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해야 될 것은 반드시 참회하고, 돌이킬 것은 돌이켜서 반성하고,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그대로 곧 인정하고 받아들이시는 거 에요. 그러는 게 곧 뭘 받아들여요? 즐거움을 받아들이는 거에요. 지는 언제든지 평생 잘했다고 말 할 수 없어요. 싸울 때 보면 한 번도 지는 잘못 안 했거든. 세월이 세월이 지나고 나서 ‘아~ 그때도 내가 잘못한 인연도 있구나.’ 그때 깨우치게 돼요. 지금은 잘 몰라요. 싸울 때는요, 분노와 그냥 원심이 거기 꽉 들어차가지고, 자고 나서 깨어나면 그 생각밖에 안나. 그런데 깊이 생각해보면, 나도 잘못할 수가 있고, 나도 잘못 말을 사용했을 때도 있어요.
본의든 본의 아니든 상관없이 상처를 줄 수가 있는 거에요. 이런 것들을 그러나 계속 안 좋은 것에 계속 머리를 디밀고 산다면 거기 염이 들었어요. 무슨 염이에요? 염이 들어버렸단 말이에요. 무슨 염이 들었어요? 벗어나지 않는 거에요. 감옥에서 벗어나지 않는 거에요. 집안의 틀, 자기 생각의 틀, 이게 다 자기 감옥이거든요. 벽이라는 거에요. 벽. 이게 이 벽이라는 벽에서 못 벗어나는 거에요. 그게 염이라는 거에요. 자기가 나는 우리가 살면서 이게 뭐죠? ‘나는 이것도 저것도 부족하고 결핍의 세계에 내가 있다.’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이게 거기에 물들어 있는 거에요. 나는 뭐죠? 이게 뭐라고 말해요? ‘병들었다.’ 이렇게 말해요. 이거 ‘병듦이다.’ ‘병들었다.’ 이렇게 말해요. 그렇죠. 그죠.
그러니까 이게 뭐죠?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뭣 때문에 불행한지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내가 가난한 것도 그 원인에 대해서 자기가 모르거든요. 그런 생각하지 않고 가난한 것에 대한 불행만 탓을 하는 거에요. 그게 염한 거에요. 염이 들었다. 이런 뜻입니다. 생각을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구의 삼업에서 거꾸로 돌아오면요, 육체고 감정이고 그냥 내비 놔두고 잘 살펴보면요, 걸핏하면 짜증 내고, 걸핏하면 화내고, 걸핏하면 소리 지르고. 조금만 마음의 다 걸리잖아요. 귀에 걸리거든요. 그 오죽하면 그런 말이 있어요. ‘눈으로 들여다본 것은, 눈으로 들여다본 것은, 어떻게 저렇게 잘못 보고 있고, 귀에 들은 것은 어떻게 그렇게 착각을 일으키는가?’ 들은 것에 대한 것은 착오일 수가 있다는 거에요. 눈도 잘못 보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들여다보는 이런 과정을 이게 물들지 아니하는 거에요. 그러려면은 객관적으로 전부 있을 수는 없거든요. 그러니까 자기 주관적으로 하나하나씩 살펴보면은 내가 어디에 물들어 있는지 보면 돼요. 잘 들여다보세요. 어디에 우리가 물들어 있는지 보세요. 딱 좋은 점은 있어. 불교TV 보는 것은 물들어도 괜찮고, 법문 들으러 오는 것도 괜찮고. 그거는 물들어도 무염이야. 봉사하는 것도 무염이고, 그렇죠. 그죠. 내가 행복해지는 것도 무염이에요. 내가 즐겁게 사는 것도 무염이야. 물들지 않는 거에요. 내가 행복감을 200배 300배 천배를 누려도 그거는 물들지 않는 거에요. 조건적이지 않으면, 그러니까 물들지 않는 거에요. ‘염심에 물들지 아니한다.’ 그러잖아요. 싫은 마음에 물들지 않는 거에요.
