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반야심경 20번째 강의 시간입니다. 오늘은 사성제에 이어서 무지역무득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무고집멸도/ 그 다음에 /무지/ 지혜도 없고, 이 말이오. 깨달음도 없고. 이 말이에요. /역/도 또한 /무득/ 얻음도 없다. 그러니까 이것은 글이 워낙 압축되어있으니까 그런데 쉽게 말하면 ‘이것이 깨달음이다’라고 하는 그 어떤 실체도 없고, 그러므로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할 것도 없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깨달음을 얻는다 해서 깨달음이라는 게 무슨 구슬 같은 게 어디 있어서 그것을 내가 발견하면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그 깨달음을 얻었다. 그 구슬을 얻었다라는 것을 움켜쥐고 있다. 이런 식으로 잘못 착각하고 있다. 그러니까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러니까 상대가 나쁜 사람이 아닌데,
자기가 “저 놈 나쁘다.”하고 한 생각을 일으켜서
그것을 움켜쥐고 있는 거요. 그래서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상을 지어버립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건 누구 생각이오? 내 생각이오.
그러데 이것을 내 생각이라고 내가 알지 못하는 거요.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이다.” 즉, 주관을 객관화 시켜버렸다.
내가 파란 색깔의 안경을 끼고 저 벽을 보니
저 흰 벽이 푸르게 보인다.
그럴 때 저 벽이 푸르다하는 것과 같다.
푸른 것은 나의 안경,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업식에 의해서
내가 그렇게 나에게 보인 거지, 그 벽이 푸른 색깔은 아니에요.
그것처럼, 남편이 술을 먹는다고 당신 나빠할 때,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술을 안 먹었으면 좋겠다.”하는 내 생각대로 안 되니까,
내가 그 사람을 나쁜 인간이라고, 나쁜 사람이라고
내가 한 생각을 딱 일으키고, 그것을 상을 지어버린 거요.
그리고는 그 사람이 나쁘기 때문에
“내가 그 나쁜 인간을 알았다.” 이런 식이란 말이오.
그러니까 이 문제가 해결이 되려면
그 사람이 크게 반성을 하고,
나한테 용서를 빌어야 이 문제가 해결이 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늘 자기가 일으킨 생각에 사로잡혀서
세상을 그렇다고 보고, 그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내 맘대로 안 되잖아. 그죠?
그래서 여러분들은 부처님이나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거요.
이것은 꿈속에서 강도에게 쫓기던 사람이
그 강도로부터 나를 구해달라고, 하나님이나 부처님께 비는 것과 같다.
그 부처님이 본래의 가르침은
바로 그 꿈에서 깨는 거란 말이오.
이것이 꿈이다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거란 말이오.
그러면 꿈에서 깨면, 깬 뒤에 “그것은 꿈이었다.” 이런 얘기요.
“그것은 무지였고 사로잡힘이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 꿈속에 강도가 있어서 깨면
강도가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강도는 본래부터 없는 거요.
그거 다 한 생각 일으킨 거요.
그러니까 그 무지로부터, 그 사로잡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이름하여 뭐라고 한다?
깨달음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러니까 텅 빈 줄을 알았다. 이 말이오.
이것은 헛것이고, 내가 이게 진짜인 줄 알고 그 동안에 집착을 했는데 알고 봤더니 가짜요. 그럼 이 가짜를 벗겨내니 그 속에 진짜가 따로 있다. 자꾸 우린 이런 생각을 해야 되는 거요. 왜? 뭐가 있어야 돼. 뭐가 없다고 그러면 허전해서 안 돼. 이게 문제에요. 그래서 이 무아가 제대로 이해되기가 어렵습니다. 내가 지금 ‘아’라고 생각했던 것은 ‘가아’다. 가짜다. 그래서 가짜인 줄 알고 봤더니 그 안에 진짜가 따로 있더라. 이런 얘기요. 그 진아를 내가 발견해야 된다. 자꾸 이런 생각을 하는 거요. 지금 이렇게 가르치는 분도 많죠. 왜 그럴까? 뭐가 있어야 돼.
