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오늘 법문은 불성과 인과, 이런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몸이 있는데요, 우리 자신은 몸인데, 이 몸이 형체가 있고 감각이 있거든요. 형체가 있고 감각이 있다. 그러면 이
몸의 형체가
그대로 불성이고,
이 감각 그 자체가
그대로 불성입니다.
그런데 그 감각 그 자체가
그대로 또 인과고
이 몸의 형체가 또 인과에요.
그래서 우리는
불성과 인과를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과는 뭐냐?
생로병사입니다.
인과라는 게 나고 늙고 병나고 죽고. 이게 다 인과거든요.
그러면 불성은 뭐냐?
불생불멸,
이게 불성이에요.
불생불멸은 불성이고,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건 불성이고. 낫다가 죽는 건 몸인데,
몸은 어디서 오느냐?
그대로 우리 인과의 소현물,
인과가 나타난 형상이다.
이 말이죠. 인과 소현물이다. 그래서 이 몸 자체가 인과덩어리고 불성 덩어리다. 그런 말씀입니다. 인과고 불성이다.
그러면 인과가 뭐냐?
이게 어디서 왔는가?
이게 다 우리 업에서 이루어진 겁니다.
자업 소득이죠.
자기 업으로 얻은 바죠.
그러니까 팔 하나 생긴 거, 얼굴하나 생긴 거, 전부가 자기가 어떻게 지었느냐에 따라서 자기 원인에 따라서 결과가 다 이루어지는 거니까, 그대로 나의 인과죠. 전체가.
그런데 여기엔 다 감각이 있어요. 감각이. 그러면 눈에는 눈의 감각이 있고, 귀에는 귀의 감각이 있고 다 있거든요. 그런데 이게 감각이 전오식이라고 그래서 앞에 다섯 가지는 그게 감각인식입니다. 안이비설신. 그러니까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안이비설신의는 이게 다섯 가지가 감각식이거든요.
그리고 또 이것을 종합하고 판단하고 분석하는 분별식이 있어요. 그것을 의식이라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눈, 보는 것은 눈에 근거가 된다고 그래서 안식은 안근에서 나오고, 이렇게 얘기를 하고 근시. 이식은 이근에서 나오고, 근과 식이 있단 말이죠.
그런데 분별식은 근이 뭐냐? 의근인데 의근은 눈도 아니고, 코도 아니고, 귀도 아니고, 혀도 아니고 뭐죠? 의근은? 분별하는 뿌리기관, 이건 뇌에요, 뇌. 그래서 눈으로 보듯이 뇌로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 그것이 근이거든요. 근입니다. 육근이에요. 우리 몸은 근이에요.
근은 보이는데
식은 안보여요.
눈이 보는데,
눈이 보는 게 아니라
식이 보는 거거든요.
그래서 눈동자는 보이는데
식은 안 보인단 말이에요.
눈동자를 빼서 조사해봐야 물이죠, 물. 귀 조사해봐야 구멍만 뚫려있지 뭐 없어요. 뻥 뚫려서. 식은 안보여요. 코로 냄새 맡을 때 콧구멍 들어가 봐야 없어요. 식이 안 보인다고요. 그래서
색은 보인다고 색이고, 이름 명,
명은 안 보인다고 명이거든요.
그래서 우리 몸을 명색이라고 하거든요.
명이라는 것은 안 보인다는 설이에요. 이름 명. 본래 명이라는 자체가 저녁 석 밑에 입구. 옛날 어른들이 낮에는 보이는데 저녁에 보면 안 보이니까 “당신 누구요?” 이러면 서로 안 보이는데도 서로 통하려고 이름을 하나씩 지어놓은 거예요. 그래서 저녁에 부르도록 만든 게 이름이다. 그래서 저녁 석 밑에 입구. 입구는 부른다는 소리거든요. 보이면 이름이 필요 없어요. 안 보이일 때만 이름이 필요하거든요. 안 보이는 거예요. 이게.
눈이 보는 게 아니라
눈이 뿌리가 되어서
안근이 식을 발동을 해야 보거든요.
그런데 식은 안보여요.
눈동자가 보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안근일 뿐이죠.
안식은 안 보이는 거예요.
귓구멍이 듣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이근일 뿐이에요. 이 혀가 맛보는 게 아니에요. 이건 설근일 뿐이에요. 여기 설식이 그게 느끼는 거거든요. 그러면
이런 근과 식이 다 어디서 나오나요?