성질 발칵발칵 내는데 거기 물들어서 재미 붙이거든? 처음에 한번은 잘해주다가 편안해지고 상대가 만만해지잖아요. 그럼 아예 노예처럼 구는 사람이 있어. 심리학적으로 보면 상당히 문제가 있는 거거든요. 그러면서도 애기들 한 번씩 처음에 회초리를 가지고 어머니처럼 좋은 어머니처럼 해야지. 이러잖아요. 나중엔 아주 폭력하고 앉아있어. 물드는 거에요. 생활의 물듦이다. 이렇게 말해요. 삶에 물들어요. 그러면 그 자체를 우리는 그걸 보고 뭐라고 그래요? 벽이라고 그랬죠. 그 벽은 다른 말로 뭐라고 그래요? 감옥이에요.
고통스러운 신음고통을 내면 지옥 같은 감옥에 사는 거에요. 그러니까 염들지 말아야 되요. 물들지 않으셔야 돼. 세상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그러잖아요. 사랑해도 물들지 않으셔야 돼. 자비를 베풀어도 물들지 않아야 돼요. 그렇죠. 그죠. 할 수 있으면은 행복을 나누는 것에도 물들지 않아야 돼. 그렇지만 그렇게까지는 요구하기 어렵거든요. 그런데 차차차차 자기가 알다 보면은 정말로 기쁜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하나둘씩 하나둘씩 우리의 삶을 정리해가는 과정 안에서 받아들일 줄 알아야 되요. 그래서 보면 원력을 가진 자는 물들지 아니한다. 이러거든요. 물들지 아니하게 즐거움을 받아들일 줄 아는 거에요. 그러면 진정한 뭐가 생겨요?
현실이. 저 공덕으로 가득 될 거뿐이고, 지금 이 시간이 전부 뭐죠? 복을 짓는 거에요. 우린 자꾸 재앙을 짓는데 아주 노력을 하고 살거든. 그래서 우리가 현상을 이게 탁 부처님의 위신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게 얼른 전*이 잘 안 되는 경우도 한번씩 있거든요. 앉아서 조금만 보십시다. 따라 해 보겠습니다. [수락무염원] 48대원 중에 너무 마음에 드는 구절 중에 하납니다. 으음. 뭐라고요? 그죠? 수락무염이에요. 네 글자만 외워도 됩니다. 수락. 수락무염. 물들지 않는 거에요. 복을 받아서 쓰고 누리고 사는데도 물들지 않는 거에요. 그렇죠. 그죠. 그 반대로 병이 들었거나, 물질의 결핍이 있거나, 가난이 있어도 어떻게 해요? 그죠? 물들지 않는 거에요.
그러면 그 가난은 이미 가난이 아니거든요. 사실은 가난이 본래 없잖아요. 비교적 빈등에 의해서 결정이 될 뿐이지 사실은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현실은 고통스럽습니다. 여민한 사람들에 대한 답과 봉사와 보시를 통해서 할 수 있는 한은 조금씩 조금씩 가족의 피해가 아니 되는 선에서 조금씩 조금씩 나눠서 보시 할 수 있는 공덕력을 우리 불자님들은 가지셔야 됩니다. 사찰마다 추석이나 또는 겨울이나 그런 때 보면 보시하고 그러잖아요. 불교TV에서도 해마다 불우이웃돕기 하시잖아요. 그리고 이제 ARS 그런 거 하잖아요. 할 수 있으면 조금씩 조금씩 힘들게는 하실 게 없어요.
이런 걸 하는 것이 다 뭐죠? 수락하는 거에요. 물들지 아니하는 대 복을 자기가 누리고 사는 거에요. 지금 현실에서 고통으로만 받아들이면, 자기가 힘들어져서 거기서 더 이상 못 벗어납니다. 지금 힘든 사람이라도 병든 사람이라도 어려운 사람이라도 원을 딱 세우셔서 대원을 세우고 일어나셔야 돼. 병든 사람은 속으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억지로라도 하셔야 돼.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러다 내가 죽겠다. 이렇게 원을 세우셔야 돼. 육체를 고치겠다 생각하지 말고, 병든 것도 감사합니다. 이렇게 할 줄 아는 마음의 태도가 이루어지면은 무염의 세계가 일어나요. 병에 물들지 않는 세계가 자기한테 일어나기 시작해서 오히려 육체는 자기의 본래 치약능력이 있거든요. 면역체계도 있고요. 조화가 지금 깨져있는 상태거든요.