그런데 가짜를 진짜인 줄 알고 집착을 했어요. 그런데 알고 봤더니 가짜더라. 이 가짜라는 말은 가짜와 진짜의 반대말이 가짜가 아닙니다. 이 가짜라는 말은 없는 것이더라. 텅 빈 것이더라.
그래서 금강경에 뭐라고 그래요?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다_무릇 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 이러잖아요. 그 허망하다는 말이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 허망하다. 그 말은 텅 비었다. 실체가 없다. 이런 얘기요. 그 실체가 없다라는 것을 뒤에 가서 뭐라고 설명합니까? 일체 유위법, 일체 함이 있는 법은 이 말은 상이 있는 것은, 그것은
/여몽환포영/ 꿈같고, 환영같고, 포_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다. 이 말이 전부 뭐요? 꿈, 깨보면 아무것도 없죠. 환영, 신기루, 이것도 아무것도 없죠. 착각이죠. 그 다음 물거품, 이것도보면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 다음에 그림자, 이것도 실체가 없단 말이오. 이게 바로 ‘아’라고 할 것이 없다. 공이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이 금강경에는 공이란 단어는 안 쓰잖아요.
/여로역여전/아침이슬 같고 아침이슬이라는 게 있지만, 금방 해나면 없어지죠. 그 다음에 번갯불 같다. 번갯불도 있는 것 같이 번쩍하고 금방 없어지지. 이 둘은 앞에 것은 무아고, 뒤에 것은 무상이에요. 다 앞에가 공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것은 텅 비어서 있는 것 같았는데 알고 봤더니 없더라. 착각이었더라. 그래서 그것을 허망하다. 이래요. 그래서 있는 줄 알았더니 자세히 봤더니 없더라. 귀신을 만나서 놀랐는데 정신을 차리고 봤더니 귀신이라는 것은 없더라. 내가 헛것을 봤더라. 그게 약견_만약에 이렇게 본다면, 제상비상_상이 상 아님을, 상이라고 하는 것은 실체가 있는 줄 알았는데, 상 아닌 것은 실체가 없고 텅 빔을 본다면 그게 곧 부처를 보는 거다. 그게 곧 깨달음이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이 문제가 정확하게 되어야 되요. 여러분들이 상대편에 대해서 내가 환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대편에 어떤 존재가 있다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내가 보는 게 아니고,
내가 상으로 그려서 보고 있어요.
그 갭이 크면 클수록 실망을 하게 됩니다.
또 ‘나는 이런 인간이다.’하고 자기가 자기를 그립니다. 대부분 다 자기를 다 예쁘게 그려요. 다 좋게 그려요. 그래서 너무 자기를 잘 그려놨기 때문에 어디가도 잘난 척해요. 그런데 이 현실의 자기는 자기가 봐도 좀 실망스러워요. 그래서 너무 잘난 체하기 때문에 자기에 대해서 또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이
현실의 자기를 보면서는 열등의식이 있고
자기 그려놓은 상으로는 잘난 척하고,
그래서 이게 열등의식과 우월의식 사이에
모든 사람이 다 양쪽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기를 세우고,
어떤 때는 기가 죽고,
그 갭이 크면 클수록
자기가 부끄러워집니다.
자기는 자기를 너무 잘 그려놨는데,
이 현재에 있는 자기는 말도 좀 신통치 않게 하고,
노래도 잘 할 줄 모르고,
거울을 보니 얼굴도 별로 안 예쁘고.
이래서 이게 너무 실망이 큰 거요.
그래서 자기상과 현실의 자기 사이에 갭이 너무 크면
자기에 대해서 실망하게 되고,
그 실망이 커지면 보기 싫어지고,
그래서 문 닫고 밖에 안 갑니다.
즉 내가 안보는 게 아니라 남에게 보이기가 부끄럽다.
그래서 안 나가려고 그래요. 주로 혼자 있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이런 것은, 이런 못난이는 없애버리는 게 낫다.
이게 바로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 이래서 자살로 가고.
그 다음에 내가 상대에 대해서
내가 그린 것과 상대 사이에 갭이 너무 커지면
실망하고 미워집니다.
보기 싫다 해서 안 보려고 그래.
헤어지고 안보면 되는데, 안볼 수가 자꾸 없어져.
