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각각 개별적으로 모여 있다고 생각했는데
깨달음을 얻고 걸림 없는 상태에서 세상을 바라보자
모든 존재들이 실제로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 존재라는 걸 알게 되셨습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에 2만여 개의 부속품이 들어갑니다.
과거에는 그 부속품들을 해체해서
바구니에 담아 놓은 것과 같이 세상을 본 것입니다.
이것을 삼라만상이라고 합니다.
수많은 개별적인 존재들이
그저 모여 있는 상태라고 본 것이죠.
모든 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은
그 부속품들이 설계도에 따라
정교하게 조립되어서 상호 작용하면서
자동차의 모양을 띠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때 부속품들은 하나하나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전체의 일부분이고,
그러한 부분들이 모여
다시 하나의 자동차가 되는 상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게 독립적이면서도 하나를 이루는 상태에서는
자동차가 움직인다거나, 소리를 낸다거나, 불을 비추는 등
제3의 작용이 나타납니다.
그 많은 부속품 중 하나만 잘못되어도
자동차 전체가 움직이지 못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가
바로 이러하다는 것을 깨달으신 겁니다.
이를 ‘연기(緣起)’라고 합니다.
천하 만물은 모두 이렇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이걸 제자들에게 이해시킬 때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이 가르침이 후대에 와서 교리로 정리될 때는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제행무상(諸行無常)으로 요약되었습니다.
-제법무아는 단독의 실체는 없다는 뜻이고,
-제행무상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은
카스트 제도, 성차별, 운명론 등
실체가 있다는 선입견을 극복하는 사상적, 철학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연기법을 깨달은 것입니다.
연기법으로부터 나온 것이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입니다.
빨리어로 표현하면
제법무아를 ‘아낫따(Annata)’라고 하고,
제행무상은 ‘아닛짜(Anicca)’라고 합니다.
연기,
즉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을 자각하지 못하면
즐거움이 곧 괴로움이 되는 고(苦)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무명(無明)에 휩싸여 있을 때는
삶이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으면 괴로움에서 벗어납니다.
이렇게 괴로움에서 벗어나 고요함에 이르는 것을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제법무아, 제행무상, 열반적정을
법의 세 가지 징표라고 하여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합니다.
괴로울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다가
연기법을 깨달으면, 즉 무상과 무아를 깨달으면
열반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먼저 우리의 삶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고성제(苦聖諦)입니다.
그런데 그 괴로움은 본래부터 주어진 게 아닙니다.
전생으로부터의 업보도 아니고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하늘이 준 것도 아닙니다.
괴로움은 형성된 것입니다.
어떻게 형성되었을까요?
우리의 어리석음과 그로 인한 집착으로 인해 형성된 것입니다.
이것이 집성제(集聖諦)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 괴로움은 사라집니다.
이것이 멸성제(滅聖諦)입니다.
그리고 그 어리석음과 집착에 다시금 휩싸이지 않으려면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도성제(道聖諦)입니다.
이것을 고집멸도(苦集滅道)
또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四聖諦)라고 합니다.
그리고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방법을 여덟 가지로 나누어서
팔정도(八正道)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시고
사르나트에서 처음으로 법을 설했습니다.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수행자는 양극단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쾌락을 따라가거나 쾌락을 거부하는
고행의 양극단에 치우치지 말고
항상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중도의 길을 가야 한다고 설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성제를 설하셨습니다.
사성제와 팔정도는 교화의 방편입니다.
이러한 방편의 기본 바탕이 되는 본래 깨달음은
연기법(緣起法)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연기법을 깨달았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핵심 목표는
괴로워하는 현실의 내가
괴로움이 없는 열반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자의 길입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근본이 되는 원리는 연기법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존재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괴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존재에 대한 진실은 바로 연기법입니다.
우리는 단독자의 집합이 아니라 서로 연관된 존재입니다.
지금은 과학이 많이 발달 되어
물질세계에서도 다 연관된 존재라는 것이 밝혀졌고,
생명 세계에서도 본래 어떤 종자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의 설계도에 따라
연관되어 나타나는 현상들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자도 바꾸지 못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유전자의 설계도를 바꾸면 종자도 바뀌게 됩니다.
물론 부처님은 물질을 연구하신 것도 아니고,
생물학을 연구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괴로움의 근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정신적인 현상에도 작용은 있지만
실체는 없다는 것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아트만(atman)이라고 하는 영혼이 있다고 믿었지만
부처님은 깊이 탐구한 결과
그렇게 보이는 작용은 있지만
실체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브라만이라고 하는 실체도 없고,
노예라고 하는 실체도 없고
남자가 우월하다는 실체도 없고
여자가 열등하다는 실체도 없고
다만 우리가 그렇게 잘못 인식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밝히셨습니다.
이러한 인식상의 오류를 걷어내면,
즉 무지에서 벗어나 실제의 모습을 보게 되면
누구나 번뇌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부처님은 이것을 본인이 직접 경험하셨고
그 경험을 토대로 대중들에게도 그 길을 안내하셨습니다.
태어남도 중요하고 출가도 중요하고 수행도 중요하고 다 중요하지만
성도가 제일 중요합니다.
부처님께서 붓다인 것은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일을 제일 중심에 놓고 정진을 해야 함에도
현재 정토회마저도
성도일에 가장 짧은 정진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모든 불자들이
성도일을 가장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성도재일 1주일 전부터 정진을 시작해서
성도일 전날에는 철야 정진을 하고
성도일에는 기념 법회를 하는 문화가 정착된다면
어쩌면 이것이 가장 적합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보통 깨달음을 등불로 많이 비유하기 때문에
어쩌면 성도절에 연등을 밝히는 문화가 생겨야 합당할 것입니다.
불자라면 성도일을 가장 중요시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어떤 모습이셨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는 어떤 모습이셨고,
또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이었으며,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는 또 어떤 모습이셨는지,
이러한 행적들이 어우러져 있는 곳이 바로 보드가야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드가야 근방에서 6년간 수행을 하셨고,
깨달음을 얻으셨고, 1000명을 교화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도 자기 수행만 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과 전법은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자기 해탈을 위한 수행 정진과,
다른 사람도 행복해지도록 해탈의 길로 인도하는 전법을
우리는 항상 함께 해나가야 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통 불교는
너무 종교적으로 흐르다 보니
복을 비는 데에 급급했고,
또 너무 철학이나 학문적으로 흐르다 보니
교리를 연구하고 지식을 쌓는 데에 치우쳤습니다.
그 결과 수행에도 소홀해지고 전법에는 소홀했습니다.
선불교가 새로 일어나면서 수행을 강조했고
수행은 어느 정도 중심이 잡혔는데
부처님 당시와 같은 전법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이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으로 돌아가려면
수행과 전법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성도절을 기해
우리 모두가 더더욱 수행 정진을 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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