원동력을 딱 가지실 필요가 있으세요. 크나큰 원동력을 좀 가지세요. 그렇죠. 그죠. 그게 오늘 법문 내용이 수락하는 거에요. 기쁘게 받아들이는 거에요. 사람스럽게 받아들이는 거에요. 인생을 즐겁게. 즐거운 인생으로 자기 스스로 하나씩 만들어 가는 거에요. 그렇죠. 요게 안 될 때는 각자 나무아미타불을 기도를 하시든가, 지장보살로 하시든가, 관세음보살은 모시고 수행하시는 그런 불자님들께서는 달라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부르고 마음속 깊이깊이 감사하셔야 돼. 자기 병든 것도 감사하고 모자란 것도 감사하고, 누가 뭐라고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실천하는 사람만이 원하는 것을 갖습니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 원이 이뤄집니다. 생각하는 대로 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그대로 하나하나씩 잘 이루어져 가거든요. 무염의 세계가 우리한테 이루어집니다. 39번째 한글을 좀 같이 읽겠습니다. [제가 부처가 될 적에 그 나라의 중생들이 누리는 상쾌한 즐거움이 일체 번뇌를 모두 여읜 비구와 같지 않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나이다.] 그렇죠. 그죠. 일체중생이 다 상쾌한, 아라한을 얻은 비구처럼, 그 사람들은 다 편안한 사람이거든요. 저는 안 편한 구석이 많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선정에 들으셔가지고 아주 상쾌한 상태를 유지하는 큰 스님들이 많습니다.
나이를 불문하고 또 세속에 계시더라도 공부를 잘하시고 마음 관리를 잘하신 분들은 으뜸인 수락의 세계를 사시고 계신 분들이 많아요. 머리 기른 사람도 수행인이라도 누구라도 다 같이 공부하는 데는 노소가 없습니다. 육체에 머물러서 나는 힘든 상태만을 주장하고, ‘나는 이런데 왜 안 해주나.’ 이런 생각. ‘왜 나는 도와주지 않나.’ 이 생각을 가지면 올바른 불자가 아닙니다. 얼른얼른 털고 일어나서, 저 고난에서 훨뜩 일어나서, 그분들을 도와주는 그런 불자가 되셔야죠. 여기 저 얼굴 들어 저 좀 보십시다. 이렇게 석가세존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구나.’ ‘진정 그렇구나.’ 일체중생이 다 ‘그렇구나.’ 이렇게 말했어.
그 얘기는 뭐냐 그러면 일체중생이 다 싸우고 터지고 이러는 것이 아니라, 그런 그 안에서 들여다보니까 원만하고 완전한 불성세계를 가지고 있는 거에요. 밝은 빛을 가지고 계시는 거에요. 무량수무량광의 한량없는 무한공급을 자기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봤어요. 봤는데 왜 그렇게 안 되는가? 그렇구나. 석가세존의 표현입니다. 그렇구나. 들여다봤는데 그게 왜 그렇게 안 되는가를 살펴봐서 제가 좀 옮겨 왔는데 보니까 뭐라고 돼 있느냐하면, 반드시 편협하고 있는 사람한테는 편협하는 거 있죠. 편을 가르듯이 자기를 한정하는 것, 어떤 것에 대해서 편협을 하는 것, 나쁜 편견을 갖는 것, 이런 사람한테는 진리가 없다. 이렇게 표현했고요.