그러면 어떻게 된다?
안보는 방법은 없애버리는 거요.
그게 뭐다? 살인.
그러니까 자살과 살인은 동일합니다.
그래서 살생하지 마란 말은
살인도 해서는 안 되지만
자살도 해서는 안 돼요.
본인에게나 남은 가족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살인행위하고 자살행위하고
어느 게 더 업보가 크냐하면
자살이 더 업보가 큽니다.
그러니까 일체중생을 위하여
내 한 몸을 던지는 것과는 다른 얘기에요.
이것은 자기를 헌신하는 거고,
이것은 자기가 보기 싫어서
죽여 버리는 거요.
이것은 일종의 정신병에 속한다.
그래서 생명경시사상이 있으면 살인행위도 늘어나지만 자살행위도 늘어나게 된다. 이렇게 우리가 자꾸 착각하게 된다. 이 착각에서 깨어난다. 이게 깨달음이오. 그런데 깨달음이라는 것을 잘못이해해서 가아를 버리고 진아를 발견한다. 이렇게 되면 불성을 찾는다면서 마치 몸이나 어디 마음속에 아주 다이아몬드 같은 불성이 반짝반짝 빛나서 그것을 찾으려고 하는 거요. 이렇게 되면 유아에 빠진다. 이러면 우파니사드철학, 브라만 사상에 돌아가 버리는 게 됩니다. 무아사상도 아니고 공사상도 아니다.
그래서 여기, 그런 오해, 착각을 하지 마라. 그래서 뭐다? /무지/ 깨달음도 없고, 이 말이오. 이것을 잘못 알아 들어서 “아무리 노력해봐야 너 못 깨닫는다.” 깨달음이란 없는 거야. 그런 뜻이 아닙니다. 깨달음이라고 할 때, 그 깨달음이라는 것은 가아를 버리고 진아를 찾듯이 뭔가 깨달음의 실체가 있다. 이것은 착각에 속한다. 그래서 무지. 깨달음도 없고, 그러니까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할 것도 없다. 얻을 것도 없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것, 여러분들이라고 하니까 나는 꼭 뺀 것 같은데, 그게 아니고, 나와 여러분들을 합해서 우리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야 됩니다. 자신의 무지를 깨우쳐야 된다. 한 생각 사로잡힌 데서 벗어나야 되는 거요. 그런데, 우리는 뭔가를 자꾸 얻으려고 그래요. 깨우치면 움켜쥐고 있던 것을 놔버리는 거요. “내꺼다” 했는데 알고 봤더니 내거 아니오. 그래서 집착할 바도 없고, “나다” 했는데 나다할 게 없어요. 그래서 집착할 바가 없고, “내가 옳다”했는데 알고 봤더니 옳다할 것도 없어. 이게 뭐요? 무아, 무소유, 무아집이란 말이오. 이것을 깨쳐서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면 자유와 행복을 얻는 거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렇지 않죠. 돈에 집착을 합니다. 돈, 권력에 집착을 합니다. 명예에 집착을 합니다. 인기에 집착을 합니다. 그래서 기필코 그것을 얻어야 돼. 거기에는 내가 있고, 내 게 있고, 내가 옳은 게 있어요. 이런 집착 때문에 우리가 괴로움이 빠져 있고, 우리가 이 본질을 꿰뚫어보면, 바로 이 집착에서 놓여나는 거란 말이오.
그런데 도를 어떻게 구하느냐? 도를 돈 구하듯이 구하는 거요. 도라는 게 있고, 돈이 있듯이 내가 그것을 어떻게든지 고생고생 해서 도를 얻는다. 도를 깨닫는다. 도를 얻는다. 이런 식의 도를 얻는단 말이오.
그래서 부자가 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30년 사업을 했는데도 부자가 못되었다. 그럼 실패했죠? 두 다리 뻗고 울어요. “아, 내가 부자가 되겠다고 원을 세웠는데 아직도 사업해서 뭘 못했다.”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되겠다고 출세하겠다고 원을 세웠는데 3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한자리 못했다.” 그럼 실패한 거란 말이오. 연예인이 되거나 해서 인기를 얻으려 했는데 못 얻었다. 그러면 절망에 빠지죠.