순전히 자기 업이 그런 식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내가 평소에 어떤 것을 먹었던지,
어떤 것을 많이 생각했던지 하면
그 먹은 것이 그대로 모이고,
생각한 것이 그대로 모여서
보는 게 달라지고, 듣는 게 달라지고요,
느끼는 게 달라지죠.
그래서 이것을 업식이라고 합니다.
업에 의해서 식이 형성되고,
또 업신, 업에 의해서 몸이 형성 되요. 몸이.
그래서 요즘에 현대의학에서 뇌에 대한 관심이 많은데요, 뇌과학, 그 뇌라는 게 뭐에요? 뇌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눈동자하고 같은 거예요. 눈동자가 보듯이 안식과 같은 것이고, 그 뇌가 의근이 되어서 의식이 나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뇌가 그게 보이는 의식이 아니고, 의식이 나오는 근 일뿐이에요. 의근 일뿐이에요.
귓구멍 들어가 봐도 아무것도 없듯이 뇌 갈라 봐도 아무것도 없죠? 거기에 의식이 있습니까? 생각이 있습니까?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것처럼 불성은 보이지 않아요. 불성은. 뇌를 갈라 봐도 의식이 안보이고, 눈동자를 분해해 봐도 안보이고, 모든 온 몸을 해체를 해봐도 안보여요. 이게 식입니다. 그런데
식과 근이
그대로 다 불성이에요. 불성.
그러면 이 불성은 뭐냐?
전후유무가 없어요.
전후유무. 과거다 현재다 미래다. 삼세가 없어요. 전후유무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있다 없다. 이게 불성입니다. 꼭 우리 의식이 분별하는 건데, 이 의식은 뭘 하는 거냐 그러면, 그런 겁니다. 이게. 분별식인데, 진로망상, 사량분별,
진로_의식은 항상 색성향미촉법, 6진을 쫓아가요. 의식이 하는 역할이. 눈으로 보는 것, 듣는 거, 냄새 맡는 거, 맛보는 거, 느낀 거, 또 과거에 본 거, 현재에 본거, 미래에 본 거. 우리 생각 속에는 보고 들은 게 다 있는데, 보고 들은 게 과거에 본 게 의식에는 그대로 남아있어요. 또 보지 않은 것도 과거 본 것에 견주어서 또 생각을 해요. 이것을 진로라 그럽니다. 티끌 진, 피로할 로. 의식은 항상 이 티끌, 육진에 피로해요. 보고 듣고 한 거 이거 다 피로해요. 그래서 진로라고 그래요.
의식이 늘 보고들은 거 이거 처리하려고 그냥 잠을 못자요. 피로해요. 그래서 항상 티끌에 피로하다. 그래 가지고 허망한 생각, 그게 번뇌인데,
죽지도 않았는데 죽는 거 생각하고,
병도 안 났는데 병드는 거 생각하고,
미움도 안 받았는데 미움 받는 거 생각하고.
죽어보지도 않고 죽은 다음에 뭐가 잘못되면 어쩌나,
이런 게 망상이에요.
이것을 진로망상이라고 그럽니다.
허망한 생각.
늘 육진에 피로해서 망상을 해요.
사량분별, 진로망상, 사량분별_생각으로 이렇게 하면 좋아질까? 나빠질까? 사량하고요, 또 갈라놔요 항상. 의식이 하는 일이. 이게 분별식이거든요. 분별은 가른다는 말이에요. 분별. 나누어서 다르게 한다. 이거거든요. 좋은 거다. 나쁜 거다. 이런 식으로. 천한 거다. 귀한 거다. 뭐 이런. 그래서 항상 자기가 좋다고 한 것은 따라가야 되고, 나쁘다고 한 것은 버려야 되고, 편안할 날이 없어요.
고 밑에는 아집식이 있어요. 그것을 칠식이라고 그러는데, 내가 본거, 내가 생각하는 것은 틀림없이 옳아요. 이게 아집이에요. 내 생각만 내가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도 옳다고 집착을 해요. 그게 아집이에요. 자기가 생각하는 것은 절대 포기할 수가 없어요. 언제 포기가 되냐? 아주 나를 깊이 사랑한다고, 그래야 흐물흐물하게 믿을 때 그때 한 순간만, 내 생각을 접어둬요. 그래서
상대편에게 뼛속까지 감동을 주지 못한 상태에서
그 사람 생각을 그르다고 하면 원수져버려요.
