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 금강경 열 번째 시간이 되겠습니다. 75페이지 펴주세요. 자~ 오늘은 금강경 열 번째 강의 시간입니다. 제 13 여법수지분
如法受持分 여법하게 받아 지녀라. 여법하다는 것이 법다이. 법답게 이 말이오. 법답게 받아 지녀라.
爾時 須菩提白佛言 이 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되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云何奉持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합니까? 이 말이오. 이제까지 부처님께서 쭉 말씀을 하셨는데 이 경의 제목을 무엇이라 저희들이 붙이면 좋겠습니까? 이 말씀, 지금까지 하신 말씀에 이 경의 제목을 무엇이라고 지으면 좋겠습니까? 이 말이오. 그리고 이 경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경을 우리가 받들어 가지는데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경을 받들어 가져야 되느냐?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佛告須菩提 是經 名爲金剛般若波羅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하되. 이 경의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하리니.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하라. 이랬어요. 반야라는 것은 깨달음. 지혜 이런 뜻이죠? 바라밀은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다. 저 언덕에 건너간다. 이런 뜻이죠? 그러니까 깨달음을 통해서, 깨달음으로 인해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이것을 반야바라밀이라 이렇게 말해요. 그런데 그 반야바라밀을 그 반야를 다시 앞에 강조해서 어떤 반야냐? 금강반야다. 금강반야로 모든 괴로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다. 이런 얘기에요. 그러면 금강은 여기서 뭘 의미하는 거냐? 금강은 다이아몬드죠?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게 뭡니까? 다이아몬드입니다. 강도10. 강도가 제일 강한 게 다이아몬드다 이 말이오. 이 세상에 그 어떤 것하고 다이아몬드하고 서로 부딪치면 뭐가 깨집니까? 다른 물건이 깨집니다. 그러니까 다이아몬드는 금강은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깨뜨릴 수가 있다. 이 말이오. 가장 단단하다. 그래서 이 금강반야는 일체의 번뇌를 중생이 갖고 있는 그 모든 번뇌를 다 깰 수가 있다. 소멸 시킬 수가 있다. 그래서 앞에다가 금강반야다. 금강이 모든 사물을 다 부술 수 있는 것처럼 바로 이 깨달음의 지혜는 모든 번뇌를 다 없앨 수가 있다. 부술 수가 있다. 그래서 금강반야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하는 이런 이름으로 부르라. 이 말이오.
以是名字 汝當奉持 이런 이름으로, 이런 명자로, 이런 이름으로 너희들이 마땅히 받들어 지녀라 이 말이오. 그런데 이런 이름으로 받들어 지녀라 하니까. 반야바라밀이다 하면 또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어떤 상을 지으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어떤 실체가 있는 줄을 또 착각하면 안 된다. 그래서
所以者何須菩提 수보리야.
佛說般若波羅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卽非般若波羅蜜 이것이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어떤 상, 어떤 실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是名般若波羅蜜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양 지어진 것은 다~ 자세히 살펴보면 실체가 있고, 영원한 것 같지만은. 사실은 꼭 꿈같고, 아지랑이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아서. 거기에는 아무런 실체도 없고 영원한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헛거다 이거요. 그것을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다. 그런데 우리가 헛거를 헛건줄 모를 때 갖가지 괴로움이 생긴다. 거기에 집착이 일어나서 괴로움이 생긴다.
우리가 꿈을 꾸는 줄 모르고 꿈을 현실인줄 실제인줄 착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꿈속에서 갖가지 괴로움을 겪게 된다. 꿈이 꿈인 줄 안다. 꿈속에서 그게 헛건줄 알아 버리면 어떠냐? 우리는 그 속에서 어떤 두려움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게 헛건줄, 허상인줄 알기 때문에. 그것이 환상인줄 알기 때문에. 그러니까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인줄 깨닫게 되면 곧 즉견여래한다. 도일체고액한다.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 제상이 비상인줄 알게 되면 모든 모양 지어진 것에 실체가 없는 줄을 깨닫게 되면 곧 즉견여래라. 곧 부처를 본다. 이 말은 곧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모양도 지어서는 안 된다. 어떤 모양을 짓고 거기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모든 괴로움. 번뇌 망상이 다 이렇게 허상을 실상 인줄 알고 거기에 집착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거다. 헛된 상을 실제인줄 알고 집착을 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긴다 이러니까 헛된 걸 떠나서 실상이라고 하는 그런 실체가 또 별도이 있느냐?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 또한 잘못이다. 하나의 집착을 버리면서 또 다른 것에 또 집착하는 것과 같다.
제상이 비상이다. 범소유상이 개시허망하다. 허망한 것이 실제 모습이다 이 말이오. 실상이라고 하는 허상을 떠난 실상이 또 별도 있는 게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우리가 깨닫게 되면 바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보는 소위 조견하는 그 지혜. 그 깨달음을 이름하여 뭐라고 한다?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거다. 그러니 반야바라밀이라 함은 요게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어떤 실체. 그런 게 또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이야.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을 말씀하시면 반야바라밀이 아닐 세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느냐? 일체 상을 여의는 게 바로 반야바라밀인데. 반야바라밀이라는 상을 취해서 그걸 가지고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면 이미 반야와는 십만 팔천 리 거리가 멀어진다. 이 말이오. 그것을 경계하는 거다. 이렇게 받들어 가져야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금강경을 많이 독송하게 되면 수지독송하게 되면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금강경에서는 다 제행이 무상인줄, 제법이 무아인줄을 우리들에게 깨우쳐 준다 이거야.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인줄을 우리들에게 깨우쳐준다 이거야.
일체가 다 텅 빈 자리임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거기에는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고. 그래서 우리는 함이 없다 이거야. 함이 없는 데서 얻어지는 그 한량없는 복이 바로 우리가 뭔가 함이 있는 그러한 유루복에는 비교할 바가 없다. 그래서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면 그리고 위타인설하면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 이렇게 말한다 이거야.
그러니 그 이치를 깨우칠 때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 이 말인데. 이 명자에, 이 이름에 또 집착해서. 그저 마하반야 바라밀, 마하반야 바라밀, 마하반야 바라밀. 이렇게 마하반야 바라밀을 외우든지. 금강반야 바라밀만 외우든지. 그렇지 않으면 금강경을 자꾸 소리 내서 읽거나 하루에 7번씩 읽거나 하면 모든 재앙이 없어지고 병이 낫고 온 갖게 다 좋아진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것은 또 금강경이라고 하는, 반야경이라 하는. 또 하나의 모양을 짓고 집착을 해서 뭘 구한다? 또 얻을 바 어떤 복을 구한다 이 말이야.
진정한 해탈은 얻을 바가 없는 줄을 깨쳐야 되는데. 그것이 다 허망한 줄을 깨달아야 되는데. 깨닫게 되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는데. 우리는 또 그런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모양을 짓고 금강경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상을 지어서 거기에 집착해서 또 무언가를 구한다 이거야. 이렇게 공부를 하면 공부를 아무리 해도 헛공부가 된다. 그걸 지금 여기서 다시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어요?
須菩提於意云何 如來有所說法不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법을 설한 바가 있느냐? 왜 이런 질문을 했겠어요?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라 할 것이 없다 하니까. 여래가 지금까지 뭘 설했습니까? 지금까지 반야바라밀에 대해서 설명을 했잖아. 그죠? 이제까지 깨달음에 대해서 지금까지 설명을 했는데.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이라고 할 것이 없다 이렇게 말하니까. 수보리가 의심이 들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수보리에게 여래가 법을 설한바가 있느냐? 이것이 법이다고 할 것이 있어서 여래가 지금 그것을 설하느냐 이거야. 그러니까 수보리가 그걸 금방 알아듣고
須菩提白佛言世尊 如來無所說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법을 설한 바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한단 말이오. 여래는 설한 바가 없다. 그러니까 달을 가리키면 사람은 달을 안보고 손가락을 본다. 이런 말이 있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본다. 중생은 늘 어떤 형상에 집착을 하게 된다. 바로 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손가락을 들어서 가리켰다. 손가락을 들어서 가리킨 것을 뭐라 한다? 방편이라고 한단 말이오. 우리는 그 방편을 통해서 달을 봐야 한단 말이오. 동쪽으로 가라 하는 거는 방편이란 말이오. 그 가르침에 따라서 우리는 어디에 도달해야 한다? 서울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면 서울에 도달하게 되면 그 동쪽은 버려야 되죠? 달을 보면 손가락은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다. 이 말이오. 그런데 우리는 보라는 달은 안보고 가라는 서울은 안가고 그 손가락 끝, 그 동쪽이라는 말에 집착을 하기가 일수다. 이럴 때 우리는 일상적으로 말하면 방법을 수단을 거기 도달하는 방법, 수단 방편을 목적화 시켰다 이거야. 거기에 집착해서. 그게 마치 전부인양. 그게 목적인양. 이렇게 됐다. 이것이 모순이다. 이거야. 이게 잘못됐다는 거죠. 이런 경우가 우리가 허다하다.
제가 늘 말씀 드렸지마는 옷을 왜 입느냐? 옷은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입는 거다. 옷이 사람을 지키느냐? 사람이 옷을 지키느냐? 옷이 사람을 지키고, 옷이 사람을 보호하는 거다. 그러면 좋은 옷이라는 건 뭐냐? 사람을 그 만큼 더 잘 보호하는 거다. 추위로부터 잘 보호하고, 더위로부터 잘 보호하고, 외부의 어떤 타격으로부터 잘 보호하는 거다. 그런데 우리가 좋은 옷이라는 것은 그래서 더 값이 나가는 거요. 그런데 우리는 값나가는 게 무조건 좋은 거다. 이런 생각으로 자꾸 비싼 거 비싼 거 비싼 거 해서 천만 원짜리, 이천만 원짜리 이런 옷들을 사게 되면 결국은 사람이 뭘 해야 된다? 옷을 지켜야 되고, 사람이 옷걸이가 되고, 이렇게 뒤집어 진다. 이걸 뭐라고 한다? 이런 게 전도 몽상이란 말이오.