그것처럼, 그런 관점에서 도를 구한단 말이오. “내가 수행을 해서 도를 얻어서 깨쳐야지.” 이런데 10년이 지나가고 20년 30년 지나도 도를 못 얻었다. 그럼 다리 뻗고 운단 말이오.
“아, 내가 30년이나 수행했는데 도도 얻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이러면서. 그때 깨달음이라는 것은 도나 돈이나 별 다른 게 없습니다. 포장이 다른 것뿐이지. 그러기 때문에 30년을 했는데도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괴로움이 생긴다.
수행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움켜쥐고 있는 것을 놔버리는 거요.
텅 빈 줄을 아는 거요.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내가 괴롭다.” 수행을 하는데 “내가 괴롭다”하면 왜 괴로울까? 보니까 뭔가를 움켜쥐고 있어. “아, 내가 이것을 움켜쥐고 있구나.”하고 탁 놔버리면 번뇌가 사라져버리고 괴로움이 사라져버린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가끔 이렇게 말하죠. “스님, 괴로워주겠습니다.” “왜?” “요즘 수행이 잘 안되어서요, 애가 말을 안 들어서요, 남편이 말을 안 들어서요. 아내가 말을 안 들어서요.” 하는 것처럼 수행이 잘 안되어서 괴롭다는 거요. 이런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수행이라고 하지, 이분이 말하는 수행이 안 되어서 괴롭다할 때 수행은 뭘 의미합니까? 절하는 것을 의미하든지, 좌선하는 것을 의미하든지, 염불하는 것을 의미하든지, 무슨 공부를 의미하든지. 무슨 호흡을 의미하든지,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이게 바로 수행이라고 하는 상에 집착한 거요.
수행이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뭔가 상에 집착해서
뭔가 집착함으로 해서 괴로움이 생길 때
그 본질을 꿰뚫어보고 그것을 놔버릴 때
자유로워지는 것을 이름하여 뭐라고 한다? 수행이다.
이렇게 부른단 말이오. 그런데 “수행이 안 되어서 괴롭다.” 이럴 때는 수행이라고 하는 상을 짓고 그 상에 집착했다. 이런 얘기요. 그런데 오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수행병에 걸린 사람이 많습니다. 돈병에 걸리고, 출세병에 걸리고, 인기병에 걸리듯이 수행병에 걸려서 돈을 얻으러 지구를 몇 바퀴 돌고, 출세를 하려고 온갖 곳에 줄서고 하듯이 도를 구한다고 온 천지를 돌아다닌단 말이오. 이것은 방황이에요. 방황.
바로 자기 마음을 봐야 되는데,
도를 지금 밖으로 구한단 말이오.
인도에 가면 될까? 티베트에 가면 될까?
미안마가면 될까? 미국가면 될까?
이렇게 구하러 다닌다. 구하러 다녀.
그런데 본질은
구할 것이 없는 줄을 깨쳐야 되는 거요.
이 정반대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경을 잘 읽어야 된다. 이 말이에요. /무지역무득/ 깨달음도 없고 깨달음을 얻을 바도 없다. 그러니 다음이 어떻게 연결이 됩니까? /이무소득고/ 얻을 바 없는 까닭으로. 그런데 얻을 바가 없어야 돼.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얻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말이오. 그 얻는 것을 돈만을 얻다가 이제는 권력을 얻으려고, “에이, 권력 해봐도 별거 아니더라.” 그래서 명예를 얻으려고, “에이, 명예 그거 별거 아니더라. 도를 얻어야지.” 이렇게 얻으면 그것은 동렬에 속하는 거다. 그것은 도가 아니다.
자, /이무소득고/ 이 얻을 바 없는 까닭으로. 그러니까 한 법도 얻을 바가 없는 줄 알아야 된다. 그러니까 이 말은 모든 집착에서 놓여놔야 된다. 제법이 텅 빈 줄을 알아버리면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고, 뭔가 움켜쥐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지는 거요. 이 얻을 바 없는 까닭으로, /보리살타/는 여기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 지금까지 /시고 공중/ 여기부터 시작해서 여기까지는 뭐요? 소승교설의 잘못됨을 즉, 법상을 짓고 법집을 일으키는 것을 지금 비판해서 본래의 부처님 가르침대로 돌아오도록 인도해 주는 거란 말이오.