그래서 감동주기 전에 충고하지 마라.
이게 아주 상식이에요. 감동을 푹 주면, 한두 번 자기 생각을 포기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것도 계속하다보면 의심하기 시작해요. 계속하면. 이게 아집입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에요. 똑같이 그래요. 그래서 감동 줄 생각을 해야지 충고할 생각을 하지마라. 잘못한 것을 절대 잘못한다고 그러지 말고요. 성격이상한 사람보고 절대 이상하다는 소리하지 말고. 하여튼
충고하는 것은
그 사람 아집을 건드리는 거라
원수 됩니다.
이별이 문제가 아니라 원수가 되어버려요.
이게 아집이거든요.
그다음 여덟 번째 8식이 있는데 이건 저장식이라. 전부 저장이 됩니다. 어디에 저장되는지, 보아도 안보이니까 이게 발가락에 저장이 되는지, 뇌에만 저장되는 게 아니에요. 뇌의 분별하는 그 뿌리가 될 뿐이지, 이게 어디 저장되는지 형체가 없거든요. 그런데
온몸에 그대로 저장 되요.
이것을 장식이라고 그런단 말이에요.
장식. 저장식이라고.
그래서 이게 다시 나오거든요. 나와서 또 다시 저장을 해요. 나와서 저장하고 나와서 저장하고. 이게 인과가 계속 돌아가는 거죠. 삼세인과. 지금 지은 게 죽어도, 몸은 해체가 되는데, 그 저장식은 해체가 안 되어서 내세에 또 가거든요. 그래서
8식이 거후래선이에요.
갈 때는 8식이 제일 뒤에 가고,
태어날 때는 제일 먼저 태어나요. 내선.
그래서 작주공유
그래서 언제나 주인공이 8식이 되는 거예요.
이게 인과입니다.
우리 생각도 인과고
몸도 인과고,
색심_신체와 의식이 다 인과에요.
내가 어떤 경험을 했느냐에 따라서
보는 시각이 틀리거든요.
이게 인과거든요.
그러면 불성은 뭐냐, 여기에 불생불멸이 있어요. 그게 불성이에요. 그래서 이런 몸만 알고, 불성을 모르는 것은 미혹이라 그럽니다. 미혹, 이게 미혹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 보는 거죠. 망견이죠. 망견.
불성은
정견에 의해서만 나타납니다.
망견으로는 안 나타나요.
그래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여실지,
여실하게 아는 게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은 뭘 만들어내는 게 아니고, 여실, 고 진실과 같이 실상과 같이 안다. 이게 여실지, 이게 깨달음이거든요.
그러면 미혹이라는 것은 뭐냐? 불여실지, 여실하게 알지를 못해요. 불여실지. 요게 미혹과 깨달음이거든요. 그래서 이런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아소현이라. 무아_내가 없는 것을 아는 세계에서 나타는 것이 불성이다. 이렇게 설명해요. 무아에 의해서 나타는 것이 있는데 그게 불성이에요. 세친보살이 불성론을 지었거든요. 거기 첫 번째 나오는 불성은 무아소현이라. 무아에 의해서 나타나요. 그런데 우리는 아집을 가지고 살아가니까, 아집이라는 것이 요게 불여실지거든요. 여실하게 알지 못하는 거예요. 무아라는 게 그게 여실지에요. 여실하게 아는 거거든요.
그러면 같은 죽음인데,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 도인들이 돌아가실 때, 죽음의 공포감이 없어요. 공포감을 안가지고 돌아가시는 분이 있고, 두려운 생각을 가지고 돌아가시는 분이 있거든요. 그럼 그 차이가 뭐냐?
이 몸이 나고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하게 알고 죽으면, 불생불멸의 불성을 알고, 불성의 힘으로 죽으면 불생불멸로 생로병사를 맞이하니까, 고뇌와 공포가 습관적으로 있어도 배고플 때 보고프기도 하고, 추울 때 춥기도 하고, 더울 때 덥기도 하고 그런 감각적으로는 있어도, 의식판단에는 없거든요. 감각은 다 있어요. 감각은 있는데, 의식판단에는 없어요. 두려운 생각이. 그래서
공포감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불생불멸의 불성을 알고 죽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막 두려운 생각을 가지고 죽는 것은 생로병사는 확실히 지금 느끼는데, 불생불멸을 모르니까, 여실지가 안 되는 거죠. 생로병사만 아니까. 이게 전혀 모르는 게 아닙니다. 이게. 미혹이라는 게. 미혹은 모르는 게 아니고 실답게 모르는 거죠. 실답게. 그러니까
죽는 것만 알고
죽지 않는 걸 모르니까
두려움이 막 생기는 거예요. 두려움이.
