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62페이지 펴주십시오. 오늘은 금강경 강의 아홉 번째 시간이 되겠습니다. 제 10
莊嚴淨土分 정토를 장엄한다. 정토를 장엄하는 분이다.
佛告須菩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하되
於意云何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如來昔在燃燈佛所 於法 有所得不 여래가 옛날에 연등부처님 처소에 계실 때에. 저 법에 얻은 바가 있느냐? 없느냐? 이렇게 질문을 했어요. 왜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됐느냐? 그 앞에서 어떤 상도 취해서는 안 된다. 이런 얘기가 나왔었죠. 그러니까 성문승들이 어떤 수행의 결과, 수행의 과보로 무엇인가를 증득했다. 즉 아라한과를 증득했다. 나는 수다원과를 얻었다. 나는 사다함과를 얻었다. 나는 아나함과를 얻었다. 나는 아라한을 증득했다. 이렇게 하면 이미 이것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증득했다 하는 그 어떤 상도 지어서는 안 된다. 왜 그럴까요? 본래 한 법도 얻을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반야심경에 이무소득고 이렇게 나오죠? 이 얻을 바 없는 까닭으로. 또 그 앞에는 무지역무득 깨달음도 없고, 깨달음을 얻었다 할 것도 없다. 얻었다 하는 거도 한 생각을 일으켜서 모양을 지은 것이 된다.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으면 모양을 지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그 모양 없는 것이야 말로 깨달음의 세계다.
그러니 수보리가 여기까지는 알아들었는데,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저 과거세에, 연등부처님을 뵙고, 그 때 미래세에 부처가 되리라고 하는 수기를 받았다 이거야. 그건 분명히 수기를 받았다. 하니까 무엇인가 법을 얻은바가 있다. 이런 생각이죠? 과거에 부처님께서는 연등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았다 하는데, 그건 뭔가? 이렇게 생각을 하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야, 내가 과거 연등부처님 계시는 곳에서 이게 법이다 하는, 이게 깨달음이다 라고 하는 그 어떤 법이 있어서 그것을 얻었느냐? 이렇게 질문을 했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수보리가 또 아차, 내가 또 법이라고 하는 상을, 또 짓는 거구나. 그래서 아니옵니다. 부처님께서는 한 법도 얻은바가 없습니다. 이렇게 또 자기가 짓는 상이 부처님의 질문에 의해서 또 깨진다 이 말이오. 그런 얘기에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하되
어이운하오. 너는 어이 생각하느냐?
여래석재연등불소어법 유소득부. 여래가 과거 연등부처님계시는 처소에서 저 법에 얻은바가 있느냐? 이 말은. 이것이 최상의 깨달음이다라고 하는 그런 법을 얻을 것이라고 수기를 준바가 있죠? 그래서 수기를 받았다. 우리가 이렇게 이해하고 있는데. 그 어떤 최상의 깨달음이다 하는 것을 얻은바가 있느냐? 이거야.
不也世尊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如來在燃燈佛所 처님께서 연등불 처소에 계시사
於法 實無所得 저 법에 실로는 얻은바가 없습니다. 이런 얘기요. 실로는 얻은바가 없다. 그러니까 이 부처님께서 이 마아가섭존자에게 전법을 할 때, 즉 선에서는 삼처전심이라 해서 부처님이 교외별전. 그러니까 이런 가르침 이외의 별도의 세군데서 미묘법을 전했다. 이런 얘기가 선불교에서는 있죠?
첫째가 뭐요? 염화미소죠? 염화시중의 미소요, 두 번째는 다자탑앞에서의 분반좌요. 세 번째는 곽시쌍부죠. 사라수하에서의 곽시쌍부다. 이래서 무엇인가 말 이외에. 언어를 떠나서 문자를 떠난 그 이외의 법을 전했다. 이렇게 선불교에서는 교외별전 삼처전심을 얘기하고 있단 말이오. 이 선에서는 부처님의 바른 정법이 마아가섭존자에게로, 마아가섭이 아난다 존자에게로, 아난다존자에서 상나화수존자에게로. 이렇게 바른 법이 언어를 떠나서. 소위 말해서 전해져 내려온다. 이게 선불교의 주장이란 말이오. 그럴 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가섭존자에게 전한 전법계. 그러니까 법을 전할 때 그 전법계가 뭐냐 하면 이렇게 기록이 되 있어요.
法本法無法법본법무법. 법이라고 하는 본래 법, 법본법, 법이라고 하는 본래법은 무법. 없는 법이다. 이 말이오. 법이라고 하는 본래 법은 없는 법이니.
無法法亦法무법법역법이라. 없는 법도 또한 법이다. 없는 법, 무법이라고 하는 법. 없는 법도 없는 법이라는 법 또한 뭐다? 법이다. 이거야. 그러니까 무법법. 없는 법. 무법이라고 하는 법. 역이라고 하는 것은 또한 이죠? 또한 법이다.
今付無法時 금부무법시 지금 내가. 지금 이 무법을 이 없는 법을 전하는 이때에. 누구에게 전하죠? 마아가섭에게 전하죠. 부탁하는 부촉하는 이때에.
法法何曾法 법법하승법이다. 법이라고 하는 법은 어찌한 법인가? 법이라고 하는 법이 어찌한 법인가? 이런 게송이 있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여기서 핵심적으로 얘기하고 싶은 것은 법이라고 하는 본래 법은 없는 법이다. 이거야. 그러니 금강경에서는 뭐라고 했어요? 무유정법이다. 이랬단 말이오. 또 반야심경에는 제법이 다 뭐하다? 공하다. 했단 말이오.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공하다는 말은 어떤 정해진 법이 있다는 얘기요 없다는 얘기요. 없다.
법법하지만은 법법법 사람들이 하지만은 법이라고 할 만한 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이 없는 법을 또 전해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데. 전한바 없이 전하고, 또 받은바 없이 받는단 말이오. 그러니 법이라 법법하지만 법이라고 할 만한 법이 없다. 이 법이라고 할 만한 이것 또한 법이다 이 말이오. 법이라고 할 만한 법이 없다는 이 법을 내 너희에게 전하노니, 잘 받아 가져라. 받은 바 없이 잘 받아 가져라. 쉽게 얘기하며 이런 뜻이란 말이오.
그러니 우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최상의 깨달음. 이 세상에서 가장 바르고, 가장 으뜸가는 최고의 깨달음. 그것은 뭐다? 무유정법이다. 그것은 곧 공함이다. 서울 가는 길을 확연하게 아는 최고의 법은 바로 저 허공에서 서울을 중심으로 해서 주위를 내려다보는 것이다. 이 사람만이 서울 가는 길을 하나도 걸림 없이 완전하게 알 수 가 있다. 어느 쪽으로 가는 게 서울 가는 길이냐? 그것은 정해서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누군가가 어떤 위치에서 물으면 단박에 그 답이 뭐라고 나온다? 정해져서 나온다. 이것이 무엇이다라고 정해서 말할 수가 없다 이거야. 그럼 말로 표현 못하는냐? 아니다 이거야. 물으면 답이 나온다. 왜 그럴까? 거울은 한 그림도 그리지 않지만은 물체가 오면 뭐한다? 비친다. 물체가 오면 비친다. 그러니까 이 한 그림도 그리지 않는 텅 비어놓는다 이 말이오. 늘 텅 비어놔서 한 그림도 그리지 않는 이것이 바로 무유정법이다.