또 그다음에 분노하고 있고, 다툼을 하고 있는 동안은 거기 진리가 없고, 생각이 편협돼있다 그러잖아요. 한쪽으로 치우쳐있는 것을 편협이라고 그러잖아요. 이렇게 편협 돼 있는 생각을 가지고 살면은 거기에 진리가 따르지 아니하고. 또 경계하는 말이 뭐라고 그러냐 하면 한정을 한다는 거에요. 자기 한정을 하는 사람한테는 거기에 진리가 없어요. 분노하고 있고 다툼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그게 또 진리가 없어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삶 속에 자기상이 있으면, 옛날 말로는 상이죠. 아상인상중생상. 그러시잖아요. 그런데 상을 가지고 있으면 거기 진리가 없다. 이랬어요. 요 네 가지를 석가세존께서 말씀하셨거든요. 안 적어도 됩니다.
금방 잊어버리니까. 편협하면은 진리가 없어요.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자기를 한정하면 안 돼요. 편협하지 말고 조화롭게 들여다보실 필요가 있고, 한정하지 말고 무한한 존재라고 보시는 거고. 또 뭐라고 그래요? 편안하게 편안하게 이끌어 가시면 그러면 진실을 통해서 자기 자신 안에 그렇구나.라고 하는 답을 스스로에게 얻게 돼요. 이건 석가세존께서 당신이 하신 말이거든요. ‘아 그렇구나.’ 으음. 저들이 그러니까 거꾸로 보면 저 아니에요. 그죠? 나는 여기 한정이 있어요. 편협 편견을 가질 수도 있어요. 편견도 가질 수 있어요. 나는 아플 수도 있고요. 병원에 가기도 하고요. 나는 슬퍼하기도 하고, 아파하기도 하고 상처받아서 괴로워하기도 해요.
그런데도 이것이 나한테 있는 것이 한정이라고 여긴 다면은 그런 편견을 자기 자신 안에 스스로 갖는다면은, 그러고 그것 때문에 분노하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렇죠. 그죠. 그렇게 하고 있는 동안은 본래, 그렇구나 하는 진실 된 그렇구나에 대한 답이 생기지 않는 거에요. 본래 원만하고 완전한 생명의 본질을, 불성의 본질을, 자기가 그렇구나라고 인정을 해야 돼. 요런 답이 딱 나오거든요. 그렇죠. 그죠. 누가 말해요. 그렇구나. 그러면 답이 뭐에요? 그렇다네.^^ 연습을 좀 해보셔야 돼. 스님이 법문을 하거나 염불을 들으면 “아~ 그렇구나.” 이렇게 얘기를 해야 돼. 누가 옆에서 “아이고, 그 스님이 염불을 참 잘하시네.” 그러면 “그렇다네.”^^
이렇게 우리가 하나하나씩 즐거워하는 과정을 좀 겪을 필요가 있어요. 그렇죠. 그죠. 그렇게 즐거워 가려면은 연습을 좀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자꾸 웃고 연습을 하셔야 돼. 이게 만고의 진리에요. 종교를 넘어서는 진리 중의 하나가 웃을 줄 아는 사람이어야 돼. 기쁘게 생각할 줄 알아야 되고 기쁨을 누릴 줄 알아야 되요. 그런데 요걸 잘 못하시거든요. 우리 모두가 다. 즐겁게 사셔야 돼. 늘 우리는 마음속으로 수락무염에 대한 생각을 갖출 필요가 있어요.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웃으셔야 돼. 그러고 기쁘게 생각해야 돼. 그리고 일체 모든 것에 대해서 뭐라고 표현해요? 감사하게 느낄 줄 알면 돼요.
그러면 원하는 만큼 뭐가 생겨요? 무염의 세계의 진리가 작동을 해서 받아들이는 것은 어떻게 해요? 영원불멸한 만큼 저 무한 공급의 세계에 이를 때까지, 편안하고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에 대한 답은 “그렇구나.” 으음. “그렇다네.” 이렇게. 말은 좀 재미있는 거 같은데도 아주 심오한 거에요. 인정하셔야 돼. 내가 즐겁게 사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렇다네.” 즐겁게 살아도 아무도 누가 시비 안 합니다. 행복하게 사시고 수행법회 잘하시고 편안하게 매일매일이. 매일매일이 현상이고, 매일매일이 현재고, 매일매일이 현실이거든요. 이 현실에 저 부처님의 대복을 불러들일 수 있는 그런 지혜와 원동력을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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