그래서 이것을 불성이라는 성이 있고, 생로병사라는 몸이 있어요. 그래서 성을 느끼는 사람, 몸만 느끼는 사람이 있는데, 여튼 성과 신이 있다. 불성과 신체가 있다. 불성과 신체, 그러면 불성은 뭐냐? 이게 차인데요, ‘이게 차다.’라는 것은 신체구요, 차 속에는 보리차든, 무슨 차든, 그 이전에 맑은 물이 있죠. 그 맑은 물은 그게 불성이에요. 그런데 차만 알고 맑은 물을 모르면 그게 불여실지에요. 여실하게 모르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차인 동시에 맑은 물이다 하면 이게 여실지거든요.
그래서 생로병사도 알고 불생불멸도 알면 그게 여실지, 여실하게 아는 거죠. 그런데 수행과정에서 불성은 불성대로 그냥 가지고 있는 거예요. 맑은 물은 맑은 물대로 있어요. 없는 게 아니에요. 차속에 그래도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진 차만 알면 그 맑은 물은 모르죠. 그래서 여기에는 차도 있고 맑은 물도 있다. 그래서 맑은 물이 불성이고, 차가 그게 신체입니다. 신체. 그래서 불성과 신체가 있다. 이거에요.
그런데 으흠, 맑은 물이 중심이 되어서, 말하자면 불성이 중심이 되어서 살아가는 분들은 성중신입니다. 그게. 불성 가운데 몸이에요. 성중신. 성, 가운데 중. 성중의 신에요. 이분들은 굉장히 지혜가 있고 여유가 있죠. 성중신이니까. 불생불멸로 생로병사를 자제하는 거예요. 이게 도입니다. 불생불멸로 생로병사를 스스로 자제한다. 이게 성중신이거든요. 그런데 생로병사만 알고 불생불멸을 모르면 신중성이 되는 거예요. 신중성. 몸속에 성이 있는 거죠. 모른다고 그래서 불생불멸이 없어진 거는 아니거든요.
차속에 맑은 물이 있는 것을 모른다고 그래서 맑은 물이 없어지는 건 아니죠. 있는데 차만 아는 거예요. 커피다. 커피만 알지 그 커피가 되기 위해서 맑은 물이 있었는데,
커피마실 때
맑은 물 생각하고
마시는 사람 없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
불생불멸 알고
죽는 사람 없어요.
늙을 때
늙는 거 없는 거 알고
늙는 사람 없어요.
그게 미혹이거든요. 그게 말하자면 신중성이 되는 겁니다. 신중성. 몸속에 불성이 있는 거예요. 신중성.
그러면 불성, 신체, 성중신, 신중성, 4단계가 나왔죠? 마지막 한단계가 있는데요, 그게 뭐냐 하면 성신합도. 불성과 신체가 합해지는 길이 있어요. 합해서 움직이는 세계가 있다고요. 합할 할, 길 도. 성신합도. 그것이 깨달음과 생활이 조화가 되는 높은 단계의 정신행복세계입니다. 요즘에는 힐링의 시대라고 힐링. 전부 힐링이에요. 힐링이 뭐냐 그러면 쉽게 말하면 정신치료죠. 정신치료. 그러면 생각해보세요. 웬놈의 정신 상처를 그렇게 받았냐 이거에요.
상처를 받지 말지,
왜 치료에 중점을 두냐.
이런 나참. 웃기는 사람들 다 있어요. 관광을 가도 힐링 관광, 음식을 먹어도 힐링 식사, 말을 해도 힐링 대화, 상처투성인가 봐요. 그냥. 그거 아주 어리석은 겁니다. 어떻게 되냐? 상처받지 않는 게 현명한 거예요.
상처를 안 받으려면
불성이 중심이 되어야 되요.
불생불멸이 중심이 되어야 된다구요.