여래가 법을 설한 바가 있느냐 하니까. 수보리가 금방 아이고 내가 또 상에 집착했구나. 해서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법을 설한 바가 없습니다. 이 참 불교 아니고는 이런 얘기를 들을 수가 없죠. 그래서 이걸 따서 불국사에 가면 말이에요. 불국사는 여러분들이 일주문을 지나고 사천왕문을 지나고 그 다음에 다리를 지나서 그 소나무가 있는 넓은 마당에 도착하게 됩니다. 여기가 바로 구품연지란 말이오. 여기가 중생세계란 말이오. 거기서 부처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한 계단 한 계단 한 계단 한 계단 나아가야 되는데. 33계단을 딛고 올라가야 되요. 소위 청운교, 백운교를 딛고 올라 야 된단 말이오.
그럼 33계단은 뭘 말하느냐? 바로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 5개죠? 그 다음에 천상인데 천상은 욕계 6천, 색계 18천, 무색계 4천. 이래서 몇 개가 있다? 28개가 있단 말이오. 그러니까 지옥부터 세면 모든 세계가 몇 개다? 33개의 세계란 말이오. 이 33개의 세계를 지나서 그걸 뛰어 넘어야 어디에 도달한다? 부처님의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33 세계를 지나서 거기에 도착하는 데가 바로 부처님의 세계다. 그래서 거기에는 아주 붉은 안개가 자욱이 서려있는 그런 성스러운 곳이다 해서 문이 뭐요? 자하문이란 말이오. 자하. 자주색 안개가 서려있는 그런 데란 말이오.
이 자하문을 지나면 바로 좌우로 다보탑과 석가탑이 있다 이거야. 이것은 왜 그러냐 하면 이 불국사는 법화경의 근거해서 지었기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땅속에서 다보탑이 솟아오르고. 거기에 다보여래가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이 말씀이 옳다 하는 것을 증명을 했단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좌우에 다보탑과 석가탑이 있다. 그 다보탑과 석가탑을 지나서 대웅전이 있다. 옛날에는 대웅전이라 하지 않고 보통 금당이다 이렇게 했어요. 대웅전이 있는데 이 대웅전이 금당이란 말이오. 금당이라는 거는 부처님만 계시는 거요. 거기에는 우리가 가서 참배만 하지 거기 가서 법문을 하거나 이러면 안 돼요. 문도 잡아 여는 게 아니라 밀고 들어간단 말이오. 왜 밀고 들어갈까?
한 번 들어가면 못나오는데다 이 말이오. 아시겠어요? 밀고 들어간다. 들어가서 거기서는 참배만 해. 그러니까 소위 무릎을 꿇고 합장 공경해서 희유세존 이렇게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경하고 예배하고 참회하고 발원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 건물 뒤에 그 건물 뒤에 뭐가 있느냐? 설법전이 있다. 그럼 부처님의 법에 대해서 설법을 할 때는 어디서 해야 된다? 설법전에서 해야 된단 말이오. 그런데 그 설법전의 이름이 뭐냐? 무설전이다. 법을 설하는 곳이다. 이래서 이름이 뭐라고? 설법전인데. 그 설법전에 간판이 뭐냐? 무설전이다 이 말이오. 설함이 없다. 이렇게 붙어 있단 말이오. 거 얼마나 재미있는 얘기요. 그죠? 얼마나 깊으냐 이거야.
이 강당에 들어와서 법문을 듣는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들어야 된다? 그 말에 집착해서는 안 되고 그 말이 가리키는 그 어떤 세계, 깨달음의 세계를 봐야 된다. 이 문안에 들어온 사람은 손가락 끝을 보지 말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봐야 된다. 그러기 때문에 설한 바가 없다. 법을 설하는 곳에 설한 바가 없다 하는 제목을 붙였단 말이오. 어디서 땄겠어요? 이 금강경에서 땄겠죠? 부처님은 한량없이 많은 법을 설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법을 설한다 하는 그런 어떤 의지, 생각을 갖고 법을 설했습니까? 아니요.
거울에 수많은 물체가 오면 그냥 비추듯이. 서울 가는 길을 물으면 그냥 그 중생의 근기 따라, 동이다 서다 남이다 북이다 하는 것이 저절로 나오듯이. 중생의 병고 따라 중생의 번뇌 따라 그냥 법이 설해지는 거란 말이오. 부처님이 법을 설한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법을 설하는 게 아니란 말이오. 그러니까 사실은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 이 말이오. 한 법도 설한 바 없는 가운데 팔만 사천법문이 설해지고. 팔만 사천법문이 설해지는 가운데도 사실은 한 법도 정해진 법을 설한 바가 없다. 그것은 서울 가는 길은 어떤 방향이라고 정해진 방향이 없지만은 중생이 물으면 팔만 사천방향이 벌어진다.
팔만 사천방향이 벌어지지만 그냥 서울 가는 길은 어느 방향이냐 할 때는 서울 가는 길은 말할 수가 없다. 그와 같다. 한 법도 설함이 없는 가운데 만법이 설해지고, 만법이 설해진 가운데 사실은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 할 때는 그 한 법이라는 것은 정해진 법을 말하는 거요. 이것이 깨달음의 길이다 라고 확정된 정해진 모양 지어진 그런 법은 설한 바가 없다. 어떤 생각을 하고 의도를 해서 법을 설한 바가 없다.
須菩提於意云何 수보리야 저 뜻에 어떠하냐? 여기서 잠깐 더 보충을 한다면 그러니 여러분들이 법명을 받아서 말이야 저한테 와서 말이야. 스님 이 법명 좀 해설해 주세요 이래. 법명은 해설할 필요가 없는 거요. 왜? 법명은 이름이죠. 그렇게 불린단 말이오. 거기 무슨 뜻이 있어요? 산이 하나 있는데 그 산 이름이 뭐요? 서쪽에 가면 뭐가 되고? 동산이 되고, 동쪽에 가면 서산이 되고, 남쪽에 가면 북산이 되고 북쪽에 가면 남산이 된단 말이오. 그게 뜻이 뭐요? 뜻이 없어. 그냥 그렇게 불릴 뿐이오.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데.
굳이 그걸 좀 해석해 주시오 이러면 동쪽에 섰을 때는 서산이라고 불리죠. 왜? 내가 선 위치에서 어느 쪽에 있으니까? 동쪽에 있으니까. 또는 서쪽에 있으니까. 이렇게 해서 동산이다 서산이다. 왜 동산이고 서산이냐? 그게 동쪽에 있으니 동산이라 하고, 서쪽에 있으니 서산이라 하느니라. 이렇게 되는 거요. 같은 산을 두고, 한 사람은 동산이라 불리고 한 사람은 서산이라 불린다 이 말이오. 그러니 똑같이 어떤 이름을 지어도 짓는 사람이 어때요? 짓는 사람이 그 언어와 문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지었는지가 중요하니 누구한테 가서 물어봐야 된다? 짓는 사람한테 가서 물어봐야 된단 말이오.
그러면 그냥 이게 무슨 뜻이오? 하는 것은 글자를 이미 절대화 하는 거란 말이오.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글자를 절대화 하는 거다. 글자는 절대화 하면 된다 그랬어요? 안 된다 그랬어요? 안 된다 그랬어. 그러니 어떻게 지었는지를 알면 그거는 해석해 줄 수 있겠죠. 동쪽으로 가라는데 왜 동쪽으로 가야 됩니까? 그거는 그가 어디 사는지를 확인해 봐야 된다. 아시겠어요? 그가 인천 사는지 자기 사는 지역을 확인하면 동쪽으로 가라는 거는 아~ 서울 가라는 얘기구나. 이렇게 금방 설명해 줄 수 있다.
제가 물으니 동쪽으로 가라는데. 동쪽으로 가면 뭐가 나옵니까? 동쪽으로 가면 뭐가 나오는지는 알 수가 없어. 당신은 어디 살아요? 인천 삽니다. 오~ 그러면 서울이 나온다. 당신은 어디 살아요? 춘천 삽니다. 그래? 그럼 동쪽으로 가면 강릉이 나오겠는데. 이렇게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동쪽이라는 그 동이라는 말에 어떤 절대적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이오. 그것은 어떤 위치에서 동이냐에 따라서 목적이 다를 수도 있다 이 말이오. 이 법명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에요.
지옥이 있느냐? 이렇게 물었더니 어떤 스님이 지옥이 없다 했단 말이오. 또 어떤 스님한테 가서 지옥이 있느냐? 하고 물었더니 지옥이 있다 이렇게 대답했단 말이오. 왜? 두 스님의 말이 틀립니까? 이것은 지옥을 절대화시키기 때문에. 지옥을 마음 밖에 객관화시키기 때문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그러니까 그 스님이 지옥이 있다 할 때, 그 스님이 지옥이 없다 할 때, 거기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겠지. 그럴 때 그 사람한테 물어야 되겠지. 지옥이 있다 하는데 지옥이 어디 있습니까? 지옥이 없다 하는데 지옥이 없으면 우리가 굳이 나쁜 짓 해도 괜찮겠네요. 라고 물어보든지. 그때 그 자리에서 물어봐야 되겠죠. 그걸 스님한테 가서 물으면 다툼이 생긴다.
한 중은 있다 그러고, 한 중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된단 말이오. 그러면 제가 그 사람에게 얘기해 줄 것은 있다를 편들어 주거나 없다를 편들어 주는 게 아니라. 그 있다 없다를 갖고 그 분별심을 내는 그 사람의 묻는 자의 분별심을 내가 지적해 줘야 된단 말이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럼 그걸 지적해 주면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이고 내가 또 분별 망상에 빠졌구나. 이렇게 생각을 안 하고. 왜 묻는 말에. 있든지 없든지. 묻는 말에는 대답을 안 하시고. 엉뚱 질문만 하십니까? 이런단 말이오. 이런 것이 다 왜 그러냐?
