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법문은 무아와 아상, 이런 주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것은 무아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무아. ‘나’라는 것이 없다. 이런 깨달음입니다. 이 무아를 다른 말로 하면 연기라고도 하고, 중도라고도 하고, 해탈이라고도 하는데, **** 무아입니다. ‘나’라는 것이 없다. 이것을 깨들은 거죠. 그러면 ‘나’라는 것이 없는 게 뭐냐? 세계적으로 불교에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는 프랑스에 계시는 월남스님, 틱낫한스님은 무아를 아주 쉽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뭐냐 하면
나에는 나 아닌 존재로 다 채워졌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것은 없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세요. 나는 나 아닌 존재로 모두 채워졌다는 거예요. 이 나에는 첫째 뼈가 있는데, 이 뼈는 흙이라고 하는 존재로 채워진 것이고, 또 혈액이 있는데, 이 혈액은 물이라는 존재로 채워졌고, 지수 아닙니까? 또 우리는 체온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불이라는 존재로 이루어졌고, 숨지면 나가 아닌데 이 호흡은 바람이라는 존재로 이루어져서, 이건 전부 내가 아니죠. 그래서 이런 것을 우리 몸에서 하나하나 드러내고 제거해내면 ‘나’라는 것은 없는 거죠. 그래서 나는 나 아닌 것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나는 없다.
예를 들면 이렇게 또 설명하세요.
나무가 있는데,
나무는 나무 아닌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나무에서 나무 아닌 것, 하나하나 물이라든지, 거기에 여러 가지 요소를 하나하나 들어내면 나무는 없다는 거죠. 이것을 무아라고 합니다. 그 유명한 인도에 왕과 스님의 대화가 있는데요, 미린다왕이라고 하는 왕하고 유명한 나승비구라고 하는 스님하고 대화를 하는 가운데 그런 얘기를 합니다.
수레를 타고 왔다. 분명히 수레를 타고 온 거죠. 그런데 수레는 없는 겁니다. 왜 없느냐? 수레는 수레 아닌 요소들로 채워졌어요. 그래서 그 수레에서 수레 아닌 부품을 하나하나 드러내면 수레는 없습니다. 이게 무아입니다. 그래서
수레가 생겼지만
수레 아닌 요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수레는 생기지 않은 거예요.
이게 불생이에요. 불생.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불생불멸 그러는데, 그것이 무아요 중도입니다. 수레 아닌 요소들로 전부 이렇게 되어서 수레라고 하는 요소가 없이 수레가 된 거에요. 그러니까 수레는 생긴 일이 없다. 수레 아닌 부품이 모여졌을 뿐이다. 이것이 생겨도 생긴 게 아니다. 이거거든요. 또 생겨도 생긴 거 아니기 때문에 그거 하나를 하나 하나 들어내면 없어지는 거예요. 이것이 또 없어져도 없어지는 게 아니다. 이게 불생불멸이죠. 그런데 수레는 갑니다. 수레가 없지만 수레는 갑니다. 이것이 무아윤회입니다.
교리적으로 무아와 윤회를 책도 많이 내고, 토론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토론할 일이 아니에요.
현상 그대로가 무아이면서
동시에 윤회를 하고 있습니다.
수레가 없으면서
수레는 가고 있습니다.
이게 현상이에요.
그래서 옛날 큰 스승님한테 어떤 분이 찾아가서 "불생불멸을 어디가야 만날 수 있습니까?" 이렇게 여쭈어 봤습니다. “이 세상에 불생불멸이 어디 있느냐? 어디 가야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그런 세계를 만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 큰 도인 스님이 뭐라고 그러냐하면, 생로병사 속에서 불생불멸을 만난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바로 이게 깨달음입니다. 생로병사 그 자체가 불생불멸입니다. 그런데 무아를 못 깨달으면 생로병사만 알고 불생불멸을 모릅니다. 그런데 무아를 깨달으면 생로병사 그 자체에서 불생불멸을 보는 거예요. 그 수레 그 자체가 수레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여전히 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세상에 모든 게 이루어졌는데, 그 모든 것은 그 모든 것이 아닌 것으로 이루어졌어요. 그래서 그 모든 것 요소를 하나 하나 제거하면 모든 것은 없는 거거든요. 그런데 중생들은 형상만 알고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상만 보고 성을 못 보기 때문에 그 불생불멸을 모르고 생로병사만 압니다. 그래서 그 생로병사에 매달리고 집착을 해요. 그게 아상입니다.
생로병사에 집착을 하는 게 아상이에요.