그래서 성신합도가 되어야 된다구요. 성신이 합한 세계, 길 도, 어조사도 되고, 그냥 붙여놓는 어조사도 되고, 또 세계라는 것도 되고, 또 영력 이런 것도 되고 뜻이 많거든요. 성신이 합해진 세계에요. 그래서 죽는 거 그대로 불생불멸이구요, 요게 성신합도 거든요. 사는 거 그대로 불생불멸이고. 그게 힐링 없이 사는 세계입니다. 그게 힐링 없이 사는 세계에요. 왜 치료에만 매달리나? 나 그것 참.
왜 치료에 매달리냐 이거에요. 상처받지 않는 법을 배워야지. 상처받지 않는 법을 배워야지요. 그래서
내 몸에 불생불멸이 있는데
모른다 이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 그런 거예요. 며칠 전에 지방에 갔는데, 거기 꽃이 다 폈더라구요, 거기는. 그래서 서울은 아직 들 피었어요. 꽃 속에는 분명히 봄이 있어요. 봄. 봄과 꽃이 있는데, 봄의 세계, 꽃의 세계가 있어요. 그런데 그 꽃을 볼 때, 춘중화, 봄 속에 꽃이라면 피고 지는 거, 그냥 자유롭게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화중춘이라. 꽃 속에 봄으로 된다면 이것은 꽃이 지면 모든 게 다 지는 거로 알거든요. 화중춘이 되어버려요. 그러니까 춘, 화, 춘중화,
봄 속에 꽃, 화중춘,
꽃 속에 봄.
춘화합도.
봄과 꽃이 합하는 길이 있단 말이죠.
그게 도의 세계입니다.
도라는 것은 마지막이거든요. 봄과 꽃이 합해진 세계. 그러니까 거기는 뭐가 있냐? 거기는 봄 속에서 꽃이 나타나는 거니까, 꽃이 피는 것도 봄이고, 꽃이 지는 것도 봄이죠. 그러니까 불성을 보면
태어나는 것도 불성이고,
죽는 것도 불성이라.
그래서 이 삶에 대한 힐링이라는 게 그런 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삶에 대한 분통, 그 분통치료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고상한 말 쓰지 말고, 내가 분통터져 죽겠는데, 이거 좀 구멍 내서 폭발 안하게 하자. 이거거든요. 삶에 대한 분통, 그 거가 있거든요, 실제로. 그러니까 그 봄 속에서 꽃을 보면 그 꽃다운 나이란 말도 있지만, 그 피자마자 그냥 누가 꺾어간다든지, 피자마자 또 꽃샘추위가 와서 우수수 떨어진다든지, 이거 얼마나 분통이 터지겠어요.
그런데 이것을 봄 속에서 보면, 봄의 현상이다, 그 모든 게. 또 꽃이 우수수 질 때, 그 얼마나 허무하겠어요. 그것도 봄의 현상이다. 이게 춘화합도 거든요. 성신합도. 그러니까 우리가 늙은 거, 그대로 불성현상이에요. 몰라서 그럴 뿐이지. 그러니까 모르니까 신중성이 되는 거죠. 몸이 중심이 되고, 불성은 묻혀있다. 그게 미혹이다. 이거죠.
그래서 이런 도를 닦아요. 우리는 생로병사는 확실한데, 불생불멸 모르잖아요. 그것을 믿어야 되요. 첫째. 믿으면 그게 나중에는 불성을 알고, 불성이 중심이 되어서 생로병사를 자제하니까 그것이 성신합도다.
똑같은 죽음인데, 어떤 분은 그냥 아프다고 고함을 지르는데, 아프니까 아프다고 한 거죠. 살려달라고 이런 소리는 안 해요. 또 살려달라고 설사 했다 하더라도 그냥 장난삼아서, 이 아픔을 면하기 위해서 살려달라고 한 거 하고, 정말로 살고 싶어서 “살려주세요” 하는 거, 이게 표현은 같아도 그 말하는 심정은 틀리거든요. 그래서 언제든지 이게
말이 문제가 아니라
말속에 들어있는 심정이 문제요.
심정.
심정이 따라가야지 되지, 그냥 말만 하는 것은 또 의식이 느껴요. 저게 심정으로 하는 말인지, 딴 생각가지고 하는 소리인지 그걸 느끼거든요. 그러니까 죽음도 그래요. 어떤 분들은 불생불멸이 중심이 되어서 생로병사를 맞이하니까, “아이고 아파죽겠다.”고 해도 별거 아니에요. 그런데 정말 불생불멸을 모르고, 죽는 것만 알 때 절실하거든요. 아주 그 공포감, 허무감 좌절감 무섭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진정으로 살려달라고 매달려요.