그러니, 이것은 한 그림도 그리지 않는다 해도 맞고. 무수한 그림을 그린다 해도 맞다. 또 반대로 한 그림도 그리지 않는다 해도 맞지 않고. 무수한 그림을 그린다 해도 맞지 않다 이거야. 거울은 그냥 다만 본래로 청정할 뿐이다. 그러나 물건이 오면 그 어떤 것도 다 비친다. 서울 가는 길은 무엇이라고 정해져 있지 않다 이거야. 그러나 중생이 물으면 그 어떤 사람이 물어도 서울 가는 길은 일러 준다.
그것은 몇 가지냐? 말할 수가 없다 이거야. 동일한 선상에서 물으면 만 명이 물어도 만 가지가 한 가지 법으로 대답할거요. 만 명이 다 다른 위치에 있으면 만 명이 물어도 만 가지 답이 다 달라진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려운 게 아니다. 우리가 어떤 관념을 가지고 불교를 이해하려고 하니까. 불교가 이해기 어렵고, 부처님의 말씀이 이해하기 어렵지만은. 사실은 부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일상 생활속에서 적용해서 보면 상식에 속하는 거다. 너무나 당연한 일상적인 얘기다.
그럼 우리는 일상적인 것을 일상적인거로 보지 못한다. 왜? 우리는 일상적인 삶의 깨어있지가 못하고 꿈속에서 살고 있다. 꿈속에 있으니까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고, 손이 있으나 만지지를 못하단. 그냥 있는 그대로 보면 되는데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의 어떤 관념, 즉 망념에 의해서 환상을 보고 있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 그것을 깨달았으니 다만 자신의 사상을 아상을 탁 내려놨다 이거야. 탁 내려놓으니까 부처님께서 아~ 너는 미래세에 성불하겠구나! 이렇게 대답했단 말이오. 선해동자가 내가 한 소식을 탁 깨달았다. 이게 아니란 말이오. 부처님 전에서 어떻게 했어요? 자기의 모든 것을 던졌다. 부처님이 지나가시는 그 길에 바로 자기가 가진 모든 재산을 하나도 남김없이 털어서 꽃을 사서 공양을 올렸다 이거야. 재물과 지위를 버렸다 이거야.
그는 부처님이 진흙을 밟을까 해서 자기의 옷을 벗어서 밟고 지나가게 했다 이거야.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거기에 부처님 발아래 깔았다 이거야. 그래도 모자라니까 자기의 온 몸을 던져서 밟고 지나가게 했다. 그것도 부족하니까 머리까지 풀어서 밟고 지나가게 했다. 그것은 그가 가진 모든 것. 즉 재물이든 지위든 명예든 그의 육신이든 그의 머릿속에든 갖가지 가치관이든 일체를 다 부처님 발아래 던져버렸다.
이건 뭐에요? 아를 버렸다. 몸뚱이를 아로 삼거나, 가치관으로 아를 삼거나, 윤리도덕으로 아를 삼거나, 자기 생각을 아로 삼거나, 재물로 아를 삼거나. 무엇인가 삼을만한 거를 다 던져버렸다 이거야. 그러니 그거 무언가를 얻은 것이 아니라. 그는 그냥 버렸다 이거야. 일체를 놓아버리자. 부처님께서 너는 다음 생에 부처가 되겠구나. 이렇게 말했다 이거야. 그러니 수기를 받았다 하니까. 어떤 법이 있어서 그것을 부처님이 움켜쥔 게 아니다. 이거야. 무언가를 더 움켜쥔 게 아니라 이미 움켜쥐고 있던 모든 것을 놔버렸다.
여래가 연등부처님 처소에 계시사. 이것이 최상의 깨달음이다 라고 하는 그런 법을 실로는 얻은 바가 없나이다. 실로는 얻은 바가 없다.
須菩提於意云何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菩薩 莊嚴佛土不 보살이 불토를 장엄하느냐? 이랬어. 왜 이런 질문을 했냐? 수보리가 또 의심이 들었다. 부처님께서 한 법도 얻은바가 없다면 보살은 다생겁래로 보살행을 해서 불국토를 뭐하고? 장엄하고, 그 다음 뭘 얻는다?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된다 이 말이오. 보살은 한없는 보살행을 하고. 그리고 그 공덕으로 불국토를 장엄을 하고. 그 다음에 여래지를 얻는다. 이렇게 본인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한 법도 얻은바가 없다면 어떻게 정토를 장엄하는가? 어떻게 정토를 장엄하는가? 이런 의심이 들었다.
여기에 수보리는 정토를 장엄한다 하니까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칠보로 갖가지 아름답게 꾸몄는 이것을 뭐라고 했다? 장엄이라고 생각을 했다. 바로 이 세계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우리가 국토를 장엄하는 것이고. 그 몸을 청정히 하는 것이 바로 몸을 장엄하는 것이고. 그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이 마음이 장엄하는 것이 되는데. 바로 이 세계를 절을 짓고, 탑을 세우고 뭘 만들고, 뭘만들고===뭘 만들어서 이렇게 해서 장엄을 한다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했기 때문에. 어떻게 이 세계를 장엄을 하느냐? 불국토를 만드느냐? 이렇게 생각했다 이 말이오.
이러니 부처님께서 니가 또 상을 짓는다 이거야. 장엄할 것이 없다. 이거야. 왜 그럴까? 중생의 마음은 어리석으니 바로 뭐다? 그가 사는 세계가 무슨 세계고? 사바세계고. 중생의 어리석음을 버리고 청정한 마음을 내게 되면 곧 그 국토가 뭐된다? 청정하다 이거야. 그래서 심청정국토청정이다. 이 말이오. 그래서 수보리야 보살이 정토를 불토를 장엄하는가? 이러이런 것들이 정토다 해서 보살이 그러한 세계를 바깥에다가 만드느냐? 이 말이오.
不也世尊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何以故 어찌한 까닭이냐 하오면
莊嚴佛土者卽非莊嚴 是名莊嚴 불토를 장엄한다 하는 것은 곧 장엄이라 할 것이 없을 새 그 이름이 장엄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리석은 마음을 내게 되면 그 어리석은 마음으로 인해서 뭐가 생깁니까? 갖가지 고통이 생긴다. 그 갖가지 고통이 바로 뭘 만든다? 지옥을 만들고 아귀를 만들고 축생을 만든다 이거야.
그런데 여러분들이 어리석은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어리석은 생각을 내지 않으면 바로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 괴로움이 생기지 않으면 지옥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이거야. 그러니 지옥이 있느냐? 지옥이 없느냐? 중생에게는 뭐가 있고? 지옥이 있고. 깨달은 자에게는 지옥이 없다 이거야. 왜 그러냐? 다 마음이 짓는 바니까. 어리석은 생각을 내면 바로 갖가지 괴로움이 생기고 갖가지 괴로움 중에 가장 나쁜 게 뭐다? 지옥이다.