그래서 생로병사에서 집착하지 아니하면
그게 무아고,
무아를 바로 알면 해탈이거든요.
이게 참 중요한 거예요. 또 생로병사에 집착하는 게 윤회입니다. 윤회가 집착이 없으면 윤회가 없거든요. 아주 간단한 거죠. 얼음도 그렇습니다. 얼음은 얼음 아닌 요소들로 이루어졌어요. 첫째는 물입니다. 둘째는 추운 공기에요. 그래서 얼음에서 추운 공기를 빼면 물로 돌아가요. 물 제거하면 얼음 없습니다. 이런 거예요. 전부가.
그러니 우리 이 삶이라고 하는 것도 사람이 아닌 요소들로 이루진 게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 속에서 사람이 아닌 요소를 하나 하나 제거하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생긴 거 자체가 불생지이, 이 생긴 것을 떠나서 생기지 않은 것을 찾는 다는 것은 마치 파도를 버리고 물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항상 이
생로병사에서 불생불멸을 바로 아는 것,
그게 무아의 깨달음이죠.
무아의 깨달음을 가지고
나에 대한 집착을 끊으면
그게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그것이 해탈입니다.
그런데 이 나에 대한 집착이 뼛속까지 사무쳐있어요. 뼛속까지. 그래서 이것을 끊는다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무아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도
결국은 아집이 생겨서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나를 중심으로 활동하는데,
이것을 업장이라고 그럽니다. 업장.
업장은 관습적 아집행위에요.
아집행위가 관습적으로 일어나는 거예요.
이게 업장입니다.
그래서 관습적 아집행위가 좀처럼 안 끊어지기 때문에 수행을 깨닫기 전에도 하고, 깨달은 뒤에도 하고, 계속해야 된다. 이렇게 강조를 합니다. 이 아집적, 관습적 아집행위가 이 생각에 사로잡힘은 물론이거니와 아주 온 몸에 퍼져있고, 뼛속까지 골수까지 사무쳐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 제거하려면 생각만 다짐을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이 몸에 까지 수련을 계속하고, 몸도 계속 단련을 해야 되는 것이지, 몸만 해도 안 되고, 생각만 해도 안 되고, 몸과 마음을 같이 합쳐서 닦고 닦고 했을 때 나중에는 저절로 된다. 이것이 무아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길입니다. 그래서 이런 점을 수행이라고 그러는데요, 수행. 그래서
수행은
첫째 무아를 깨닫는 길이고,
무아를 깨달은 다음에도
관습적으로 나에 집착하는 의식과 행위를 다 맑혀서
수정하는 길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려면 이런 거예요. 우리가 ‘나’라는 것이 없는데, ‘나’라는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데, 그것이 무명이거든요. 어리석음. 이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은 잠드는 겁니다. 잠드는 거. 그런데 이 잠 들어서 꿈을 꾸게 되면 그 꿈속에서 아무리 훌륭한 것을 봤다하더라도 꿈입니다. 꿈. 꿈은 꿈꾸기 전에도 없었던 것이고, 꿈에서 깨어나면 또 없는 거예요.
그래서 꿈속에서 부자가 되던, 가난하게 살던, 꿈속에서 출세를 하던, 그렇지 못하던, 아무 의미가 없어요. 꿈에서 깨는 순간에 없어져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꿈에서 어떤 꿈을 꾸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꿈에서 빨리 깨어나는 게 문제입니다.
빨리 깨어나는 게.
그런데 깨어나죠. 어떻게 해서 깨어나느냐? 꿈 자체가 몸과 마음의 피로함으로 꿈을 꾸게 되는데, 몸과 마음이 자연히 피로가 풀리면 저절로 깨어나는 수가 있죠. 이것이 뭐냐 하면
죄업을 적게 짓고,
선업을 자꾸 쌓아 가면
깨달음이 와요.
그래서 잠을 푸욱 자면
잠에서 깨어나고
꿈에서 깨어난 것과 마찬가지에요.
또 한 경우에는 곤하게 꿈을 꾸는 사람이 있는데, 옆에서 “빨리 일어나라.” 이래서 깨우면 깨요. 그것은 훌륭한 선지식을 만나면 선지식의 가르침에 의해서 금방 깨어나는 수가 있거든요. 그것이 一言之下일언지하에 頓忘生死돈망생사라고, 선지식의 한 말씀 끝에 그냥 생사에서 벗어난다. 이런 거죠.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또 있는 거예요. 잠자리에서 잠들어있던 습관이 있어서 이게 꿈에서 깨어났는데, 깨면서 이게 분명히 깨기는 깼는데, 잠들어있던 습관이 있어서, 빨리 미리 일어나서 활동하던 사람하고는 틀린 거예요. 이게 문제인 거예요.