그것은 미혹 때문에 그렇다. 죽는 것만 느끼고, 거기에 유무와 전후가 없는 불성을 못 느껴서 그렇다. 요 차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과거다 현재다 이거 생각에서 우리 분별에서 나오는 거구요, 있다 없다. 이것도 의식 분별로 나오는 거예요. 요것을 사량분별이라고 그러거든요. 유무, 전후는 다 사량분별의 소각이다. 사량분별로 느끼는 바다. 여기에서 들어가면 불생불멸이라는 게 들어가는데, 그것을 사량분별에서 무념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정입이라 그럽니다. 증득할 정, 들어갈 입. 정입.
내가 사량분별해서
불생불멸로 정입하지 않으면 몰라요.
아무리 설명을 해도 몰라요.
알 수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정입을 해야 되요. 정입하는 그게 수행이거든요. 그래서
수행은 뭘 하는 게 아니고
아는 겁니다.
수행은. 이미 불생불멸로 되어있는 것을 알 뿐이지, 하는 건 아니거든요. 만들어내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수행을 할 때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깨달음이라는 게 안다는 소리에요.
그 아는 데 그냥 아는 게 아니라, 여실하게 안다. 이 소리에요. 그게 깨달음입니다. 여실하게 안다. 그러면 다른 건 뭐냐? 여실하게 알기 위한 다 보조수단이에요. 그것을 조도라고 그러거든요. 도를 깨달음을 돕는 거예요, 조도.
공덕을 많이 짓는 거,
이게 전부 깨달음을 돕는 거예요.
참선이 그게 목적이 아니라
깨달음이 목적이죠.
참선은 깨달음을 돕는 거예요.
염불이 목적이 아니라,
깨달음이 목적이죠.
그래서 한국불교 수행이 간경, 염불, 참선, 주력, 요 4가지가 전통수행인데요, 그럼 다라니 외우는 게 주력인데, “신묘장구대다라니 나모라..” 이거 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깨닫는 게 목적이거든요. 그것은 조도에요, 조도.
복을 지어서 부자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복을 지어서 그것이 도움이 되어서 깨달음으로 간다.
이게 전부가 조도.
그래서 이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날 생자, 원인, 생인이라고 그럽니다. 생인은 만들어 내는 거에요. 그런데 이렇게 아는 것을 수료한다는 알 료, 원인 인. 요인이라고 그럽니다. 요인은 아는 거고, 생인은 만드는 건데요, 지금 우리가 턱, 앉고, 절하고 이러는 거 전부 공덕 짓는 게 전부 생인인데, 이것이 목적이 아니고 그것이 조도가 되어서.
가령 예를 들면 저 잠자는 방, 잘 꾸며놓는데요. 잠자는 방. 숙소. 잘 꾸미는데. 침대 놓고 이불 들이고, 커튼치고 이게 목적이 아니에요. 그 목적은 뭐냐? 자는 거예요. 그럼 그냥 자기 그러냐? 그런 것을 해야 잠을 자도록 돕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 정신상처가 워낙 깊으면 방은 잘 꾸며놨는데 잠을 못자요. 이거 웃기는 거예요. 침실은 좋은데, 잠 한숨도 못자고 그냥 나온단 말이오. 아, 이거 참내.
그전에 통도사 젊은 스님 보면 얼마나 잠을 잘 자는지 종 “땡” 치다가 그냥 자버려서. 그래서 법당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어요. 다음 쳐야, 마무리 종을 쳐야 예불을 하는데 마무리 종을 안쳐. 가보니 거기서 그냥 자는 거요.
정신이 높은 사람은
오다가다 깨닫는 거예요.
그저 말 한마디 들을 때 깨닫고
절한번 할 때 깨닫고
그냥 툭툭 깨달아요.
그런데 업이 두터운 사람은 그냥 참선을 디립다 해도, 절을 그냥 무릎이 부서지게 해도, 이게 인연이 달라서 그렇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그냥 선채로 잠을 쿨쿨 자는데, 어떤 사람은 침실을 잘 꾸며도 눈을 꼬빡 뜨고, 한숨도 못자는 이런 게 있다는 말이죠. 그게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방 꾸미는 게 목적이 아니고, 자는 게 목적이거든요. 자는 거. 그러니까 불교는 그래서 불교라고 그러지, 뭐 딴교라고 안 해요. 다른 건 다 깨달음을 돕는 조도다. 이거거든. 조도. 불=깨달음이다. 이거죠.