왜 그럴까? 이 육도윤회의 세계는 다 중생의 뭘로 이루어진다? 중생의 업으로 이루어지는 거다. 나의 본래 청정 자성심이 지옥을 가고 천당을 가고 지옥고를 받고 천당 고를 받는 게 아니다. 그것은 내가 지은 업이 받는 거다. 그러기 때문에 업이 다하면 그것은 사라지게 된다. 선업을 지어서 천상에 간다 하더라도 그 과보가 다하게 되면 본래 자리로 오고. 악업을 지어서 지옥에 간다 하더라도 그 고를 다 받게 되면 본래로 돌아오게 된다. 그 업을 받는 주체가 나의 본심이 아니다 이거야. 그거는 업장이다 이거야.
그러니 불토를 장엄한다 할 때, 이 세계를 무엇인가 가꾸고 무엇인가 다듬어서 이 세계를 이루는 게 아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은 또 마음 밖에서 뭐를 찾는다? 도를 찾는 것과 같다 이거야. 우리의 마음이 어리석어서. 즉 중생심을 내게 되면 이 세계는 갖가지 고가 벌어지게 되니. 이것을 이름하여 사바세계라고 하고. 그 마음이 청정해지면 어떠냐? 바로 이 갖가지 고는 사라지게 된다. 그러니 모래로 이루어져 있다 해서 그것이 나쁜 겁니까? 모래로 이루어져있다 해도 그것은 아름다운 겁니까? 푸른 바닷물이라 해서 나쁜 겁니까? 바닷물이라 해서 아름다운 겁니까? 기암괴석이 있다 해서 그게 아름다운 겁니까? 기암괴석이 있으니 그게 악산입니까? 이게 다 사람이 있다 이거야. 사람에. 사람에 있다.
어떤 사람은 서울 오면 사람 살 곳이 못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어떤 사람은 서울 오면 여기야말로 천국 같은 곳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저 산속에 작은 오두막살이 집을 짓고 뒤에는 기암괴석이 배경을 하고, 갖가지 숲속에 시냇물 흐르는데 조그마한 오막살이가 있는데. 가서 며칠 살아보고 야~ 극락이 따로 있나 여기가 극락이구나 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여기에 파리모기 날고, 더운물도 안 나오고, 전기도 안 들어오고, 이게 지옥이지 지옥이 따로 있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러니 보살이 정토를 장엄한다고 라도 말할 때 그것은 바깥세계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이것은 제가 앞에서 몇 번 얘기를 했습니다. 원효대사가 마지막 깨달음을 얻을 때. 방울 스님을 불쌍하다고 보고 그 방울스님에 대해서 갖가지 보살로서의 뭐를 베풀었다? 자비를 베풀었다. 이거야. 소위 보살행을 했다 이거야. 그런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방울스님은 불쌍한 중생이 아니었어. 깨달은 부처였단 말이오. 그 깨달은 부처를 누가 원효가 그 모양만보고 곱추라든지, 말하는거라든지, 밥얻어 먹으러 온다든지, 그 허튼짓 한다든지. 이런 모양에 집착해서 불쌍하게 봤다.
어떤 중생은 모양에 집착해서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은 원효대사는 그런 모양을 봤지만은 그 모양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서 갖가지 자비를 베풀었다. 그러니 깨닫고 보니 그것마저도 뭐에 집착한 거다? 모양에 집착한 거다. 상을 지은 거다 이거야. 스스로 한 생각을 일으켜서 불쌍하다는 상을 짓고. 거기에 집착을 해서 또 갖가지 보살행을 했다 이거야. 그러니까 깨닫고 보니 그게 다 누구 망념이다? 나의 망념이다. 이거야. 중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내가 한 생각을 어리석은 마음을 일으키니 그게 바로 뭐다? 중생이다.
내 어리석은 생각이 사라지니까 바로 중생이 사라지는 거다. 그러니 보살은 장엄할 것이 없는 줄을 알고 이 세상을 장엄한다 이거야. 장엄할 바가 없는 줄을 알고 이 세상을 장엄하게 된다. 이거야. 그러니 보살은 그가 배고프니 다만 먹을 것을 주고, 그가 아프니 다만 약을 줄 뿐이다. 그것은 무심히 하늘에서 대지에 떨어지는 비와 같다 이거야. 흘러가는 물을 보고 어떤 사람이 물 좀 먹어도 됩니까? 하니까 그러세요. 했단 말이오. 그러세요. 할 때 내거라고 허락 한 거에요? 아니란 말이오. 그가 물으니 그렇게 하라 그랬단 말이오. 다만 그렇게 인연을 따라서 배풀뿐이다. 그는 물을 먹어도 되느냐? 물으니 그러라 그랬고. 그가 숨을 쉬어서 되느냐 하니까 그러라 그랬다. 그와 똑같이 방에 들어와서 자도 되느냐? 하니까. 그러라 그랬고. 밥을 먹어도 되느냐? 하니까 그러라 그랬단 말이오.
왜 그러냐? 저 태양이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누가 써도 좋다. 누가 쪼여도 좋다 이거야. 이 공기가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누가 숨 쉬어도 좋다 이거야. 이 물이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누가 마셔도 좋다 이거야. 이 음식이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누가 먹어도 좋다 이거야. 이 집이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누가 자도 좋다 이거야. 이것이 필요에 의해서 쓰여지는 거다. 그것이 바로 아무런 분별없이, 아무런 바람 없이, 베풀어지는 세계다. 이것이 바로 보살이 이렇게 보살행을 한다 이 말이에요.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토를 장엄하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不也世尊 何以故 어찌한 까닭이오.
莊嚴佛土者卽非莊嚴 是名莊嚴 불토를 장엄한다라고 하는 것은 곧 장엄이라고 요게 장엄이다라고 하는 어떤 실체가 있어요? 없어요? 없다 이거야. 이게 장엄이다라고 할 어떤 실체가 없다 이거야. 목마른데 물을 마시지 못하는 중생이 있으면 그게 뭐다? 사바세계고. 그때 목마를 때 능히 물을 마실 수 있는 조건이 되면 뭐다? 그게 불토다 이거야. 그러니 보살은 다만 목마른 자가 물을 마신다. 물을 마시도록 내가 해 주는 게 아니다 이거야. 목마른데 물을 마시는 거요 그냥. 다만 여기 물이 있으니 그가 마시게 하는 거다.
시명장엄. 장엄이라고 이름 할 뿐입니다.
是故 이런 까닭으로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수보리야 모든 보살 마하살은
應如是生淸淨心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내느니라. 이렇게 내는 마음을 이름하여 뭐라고 한다? 청정한 마음이라고 하지. 청정한 마음이라는게 또 더러운 마음이 있고 깨끗한 마음이 있다. 이런 의미로 청정한 마음이란 게 아니라. 이렇게 아무런 분별없이 일으키는 그 마음을 이름하여 뭐라고 한다? 청정심이다. 보살은 이렇게 응당히 이 같이 이렇게 청정한 마음을 내어. 이 말이오.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색에 주하여 마음을 내지 아니한다. 그러니까 눈으로 보고 그 빛깔과 모양에 집착을 해서 저놈의 자식 저 나쁜 놈, 너는 임마 밥 먹으면 안 돼. 밥먹으려면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 그러면 내가 좀 줄게. 이렇게 하는 것은 뭐에 집착한 거다? 눈에 보이는 모양과 빛깔에 집착한 거다 이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마음을 내지 아니한다. 이 말이오.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소리나 향기나 맛이나 감촉이나 법에. 즉 자기의 어떤 알음알이에 집착하여 거기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아니한다 이거요. 그러니까 육근경계에 끄달려서 거기에 집착해서 마음을 내는 게 아니다. 이 말이오.