그러니까 첫째 단락이 대승의 진실에 대한 얘기요. 제법이 공함을 가르치고,
두 번째가 그 관점에서 봤을 때 소승의 법집을 비판하는 거란 말이오.
그리고 세 번째 단락은 다시 대승의 위대함을 찬양하고 찬탄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첫 문단에서 대승의 위대함, 대승의 핵심 사상을 말할 때, 주인공이 누구였어요? 관자재보살이었죠.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하여서,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오온이 모두 공함을 깨달으시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되었어요.
그러면 관세음보살만 그러시냐. 아니다. 모든 대승보살은 다 이렇게 수행한다. 그래서 여기에 보리살타는 이렇게 된 거요. 엄격하게 말하면 앞에 뭐가 붙어야 된다? ‘제’ 자가 붙어야 됩니다. /제보살은. 제보리살타는/ 이 말이오. 모든 보살마하살은. 정확하게 말하면. 그러니까 관세음보살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대승보살은 다 이렇게 수행해서 이렇게 깨달음을 얻는다. 이런 얘기요. 자, 보리살타, 이 말은 보리는 보디의 음역이고, 살타는 사트바의 음역이죠. 보디사트바. 깨달은 중생. 그러니까 중생이 큰마음을 내어서, 깨닫겠다고 원을 세운자다. 이 말이오.
그래서 이 보리살타는 보디사트바인데,
금강경에서는 어떤 자를 보디사트바라고 한다?
발심한, 발보리심한자,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한자,
위없는 깨달음을 얻겠다고 한마음 낸 자,
그런 선남자 선여인을 보디사트바라고 한단 말이오.
그러니까 보리살타가 곧 보살입니다. 줄인 말이 보살이에요. 모든 보살마하살들도, 이 말이오. /의반야바라밀다고/ 그러니까 관세음보살만이 아니라 모든 보살들도 다 무슨 수행을 한다?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한다. 깨달아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그런 수행을 한다. 여러 가지 수행법이 있는데 바로 깨쳐서, 자신의 무지를 깨쳐서, 바로 해탈해 버리는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한다.
앞에서는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이렇게 썼는데 여기서는 줄여서 /의반야바라밀다/ 이렇게 표현만 다를 뿐이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까닭으로. 이렇게 표현했어요. 그러니까 반야바라밀다를 닦아서. 이 말이오. 닦아서 /심무가애/마음의 장애가 없다. 마음이 아무 거리낌이 없다. 확 깨쳐 버리니까 마음에 아무 거리낌이 없어요. 강도에 쫓기던 사람이 눈을 번쩍 뜨니까 마음에 아무 거리낄게 없는 거요. 마음에 아무런 장애가 없다. 마음에 아무런 장애가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다. 확 깨쳐버리니까 마음에 아무런 장애가 없고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 그게 바로 뭐요?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보통 우리는 마음에 걸림이 많죠. 죽음이라는데 걸리고, 시체라는 데 걸리고, 무덤이라는 데 걸리고, 이러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까 공동묘지 옆을 지나면 뭐가 생깁니까? 두려움이 생기잖아요. 마음에 걸림이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는 거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두려움이 없다.” 이렇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성난 코끼리가 왔을 때도 사람들이 그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니까, 부처님께서는 “여래는 두려움이 없다.” 또 살인자 앙굴리말라가 칼을 휘두르고 오는데 사람들이 다 도망을 가면서 부처님보고 그쪽으로 못 가게 했죠. 그런데 부처님은 “여래는 두려움이 없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부처님께서 마음에 아무런 걸림이 없는 거요.
즉, 마음에 걸림이 없다는 것은 마음에 분별이 없다. 이런 얘기요.
우리는 분별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예쁘고 못나고 늙고 젊고 잘하고 잘못하고,
뭐 온갖 분별을 일으켜서 그것을 집착하잖아요.
좀 좋으면 가지려고 그러고, 싫으면 버리려고 그러고.
우리들이 일으키는 이 분별은
그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게 죽끓듯이 하죠.