이것이 여러분들이 자꾸 마음 밖에서 뭔가를 찾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마음 밖에 뭐가 없다고 끊임없이 여기에 금강경에서도 얘기하고. 팔만사천법문에서도 다 얘기를 하고 있고. 어떤 모양도 지어서는 안 된다고 계속 얘기를 하는데도 끊임없이 모양을 짓는다. 이게 중생이죠. 수보리도 지금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러죠. 끊임없이 모양을 짓는다 이 말이오. 그런데 수보리가 이렇게 모양을 짓는 거는 수보리가 아직도 소승이라서 그렇다 할 수도 있고. 또 수보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이렇게 갖가지 모양을 지어서 우리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짐짓 수보리가 우리를 대신한다. 이렇게도 볼 수가 있겠죠.
그러니 수보리가 공연히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일으키니 부처님이 이런 법문 저런 법문을 하시죠. 그러니 부처님이 이런 법문 저런 법문을 공연히 많이 하도록 평지풍파를 일으키도록 수보리가 번뇌 망상을 왜 자꾸 일으켜서 이렇게 경이 지루하고 길게 만드냐? 이렇게 볼 수도 있고. 또 수보리가 이렇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부처님의 좋은 법문이 가지각색이 자꾸 벌어지죠. 그러니까 우리가 참 얻어 듣는 재미가 있다. 이렇게 생각 할 수도 있다 이 말이오.//
수보리 어의운하.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三千大千世界所有微 塵是爲多不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미진은, 가는 티끌은 많으냐 많지 않느냐? 티끌이라는 것은 한홉큼만 해도 많습니까? 많지 않습니까? 엄청나게 많죠. 소위 먼지 한홉큼만 하면 그 개수세면 엄청나게 많은데.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이 티끌이 많으냐? 많지 않느냐 하니까 헤아릴 수 없이 많죠.
須菩提言甚多世尊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須菩提 諸微塵 수보리야 이 모든 티끌을, 가는 티끌을
如來說非微塵 是名微塵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미진이 아니라 그 이름이 미진이다. 미진이라 할 것이 없을 새 그 이름이 미진이다.
如來說世界非世界 是名世界 여래가 말씀하시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세계라고 할 것이 없을 세 세계가 아닐 세 그 이름이 세계니라. 여기 갑자기 왜 티끌이 나오고 갑자기 또 세계가 나오느냐? 우리가 인식을 한다. 바깥세계를 보고 인식을 하죠. 우리가 인식한다. 즉 또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큰 것을 이름하여 옛날에 뭐라 그랬다? 세계라 이리 불렀어요. 그리고 가장 작은 것을 이름하여 뭐라 불렀다? 미진이다 이렇게 불렀어. 중국 같으면 가장 큰 거는 아니지만 큰 것을 이름하여 태산이라 부르고. 작은 것을 이름하여 티끌이라고 불렀다 이 말이오.
태산이 높다하되 태산이 크다 하되 티끌이 모여서 태산이 되는 거다. 태산이 그냥 태산이라고 되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가장 작은 것들을 무시하면 안 되죠. 그 작은 것들이 한량없이 모이면 가장 큰 태산이 되기도 하고. 가장 큰 태산이라는 건 때려 부셔버리면 또 뭐가 되기도 한다? 가는 티끌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태산은 이 세계 안에 있죠. 세계 안에 있는 작은 것에 불과해. 가장 큰 것이 세계고 가장 작은 것이 티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용어를 쓰다 보면 큰 것은 제일 큰 것, 세계는 무엇보다도 적어 질 수가 없죠. 가장 큰 거고, 티끌은 무엇보다 커 질 수가 없죠. 왜? 가장 작은 거니까.
그래서 크다는 의미로서의 세계와 작다는 의미로서의 티끌은 이미 가장 작은 것, 더 이상 작아 질 수 없는 것으로의 실체가 딱 부여가 돼 있다 이 말이오. 절대화 돼 있다 이 말이오. 그 중간에 있는 거는 어떤 건 어떤 거 보다 크고, 어떤 건 어떤 거 보다 작다. 이렇게 쓰이지만은 가장 작은 것이 티끌이고 가장 큰 것이 세계고, 가장 적은 것이 티끌이란 말이오. 그런데 부처님께서 이런 것도 절대화 하면 안 된다. 미진, 티끌이다. 가는 티끌이다. 가는 티끌이다 하지만은 그것도 가장 작은 티끌이라 할 실체가 없다 이거야. 사실은 그것보다 더 작은 게 있다는 거요? 없다는 거요? 있다는 거요.
오늘날 원자나 분자에 비하면 티끌은 태산처럼 큰 거에 속한다. 오늘날 저 무한한 우주에 비하면 세계라는 것은 티끌만큼 적은 것에 속한다. 다만 내가 그것밖에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걸 크다 하고 저걸 작다 하지만은. 너희들이 더 넓은 눈으로 보면 확~ 밖에 나가서 보게 되면 세계라 하는 것은 우주에 비하면 가는 티끌에 불과하고. 티끌이라 하는 것은 저 미시세계에 비하면 원자소립자에 비하면 태산보다 더 큰 것이 된다. 그러니까 티끌이라 하지만 티끌의 실체도 없고, 세계라 하지만 세계의 실체도 없다. 작다 하지만은 작다 할 것도 없고, 크다 하지만은 크다 할 것도 없다. 다만 이름하여 작다라고 부르고, 크다라고 부르고, 티끌이라 부르고, 세계라고 부를 뿐이다.
오늘은 여러분들이 세계보다 더 큰걸 알기 때문에, 티끌 보다 더 작은 걸 알기 때문에, 이런 얘기는 굳이 안 해도 될지 모른다 이거야. 그러나 이 옛사람들은 티끌이다 미진이라 하면 미진보다 더 작은 게 없는 그런 의미로 미진이라 쓰고, 세계라 할 때는 세계보다 더 큰 것이 없는 그런 의미로 썼단 말이오. 그러니 크다 하는 그 세계가 작다 하는 티끌이 모여서 이루어지고, 크다 하는 그 세계를 부셔버리면 작다 하는 티끌이 된다. 그러니 티끌에게도 실체가 없고 세계에게도 실체가 없고, 작다 하지만 작다에도 실체가 없고, 크다 하지만 크다 에도 실체가 없는 거다.
즉 어떤 상도 지어서는 안 된다. 모든 상은 다 뭐하다? 공하다. 상이라고 할 게 없다. 이 얘기요. 바로 이러한 공간에 대한 우리들의 잘못된 상을 여기서 깨뜨리는 거다. 이렇게 해서 나중에 더 나아가면, 더 나아가면 어떤 얘기가 됩니까? 한 티끌 안에 시방세계가 포함이 되어 있다. 이런 얘기가 나오죠? 일미진중함시방. 이렇게 해서 우리들의 상식을 확 뒤집어 버린다. 세계 속에 무수한 티끌이 들어 있어야 되겠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세계는 티끌 속에는 들어 갈 수가 없는 거 아니오. 그죠? 그러니까 크기에 있어 어떤 절대성을 우리는 가지고 있단 말이오. 그것도 깨 버린단 말이오.
그래서 티끌 속에 세계가 들어있다. 티끌이 모여서 세계를 이루는데 그 티끌이 모여서 이루어진 세계가 다시 어디 속에 들어있다? 티끌 속에 들어있으니 이것이 바로 중중첩첩연기다 이 말이오. 그래서 법이 공하다 하면 이 말이 성립하지만은. 어떤 작은 거에 큰 거에 어떤 실체가 있다면 이런 얘기는 성립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실체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須菩提於意云何
三千大千世界所有微 塵是爲多不 여기 이미 세계라는 말이 나오고 미진이라는 말이 나왔죠? 그러니까 세계 속에 있는 삼천대천세계안에 있는 미진은 많으냐? 많지 않느냐? 매우 많다 이 말은 티끌이 모여서 무엇을 이루고 있다? 세계를 이루고 있죠. 그러니까 티끌은 세계에 부분집합이란 말이오. 아시겠습니까? 이 삼천대천세계는 가장 큰 절대치를 말하고, 바로 미진은 제일 작은 절대치를 말한다. 그런데 미진은 미진이 아니고 세계는 세계가 아니다. 이래서 크느니 작느니 하는 생각을 다 그런 상도 버려라. 이것을 지금 얘기하는 거란 말이오.
須菩提言甚多世尊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須菩提 諸微塵 수보리야 이 모든 미진을 여래가 말하되 미진이라 할 것이 없을 새 그 이름이 미진이며
如來說非微塵 是名微塵 여래가 세계를 말하되 세계라 할 것이 없을 새 그 이름이 세계니라. 이런 얘기들은 우리가 보통 일상적인 뭐 마음을 깨끗이 가져라. 바르게 살아라. 하는 그런 차원에서 볼 때는 이런 얘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는 거 같지만은. 사실은 오늘날 과학이 점점 발달되면서 이런 얘기는 과학적으로 다~ 밝혀져 가고 있는 얘기다. 그러니까 우리가 깨끗하다 더럽다 하는 것만 마음이 짓는 바가 아니고. 우린 그래도 그거는 좀 주관적인 거다 하는 게 좀 이해가 비교적 쉽잖아. 그런데 크니 작니, 무겁니 가볍니 하는 거는 주관이 아니고 그건 우리 마음이 짓는 바가 아니고 그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거 아니냐? 이렇게 생각을 한단 말이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그것도 다 마음이 짓는 바다. 이거야. 그러니 다 공한 거다. 이 말이오.