應無所住而生其心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응무소주, 응당히 머문 바 없이. 여기서 머문바 없다 하는 것은 앞에 설명이 되 있죠? 머문바 없다 하는데 뭐에 머문바 없다? 집착함이 없이. 뭐에 집착함이 없다? 색성향미촉법에 집착함이 없이. 이생기심. 그 마음을 내느니라. 그러니까 돌멩이처럼 아무것도 마음을 안내는 그런 게 아니라 마음을 내되 어떻게 한다? 색성향미촉법에 집착하지 아니한다. 색성향미촉법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갖가지 마음을 낸다. 이런 얘기요. 이것을 응무소주이생기심이다. 앞에 똑같은 게 놔었어요?. 이게 마음내는 도리로 나왔지만 앞에 보시를 할 때도 어떻게 하라? 색성향미촉법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를 행하라. 이렇게 이미 나왔죠? 4분에.
須菩提 譬如有人 수보리야 비유를 하여서, 내가 지금 비유를 들어서 말을 한단 말이오. 어떤 사람이 있어서 비유를 들어서 말할 거 같으면. 어떤 사람이 유인. 어떤 사람이 있어서.
身如須彌山王 그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수미산과 같다면 수미산이라는게 뭐에요? 이 세계에서 가장 큰 산을 말하죠. 이 세계의 중심에 있어서 가장 큰 산을 수미산이라 그래. 그 몸뚱이가 수미산과 같아서. 같다면,
於意云何 너 어떻게 생각하느냐?
是身爲大不 그 몸이 크다고 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이 말이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하다면 그 몸이 크다고 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이거요. 크다고 할 수 있어요? 없어요? 크다고 할 수 있죠.
須菩提言甚大世尊 수보리 말하되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何以故 어찌한 까닭이냐 하면
佛說非身是名大身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은 몸이라고 하는 큰 몸이라고 하는 것은. 이게 사실은 생략 돼 있어요. 대신은 곧 뭐다? 비신이다. 큰 몸이라고 하는 것은 큰 몸이라고 할 것이 없을 새. 그 이름이 뭐다? 대신이다. 큰 몸이라 이름한다. 이렇게 논리가 되야 되는 거요. 그럼 중간에 번역할 때 한자 빠지고. 빠졌다 해서 뭐 해석이 안되는건 아니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큰 몸이라고 하는 것은, 대신이라고 하는 것은. 비신, 몸이라 할 것이 없을 새. 시명대신. 그 이름이 큰 몸이다. 즉, 큰 몸이라 불린다. 이런 얘기에요. 다시 똑같은 예로 돌아갑시다. 산이 하나 있는데 동쪽사람은 서산이라 부르고, 서쪽사람은 동산이라고 부른다. 사실은 그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죠. 다만 동쪽 사람은 뭐라고 부르고? 서산이라 부르고, 서쪽 사람은 동산라고 부른다.
그 산을 동산이라고 할 때는 동산이라고 할만한 어떤 실체가 있는 게 아니다, 동산이라고 할 만한 그런 아가 있는 게 아니다. 동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 사실은 없다 이거야. 다만 그 이름이 뭐다? 동산이다. 서산이라고 하지만은 서산이라고 할 것이 없을세. 다만 그 이름이 서산이다. 그러니 부처님이 불러도 동쪽에 가면 그 산을 뭐라고 부를까? 서산이라고 부르고, 서쪽에 가도 그 산을 뭐라고 부를까? 동산이라고 부르겠죠.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저 산을 동산이라고 말하는 것은 동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을세 동산이라 부른다. 동산이라 이름한다.
자~ 여기서 수미산이다 하는 것을 얘기를 잠깐 단어해석을 좀 하면 인도에 어떤 세계관에서는요. 자~ 이 세상의 한가운데에 뭐가 있느냐? 엄청나게 큰 산이 하나 있는데 그 산을 수미산이다 이렇게 불러. 그러면 수미산에다가 왜 뒤에 왕자를 붙였느냐? 수미산은 산들 중에 왕이니까. 그러니까 산 왕이다. 산 가운데 최고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 왕 자는 해석할 필요가 없어. 그냥 산이라고 해석하면 되지. 수미산이 있다.
그 산은 엄청나게 크죠. 그런데 그 산주위로 뭐가 있느냐?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 4개의 섬이 있다. 이거를 사주라 그래. 북쪽에는 구로주가 있고, 남쪽에는 염부주가 있다 이 말이에요. 우리가 사는 데가 어디다? 염부주란 말이오. 그러니까 남염부주가 발음이 잘 못돼서 남선부주가 됐단 말이오. 스님들이 축원할 때 사바세계 남선부주 해동대한민국 동양해동 대한민국 이렇게 해요? 안 해요? 하죠.
남선부주 하지만은 원래 뜻이 뭐다? 남염부주다. 왜 염부주라 하느냐? 염나무 염부나무가 많기 때문에 염부주라고 한다. 염부나무가 언제 나옵니까? 부처님께서 12살 때 농경지에 가서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거를 보고, 농부가 소를 두드려 패는 거를 보고, 나무 밑에 가서 명상을 하면서 이 세상은 왜 이리 불공평할까? 모든 중생이 함께 행복하게 사는 길은 없을까? 이렇게 명상을 할 때 앉아 있었던 그 나무가 뭐라고? 염부나무란 말이오. 아시겠습니까?
남염부주, 북구로주, 동성신주, 서유화주. 이렇게 말한단 말이오. 오하주, 그러면 이렇게 네 개의 섬인데 여기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 뒤로 또 뭐가 있느냐? 산이 있어. 또 뭐가 있냐? 바다가 있고, 또 산이 있고, 또 바다가 있고, 또 산이 있고, 또 바다가 있고. 이렇게 해서 맨 끝이 뭐가 돼야 될까? 바다가 돼야 될까? 산이 돼야 될까? 산이 돼야 되겠지. 그러니 산이 몇 개가 되느냐? 9개가 된다 이 말이오. 그러면 그 사이에 빈 공간이 몇 개에요? 8개가 되니 이것이 구산 팔회다. 아시겠어요?
자~ 그래서 맨 바깥에 있는 산 이름을 뭐라 그러냐? 철위산이다 이렇게 말해. 그러니까 앞으로 철위산 얘기가 나오면 세계의 끝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되요. 이렇게 돼 있고, 그 다음에 이 세계의 저 지하 아래에 뭐가 있냐? 지옥이 있다. 그 다음에 역시 지하에 아귀가 있다. 그 다음에 지표에 축생이 있고, 인간이 있다. 주위 옆에 허공에 뭐가 있느냐? 아수라가 있다. 그리고 이 산 중턱에 뭐가 있느냐? 거기서부터 신들의 세계가 있는데 사왕천이 있다. 꼭대기에 뭐가 있느냐? 도리천이 있다 이거야.
