 모르고 안 믿어서 생긴 문제요.

그래서 인과의 도리를 믿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가 계율을 청정히 지키게 되고,

복이 되는 것은 짓게 되고.

그래서 이 세상에 드러나는 인격은

남을 해치지 않고, 남을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곧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길이다.

그래서 자리이타의 길을 가게 되는 거요.

 

여러분도 이렇게 인연법을 믿고, 따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