부부가 같이 살면서 조금 마음에 들면 “아이고, 천생연분이다.”이러고, 조금 마음에 안 들면 “우리는 전생에 원수였나 봐.” 늘 이렇게 왔다 갔다 한단 말이오. 우리는 늘 분별에 끄달려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그런 분별이 없다. 그런 분별이 없기 때문에 어떤 바라문집에 걸식하러 갔는데, 그 바라문이 막 욕을 한단 말이오. 그럼 나 같으면 대꾸하고 싸우겠죠. 왜? “야, 안주면 말지 왜 욕해?” 대꾸하고 싸울 텐데, 부처님은 빙긋이 웃으신단 말이오. 분별이 없기 때문에 그러죠. 우리는 분별을 일으키기 때문에 늘 경계를 갖고 시비를 하게 되는 거요.
자, 그래서 ‘마음에 장애가 없음으로 두려움이 없고’ 이 말은 두려움이 없다. 이 말은 괴로움이 없고, 이 말도 되요. 자,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된다? 전도, 뒤집어 지는 것, 거꾸로 되는 것을 말합니다. 몽상, 꿈속의 생각이오. 이 /전도몽상/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다. 이런 얘기요. 그런데 우리가 지금 전도몽상에 휩싸여 있는 것은 바로 경계에 끄달리기 때문에 그래요. 경계에 끄달리기 때문에 이게 헷가닥 해버리는 거요. 그러니까 상대가 뭐라고 하는 소리에 끄달려서 그 말에 끄달리고, 그 모양에 끄달리게 되니까, 눈이 확 뒤집어진다. 이 말이오. 그래서 “나쁜 놈” 이렇게 된단 말이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쁜 놈”이오? 내가 나쁘게 생각하는 거요. 내가 나쁘게 생각하는 거지. 그때 나의 분별이,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내가 한 생각이 일어난 거지,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그런데 한 생각이 일어나 확 사로잡혀 버리니까 그 놈이 나쁜 놈이 되어버리는 거요. 그 사람이 나쁜 줄 내가 알았다. 나는 바로 본거요. 어떻게 봤다? 나쁜 놈을 나쁜 놈이라고 내가 정확하게 봤다. 뒤집어져서 거꾸로 되어버렸어. 이것을 뭐라고 한다? 전도몽상이다. 이렇게 말해요. 이 전도몽상으로부터 멀리 떠난다. /원리/라는 말은 멀리 떠난다. 전도 몽상으로부터 멀리 떠난다. 이 말이 뭘까? 이 무지로부터 깨어났다. 이 말이오.
전도몽상으로부터 멀리 떠났다를 앞에 문장하고 비교해본다면 뭐하고 똑같을까? /조견오온개공/과 똑같습니다. 오온이 모두 공함을 밝게 비추어 봤다. 이 말은 전도몽상에서 멀리 떠났다. 전도몽상에서 깨어났다. 이 말이오. 그러니 어떻게 되더나. 앞에서는 /도일체고액/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여기는 /구경열반/ 마침내 니르바나에 이르렀다. 열반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것을 곧 뭐라고 한다? 열반이라고 하는 거요.
열반이라는 것은
모든 괴로움이 소멸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뭐라고? 열반,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마침내 열반에 이르렀다는 말이나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는 말이나 다 같은 말이오. 그게 똑같은 문장이에요. 표현방법이 좀 다르지.
다시 돌아가서 /관자재보살/ 대신에 뭐라고 들어왔어요? /보리살타/는 이렇게 되어있죠. 사실은 이 앞에 뭐가 붙어야 된다. 제, 제보살마하살은. 그 다음에 앞에서는 /행심반야바라밀다시/ 했는데, 여기는 /의반야바라밀다/ 그 사이에 조금 설명이 들어가 있어요. 밑에 문장에서는.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이게 들어가 있고, 위에는 그런 말없이 바로 /조견오온개공/ 이렇게 했죠. 여기서는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이 말이오.