須菩提於意云何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可以三十二相 見如來不 32가지 이 몸으로, 32상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몸매 가운데서 32가지 다른 사람과 다른 특징을 32상이라 그래요. 여러분께서도 앞에 있는 불상을 보면서 벌써 몇 가지를 알 수가 있죠? 첫째는 양미간에 흰 털이 있어서 긴 흰털이 있어서 그게 도로로 말려서 여기에 있다 이 말이오. 이걸 백호라 그래요. 백호가 흰 털이라는 뜻입니다. 구슬이 박혀 있다는 뜻이 아니에요. 이게 미간백호상이란 말이오. 예를 든다면. 그 다음에 귀가 다른 사람보다 길죠? 목에 삼도 주름이 3개 있다든지. 팔이 길어서 무릎까지 내려온다든지.
예를 들면 이렇게 몸에 각 부분에 특징이 있어요. 32가지 특징이 있다. 또 80가지 거룩한 몸매가 있어. 피부가 어떻다 어떻다 어떻다 해서 또 80가지. 더 자세하게는 80가지 특징이 있다 이 말이오. 이것을 우리가 32상 80종호. 이렇게 불러요. 그러니까 그것만 탁 보면 누군지 알 수가 있다? 부처인지 아닌지 알 수가 있다 이 말이오. 그래서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 부처냐 아니냐 하는 거를 32가지 그 몸의 특징을 보고. 아~ 저분은 부처다. 아~ 저 분은 부처가 아니다. 이렇게 알 수가 있느냐? 이 말이오. 알 수가 있어? 없어? 있죠. 있어요?
不也 世尊 不可以三十二相 得見如來 세존이시여,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가 없습니다.
何以故 왜냐하면
如來說三十二相 여래가 말씀하시는 32가지 특징이라고 하는 것은
卽是非相 특징이라고 할 것이 없을 새
是名三十二相 그 이름이 32상 이니이다. 만약에 32가지 몸의 특징을 가지고 부처를 볼 수 있다면, 즉 32가지 몸의 특징을 가지고 부처를 볼 수 있다는 게 형상으로 부처를 볼 수가 있다. 이런 얘기 아니에요. 그죠? 눈으로 부처를 볼 수가 있고, 소리로 부처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이렇게 되는 거란 말이오. 그래서 그건 사도를 행하는 거라 해서 若以色見我약이색견아 以音聲求我이음성구아 是人行邪道시인행사도. 이렇게 말했단 말이오.
눈으로 봐서 어떻게 어떻게 생긴 게 부처다. 이렇게 부처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귀로 무슨 소리를 들었다. 아~ 기도를 하는 중에 부처님께서 거룩한 음성을 들었다. 이렇게 부처를 구한다면 이것은 사도를 행하는 거다. 이거 판이하게 틀리죠. 그런데 다른 종교가 같은 데서는 눈에서 보이는 빛을 봤다든지. 어떤 형상으로 나타났다 하면 이건 본거에요 안 본거요? 본거죠. 그 다음 귀로 어떤 소리를 들어요? 안 들어요? 산상에 가서 기도를 하다 무슨 소리를 귀로 듣죠. 예. 이것을 가지고 친견을 했다. 봤다. 들었다. 이런단 말이오.
여기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것은 망상이다. 이거야. 즉 깨달음이라는 것은 그런 눈으로 보이고 귀에 들리는 거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건 육근 경계에 집착해서 생겨난 거다. 형상에 사로잡힌 거다. 그러니까 사도를 행하는 거다. 이리 말하잖아. 그런데 뭐 점안식을 하다가 무지개가 켜졌니, 뭐 어쨌니, 이런 얘기하고. 어디에서 뭐 누구 집 장독대 위에 관세음보살 모습이 나타났느니. 비행기를 타고 어디를 가보니까 관세음보살이 용을 타고 나타나는 그림을 봤느니 이러면 불교에서는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거에요? 아니에요. 그런 거는 다~ 있을 수가 있어. 그러나 그것으로는 깨달음의 길에 이르지 못한다. 이런 얘기에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 사라수 나뭇잎이 다 꽃필 때가 아닌데 꽃이 피어 하얗게 되었다 그랬죠.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이런 얘기가 아니란 말이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있어. 하늘에서 신들이 갖가지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연주를 했단 말이오. 아~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가 아니라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있어. 그런 일이 있어도 부처님께서 뭐라 그랬냐? 저것은 제 일의 공양이 아니다. 제 일의 공양은 내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
우리가 정토라 할 때는 바로 어떤 좋은 바깥에 잘 꾸며진 세계라는 없고 다 지맘이 하는 거다. 이런 얘기가 아니에요. 잘 꾸며진 세계. 이 세계가 전부 보석으로 이루어진 그런 세계도 있을 수가 있고. 얼마든지 더 바깥세계가 좋은 세계도 있고 나쁜 세계도 있을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정토가 되지 못한다. 이거야. 왜냐하면 그렇게 따진다면 인도사람은 다 괴로워야 되고 미국사람은 다 행복해야 되겠지? 여러분들은 옛날에 비새는 그런 집에 살 때는 괴롭고, 지금은 다~ 비도 안 새고 전기도 들어오고 모든 게 다 갖추어져 있으니까 이게 정토냐? 그렇지가 않다.
다 자기가 어떤 마음을 내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다. 그래서 정토는 마음에 있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지옥이 천당에도 다 자기 마음에 있다니까 아~ 지옥 같은 세계는 없고, 천당 같은 세계도 없고, 다 지 마음이 짓는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안 돼요. 세상에는 술집도 있고, 당구장도 있고, 온 갖게 다 있죠. 그러나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리 선방을 만들어 놔도, 그건 그 사람한테는 정토요 아니오? 아니요. 술집이 정토란 말이오. 그 사람한테는. 구더기는 변속간이 뭐다? 정토란 말이오.
그러니까 이 세계는 지 업이 만든 거요. 지 업 따라 가는 거란 말이오. 여러분들이 업장에 사로잡히는 한 지옥이 있어요? 없어요? 지옥이 있단 말이오. 여러분들이 업으로 지어서 그 지옥에 가서 괴로워한다 이 말이오. 그러나 마음이 청정한 사람은 지옥이 없단 말이오. 왜 그러냐? 그런 세계, 똑같은 세계에 가도 한 사람은 죽겠다는데 한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다 이거요. 우리는 지옥이 지옥이라고 할 만하지만은. 지장보살에게 지옥은 이미 지옥이 아니란 말이오. 지장보살에서의 지옥은 자기 수행도량이란 말이오.
똑같이 부목을 살아도 그 부목살이를 하는 사람에게는 그 신분이 천하고 또 갖가지 구박을 받고 사는 게 지옥 같지만은 원효대사가 부목을 할 때는 원효대사에게서는 그 절에서의 부목 안에서 공양주하는 것이 지옥이 아니란 말이오. 그건 뭐 하는데다? 보살수행하는 곳이오. 보살이 수행하는 도량이란 말이오. 도무지 그 도량이 원효를 괴롭힐 수가 있어요? 없어요? 없단 말이오. 그러니 지옥과 천당을 다 제 마음이 만든다는 거. 그런 뜻이에요. 아시겠어요? 마음을 해서 세상이 참 좋아져라 하면 세상이 천당이 탁 되어 버리고, 지옥이 되라 하면 지옥이 턱 된다. 이런 뜻이 일체유심조라는게 그런 뜻이 아니란 말이오.
이 세계는 숲이 있는데도 있고, 나무가 있는 데도 있고, 물이 있는데도 있고, 같이 섞인대도 있고, 하나만 있는데도 있단 말이오. 그러나 사막이 어떤 사람에겐 지옥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뭐가 된다? 천상이 된다 이 말이오. 사람이 아무도 없는 외딴 섬이 어떤 사람에게는 귀양살이를 할 때는 뭐가 됩니까? 지옥이 되지만은. 수행하러 그곳에 가면 사람도 그림자도 하나 없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그게 뭐다? 천상이다 이 말이오. 고행님이, 고행을 하고 있을 때는 지옥과 같았는데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나니 그게 정토와 같았죠? 왜? 그 나뭇잎, 그 나뭇잎 속에 비치는 태양, 그 나뭇잎 속에 굴러 떨어지는 그 구슬 같은 물방울.
그런 걸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그건 금으로 만들어도 그렇게 만들 수가 없고, 은으로 만들어도 그렇게 만들 수가 없고, 옥으로 만들어도 그렇게 만들 수가 없단 말이오. 그 하나하나는 참으로 살아있는 생명으로서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건 없단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수행을 해서 마음이 탁 자각이 되면. 수련장에 갈 때는 지옥 같다 이 말이오. 내가 이게 무슨 짓 하는 거야? 여기까지 와 가지고. 왜 내가 이 고생해.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저녁에 늦게 자야 돼. 사람들이 자꾸 물어서 추궁 당해.
생각해 보면 음식도 별로 풀밖에 안주고 잠도 적게 재우고. 이렇게 불평을 할 때는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게 지옥이다 이거요. 그래서 깨달음장에 오신 분들이 첫날 이튿날 다음날 뭐라 그러냐? 자기 부인이 소개를 했거나 하면 다 뭐라 그러냐? 집에 가기만 해 봐라. 마누라. 콱~ 그냥 이런단 말이오. 왜 나를 여기 보냈느냐 이거야. 괴로워서 좀 편안하게 쉬려고 했는데 왜 여기 보내서 나를 더 괴롭히냐 이거야. 이렇게 생각하니 지옥이 따로있는게 아니라 여기가 지옥이오.