그러니 사왕천하고 도리천은 이 수미산 꼭대기에 땅을 의지해서 있기 때문에 지거천. 땅을 의지해서 있다. 그러나 그 이상부터는 다 모든 천상은 뭐냐? 공거천이다. 그건 다 허공에 있다 이 말이오, 아시겠습니까? 이렇게 돼 있어요. 지금 그걸 얘기하려는 게 핵심이 아니라. 수미산이 뭐냐? 할 때. 수미산이다라는 말이 나오면 산중에 왕이다. 가장 큰 산이다. 어마어마하게 큰 거다. 이런 의미로 쓰인다 이 말이오. 무한이 크다 할 때 그 말 중에 하나로 수미산이 비유가 된다 이 말이오.
어떤 사람의 키가 수미산만하다. 그러면 크다고 할 만해요? 안 해요? 크다고 할 만하죠. 그럴때, 크다 할 때 말이오. 정말 크다 할 만한 성품이 있으면 그건 적어질 수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크다 할 만한 성품이 있는 거는 적어 질 수가 있냐? 없냐? 없단 말이오. 수미산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이 세계 안에 있으니. 이 세계하고 비교하면 작아요? 커요? 작지. 이 세계가 수도 없이 모여있는 삼천대천세계에 비교하면 이 수미산은 커요 작아요? 작아도 그거는 먼지 털보다도 더 적다 이 말이오.
그러면 그것이 정말 크다 할 만한 실체가 있는거라면 이렇게 작다가 될 수가 없단 말이오. 그것은 크다 할 것도 없고, 작다 할 것도 없는 그냥 한 물건이란 말이오. 예를 든다면. 그런데 그것이 크다니 작다니 하는 것은 비교가 돼서 서로 의지해서 연기되어서 무엇은 뭐보다 크다. 무엇은 뭐보다 작다. 이런 말이 생긴단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가 크다 작다하지만 그 크다 작다에는 큰 실체도 작은 실체도 없다 이거요.
이 컵 뚜껑이 크냐? 작으냐? 하면 여기 사람들마다 다 자기 생각 따라 크다는 사람도 있고, 적다는 사람도 있겠죠. 또 이걸 들고 자기가 쓰는 용도에 따라 형편에 따라 같은 사람도 크다 했다가 작다 한단 말이오. 조그마한 간장 종지 뚜껑을 달라니까 이걸 준단 말이오. 턱 덮어보더니 뭐라고 그래요? 야~ 이거 너무 크다 이런단 말이오. 장독 단지 뚜껑 달라는데 이걸 턱~ 주니 쑥~ 들어가니까 뭐요? 야 이건 너무 적다 이런단 말이오.
한 사람이 한 입으로 금방 크다 했다, 금방 작다 한단 말이오. 그럼 컵 뚜껑은 큰 거요? 적은 거요? 이는 크다 할 것도 없고, 적다 할 것도 없다. 이게 존재의 실상이란 말이오. 이것은 크다고 모양을 지을 수도 없고, 적다고 모양을 지을 수도 없다. 이게 바로 모양이 없는 거다. 그러니까 이걸 크다 하지만은 크다고 할 그런 모양 지어질게 없다 이 말이오. 아시겠어요? 크다 할 어떤 실체가 없다 이 말이야. 다만 우리가 모양을 지어서 크다 하고.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것은 비상이줄 알아야 된다. 상이 없는 줄을 알아야 된다. 크다 하지만은 크다 할 것이 없다 이거야. 다만 그 이름이 크다다. 이 말이오.
여기 계시는 보살님이 머리가 허여신데. 보살님은 젊었소? 늙었소? 이러면 난 늙었어요 이래. 그럼 늙었다 할 만한 게 있어요? 없어. 다만 그 이름이 늙었다다. 왜 그럴까? 고등학교 2학년짜리 하고 3학년짜리 놀 때 들어봐라. 고등학교 3학년짜리 애들이 2학년짜리보고 뭐라 그러냐? 야야야야. 우리는 늙었으니까 젊은 너그가 가서 일해라 이런단 말이오. 그런데 저렇게 70된 노인하고 80된 노인하고 한 방에 놀다, 여기 보살님들도 같이 하다가 보면, 아이고 마 노인들은 앉아 쉬세요. 젊은 우리가 나가서 할게요 그래. 70된 노인이 뭐라고? 젊은 우리가 가서 할께요 이런단 말이오.
그러니까 늙었느니 젊었느니 하는 것도 어떤 실체가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인연을 따라서 늙었느니? 젊었느니? 한단 말이오. 그럼 장수 한다 하지만은 장수한다 할 만한 것도 없어. 옛날에는 다~ 50에 죽을 때는 60만 살아도 어때요? 장수했다. 이런단 말이오. 요새는 다 80넘은 사람은 70을 살아도 단명했다 이런단 말이오, 아시겠어요? 제가 뭐한다 그랬어요? 단명의 인연이 있다 그랬죠? 단명의 인연이 있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단명의 인연이 있다 그러면 옛날에 같으면 30~ 40에 죽을 일이지만은 단명의 인연이 있어도 앞으로 100살까지 살지 모르겠죠. 왜? 여러분들이 다 150살 까지 살지 모르니까.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쓰고 있는 갖가지 상을 짓고, 상을 지으면서 거기에 실제 뭔가 실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이것을 반야심경이나 다른 말로 하면 제법이 다공하다 이렇게 되는 거고. 금강경에서는 아직 공이라는 말을 안 쓰고 있죠? 뭐라고 한다? 상이 없다 해서 비상이다 또는 무상이다 이렇게 씁니다. 무자 아니면 비자를 통해서 그것을 부정한다 이 말이오.
자~ 다시 한 번 말씀 드리면 수보리야 비유하건데, 사람이 어떤 사람이 있어서 그 키가 그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몸이 크냐? 크지 않느냐?
수보리언 심대세존. 수보리 말하되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어찌한 까닭이냐 하오면
불설비신 시명대신. 원래대로 하면 뭐라고 해야 된다? 불설대신. 그죠? 부처님께서 큰 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비신, 몸이라 할 것이 없다 한데. 여기 사실은 몸이 크다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시명대신이란 말이오. 아시겠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뭐라고? 대신비대신 시명대신. 이렇게 말해야 된단 말이오. 앞에 논리대로 하면. 앞에도 뭐라고 했다? 장엄불토 즉 비장엄불토 시명 장엄불토. 이런데 그 불토 자는 한 번 쓰고 지웠죠? 장엄불토라는 것은 곧 장엄이라 할 것이 없을세. 그 이름이 장엄이다. 장엄이라 불린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 제법이 공하니까 아무것도 입도 벙긋 못해야 되요? 입 벙긋해도 괜찮아요? 제법이 공하니까 입을 벙긋해도 괜찮죠. 그죠? 너 잘했다. 너 잘못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죠? 그러나 사실은 잘못했다 잘했다 할 것이 없다. 그러면 잘못했다 잘했다 할 것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없느냐? 아니란 말이오. 그러니 인연을 따라서 잘했다 잘못했다 하는 말이 생겨난다. 그런데 우리는 비었다 그러면 아무것도 못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뭔가 있다 이러면 거기 실체가 있다 이렇게 착각을 하게 된다. 이거야. 많은 파도가 일어나지만은 다 어디로부터 일어난다? 바다로부터 일어나죠? 그러니까 파도가 생기고 사라지니까 파도 하나만 보면 정말 생기고 사라진다 하지만은 바다 전체를 보면 생기고 사라짐이 없다. 그러니까 생이 있는 거 같고, 멸이 있는 거 같지만은 사실은 생멸이 없다 이거야.
