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6)

[법륜스님 즉문즉설 1195회] 수행은 참는 것이 아니다

Buddhastudy 2016. 6. 24. 05:53



  

32살이 나이가 적다고 지금 생각하는 가요? 아이고, 옛날 같으면 할머니 될 때가 다 되 갈 나이에요. 여러분들 제가 인도에 가서 가난한 동네에 사는데, 열 한 다섯 살 되면 결혼하는 거 알아요? 열일곱 살에 애기를 낳아요. 그러면 그 애도 또 열다섯 살에 결혼해서 열일곱 살에 애기 낳으면 서른 네 살이면 어떻게 된다? 할머니가 되는 거요. 지금 자기는 내년되면 할머니 될 나이에요. 결혼도 아직 안했어요? 그러니까 그렇지. 으흠.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다. 성숙된, 이제 곧 40이 되면 불혹이라고 그러잖아. 그런데 내가 참고 뭘 억누르고 있다. 그러면 터집니다. 참는 거는 터져요. 반드시. 즉 왜 현대인들이 스트레스가 많다고 그래요? 참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이 수행이라는 건 참는 게 아니에요. 즉 성질대로 하는 건 범부중생. 그러니까 확대 생산하는 거요. 내가 성질내면 상대도 또 성질내고 나도 내고, 이래서 확대 생산하는 거고, 내가 참으면 확대생산을 안 해요. 그런데 이게 쌓였다가 터져요. 세 번까지 참았다. 보통 삼세번에 많이 터져요.

 

그러면 이 참는 거는 화내는 거보다는 낫지만 이건 해탈의 길은 행복의 길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화내면 손해가 많다면 이건 손해를 좀 적게 보는 길이지, 이익 보는 길은 아니다. 이 얘기에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들이 옛날에 너무 많이 참아서 화병이라고 하는 독특한 병이 있잖아. 화병에 걸리고 이러는데, 요즘 현대인들이 스트레스 많은 것도 그래요. 그래서 참으라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저 놈이 밉지만, 나쁘지만 참아라가 아니라, “, 저 사람은 저런 입장에서 저럴 수도 있겠구나.” 이게 뭐요? 이해죠. 그죠? 이해.

 

즉 사람이 다 서로 달라, 생각과 믿음과 가치관이.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회교도 입장에서는,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신부님 입장에서는, 스님 입장에서는, 아내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라고 이해, 인정과 이해를 하는 건 참는 거 하고 달라요. 내가 이해를 못하면 아이고, 모르겠다.” 이렇게 하면 화가 팍 나고, 성질이 나는데. “, 그래서 그랬구나. 난 또 왜 그랬다고.” 이게 이해 아니에요. 그죠? 그러면 답답한 게 없어집니다. 그래서 참는 거 하고 다르다. 그러니 자기가 법문을 듣고 이해를 하면 성경대로 하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자유로워지는 거고, 자기가 참으면 폭발하는 거요.

 

으흠. 그러면 이해하지 말고 살면 되지 뭐. 그러면 아무 문제없어. 아까처럼 착하게 살고 싶으면 어떻게 해라? 착하게 살고, 나쁜 짓 하고 싶으면 나쁜 짓 하고, 여자 종아리 만지고 싶으면 만지고, 성추행 범으로 감옥 가서 살고, 3년 있다 나와서 또 만지고 또 가서 살고, 그게 좋으면 하면 되요. 스님은 그런 거 갖고 하지 마라는 소리를 안 해요. 다만, 자기가 감옥 가서 살면서 아이고, 그거 잠시 참았으면 이 고생 안하는데.”이렇게 후회할 때 뭐라고 한다? 그러려면 하지마라. 이렇게 얘기하는 거지.

 

그러니까 자기가 재미가 없으면 재미있게 하세요. 그런데 재미가 있다는 건 반드시 과보가 따라요. 고락이 있으면 반드시 뒤에 뭐가 있다? 고가 있어요. 그게 윤회에요. 이거 벗어날 수가 없어. 예를 들면 자식 있는 기쁨이 있으면 자식이 죽거나 자식이 문제가 생겼을 때 거기에 따른 고가 있고, 결혼하는 기쁨이 있으면 저런 결혼에 뭐가 있다? 고가 발생하는 거요. 그러니까 나는 결혼의 기쁨도 없지만 결혼의 고도 없는 거요. 그러면 재미가 없다. 그러면 결혼하면 되요. 아시겠어요?

