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자필멸이라고 그러잖아요.
한번 난 것은 반드시 죽게 되어있어요.
그 수명을 길게 가느냐?
짧게 가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저 소나무는 우리보다 오래 사니까 그의 생활이 영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그도 때가 되면 그 생물도 죽고 동물도 죽고 사람도 다 죽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은 길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 생명이 길어지는 것 자체가 우리 소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명이라는 자체는 정해진 게 없어요.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있어요? 없어요? 순서가 없어요. 그리고 우리 과거에 우리 삶을 보면 젊은 사람들이 죽는 원인이라는 자체가 병으로 죽거나, 호랑이한테 내지는 폭포에서 뭐 이런 여러 가지 원인으로 죽는 이유가 있지만, 우린 근래에 있어서 정말 우리에게 너무나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 같은 부분이 바로 자동차입니다.
이 자동차들이 우리들 생명을 참 편안하게도 해주고, 우리의 생명을 우리의 어떤 삶을 빠르게도 해주는 소통의 수단의 역할도 해주고 있지만, 이 부분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무기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장애를 말할 때 여러 가지 제가 얘기를 했습니다마는 아주 건강한 사람이 항상 건강하다고 이야기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잠재적 장애다라고 얘기할 정도로 우린 장애에 노출되어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장애면 괜찮은데 그 부분이 너무 과해지면 이렇게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갈 수밖에 없는 무기로 돌변하는 것 또한 이 자동차일 수도 있습니다. 이 자동차라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 사고를 당한 이 아버지, 이 절절한 사연을 잠깐 들어보면 본인이 조금 더 일찍 퇴근을 했다면 아내에게 운전을 맡기지 않고 본인이 아이를 케어 했을 텐데, 본인이 퇴근을 좀 늦게 하는 바람에 아내가 아이를 케어 할 수밖에 없었고, 아이를 데리러 갔던 어머니는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을 앓고 있고, 또한 그 딸은 죽었다. 이런 얘기거든요.
너무나 아프지만 그래서 몸부림 쳐보지만 이미 한번 꺼진 불은 다시 살아날 수가 없어요. 촛불은 꺼지면 불을 다시 살릴 수 있지만, 우리 생명이라는 자체는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인 고로,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생자필멸이라 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아파하시는 아빠의 심정과 이렇게 아파하는 엄마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으나 이미 한번 지나간 버스는 다시 오지 않을 진 데도 불구하고 그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하는 부분 자체가 그 딸에 대한 정이요, 아빠가 해야 할 도리다 일까? 라고 생각해 보면 저는 그렇지 않다라고 저는 단언적으로 말씀을 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이미 한번 꺼진 그 불은 다시 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도 귀한 말씀이 계셨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난 이후에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여정으로서 설법을 다니셨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이 설법을 하시는 중에 어느 여인이 부처님이 뭐든지 다 하실 수 있다는 능력이 있는 큰 스승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기의 어린 아이가 죽은 아이 시신을 안고 뛰어와서 부처님에게 갈구했습니다.
“부처님, 내 아들을 살려주세요. 당신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세상의 이치를 다 알고 있는 분 아닙니까? 그런고로 내 아들을 살릴 수 있을 겁니다.” 죽은 내 아들을 살릴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을 다합니다. 그 애끓는 심정을 바라다보며 부처님께서는 자비심이 넘쳐서 바라보시되,
“그래, 그 아이가 얼마나 소중한지 내가 알 수 있겠다. 네 아이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있는데 그게 쉽지는 않지만 한번 찾아봐라.” 그리고 말씀하신 것이 뭐냐 하면 “이 마을에 나가서 한 번도 사람이 죽지 않은 가문의 불씨를 구해오면 너의 아이를 살릴 수 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인은 죽은 아들을 부여안고 마을을 샅샅이 뒤져서 불씨를 구하기 시작합니다. 문을 두들겨 이곳에 혹시 한 번도 죽지 않은 집안 가문에 불씨를 구할 수 있습니까? 라고 이야기 했을 때 “불씨는 있지만 한 분도 죽지 않은 가문은 없습니다.”라고 이야기를 가가호호 다 방문 했을 때, 답을 그렇게 얻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루 종일 돌아다녔던 여인이 그 죽은 아들을 안고 부처님에게 갑니다. “부처님, 불씨는 흔히 구할 수 있었지만, 한 번도 죽지 않은 가문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그렇다. 여인이여. 이 세상에 그 누구도 한 번도 죽지 않는 가문의 불씨를 구해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고로 그 아이가 가는 곳도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듯이 그렇게 갔는 고로 그 아이 생명을 다시 살리려고 하고 마음을 내는 자체는 이미 어리석음이다.”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때 그 여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달게 받아들여서 “아, 그렇구나, 한번 놓친 생명을 다시 구할 수 없는 고로 내가 받아야지.”라는 마음으로 받아들여 부처님 제자가 되어서 삶의 이치를 깨우쳐 알았다라고 하는 가르침 이 있습니다.
저는 이미 간 그 따님의 애절한 사항은 이해할 수 있겠으나 이미 교통사고로 생명을 잃었거든 그 생명에 대해서 자꾸 부여잡고 앉아서 “가지마라. 가지마라. 우리 주변에 머물러 달라”고 간청한들 그것은 딸이 아니고 딸의 영혼정도가 되겠죠.
육신을 버린 영흔 결코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따님도 그 아버지의 애끓는 심정, 그 어머니의 애끓는 심정에 부합해서 가지 못하고 구천을 헤맨다면 그것이야 말로 부모가 할 도리는 결코 아니라는 생각합니다.
진정 위하는 것은 뭘까? “그래, 너와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였구나. 애끓는 심정으로 아프고 아프지만 내가 너를 위해서 내 마음 접고 좋은 곳에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관세음보살 부르고, 지장보살을 부르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그리고 거기서 조금 더 한다면 스님 초청해서 천도재라도 지내주는 깨끗한 이별을 구할 수 있을 때, 그야말로 지혜 있는 아버지요, 지혜로운 부모의 어떤 행위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합니다.
모쪼록 진정 따님을 위한 일이 뭘까라고 하는 부문을 냉정하고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찾아서 노력해 갈 수 있는 부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인연이라고 하는 부분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또 다른 인연이 시작되는 거잖아요. 불자라고 이야기 하는 자체가 바로 이 윤회를 믿는 거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에 오셔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부분이
인과를 말씀하셨고,
또한 윤회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불교가 아닌 딴 종교를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윤회에 대해서 긍정하는 반면, 불교의 핵심인 부처님가르침의 핵심인 윤회를 믿고자하는 우리 불자들이 그 윤회를 이해하지 못해서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 조금 더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윤회를 인정하시고 그 윤회를 인정한다면 가는 이별에 대해서 아파만 하지 마시고, 그 가는 이별에 대해서 오히려 축원해 줄 수 있는, 그리고 발원해 줄 수 있는, 그리고 기도해 줄 수 있는 불자들로 삶을 살아간다면 훨씬 더 당당하고 건강한 정신력을 가진 불자로 거듭나지 않을까 싶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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