담배도 못 피우게 해.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게 해. 이리 생각한단 말이오. 그런데 딱 마음의 눈이 열리고 끝날 때 되면 뭐라 그러냐? 집에 가서 제일 먼저 뭐할 겁니까? 이러면 예. 부인한테 가서 삼배하겠습니다. 왜 그래요? 마누라가 나를 여기 보내주길 잘했지. 여기 안 보내줬으면 내가 인생이 어떻게 될 뻔했나. 자식이 그렇게 말을 안 듣기를 다행이지. 그러니까. 자식이 나를 속 썩여 가지고 죽인다 살린다 하다 괴롭고 괴로워 여기까지 흘러 왔는데 그 자식이 그렇게 안 했으면 내가 어떻게 여기 올 수 있게 됐냐 이거야.
세상에서 그 어리석은 속에서 쥐가 쥐약을 먹듯이 그 속에서 물질 속에서 갇혀서 지가 잘난 척하고 뒹굴고 살았을 거 아니냐 이거야. 그 울타리에서 벗어나서 보니 이렇게 좋은걸. 이러면 밖에 떡 나가면 밤하늘의 별도 더 많고 더 밝고, 길을 가면 옆에 있는 풀 하나 꽃 하나가 더 예쁘고. 내가 왜 일 년 내내 살면서 이런 옆에 있는 풀 하나 꽃 한 포기 제대로 못보고 살았을까? 여러분들 일년 살면서 쳐다본 적 별로 없죠? 보기야 봤겠지. 눈에 늘 스치겠지마는. 그런데 모든 게 다 새로워진단 말이오.
땅에 가서 가만히 보면 그 개미 기어 다니는 거. 그런 온 갖게 다 보인다 말이오. 숲에 다니면서 언제 그런 거 봤어요? 가서 뒤져보면 썩은 나무토막 속에 개미는 개미대로 놀고, 벌레는 벌레대로 놀고, 온갖 것들이 그 속에도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엄청난 생명들이 그 속에 우글거리고 있단 말이오. 옛날 같으면 징그러워 이러지만 그렇지 않다 이거야. 거기에 어떤 생명력을 보게 된다. 깨닫지 못한 것은 마치 뭐와 같나? 깜깜한 밤과 같아. 그래서 자기 빼놓고 아무도 안보여. 그래서 안 보이는 줄 알고 혼자 외로워한단 말이오. 불을 탁 켜면 깨달으면, 깨달으면 불 켠 거와 같아. 불을 탁 켜면 주위에 보면 자기 옆에 온갖 사람이 다 앉아 있는 거요. 세상이 환하게 다 보인단 말이오.
내가 나 혼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이 세상에 온갖 연관 속에서 자기가 그물에 한 코처럼 다만 있을 뿐이라는 걸 자각하게 된다.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거요. 그러니 똑같은 세계였는데. 이 안경을 끼고 보는 세계하고 안경을 벗고 보는 세계가 다르다. 이 안경이 뭐냐? 업식이다. 이 마음이다. 마음이 지은 업장이란 말이오. 그러니 우리가 깨끗하다 더럽다 하는 것도 물 자체에 있는 줄 알았더니. 결국은 엊저녁에는 시원했고 오늘 아침엔 토했다는 건 뭘 말한다? 이게 마음이 짓는 바구나. 어제 저녁에는 밥그릇에 물이 담겨 있었고, 오늘 아침에는 해골바가지에 물이 담겨 있었던 게 아니란 말이오. 그래서 깨끗하고 더러운 게 아니었단 말이오.
똑같은 거였는데 이 마음 따라 이렇게 달라진다. 이 말이오. 마음 따라 달라진다니까 마음을 바꿔버리면 세상일 턱~ 바뀐다 이런 뜻이 아니다 이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 일체 유심조가 왜 일체유심조냐? 이걸 금이라면 금이 되느냐? 은이 되느냐? 안되잖아.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오. 이게 크다 하고 작다 하는 게 뭐가 짓는 거다? 마음이 짓는 거다. 이게 새 거다 헌거다도 뭐가 짓는 거다? 마음이 짓는 거다. 이게 무겁다 가볍다도 마음이 짓는 거다. 이게 가치가 있다 가치가 없다가도 마음이 짓는 거다. 이게 때로는 금보다 더 가치가 있을 거고 이게 때로는 흙보다 더 가치가 없어지기도 한다.
존재 자체는 공 해. 그것은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가치가 없는 것도 아니야. 가치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은 다 우리 마음이 짓는 바다. 그러니 이렇게 법의 이치를 깨닫는 것을 뭐라고 한다? 여래를 본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런데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으로 귀에 들리는 어떤 소리로 부처를 본다. 그것은 얼토당토 않는 소리다 이 말이오. 그런데 그 왜 32상 80종호가 생겼을까? 자~ 누구든지 자기 마음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어요? 없어요? 될 수 있죠. 자 여기 앉아 있는 법륜스님이 부처가 된다 합니다. 자 여러분들이 법륜부처는 어떻게 생겼냐? 안경을 꼈어요? 안 꼈어요? 안경을 꼈지. 특징 있죠. 눈썹이 짙다. 특징이 있죠. 이빨이 툭 튀어 나왔다. 특징이 있다 이 말이오. 아시겠습니까?
이렇게 다 특징을 따지면 저가 다른 사람하고 차이점이 있어요? 없어요? 있죠. 그러니까 이렇게 생긴 사람이 법륜부처다 할 때는 맞는단 말이오. 그런데 이렇게 생긴 사람이 부처다 하면 맞지가 않아요. 왜 그럴까? 나하고 똑같은 사람이 있으면 생긴 사람이 있거나, 여기 있는 요즘 유전 그 뭐요? 공학이 나와서 이 부처님 말씀을 더 정확하게 얘기해주고 증명해 주고 있는 거요. 내 세포를 하나 떼어 내서 나와 똑같은 사람을 복제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 그 사람이 나요? 얼굴생긴게 똑같고 유전인자가 똑같고 육체가 나라면 그 사람도 나라야 되잖아.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 사람 나 아니잖아.
그런데 모양과 형상은 똑같단 말이오. 목소리까지. 그럴 때 그 분이 부처냐? 부처가 아니다 이거야. 그러니까 부처님은 이렇게 생겼다 하는 말은 성립하지만은 이렇게 생긴 사람이 부처다 하는 말은 맞아요 안 맞아요? 안 맞다 이 거요. 이 내 증명하는 도리로 반야심경에서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이면 짐승이다 하면 맞아요, 안 맞아요? 맞다 이 말이오. 짐승이면 사람이다 하는 건 맞지가 않다 이 말이오. 그러니 짐승하고 사람은 이콜이 아니다. 같은 게 아니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32상과 부처님은 이콜 관계가 아니란 말이오.
부처님의 몸에는 32가지 다른 사람과 다른 특징이 있다 할 때는 맞아요 틀려요? 말이 맞다. 그럼 이런 32가지 몸의 특징이 있는 사람이 부처다 하면 맞아요? 안 맞아요? 안 맞다 이 말이오. 말 뜻 이해하시겠죠. 예. 그러니까 32상을 보는 것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냐? 아니다. 여래의 몸에는 다른 사람과 다른 32가지 특징이 있습니까? 할 때는 특징이 있다고 말 할 수가 있다. 특징이라 할 어떤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 다른 면을 이름하여 뭐다? 특징이다. 이렇게 부른다. 이 말이오. 자~ 그래서
如來說三十二相 여래가 말씀하시되 32상이라고 하는 것은 32상이라고 할 만한 어떤 실체,
卽是非相 특징이 없으므로
是名三十二相 그 이름을 32가지 몸매의 특징이다. 이렇게 이름 한다. 그럼 여기 계시는 분이 누가 부처가 되도 부처님의 몸의 특징은 32가지든 80가지든 잡을 수가 있어요? 없어요? 잡을 수가 있죠. 또 그 특징을 갖고 부처라고 말 할 수도 없죠. 그러니까 특징이 있다는 말도 맞지만은 특징으로 부처를 볼 수 있다면 맞지 않다 이 말이오. 왜? 특징이다 할 어떤 특징이라고 할 어떤 실체가 없다 이 말이오.
그러니 특징이 없으면 그러면 부처냐? 아무런 특징이 없는 게 부처냐? 아니다. 이 말이오. 아시겠어요? 누구든지 다 특징이라고 이름 할 수가 있어. 왜? 특징이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다 특징이 있다 이 말이오. 특징이 있다고 해서 특징이라고 할 만한 실체가 있는 게 아니다. 아무것도 없고 똑같은 게 부처냐? 그렇지가 않다. 32가지 몸매를 가지고 몸의 특징을 가지고 부처라 할 수도 없고, 그러면 32가지 특징이 없는 사람이 부처냐? 그 말도 아니다 이 말이오. 아시겠어요?
자~ 그러면 부처님은 술을 드시지 않는다. 맞다 이 말이오. 술을 먹지 않는 사람은 부처다. 이러면 맞아요? 안 맞아요? 안 맞죠. 술을 먹지 않는다고 부처라 할 수가 없다 하니까. 그럼 술 먹는 사람은 부처겠네. 이렇게 생각하면 되요? 안 돼요? 그것도 안 된다. 제 말 뜻 확실히 이해하시겠어요? 예.//
須菩提若有善男子善女人 수보리야, 만약에 어떤 남자와 여인이
以恒河沙等身命 布施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와 같은 몸과 이코르가 되는 몸과 목숨으로
보시를 하면
若復有人 만약에 다시 어떤 사람이 있어서
於此經中 乃至受持四句偈等 이 경 가운데에 내지 사구게 등을 받아 지녀
爲他人說 남을 위하여 연설하여 주면
其福甚多 그 복이 더 많으리라. 이랬어.