여러분들의 육신도 여러분들의 생각도 정신도 다 그래.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생기고 사라지는 것 같지만은 크게 보면 생기고 사라질 것도 없어. 생기고 사라짐이 없다 하니까 그냥 고요하다 하니까 그냥 가만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아시겠어요? 원래 고요하니까 일진광풍이 불게 되면 그 인연을 따라서 파도가 일어나고 풍랑이 일어난다 이 말이오. 거품같다 하니까 아무것도 없는게 아니죠? 거품이 돌아가면 어디로 갑니까? 물로 가죠. 그게 거품이 마치 뭐가 있는 것 같이 보면 사실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 이거야. 그러나 거품이 사실은 그것은 텅 비었지만은 텅비었다하는 것을 비유할 때 우리가 거품을 쓰는 거다 이거요.
자~ 여기서 한두 가지를 더 말하면 연등부처님이다. 이런 말이 나왔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이거 제가 부처님 전생 얘기 할 때 말씀을 드렸는데. 그 뒤에 오신 분들이 있으니까.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어디서 오셨느냐? 이런 과거 전생에 대한 얘기가 있다. 이 과거 전생에 대한 얘기를 담아 놓은 책이 뭐냐? 자카타. 한문으로는 본생담 이렇게 말해. 거기는 몇 가지의 전생 얘기가 있느냐? 547가지의 전생얘기가 담겨 있다. 그것보다 더 있었는지 덜 있었는지는 모르지만은 지금까지 내려오는 얘기가 그렇게 있다 이 말이오. 그 얘기 중에서 굳이 순서를 매긴다면 맨 끝 번째 얘기가 뭐냐?
즉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직전에 어디 있었느냐? 그게 도솔천 내용궁에 호명보살로 있었다. 하늘 중에 하늘, 천주 중에 천중천이라 그러죠? 신들 중에 신이다 해서 천중천. 또는 천주, 하늘의 주인으로 있었다. 그걸 버리고 사바세계에 오셨다. 이렇게 말하죠. 그래서 도솔천에 계시는 호명보살이 뿔이 몇 개 달린? 6개 달린 상아를. 상아가 6개짜리인 코끼리를 타고. 백상, 흰 코끼리를 타고 마야부인의 옆구리로 들어왔다 이렇게 말하잖아 그죠?
자~ 그러면 그전에는 어디 있었고? 그 전에는 어디 있었고? 그 전에는 어디 있었느냐? 이렇게 찾아올라 갈 때. 맨 첫 번째 발심을 했을 때, 즉 중생으로서 발심을 해서 보살로 나아간 그 첫 번째 사건이 뭐냐? 그것이 선해동자라는 이름으로 있을 때다 이거야. 아버지도 브라만, 어머니도 브라만, 즉 브라만 가정에서 태어나서 출신성분이 그러니까 옛날 인도식으로 얘기하면 제일 좋았다 이거야. 거기다 부유했고 지위도 있었다. 그런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 수많은 재물과 그 수많은 지위도 세습이 되니까 다 자기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그 젊은이가 살펴봤을 때. 이 재산과 지위를 모으고 얻기 위해서 윗대로 7대조 할아버지로부터 이것을 쌓아와서 지금 큰 부자가 되고 높은 지위를 얻었는데. 돌아가신 7명의 할아버지가 재물도 동전하나도 가져가지를 못했고, 지위도 옷가지 하나 가져가지를 못했다. 그걸 보면서 이것이 참으로 내 것이 아니구나. 이걸 깨달았다 이거야.
우리는 부모님 돌아가시고 재물 남기면 좋아라 하죠. 요즘 또 초상집에 가보면 부잣집일수록 부모님 돌아가시면 장래는 형식이고 끼리끼리 모여가지고 유산을 누가 더 가질까 눈이 굴래굴래굴래 하면서 다투고 그런단 말이오. 그런데 이것을 이것이 참으로 내 것이 되지 못하구나. 이거 정말 허망한 것이구나. 이렇게 깨닫고. 그것을 다 ?에게 얘기해서 가난한 사람에게 전부 다 나눠줘 버렸다 이거야. 그리고 단신으로 숲속에 들어가서 참으로 나는 무엇인가? 무엇이 정말 내가 나며, 내 것이 될 수 있느냐? 이렇게 깊은 명상에 들어가서 일주일 만에 오신통을 얻었다.
오신통이라는게 뭐요? 보지 않아도 보는 천안통, 듣지 않아도 들리는 천이통, 남의 마음을 다 아는 타심통, 몸을 여기저기 나누는 신조통, 그죠? 나와 남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아는 숙명통, 이 다섯 가지를 얻었다. 못 얻은 게 뭐냐 하면 누진통이란 말이오. 모든 번뇌가 사라져 버리는. 이 오심통을 얻었지만은 그러나 번뇌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스승을 찾아서 숲을 나왔다. 이거야. 그래서 어떤 동네에 갔더니 바라문이라고 하는 높은 스승들이 500명이 모여서 토론을 하는데 그 자리에 참여해서 자기의 의문을 물었지만은 그러나 아무도 대답을 못했어.
그런데 그 500명의 스승이 이 젊은이에게 물었을 때 이 젊은이는 다 대답을 했단 말이오. 그래서 스승을 찾아 나섰는데 도리어 그 사람들로부터 스승이 되어 달라는 간청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남의 스승이 되기 위해서 출가를 한 게 아니고, 바로 이 생사로부터 벗어나는 참으로 나를, 내 것을 찾기 위해서 출가를 했다. 이렇게 해서 그것을 거절했다. 그리고 그래서 그들이 주는 금화 한 잎씩 받아서 500냥을 보시를 받아서 결국은 부처님이 출현했다는 얘기를 듣고 왕성으로 나아갔다.
부처님께 올릴 그 꽃을 공양하기 위해서 꽃을 찾았지만은 꽃이 없었어요. 왜? 왕이 다 수매를 해 버렸단 말이오. 그래서 그 꽃을 찾아찾아 다니다가 꽃을 가지고 있는 구리선녀를 찾게 되고, 구리선녀가 꽃을 팔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한 송이에 금화 100냥씩 주고 500냥을 다 주고 꽃 5송이를 구했다. 그때 그 여인이 두 송이를 더 줬죠? 자기 몫으로. 그래서 7송이 꽃을 가지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는데. 그때 구리선녀가 조건이 있었단 말이오. 꽃을 파는 조건이. 그것은 결혼을 하자는 얘기 였는데. 이 생은 안 된다니까. 그러면 이 생이 안 되면 다음 생이라도, 그 다음생이라도 좋다 이렇게 해서 결혼 할 것은 언약하고 꽃을 얻었다 이러죠. 이것이 뭐다? 야소다라 공주의 전생이다 이런 얘기가 있단 말이오.