그러면 도가 높아지면 어떻게 가시나? 한 가지 사례의 말씀 드리고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 조선조 초에 무학선사라고 계셨잖아요. 그분이 돌아가실 때 제자가 물었어요. “병중에 환유불병자야무하.” 병중에 병을 앓고 있는데, 또 죽는 가운데, 이 말이죠. 또한 병들지 않는 것이 있느냐? 또 죽는 속에, 지금 죽는 병이 나타나니까, 지금 이 죽는 순간에 죽지 않는 것이 있느냐? 이렇게 물었거든요.
그러니까 그 무학스님이 거기에 있는 건강한 젊은 분을 한분 가리켜서 “저 사람이 안 죽는 사람이다.” 이렇게 대답을 했어요. 공안이에요. 이게. 이게 공안이에요. 저 사람이 안 죽는 사람이다. 그렇죠. 나는 죽고 저 사람은 안 죽는다 이거에요. 이게 지혜가 맑아지면 그대로 다 드러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색신은 지수화풍이라. 이 몸이라는 것은 지수화풍이라. 총기마멸이라. 다 없어지는 데로 돌아가는데, 어느 것이 낙이..어떤 것이 참다운 죽지 않는 법신이냐? 늘 하는 말이거든요. 어떤 것이 법신이냐?
그러니까 그 무학스님이 두 팔을 이렇게 올리고, 붙여서 올리고, 이 둘이 하나다. 이랬어요. 둘이 하나다. 이런 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최상의 도, 성신합도. 불성과 몸이 하나로 펼쳐지는 세계. 그 세계에요. 그러면 쉽게 말하면
스님은 지금 돌아가시는데
안 죽는 게 뭐가 있습니까?
어, 저 사람 안 죽지. 그렇잖아요.
그러면 몸은 다 사라지는데
안 사라지는 게 없습니까?
둘이 하나다.
어떤 분이 이런 법문을 했어요. 불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법문인데요, 어떤 분이 옷을 한번 지어서 젊은 스님한테 드리는데, 옷을 안 받아요. 왜 안 받느냐? 나는 이런 옷 말고 어머니 아버지가 준 옷만 가지고도 평생 입고 남는다. 그랬거든요. 그러니 그분이 물었어. 그러면
어머니 아버지가 몸 옷을 주기 전,
부모가 낳기 전에,
부모미생 전에는 어떤 옷을 입었습니까?
이렇게 물었거든. 대답 못했지. 불성을 모르니까 대답할 수가 없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 옷을 입으십시오.” “안 입어요.” “왜 안 입어요?” “난 어머니 아버지가 준 옷만 가지고도 입고 남아요.” “그래요? 그럼 어머니 아버지가 낳기 전에는 무슨 옷을 입었습니까?” 몰랐다. 이거야. 그래서 그게 딱 걸려서 도인한테 찾아갔어요. 고대로 물었어요. “어머니 아버지가 이 몸을 낳기 전에는 무슨 옷을 입었습니까?” 그러니까 그 도인이
여름에는 여름 옷 입고,
겨울에는 겨울 옷 입었지.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이게 도에요. 이게. 이것은 불성을 보고 신체에 자제하는 그 도의 세계를 그대로 표현한 겁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면 그것이 확실하게 가르침을 줬다는 것을 알아요. 우리가 이 불성을 몰라서 지금 “그게 무엇인가요?” 얼떨떨한 거예요. 이 몸 태어나기 전에 무슨 옷 입었느냐 물었는데, 여름에는 여름 옷 입고, 겨울에는 겨울 옷 입었지. 이렇게 대답한단 말이에요. 이게 성신합도의 세계를 나타내는 거예요.
불성, 불생불멸의 불성과 생로병사의 몸이 합해진 세계에서 자유자재하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공안이라.
우리 의식 속에서 망상분별이 사라지기 전에는
바른 뜻을 도저히 알 수가 없어요.
이게요. 그래서 하여튼 좋은 인연 많이 지어서 그 불성을 깨닫는 노력들을 하는 게 상처받고 치유하지 말고, 상처 안 받고 잘 사는 방법입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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