자~ 칠보로 일곱 가지 보배로 삼천대천세계가득히 채워서 남을 위해서 보시하는 게 공덕이 더 크겠습니까? 자기 몸을 버려서 이 몸뚱이 하나를 탁~ 버려서 남을 위해서 보시하는 게 더 크겠어요? 예. 몸뚱이를 버려서 보시하는 게 크겠죠. 아무리 재물을 많이 보시한다 하더라도 자기 몸과 목숨을 버려서 보시하는 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아무리 재물이 소중하다고 하지만은 목숨하고 바꾸자 하면 어느 걸 취해요? 목숨을 취한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목숨이 더 중요하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아무리 많은 재산을 보시를 했다 하더라도 목숨을 버려서 보시한 거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이 말이오. 다시 말하면 이제까지 쭉~ 비유가 나온, 삼천대천세계 칠보로 가득히 채워서 보시를 했다 하더라도 이것은 자기 목숨을 버려서 보시한 거보다는 공덕이 적다라고 말 할 수 있겠죠? 그런데 목숨을 한 번 버려서 보시하는 것은 이렇게 공덕이 큰데. 그 목숨을 얼마나 버렸다고?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이 버려서 보시를 했다면 이것은 참으로 한량없는 공덕이다.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 가득히 채워서 보시했다. 이거하고도 비교가 안 된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자꾸자꾸 갈수록 비유가 점점 커지죠. 그런데 이 무주상 보시의 공덕. 또는 함이 없는 행에 의해서 지어진 무루의 복덕은, 또는 일체상이 없는 줄을 깨닫고 행하는 이 함이 없는 이 행의 복덕은 바로 이 복보다 더 크다. 그러니까 한량이 없다. 이런 것을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거다. 그러니 이 이치를 내 스스로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을 여기서는 뭐라고 한다? 수지사구게등 위타인설이란 말이오.
이 경 가운데에 다 해도 좋고, 내지 뭐라고? 사구게만이라도 아시겠어요? 사구게등을 사구게 등을 생략했단 말이오. 사구게 등을 받아 지닌다는 것은 내가 아~ 이치를 깨닫고 그것을 가슴에 늘 새기고 있는 게 받아 지닌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스스로 그것을 깨닫고 또 위타인설, 남에게 설해준다는 것은 남도 깨닫게 해준다. 그러니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지금 이렇게 배우는 것은 한량없는 공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이렇게 배운다는 것은 뭐요? 자기가 깨닫는 거죠. 사구게 등을 뭐 하는 거다? 받아 지니는 거란 말이오.
그럼 스님은 이렇게 설법을 하는 것은 여러분들을 깨닫게 해주는 거니까 뭐다? 위타인설하는거죠. 그러니까 이렇게 이미 법을 설하고 법을 듣는데 이미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 이 말이오. 그런데 여러분들이 들어주니까 저는 한량없는 공덕을 지을 수가 있고, 여러분들이 듣는데 끝나는 게 아니라 깨달아 줘야 뭐다? 누가? 제가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 이 말이오. 그런데 여러분들은 들으므로 해서 한량없는 공덕이 있지만은. 더더욱 여러분 스스로 깨달아야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 이 말이오. 여러분들이 깨달아서 한량없는 공덕을 얻는 것이 곧 제가 한량없는 공덕을 얻는 길이죠. 왜? 여러분들이 깨달아야. 여러분들이 깨달아야 한량없는 공덕이 있지만은 여러분들이 깨달아야 또 내가 여러분들께 깨닫게 한 공덕이 있을 거 아니오.
여러분들이 깨닫지 못하면 여러분들도 공덕이 없지만 나도 쓸데없는 짓만 했잖아 그죠? 왜? 아무리 노력해봐야 아무도 깨닫지를 못했으니까. 반대로 제가 법을 잘 설해서 여러분들을 깨닫게 하면 나에게 한량없는 공덕이 있죠. 그런데 여러분들은 내 법문을 듣고 깨달았으니 여러분들에게도 뭐다? 한량없는 공덕이 있으니. 이게 자리이타란 말이오. 내가 이로운 것과 남이 이로운 것이 둘이 될 수가 없다. 여러분들이 자기생각에 빠지게 되면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 자기 생각에 빠져서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미워하는 내 자신이 뭐하다? 괴롭다 이 말이오. 초라한 존재다. 중생이 된다.
그런데 원한을 갖고 그 사람을 따라다니면서 내가 미워하니 그 사람도 인생이 괴롭다. 그래서 나도 괴롭히고 남도 괴롭힌다. 또 그 사람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하니 내가 괴롭고, 그 사람도 나를 괴롭히니 그 사람도 뭘 한다? 악행을 하는 거란 말이오. 그런데 내가 눈을 크게 뜨고 다 나와 남을 하나로 봄으로 해서 내가 그를 미워하지 않게 되니. 누가 이롭다? 내가 이롭다. 그가 부처인 줄을, 그가 좋고 밉고 할 것이 없는 제법이 공한 줄을 깨닫게 되면 미워할 바가 없으면 내가 좋다. 내가 좋은 것에 끝나는 게 아니다. 내가 그를 미워하지 않으니 그에게도 좋아요 안 좋아요? 좋다.
내가 그에게 사랑을 주면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요? 안 기뻐요? 기뻐. 여러분들 꽃을 보면 기쁘죠? 여러분들이 꽃을 사랑하고, 개를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별을 사랑하면 사랑하는 누가 좋다? 여러분이 좋지. 꽃이 좋아해요? 아니에요. 별이 좋아해요?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남편을 사랑하면 여러분들이 좋지 남편이 좋은 게 아니에요. 그런데 그 분도 덩달아 좋아진다. 이거지. 여러분들은 내가 남편을 사랑하니 남편은 참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내가 꽃을 사랑하니 꽃은 참 좋겠다 이렇게 생각 하는 거 하고 똑같애. 어리석은 생각이오. 사랑을 하면 누가 좋다? 내가 좋다. 미워하면 내가 나빠진다 이 말이오.
그런데도 여러분들은 내가 그를 사랑하고 내가 그를 위해주면 그가 좋은 게 배가 아파가지고 내 좋은 것도 싫다. 지금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오. 그러니 여러분들이 어떤 이유에서든 그를 미워하면 나에게 불행이다. 그를 미워하지 않으면 나에게 좋다. 그러니까 미워하지 않아야 되겠다 하면 그것 또한 힘이 든다. 미워할 바가 없는 줄을 알아야 돼. 제법이 공하기 때문에. 미워한다 하지만은 그것은 깨고 나면 마치 꿈속에서의 도둑놈과 같은 거다. 그것은 내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미운 사람이 됐지. 그 사람 자체는 미운 사람이 아니다. 다만 한 사람일 뿐이다.
이 세상에 무수한 남자가 이 여자를 저 여자를 좋아하든지, 한 여자를 좋아하는 일이 벌어지고, 무수한 여자들이 남자를 좋아하고. 무수한 사람을 돈을 벌고 돈을 잃고 한단 말이오. 그런데 여러분들 아무렇지 않잖아. 여러분들 TV에서 연애하는 거 보고 어때요? 웃고 재미있어 하잖아 그죠? 그런데 왜 여러분은 남자와 여자, 또는 사람으로 인해서 괴롭느냐? 그것은 거기에 집착을 하기 때문에 그렇다. 너는 내 사람이다. 내 남자다. 너는 이래야 되다. 너는 이래야 된다. 딱 규격을 지어서 이미 굳어진 살아있는 사람의 행로가 아니라. 생각도 너는 이래야 된다. 내가 물으면 말도 요래야 된다. 요렇게 다 정해 놓고 살아요. 내가 “옷 사주세요.” 하면 너는 “그래” 하고 요렇게 대답해야 된다.
“너 공부 잘해” 하면 “알겠습니다.” 요렇게 대답해야 된다. “몇 시에 들오라.” 하면 “예.” 요렇게 대답해야 된다. 요렇게 다 정해놓고 살아. 내가 너를 좋아할 때는 네가 내 옆에 있어야 된다. 내가 너를 싫어하면 너는 퍼뜩 내 옆에서 사라져 버려야 돼. 이렇게 다 정해 놓고 산다니까요. 그런데 왜 없어져라 하는데 안 없어지고 있냐? 왜 있으라 했는데 갔냐? 이렇게 생각한다. 이것이 옳지가 않다. 이래서 누구를 괴롭힌다? 자기를 괴롭히는 거요. 남을 미워하는 게 자기를 괴롭히는 건데 여러분들은 어리석게도 그게 무슨 그 사람한테 큰 보복이라도 하는 양 지금 착각하고 있다 이거요.
우리가 불도, 보살도. 이런 건 떠나서 아주 중생의 이기적인 차원에서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자~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 이거야. 치가 떨리죠. 잠이 안 온다 이 말이야. 지금쯤 그 집에 가 있을 텐데. 밤새도록 잠이 안 온다 말이오. 이렇게 치를 떨면 누가 괴로워요? 남편은 그 여자하고 잘 노는데. 누구 손해야? 자기만 손해죠. 이게 얼마나 어리석냐는 거요. 내가 그렇게 괴로워하고 치를 떤다 해서 그 사람이 괴로운 거 아니잖아.
그리고 남자든 여자든 우리 둘 사이에 뭔가 조금 빈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한 눈을 팔았겠지.
그런데 이튿날 아침 멱살을 잡고 악을 쓰고 칼부림을 하면 공간이 점점 넓어질까? 좁아질까? 넓어지겠지. 그러니 글로 쫓아내는 거란 말이오. 가지마라하고 싸우면서 어떻게 한다? 그 집에 가라고 쫓아내는 거와 똑같다. 이거야. 그 얼마 어리석은 일이오. 전혀 사리에 안 맞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쥐가 쥐약을 먹는 거 하고 같다 이거야. 결과가 그렇게 되리라고 하지만 전혀 그렇게 안 되는 쪽으로 갈 수 밖에 없다. 그러니 화가 더 나죠.