그러니 7송이 꽃을 공양 올릴 때 그것이 바로 혼인에 대한 서약이다. 이래서 우리가 불교식으로 결혼을 할 때 7송이 꽃을 부처님께 올린다. 이러요. 이렇게 가서 바로 그때의 부처님이 누구냐? 뒤팡카라. 한문으로 옮기면 연등불이란 말이오. 뒤팡카라 붓다님께 가서 꽃을 공양을 올리고. 아까 얘기한데로 길거리에서 부처님이 지나가는 길을 닦았다. 이 젊은이의 이름이 선해동자다. 이 말이오. 아시겠습니까? 그럴 때 바로 그 꽃을 공양을 올렸을 때, 그리고 그 길거리에서 자기를 밟고 지나가도록 했을 때, 부처님이 그의 갸륵한 신심을 보고 뭐라고 그랬냐? 젊은이를 일으켜 세워서 너는 미래, 저 내생에 바로 부처를 이루리라. 그 이름을 석가모니불이라 하리라. 이것이 바로 뭐다? 연등불로부터 수기를 받았다. 이런 내용이란 말이오. 아시겠습니까?
자~ 보살이 한 법도 얻은바가 없다면 보살이 어떻게 이 세계를 장엄하는가? 이 말이오. 그러니까 세계를 장엄한다 하지만은 장엄할 것이 없다. 왜냐? 장엄한다 할 때는 그것은 무엇으로 치장하는 게 아니다. 마음이 어리석으면 이 세계가 다 사바세계고, 마음이 청정하면 이 세계가 다 불국토다 이런 얘기요.
그러면 여러분들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음만 깨끗하면 되겠네요. 이래. 마음만 깨끗하면 되요. 그런데 그 마음이 어떻게 된다? 늘 경계 따라 어떻게 되죠? 영향을 받죠. 그래서 바로 일체가 마음이다. 할 때는 안과 밖을 나눠가지고 바깥은 필요가 없고 다 마음만 닦으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일체가 마음이라는 얘기가 아니죠. 일체가 마음이라는 것은 안팎이 없이 다 마음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것은 안팎 없는 세계를 다 뭐 한다? 깨끗이 한다는 얘기가 된단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예를 들어서 여성해방이다 할 때, 어떻게 하는 게 여성해방이냐? 제도를 바꾸는 것만이 여성해방이냐? 아니다 이 말이오. 제도가 지금 많이 바뀌었단 말이오. 그죠? 갖가지 여러분들의 권리를 제압하던 제도가 많이 바뀌었어요? 안 바뀌었어요? 바뀌었지. 그러나 여러분 속에는 아직도 옛날 그런 제도 하에서 노예적으로 살아온 의지심을 갖고 살아온 그 마음이 업이 그냥 있다 이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진정한 해방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이거야.
그러면 여러분들이 뭘 더 해야 되느냐? 그 의지심을 버려야 된단 말이오. 그 의지심이 바로 중생심이다. 그것을 버려야만이 참다운 해방이라고 말 할 수가 있다. 이런 얘기에요. 그러면 마음만 바꾸면 해방이 되느냐? 마음만 바꾸면 해방이 되지만은 갖가지 제약 속에서는 마음이 또 쉽게 바뀌지를 않죠. 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안팎을 동시에 하는 거다. 안팎이라는 자체를 나누지 않는다면 안팎이 없다 이 말이오.
그런데 우리는 안 밖을 나눠서 안이 먼저냐? 밖이 먼저냐? 자꾸 이렇게 생각을 한다 이거야. 일체가 유심조다. 일체가 다 마음이 짓는 바다. 이런 것은 바로 안팎을 둘로 보지 않는다 이런 얘기요. 제법이 다 한 몸이다. 일체가 다 한 몸이다. 할 때는 둘로 본다는 거요? 하나로 본다는 거요? 하나로 본다는 거요. 이렇게. 이렇게 보살은 국토를 장엄한 거요. 그 바로 이런 마음. 아무런 분별심이 없이 내는 마음.
다시 말하면 저 태양이 누구의 것도 아니고, 저 별이 누구의 것도 아니고, 저 공기가, 저 물이, 저 사람이 누구의 것도 아니다. 이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누가 써도 좋아. 필요에 의해서 쓰여지는 존재들이다. 이런 얘기요. 그걸 여러분들이 사람에까지 한 번 적용을 해 봐요. 사람에게까지. 내 남편이 나하고 둘이 약속을 하고 살았는데. 나하고 살 때는 늘 행복하지 못하고 우울했는데 어디 가서 다른 여자를 하나 만나더니 얼굴이 생기가 돌고, 사람이 아주 열심히 산단 말이오.
그러면 좋은 일이오? 나쁜 일이오? 좋은 일이지. 한 번 생각해 봐봐. 좋은 일이란 말이오. 이 내 남자다 하기 때문에 나쁜 일처럼 생각이 들지. 그건 좋은 일이란 말이오. 사람이 우울하다가 즐겁게 사는 건 좋은 일이잖아. 무기력하게 살다가 생기를 갖고 사는 건 좋은 일이란 말이오. 그러면 그 여자는 그냥 놔 놓고 본다면 좋은 약과 같은 거란 말이오. 그러니까 그냥 두든지.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래도 그렇게는 살기가 싫다 이러면 사람은 자기 또 좋은 데로 해도 되요? 안 돼요? 되죠.
그러면 “너그 둘이 살아라” 하고 자기는 자기길 가면 되지. 어떻게 생각해? 그러니 당신이 저 여자를 좋아하니까 나는 당신이 미워서 같이 못살겠다. 이런 게 아니라. 당신이 좋은 것, 당신이 잘되는 것은 나에게도 뭐다? 큰 행복이다 이거야. 예를 들면 저희 절에 신도님들이 나왔단 말이오, 이렇게. 나와서 법문을 듣는데. 법문을 듣는 내~ 분별망상이 되가지고 깨달음도 얻지도 못하고 공부에 효과도 없어. 그러다가 만약에 다른 절에 가서 법문을 듣고 확~ 깨쳐서 좋다 이러면 그걸 기분 나빠해야 되? 같이 기뻐해야 되? 같이 기뻐해야 된단 말이오.
절에 와서는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다가. 아무리 얘기해도 누리지 못하다가. 어떤 교회 가서 화~ 기쁨을 얻었다 이거야. 인생의 삶의 보람을 느꼈다 이거야. 여기 와서는 자기 이익만 챙기더니, 거기 갔다 와서는 남을 돕기도 하고 보시도 하고 한단 말이오. 그럼 좋은 일이오? 나쁜 일이오? 좋은 일이란 말이오. 그게 내 절 신도다. 내 신도다. 이렇게 생각하면 왜 여기 다니다가 저기 가냐? 왜 불교 했다가 기독교 가냐? 이렇게 되지만은. 그건 좋은 일이잖아.