그러니까 원리전도몽상이나 조견오온개공이나 같은 뜻이오. 도일체고액, 여기는 구경열반. 핵심은 뭐요? 관세음보살만이 아니라 모든 대승보살은 다 이렇게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서 마침내 열반에 이른다. 이런 뜻이오. 그런데 모든 보살마하살만 그러냐 이 말이오. 보살은 아직 부처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죠. 그러니까 대승보살만 그러냐? 아니다. 모든 부처님도 사실은 다 이렇게 수행을 해서 위없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니까 이 반야바라밀다를 굉장히 강조한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이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해서 우리가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닫고 열반에 이를 수 있다. 이 말 아닙니까? 그죠.
그러니까 대승보살은 반드시 반야바라밀다를 행한다. 그런데 보살만이 아니라 모든 부처들도 다 그렇게 수행을 했다. 그래서 /삼세제불/이라고 되어 있어요. 사실 이것도 정확하게 말하면 /시방삼세제불/이라고 그래야 됩니다. 삼세라는 것은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를 말한단 말이오. 이것은 시간을 온통 통털어서 하는 말이죠. 그럼 공간을 온갖 통털은 것은 뭐라고 그래요? 시방이라고 그래요. 십방. 십방이 뭐요? 동서남북, 북동 북서 남동 남서, 이것을 사유 그러죠. 동서남북 사유, 그러니까 몇 방이오? 8방이죠. 거기다 상하 십방이오. 쉽게 동서남북 사유 상하. 그러면 십방이 되요.
그러니까 온 우주를 통털어서 이런 뜻이에요. 온 누리에 이런 뜻이죠. 온 누리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과 무한한 과거로부터 무한한 미래에 이르도록 출현하신 모든 부처님들, 이게 시방삼세일체제불이란 말이오. 여기서는 그냥 삼세제불이라고 이렇게 표현했지만. 그럼 여기서 삼세는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해도 되지만, 정확하게는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 이 3개를 합쳐서 삼세라 그래요.
그러면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는 무엇을 말하느냐? 이 우주가 이 세계가 반드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데서 어떤 인연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머무른다. 그리고 흩어져서 사라진다. 이것을 성주괴공 한다. 그랬죠. 그러니까 과거에도 이렇게 이 세계가 한번 이루어지고 머무르고 흩어져서 사라진 이 과거에 대겁을, 이것을 대겁이라고 그래요. 이 대겁을 뭐라고 한다? 과거세라고 그래요. 그리고 이 겁을 장엄겁이라고 그래요. 과거 장엄겁.
그럼 현재에 와서도 어떠냐? 이 우주가 이루어지고 지금 머무르고 있어요.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흩어지고 사라진다. 이것을 현재세라고 그래요. 이것을 현겁이라고 그래. 현겁. 그러면 또 미래에 또 이 우주는 또 이루어지고 머무르고 흩어져서 사라진다. 이것을 미래겁이라고 그래요. 미래세 미래겁 이것은 뭐다? 미래 성숙겁 또는 성수겁이라고 그래요. 미래성숙겁.
그러면 과거 장업겁에도 이 이루어지고 머무르고 흩어져서 사라지는데, 이 머무르는 주겁, 이 주겁 때 유정이 태어난다. 생명이 태어난다. 그때 인간도 태어나고 부처님도 출현한다. 그런데 과거장엄겁에 천부처님이 출현하셨습니다. 이미. 그러면 현재 현겁에는 몇 부처님이 출현하셨냐? 4부처님이 이미 출현하셨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네 번째 부처님이오. 다섯 번째 부처님이 미륵부처님이오. 이렇게 해서 앞으로 996분의 부처님이 더 출현하십니다. 그래서 현재 현겁에도 천부처님이 출현하시고, 미래 성숙겁에도 천부처님이 출현하다.
그래서 우리가 천불전을 지을 때는 어느 것을 모신다?
현겁의 천부처님을 모십니다.
삼천불전을 짓는 것은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 삼천부처님을 모시는 거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천배 정진할 때는
천재현겁에게 한배 한배 절하는 거고,
삼천배를 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천부처님에게
한배 한배 한배 절을 하는 거란 말이오.
이렇게 시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 또 현재에도 이곳에 말고 다른 세계에는 부처님이 계십니까? 안 계십니까? 계신다 그러죠. 서방정토 극락세계 아미타부처님. 동방정토 유리강세계 약사여래불. 이렇게 다른 세계에 많은 부처님이 계신다.