이렇게 되라고 이렇게 아우성을 쳤는데 이렇게 되기는커녕 삐딱하게 나가니까. 더 화가 나고 더 괴롭고 더 악을 쓰고. 그러니까 남자나 여자가 상대편 남자가 볼 때 아이고 저런 악녀, 저런 악남. 저런 사람하고 내가 여지까지 어떻게 살았던고 해서 있던 정마저도 없어진다. 이 말이오. 그러니 이렇게 악감정을 갖고 이건 헤어지는 쪽으로 가는 거 아니오. 이렇게 헤어질게 뭐가 있어? 그래도 한 때 사랑했고, 아이의 아버지나 어머닌데. 그렇게 하느니 미리 어~ ‘안녕히 계십시오.’ 했으면 좋은 감정은 남잖아.
그러면 헤어지는 것이 상책이냐? 헤어지는 것도 한 방책이죠. 그런데 이렇게 하고 헤어질 필요가 없다. 이건 손실이다. 내 인생의 손실이다. 어디 가서 그래도 내가 한 때 사랑했던 사람. 내가 한때 같이 살았던 사람. 또 아이의 아버지를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아~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야.” 이렇게 얘기하면 누가 자랑스럽다. 자기가 자랑스럽지? “그 인간도 아닌 놈.” 그 인간도 아닌 놈을 눈이 삐어서 거기 붙어 몇 년 살았다면 그 ㄴㅕ ㄴ 도 인간이 아니다 이 말이야. 수준 이하다. 이 말이오. 수준 이하다.
그 이걸 생각해야 되는 거요. 내가 그를 욕하므로 해서 누구를 욕하는 게 된다? 자기를 욕하는 게 된다 이 말이오. 그리고 내 아이가 훌륭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그를 욕하게 되면 내 아이의 엄마거나 내 아이의 아빠를 욕하는 게 된단 말이오. 내 아이의 엄마나 아이의 아빠가 인간도 아니라면 인간도 아닌 거 밑에 태어난 내 아이는 인간이 될 수가 없다. 그러니 그는 열등감과 좌절감 속에서 잘 못된 길로 갈 수 밖에 없다. 이걸 누가 만드느냐? 내가 만든다. 이거야.
그러니 나하고 같이 안살뿐이지. 그래도 그는 좋은 사람이라야 아이의 아버지가 뭐다? 좋은 사람이 되고, 아이의 엄마가 좋은 사람이 된다. 그러니 이게 다 계속 손실을 보는 거다. 이거야. 범부 중생이라고 할 만하죠. 다 잘 난 줄 알고 한단 말이오. 이게 사는 길인 줄 안단 말이오. 그러니 쥐가 쥐약을 먹는 것과 똑 같다 이어야.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하는 행동이 똑 같다 이거야. 그러니 세속적인 이해관계로도 이거는 어리석다 이 말이에요. 보살행은 놔두고도. 자꾸 보살행이라고 생각하니 여러분들이 뭐라 그러냐?
“아이고 그건 스님이나 하지.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여기 자꾸 그래요. 질문할 때도 보면. “아이고 그게 말이 쉽습니까?” 자꾸 이래. 거 자꾸 먹어라 이거야. 배 아프게. 그래서 제가 그런 거요. “그럼 자꾸 하시오.” 이렇게 얘기 하죠. 거 왜 스님이 말을 저렇게 함부로 하느냐 하지만은. 그래 좋다니까 어떻게 하는 수밖에 없죠. 여러분들에게 큰 무슨 인생의 길을 가라는 게 아니에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 모든 중생이 다 원하는 바죠. 나는 부처 될 필요가 없습니다. 이래 말하는데 언제 부처 되라 그랬어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걸 이름하여 부처라 한단 말이요. 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그러니 그것은 자기를 괴롭힐 뿐이다. 자기를 괴롭힌 걸 넘어서서 누구도 괴롭힌다? 남도 괴롭힌다. 이게 백해무익한 거 아니냐 이거야. 그러니 헤어지려면 좋게 헤어지는 게 누구에게 이롭다? 나에게 이롭다. 헤어지지 않고 그 사람을 잡아당기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것도 길이 있어요? 없어요? 있다 이거야. 그럼 우리가 불교라는 종교 수행. 이런 걸 떠나 상식적으로 한 번 생각해 보자. 사람의 마음이 있다. 나하고 남편 한 때는 좋았어요? 안 좋았어요? 좋았죠. 그런데 살다 보니 또 나빠질 때도 있었죠. 그럼 그 남자도 그 여자도 지금은 좋지만 앞으로 나빠 질 때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있을까? 없을까? 있겠지.
그러니 그럴수록 잘 해주고 보살펴 주면 어때요? 그 사이가 벌어지면 어떻겠어요? 아이고 그래도 내 마누라가 낫구나, 아이고 그래도 내 남편이 낫구나. 이렇게 하는 것은 돌아 올 기회를 주는 거요? 안 주는 거요? 주는 거지. 그러니 그래도 내가 그를 잘 보살피는 것은 이 과정에도 내가 뭐하다? 편안하고. 돌아 올 가능성도 있으니 일거양득이지 않냐? 안 돌아 와도 나는 뭐하다? 미워하지 않으므로 누가 좋다? 내가 좋고. 그런데 왜 이 좋은 건 안 할라고 그래요? 좋은 건. 그러니 아편환자에게 담배환자에게 그걸 그만두면 건강에도 좋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어때요? 이제까지 피운 거를 어떻게 그만 두냐? 이렇게 얘기하는 거 하고 똑같아요. 그럼 피워서 죽어라. 이 얘기죠.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길을 열어줘도 안 가는데.//
그러니 이것은 여러분들이 우리 생활과 떠난 얘기다가 아니라. 괴로움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바로 현재에 나의 삶에 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필요한 거지. 이거하고 상관없는 부모자식형제들 세상 살면서 나타나는 이거와 상관없는 진리의 별도의 세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것을 가지고 이 가르침으로 내 삶에 있어서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길을 얻기 때문에. 가장 바른 법이 가장 생활적인 것이고, 그것이 가장 쉬운 법이다 이거야. 그런데 우리는 바른 법은 어려운 법이고, 바른 법은 생활과 떠나 있고, 생활하고 가깝고 쉬운 거는 바른 법이 아니고. 수준이 낮은 거고. 뭔가 이래 생각하고 있다 이거야. 그게 잘못됐다 이거야.
사람들은 정법으로는 중생을 깨우치기 어려우니 조금 이걸 이상하게 만들어서 사주팔자도 봐주고 뭐도 하면 중생이 좋아하지 않냐? 그래서 방편을 쓴다. 그건 방편이 아니에요. 방편은 깨달음의 길로 가는데. 사람이 처해있는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그 가는 길이 조금 방향이 다르다 이 말이지. 깨달음의 길이 아닌 다른 쪽으로 인도하는 것은 방편이 아니라 이건 사도다 이 말이오. 자~ 이런 데서 우리가 이 경을 읽고,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내서 자유로운 삶으로의 전환을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뭔가 제 욕심대로 뭔가 되기를 원해서 이루어지는 그 복하고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이런 얘깁니다.
그러니까 지난번에 제가 말씀 드렸는데. 제가 처음 포교하고 불교를 바르게 한다고 잘난 척하고 다니면서 스님들 만나거나 신도들이 잘못하는걸 보면서 비판하고 할 때는 가슴속에 억울한 게 많았겠어요? 없었겠어요? 억울한 게 많았다 이거야. 아~ 세상을 다 때려 고쳐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억울한 게 많았다 이거야. 왜? 바른 것이 왜 실천이 안 되느냐? 이게 바른데 왜 당신들 안 받아 들이느냐 이거야. 왜 기성세대는 왜 그러냐? 이럴 땐 억울한 게 많았다 이거야.
그러나 자기모순을 보는 순간,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독선적이고, 얼마나 잘난 척하고, 지만 옳고 하고 살았는지. 얼마나 위선적인 인간인지를 알게 되면 뭐가 된다? 참회의 눈물이 나는 게 아니에요. 후회의 눈물이 나는 거요. 내가 왜 바보같이 그렇게 살았나? 그러니까 나는 다시는 이 세상에 안 내려 올 거야. 이렇게 결심을 하고 드갈 땐 뭐요? 이제까지 그렇게 살아온 자기 생에 대해서 뭐다? 진절머리가 나는 거요. 이걸 세상 사람이 봤으면 나를 얼마나 욕했겠냐? 내 꼬라지를 보고 얼마나 우습게 여겼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니까. 부끄러워서 세상 사람들하고 다시는 보기가 싫어. 이게 후회란 말이오. 이것도 또 지 잘났다는 거요. 아시겠어요? 그런데 다시 한 줄기 마음의 빛을 느끼면서 일어났을 때 아~ 내가 그렇게 하므로 해서 오늘의 내 꼬라지를 보게 됐구나. 내가 뭣 때문에 그런 팸플릿을 뿌렸냐? 이런 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 해서 나는 오늘 내 모습을 알게 됐구나. 그러니 지난 10년간 그런 행동들을 통해서 결국 오늘 내 모습 이 모습을 아는 하나의 과정이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지나간 과거도 다 뭐가 된다? 자기의 소중한 삶이 된다.
그러니 과거에 어리석게 살은 거에 대한 뉘우침과 동시에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자신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에 그 때 바로 체루비읍이 된다? 그때 그렇게 깨닫고 경전을 턱 읽었다 이거야. 그렇게 자기를 뉘우치고 경전을 떡 읽어보니 부처님 말씀 속에 고구정녕이 다 상을 갖지 마라. 어떻게 하라 어떻게 하라. 이런 망상에 사로잡힐 걸 경계하는 말이 있어요? 없어요? 있죠. 법이라는 상에도 집착하지 마라. 이미 병따라 처방을 다 내놨는데도 처방이 없다고 아우성을 치고 이렇게 살았단 말이오.