이 다 일체중생이 다 한 몸이고, 일체중생이 다 내가 구제해야 할 대상이라면 그가 좋아지는 것은 나에게도 좋은 일이다 이거요. 그런데 사촌 논 사면 배 아프다는 식으로 그걸 배 아파할게 뭐가 있느냐? 이거야. 이게 의지심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게 중생심이란 말이오. 그러니 교회도 가고 절에도 나와도 좋은 일이고, 교회 다니면서 절에 나오는 건 좀 안 좋겠다 싶으면 선택을 해라. 이래서 절에 다니든지 교회 다니든지 하면 되겠죠. 인생이 다 그렇지 않을까요?
그런데 기독교 신자한테 그렇게 말하면 절대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죠?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어요? 절에도 가고 교회도 오고. 너 좋다면 그렇게 해라. 이런 게 교회에서는 용납이 되는 일이오? 안 되는 일이오? 안되지. 그런데 여러분들이 볼 때 그거 별문제가 없는 일 아니오? 그러면 여러분들 남편이 그렇게 한다 해서 절대 용납을 못한 일이다가 될 수도 있고, 또 괜찮은 일일 수도 있다.
내가 왜 이 얘기를 하느냐? 이조 시대에는 그런 일이 다 용납이 된 일이에요? 안 된 일이에요? 된 일이다. 지금은 용납이 된 일이오? 안 된 일이오? 안 된 일이다. 그러면 지금 법은 옳고 그때 법은 틀렸느냐? 그게 아니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지금 법은 옳고 그때 법은 틀리고, 그때 법은 옳고 지금 법은 틀린 게 아니라. 법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이거야. 이걸 탁 깨닫고 한 발 물러나게 되면 바로 여러분들은 사람을 만나서 원수 질 일이 없어진다.
그가 오해를 해서 나에게 원결을 품을 수는 있죠. 그러나 나는 이 세상 누구하고도 원수 질 일은 없고, 미워할 일은 없다. 미워하는 것은 다만 내가 어떤 상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다. 이거야. 여러분들 돈을 남한테 빌려주고도 어떻습니까? 빌려줬는데 돈을 안 갚는단 말이오. 가 봤더니 재산도 많이 가지고 있으며 안 갚아요. 그러면 화가 엄청나게 나죠. “요것들이 말이야 놔두고 안 갚는다.” 이래 괘씸해요.
그런데 아무것도 없으면 어때요? 포기를 하죠. 없어서 못 갚으니 어떻게 해요. 그죠? 그런데 여러분들이 정말 돈을 소중히 한다면 놔두고 안 갚아야 기쁘죠? 놔두고 안 갚는 거는 받을 가능성이 있잖아. 없는 거는 받을 가능성이 없잖아. 어떻게 생각해? 놔두고 안 갚는 거는 다만 얼마라도 언제라도 받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잖아. 그러나 없는 거는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단 말이오. 그러니까 놔두고 안 갚는 거는 없어서 못 갚는 것보다 더 기분 나쁠 이유가 없단 말이오.
또 없어서 못 갚는걸 보고 없으니까 받을 길이 없으니까 팔딱팔딱 펄쩍펄쩍 뛰는데. 이 세상의 물건은 본래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아시겠어요? 그런데 없어서 못갚는 거는 죄가 된다? 안 된다? 안 돼. 없어서 못갚는 거는 죄가 안 돼요. 세상의 윤리 도덕적으로는 죄가 될지 몰라도. 진리의 차원에서는 죄가 될 수가 없는 거요. 없는 거는. 있고 안 줄 때 문제가 되지. 여러분들이 아무리 돈을 빌려서 부도가 나도 정말 팬티 하나만 딱 입고 딱 죽어 있으면. 와서 성질 좀 내다 다 그냥 가고, 불쌍해서 돈 좀 보태주고 가지. 그렇게 크게 시달리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빌려서 그 돈을 가지고 꼬불치고 자기는 편하게 살면서 빌려준 사람은 버스 타고 다니는데 자기는 택시 타고 다니고. 이럴 때 사람이 화가 나고 난리잖아. 그죠? 그러니 가만히 살펴보면 없어서 안 갚아도 그대로 좋은 길이 있고, 있어서 안 갚아도 잘 보면 그대로 좋은 길이 있어. 그런데 우리는 없어서 안 갚으면 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펄쩍펄쩍 뛰고, 있어서 안 갚으면 괘씸해서 팔짝팔짝 뛴다 이 말이오.
그러니 생각을 조금 한 발 물러서서 우리가 본다면 미워할 일이 없는 거요. 거긴 다 그럴만한 이치가 있어. 여러분들 주로 얘기 들어보면 말이오. 남자가 여러 남편이 여러 여자를 이렇게 며칠씩 몇 달씩 번갈아 옮겨 가면 다 부인들이 뭐라 그러냐? 한 여자를 딱 놔 놓고 사귀면 그래도 괜찮은데. 자꾸 바꾸는다 이래. 또 한 여자를 딱 정해놓고 남편이 그런 사람을 볼 때는 또 부인들이 뭐라 그래요? 그건 더 괘씸해하지.
그냥 이렇게 바람을 피우는 건 그냥 봐줄 수가 있는데. 이거는 안 된다. 이래. 그러니까 이래도 문제고 저래도 문제요. 또 이게 방송까지 나가서 잘못해가지고 바람피우는 걸 합리화 한다. 이런 얘기가 아니라.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내가 어떻게 대하느냐? 내가 괴롭고 펄쩍펄쩍 뛰면 누구 손해다? 내 손해다. 남편은 바람까지 피우는데. 나는 뭣 때문에 집에 앉아서 괴로워해야 되? 바보 같은 짓이지. 그로부터 괴로움을 받는 거는 어리석은 짓이에요.
왜 내가 인생을 그에게 목을 매달고 이렇게 살 이유가 뭐가 있느냐? 이거야. 그걸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내가 괴롭지가 않으니, 나는 그로부터 고를 받지 않는 거요. 그리고 그런 눈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거냐? 처리를 하면 되는 거요. 그러면 처리하는 주체가 누구한테 있다? 자기한테 있어. 그런데 거기에 목을 매달기 때문에 우리는 그 남자, 그 여자한테 내 행복을 다 뺏기고, 거기에 목매달고 인생을 산다 이거야. 제 얘기가 좀 일리가 있어요?
얼토당토 않는 얘기 같지만은 잘 생각해야 된다. 인생은 절대 자기의 인생의 주인자리를 남에게 주고 살아서는 안 된다. 여러분들이 그 똑똑고 잘나서 바로 그 자기자리를 돈한테 주고, 옷한테 주고, 남편한테 주고, 그 남편 주위에 있는 어떤 여자들한테 주고. 이렇게 해서 인생을 방황하다가 끝낸다 이거야. 왜? 내 인생의 주인자리를 그런데 줄 이유가 뭐가 있느냐? 이거야. 내가 주인이 돼서 돈을 굴리고 내가 주인이 돼서 세상을 굴려야지, 왜 내가 세상에 굴림을 당하느냐? 이거야. 자~ 그러니 법이 공한 줄을 깨쳐야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자유를 얻을 수가 있다. 이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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