 

그래서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 저렇게 살아야 된다.’ 정한 바가 없고, 자기가 선택해서 사는데, 다만 선택에 따른 책임을 져야 된다. 돈이 궁할 때는 빌려야 됩니까? 안 빌려야 됩니까? 이렇게 정해진 거 없고 빌렸으면 갚아야 되고, 갚기가 싫으면 궁해도 안 빌려야 되고, 그러니까 내가 살기 어려우면 저축을 안 해도 되요. 그런데 이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지금 어려운 가운데도 저축을 해서 나중에 목돈을 받아야 되는 거요. 그러니까 그건 자기 선택이지 진리라는 거는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가 진리가 아니고, 이런 인연이 지으면 저런 결과가 난다는 원리는 설명하는 게 진리고, 그걸 우리가 보고 내가 선택하는 거요.

 

돈을 빌렸더니 갚아야 된다. 이거 피해가는 법이 없겠느냐? 그게 종교 아니오. 돈 빌리고 안 갚아도 된다. 이게 종교요. 복 안 지어놓고 저축 안 해도 목돈 받는다. 이게 뭐라고? 일반적으로 말하는 종교요. 이게 복 비는 거 아니오. 죄는 지어놓고 안 받겠다고 그러고, 복은 안 지어놓고 받겠다 그러고, 믿기만 하면 준다. 이게 종교인데, 저는 이거 허황된 소리요.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이런 거 가르친 거 아니오. 그렇지 않다. 그런 허황된 생각 그만해라. 네가 인연을 지으면 과보를 받는다. 그러니 뭐한다? 죄를 지었으면 기꺼이 받을 각오를 가져야지, 미꾸라지 새끼처럼 빠져나갈 생각하면 안 돼요.

 

그 다음에 저축을 안했으면 복을 받을 생각을 안해야 되고, 복을 받고 싶으면 저축을 해야 되고, 돈을 빌렸으면 빚을 갚아야 되고, 갚기 싫으면 빌리지를 말아야 되고, 이런 이치를 알면 내가 어떻게 살 거냐는 결정이 되는 거요. 내가 점점 자유로워지고 주인이 되는 거요. 그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고 말하는 거요. 그래서 부처가 된다고 말해요. 부처가 된다는 건 자기가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는 얘기에요. 그건 자기가 선택하세요. 그게 좋아보이 거든, 그러니까 이거와 똑같은 거 아니오. 마약 하는 사람이 마약을 한번 해보니 어때요? 기분이 쇄~ 하고 좋잖아.

 

그런데 하지마라고 그래. 그러니까 재미가 없잖아. ~ 한 게 없잖아. 그래서 쇄~ 하고 싶은데 한번 해보면 어때요? 그러면 스님이 하지마라 소리 안하고 해라. 하고 건강도 해치고, 감옥도 가고 그래라.^^ 그러니까 자기가 선택이다.

 

스님이 이런 얘기하면 좀 무책임해 보이죠. 그런데 내가 뭣 때문에 여러분 인생에 대해서 책임을 져요. 저는 이렇게 가려면 이런 결과가 온다. 아까 저기 이혼을 해도 괜찮아요. 그러면 자식을 둔 부모가 이혼을 하면 아이들에게 상처가 되고, 아이들에게 상처가 되면 자식들이 나중에 불행해지고, 불행해지면 그게 누구 불행이 된다? 내 불행이 되요. 자식을 둔 부모가 자식이 잘못됐는데 행복하다? 이런 게 가능하나? 그 정도면 도인이지. 그렇게 안 돼요.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면 그게 나한테 결국 과보가 돌아온다. 애가 나한테 못된 짓한다. 이런 얘기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적어도 내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법률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마치고, 그 다음은 내가 안 해도 되요. 그러나 그때까지는 자기가 책임을 지는 게 자기한테 유리하다. 이런 얘기에요. 여러분들 세 살 때까지 애 낳아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놔놓고 직장 다니고 이러면, 반드시 나중에 열배로 더 힘든 과보가 와요. 그러니까 스님이 그 과보가 받기 싫으면 조금 승진이 늦고 다른 게 아쉽더라도 애 낳으면 한 3년 애한테 사랑을 줘라. 뭘 먹이고, 뭘 입히고 하등 중요 안하다. 그냥 엄마의 사랑을 먹고 산다.

 

자아가 형성될 때 자아의 상처가 없어야 아이가 행복하게 살지, 그때 빈 공간이 생기면 이게 모든 사람이 갖는 사랑 고파병이에요. 아시겠어요? 이 사랑 고파병은 늘 껄떡거리게 되요. 한 평생. 칭찬받으려고 그러고, 어디 의지하려고 그러고, 그래서 우리가 다 세 살 때까지 사랑을 제대로 못 받아서 생긴 삶의 고통이에요. 그래서 그때까지만 낳았으니까 듬뿍 주면 뭘 먹이고 입히는 건 하등 중요 안 해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나중에 받을 거, 십분의 일도 안 받아요. 제가 볼 때는 어리석은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