이런 부처님은 여기 어디에 들어갑니까? 시방제불에 들어가는 거요. 시방제불. 이 우주에는 이런 세계가 몇 개 있다. 갠지즈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다. “이거 하나만 있다. 이거 누가 만들었다.” 이런 생각 아니오. 갠지즈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다. 그 정도만 있느냐? 아니다.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갠지스강이 있고, 그 모든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다. 이것이 불교에서 보는 우주관이오. 그러기 때문에 다른 세계, 다른 생명이 살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아인슈타인의 우주관은 어떻습니까? 태양이 있고, 태양 주위에 많은 혹성이 돌고 있죠. 그 가운데 지금 지구 하나 있죠. 그럼 지구에만 생명이 있고, 달에 생명이 없고 수성, 목성, 토성에 생명이 없다 하더라도 태양계에 생명이 있는 게 지구 하나 있겠죠. 딴 데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데, 지구 하나만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은하계 우주에는 태양계가 1천억 개 이상 있습니다. 그러면 한 태양계에 하나씩만 있다고 해도 얼마나 있다? 1천억 개 이상이 있다.
그런데 이 대우주에는 이런 은하계 우주가 다시 일천억 개 이상이 있다. 그러니까 오늘날 불교의 우주관은 현대의 과학적 우주관과 큰 차이가 없다. 현대 우주관에서도 이러한 별들은 항상 합니까? 생성소멸 합니까? 생성소멸 하죠. 이런 데에서 시방제불, 또 삼세제불, 합하면 시방삼세일체제불, 이 얘기에요. 여기서. 그러니까 시간적으로든 공간적으로든, 과거에 이미 오셨고, 현재 오시고, 미래에 오셨던 모든 부처님들, 또 타방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들도 다 어떤 수행을 했다? 반야바라밀다를 행했다. /의반야바라밀다/ 그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것은 인도 말인데 그대로 번역하면 무상정등각, 무상정등정각, 그러니까 무상이라는 것은 이것보다 더 높은 게 없다. 그 말이 최고로 높다 이 말이오. 무상정등, 그러니까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 이런 얘기에요. 바르고 평등하다. 바르다는 것은 뭐요? 객관적 진리다. 이런 얘기요. 그 말을 우리가 타당하다. 이런 순 우리말로 타당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바르다. 그 다음에 평등하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두루 적용이 된다. 이것을 뭐라고 그래요? 보편성이라고 그러죠.
그러니까 정등은 쉽게 우리말로 번역하면 보편타당하다. 그것이 바르기는 한데, 박사만 알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은 평등하지 못합니다. 보편성이 없다 이 말이오. 그것이 모든 사람이 다 안다. 즉,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 이렇게 다 알고 있어요. 그래도 그것은 사실이 아니에요. 그럼 이것은 뭐가 없다? 바르지 못하다.
그러니까 진리를 그것이 바라야 되고,
보편적이어야 되요.
두 가지 조건을 다 갖추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쉽게 말하면 보편타당하다.
그러니까 보편타당한 깨달음 가운데에서
이것보다 더 높은 더 이상은 없는 깨달음,
최고의 깨달음. 이게 무상정등각이다. 무상정변지다.
이렇게 번역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니까 앞에 보살들한테 얘기할 때는 제법이 공한 것을 깨닫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표현했죠. 그러면 법을 깨닫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이것을 합해서 여기서 뭐라고 한다? 무상정등정각을 얻었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러니까 똑같은 설명입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법륜스님 > 반야심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륜스님 반야심경 제22강 가장 신비하고 밝고 높은 진언 반야바라밀다2 (0) | 2017.06.21 |
---|---|
법륜스님 반야심경 제21강 가장 신비하고 밝고 높은 진언 반야바라밀다1 (0) | 2017.06.20 |
법륜스님 반야심경-제19강 사성제 (0) | 2017.06.15 |
법륜스님 반야심경-제18강 12연기 (0) | 2017.06.14 |
법륜스님 반야심경-제17강 대승의 공사상 입장에서 본 소승교설의 비판 (0) | 2017.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