그러니 이것을 보면서 경을 읽으면서 그때 체루비읍이 된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고구정영이 읽어 주셨는데도, 나는 내 눈이 어두워서 그걸 보지 못하고. 봉사가 전깃불 켜라고 아우성을 치는 것처럼, 왜 세상이 이렇게 어둡냐고 아우성을 치는 것처럼 그렇게 했다 이거야. 그러니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냐? 이것을 느끼게 될 때 경전을 읽으면서 눈물이 나게 되는 거요. 눈물이 나는 것은 슬프고 외롭고 후회되는 눈물이 아니라, 바로 그 눈물이 나면서 경은 계속 읽는다. 너무 기쁘다. 부처님께서 우리 부처님께서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우치려고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다 설해 놨구나.
그러니 우리가 금강경을 읽으면서 고구정녕, 고구정녕, 부처님께서 고구정녕 법을 설했다는 것이 뭐냐? 한 번 딱 하고 끝내 버린 게 아니고. 요렇게 하면 요기에 집착, 조렇게 하면 저기에 집착, 조렇게 하면 조게 집착 요것을 따라따라따라따라 다니면서 어때요? 요렇게 집착하면 “야~ 이놈아 고게 상이다.” 요렇게 상을 버려라 하면 또 버려 라는 상에 딱 집착을 해서 요게 답이구나 하니까 “고것도 아니다.” 하니까 또 조기 가고. 이것을 따라 다니면서 노심초사 하면서 하나하나 일러줬다 이거야.
그런데도 우리는 “에이~ 그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온갖 은혜를 베풀어도 자식은 어때요? 자기 생각에 빠져서 귀찮게 생각하고 쓸데없다고 그러고. 뿌리치고 도망가고 그런 거와 똑같다 이거야. 그런데 나중에 다 자라서 자기가 자식을 키우면서 깨닫게 되면 어때요? 아~ 우리 부모님 그때 이렇게 이렇게 해 주셨구나. 이렇게 우리가 다 느끼게 된다 이거야. 그 느끼게 될 때도 바로 참회를 해야 되는데 참회가 후회로 가면 안 된다 이거야.
아~ 지금이라도 내가 자식을 키우면서 이 부모의 은혜를 깨닫게 됐으니 누구 덕이에요? 자식 덕이잖아. 자식이 애를 안 먹였으면 내가 어떻게 부모의 은혜를 깨달았겠어? 내 잘난 줄 알고 죽었지. 그런데 이 자식이 애를 먹이는 속에서 내 온갖 얘기가, 자식을 위한 온갖 얘기가, 얘기를 자식한테 해 봐요. 말 안 듣는 자식한테. 하면 다 자식한테 독이 돼. 전부 다 반발이 돼. 관심을 가져주면 잔소리 한다고 난리고, 그래서 “알았다” 하고 외면하면 사랑 안 준다고 난리고,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
이래서 사람이 속 뒤집어 질 정도가 됐을 때, 자식이 원수같이 되지만은 그때 자기가 자기를 돌아 볼 수 있으면 그 자식이 그 부모한테 한 것과 똑같다는 것을 ‘아이고 네 모습이 내 모습이구나.’ 이 생각을 안 했으면 문제인 거요, ‘아이고 네 모습이 내 모습이구나. 네가 나 닮았구나.’ 이것만 딱 알게 되면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속상했나를 알게 된다 이거야. 그럼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속상했나를 알게 되면 부모에 대한 감사은혜. 내가 살아오면서 이제까지 알게 모르게 가슴속에 숨겨져 있던 부모에 대한 원망이 눈 녹듯이 다 녹아 내린다 이거야.
그런데 이러한 부모와의 원결을 다 소멸하고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 거는 누구 덕이다? 자식 덕이다 이거야. 그러니 자식이 보살로 보인다 이거야. 아이고 니가 내 깨우쳐 주려고 니가 고렇게 까지 일부러 나를 애를 먹이구나. 고렇게 애먹이려면 고 힘드는 일이에요? 쉬운 일이에요? 힘드는 일이란 말이오. 이렇게 딱 생각을 하고 자식을 내려다보면 자식에 대한 미움이 샥~없어져 버려.
부모에 대한 은혜를 깨우치는 동시에 자식의 은혜를 알게 되는. 깨우쳐 주는 자식의 은혜를 알게 되고, 깨우쳐 주는 자식의 은혜를 아는 순간 자식에 대한 미움도 싹없어져 버려. 그러면 내 품속에서 자식을 내가 부모에게 못 다한 효도. 그 내 가슴 아팠던 그거를 내 그때 심정으로 또 돌아가서 자식도. 지금 “아이고 이 바보같이 어리석은 놈아, 니도 나중에 후회할거나. 니도 자식 둬 봐라.” 이렇게 하면 안 돼요. 여러분들 자식 키우다 마음에 안 들면, “그래. 니도 나중에 자식 키워서 한 번 해봐라.”
그거 누구 꼬라지처럼 되라는 거요? 내 꼬라지처럼 되라. 이거 저주에요. 그런 말 하시면 안 돼요. 그게 저주다 이 말이야. 너도 나처럼 요렇게 고통스러워 봐라 이 얘기에요. 그런데 그런 말 함부로 하잖아. 그러니 사람이 성질이 나면 인간이 이게 참 더러워요. 성질이 나면 자기 자식도 사정없이 저주해 버린단 말이오. 니도 내 꼬라지 되어 요래 속이 팍팍 한 번 썩어 봐라 이거지. 그때 니도 니 눈에 눈물이 팍팍 나야 될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러면 안 돼요. 나는 이러더라도 너는 그러지 마라. 이렇게 말해야지.
이렇게 해서 자식에 대해서 너른 마음으로 포용을 하면 자식이 톡톡 쏘는 거에 대해서 아무런 대응이 없어. 이 벽은 톡톡 쇠로 된 벽은 치면 어때요? 고만큼 저쪽에서 반작용을 하죠. 탁 때려서 벽을 구멍을 내는 만큼 창끝이 그 만큼 탁 구부러집니다. 아시겠어요? 그런데 솜 벽처럼 돼서 푹 쑤시면 쑥 들어가 버리면 창이 다쳐요 안 다쳐요? 안 다치지. 그러면 피해를 안 입는 거요. 아이가 나한테 탁 쏘거나, 남편이 쏠 때 나도 탁 되받아 쏴버리면 나는 나대로 상처입고 상대는 상대대로 상처를 입으니 그게 끝이 안 난다 이거야. 그런데 탁 쏠 때 그냥 턱 받아들여 버리면 어떠냐? 받아들인 나도 상처를 안 입고, 때린 상대도 상처를 안 입으니. 한 서너 번 찌르다 그만 둬 버린다 이거야.
그래서 여러분들이 여기서 마음이 탁 변해서 집에 가 봐요. 갑자기 아이 태도가 달라지는 거 같아. 아이가 고분고분한 거 같애. 남편도 오늘따라 사람이 변한 거 같애. 깜짝 놀란다 이거야. “아이고 웬일이지? 내가 부처님한테 뭐 해달라는 소리도 안 했는데.” 이렇게 내가 바뀌면 저절로 변하게 된다. 똑같아도 내 느낌에 달라지고. 내 느낌에 다라지면 상대도 달라지는 거요. 그게 가피다 이 말이오. 아시겠어요? 가피를 입을 줄 알고 가피를 원해야지. 내~ 독을 씹으면서 가피인줄 알면 안 된다.
그리니 수보리가 오늘에 이르러서야 이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아~ 부처님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깨달았다 하는 그것도 오늘에 와야 그게 반딧불 같은 지혜인 줄 알았다 이거야. 그러니 부처님은 우리 중생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푸실까? 그러니 거룩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자기 고백을 하는 거요. 자기가 이제까지 지혜가 제일이니 깨달음을 얻었느니 하는 것도 다~ 붓다의 광명 앞에서는 반딧불 같은 존재인데. 그걸 부처님 깨달으시듯이 나도 부처님 반쯤은 되나 보다 했고. 이게 다냐? 이런 생각을 했다면 그건 너무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래서 보살은 아무리 많은 깨달음을 얻고 아무리 많은 대자대비 심을 베풀어도 늘 어디 있다? 부처님의 발아래 있는 거요. 부처님의 그림자에 불과한 거요. 그 말은 어떤 상도 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다 부처님의 은혜 속에서 이루어지는 거다. 이렇게 생각해야 돼. 자기가 잘났다. 자기가 공부 됐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우리가 오늘 날 이래하는 일도 아~ 이거 뭐 세상 사람들은 못하는데 우리가 노력해서 잘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부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부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무량한 한량없는 깨달음의 지혜를 주셨으니 나도 조금은 은혜를 갚아야 되지. 그러니까 그 분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도 그 분의 발아래에서 조금은 거들어야 되겠다. 이런 생각으로 해야 된다 이 말이오. 그래서 기독교에도 영광을 어디로 돌리라 그래? 하느님에게 돌리라 그러잖아. 그런 사람들도 그런 마을 하는데. 당연히 모든 은혜는 부처님에게로 돌려야 되겠죠?
그런데 불교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 어디로 돌린다? 일체 중생에게로. 부처에게론 돌리기 쉽지만은 중생에게로 돌리기는 어렵죠. 다시 말하면 나의 이 깨달음을 바로 그 나를 애 먹인 자식에게로, 이 깨달음을 바로 남편에게로. 이렇게 돌린다 이 말이오. 이게 바로 회향이라는 거요. 아시겠습니까? 어떤 일이든 끝에 가면 어때요? 이 모든 공덕을 일체 중생에게 회향되어 일체 중생이 다 깨달음을 얻게 하여 지이다. 이래. 그러니 얼마나 멋있는 얘기요. 자~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법륜스님 > 금강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15.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_법륜스님 (0) | 2013.04.07 |
---|---|
제 14.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_법륜스님 (0) | 2013.03.31 |
제 12. 존중정교분(尊重正敎分)_법륜스님 (0) | 2013.02.25 |
제 11.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_법륜스님 (0) | 2013.02.25 |
제 10.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_법륜스님 (0) | 2013.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