그래서 잠에서 깨고 꿈에서 깼다고 해서 이미 그냥 왔다 갔다 하고, 한참 일하고 움직이던 사람하고는 틀린다. 꼭 깨어나는 중간과정이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약간 눈도 비벼야 되고, 정신도 차려야 되고, 세수도 해야 되고, 옷도 챙겨 입어야 되고 그 과정이 있는 거예요. 이 해탈의 공부도 그와 똑같습니다.
무아를 봤다하더라도
그 무아의 지혜가 완전히 성숙하기 전까지는
늘 챙겨서 마음 챙김, 행위 챙김을 계속 해서,
힘을 자꾸 키워갔을 때,
성숙한 선지식이 되고, 훌륭한 도인이 되는 거죠.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잘못되면 꿈에서 눈은 떴는데,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자꾸 거기서 멈추는 거예요. 잠자리에서. 그러다가 잘못하면 새 잠이 들어버려요. 그럼 또 자요. 그래서 이 도를 공부하는데도 그 조사어록에서 그런 것을 아주 굉장히 지적을 했습니다.
도력이 불능성업력이라.
도력이 업력을 이기지 못한다.
도력이 업력을 못이기는 거예요.
무아는 무아대로 모르는 것은 아닌데,
여전히 아집에 집착을 해서
그 아상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이게 윤회입니다.
그래서 이런 부처님 법을 잘 보고,
자꾸 선업을 짓고, 자꾸 공부를 하고,
마음 챙김을 계속하면
무아를 훤히 보고, 또 무아를 훤히 본 다음에는
나에 대한 집착을 자꾸 덜어서
점점 더 그 무아의 깨달음에서 나오는 힘이 있어요.
그것을 깨달음에 의한 에너지라고 그럽니다.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힘이 있고,
아는 사람은 아는 힘이 있는데요,
그 모르는 힘이 무명 업력. 무명 업에서 나오는 중생의 업력이고,
무아를 아는 힘이 자비입니다.
알면 아는 대로 에너지가 나오고요,
모르면 모르는 대로 에너지가 나오는 거예요.
사랑하면 사랑하는 힘이 나오고,
미워하면 미워하는 힘이 나와요.
그래서 이 중생의 업력이라는 것이 대단한 겁니다.
그런데 이 무아를 알고 나면
무아를 아는 힘이 솟는다. 이게 자비에요.
그래서 이 자비라고 하는 것은
무아의 사랑이고 해탈의 사랑이고, 지혜의 사랑입니다.
그게 자비에요.
그래서 그렇게 될 때까지 자꾸 닦아서
그 아집에서 일어나는 분노,
이 분노는 전부 아집에서 일어납니다.
‘나’라는 것이 없으면 분노가 안 일어나죠.
아집에서 일어나는 근심
아집에서 일어나는 두려움
아집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절망감, 원망스러움.
이런 것을 자꾸 찾아내어서 이것을 없애 내버려야 되요.
이것을 자꾸 덮어놓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자기 마음속에 쌓여있는 아집의 찌꺼기를 자꾸 대청소하고, 하루하루 청소하듯이 털어내고 닦아낼 생각은 안하고, 이것을 자꾸 눌러요. 억눌러요. 그 억누르는 게 뭐냐 하면, 자꾸 웃고 좋은 표정을 자꾸 지으려고 그래요. 사실 분노와 원망과 슬픔이 있는데, 이게 아집인데, 이게 없는 것인 냥 자꾸 사진 찍으면서 자꾸 웃어라, 웃어라 그래요. 김치 있다고. 김치가 어디 있어요? 이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거든요.
예를 들면 방안에 먼지가 가득히 있는데, 그 위에다가 울긋불긋하고 좋은 것만 자꾸 갖다 덮는다고 그게 없어집니까?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도 있고 원망스러움도 있고, 미움도 있고 온갖 것이 있는데, 그 위에다가 자꾸 웃기만 하고, 그것이 마음속에서 드러날까 봐 계속 떠들고, 좋은 얘기하고, 온갖 일을 자꾸 꾸미고, 이러거든요. 이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것은 집안에 쓰지 못하고 나쁜 물건이 있으면 이것을 다 드러내어서 치워서 깨끗하게 해야지, 그것을 그냥 계속 지하실이나 보이지 않는 창고에 쌓아놓기만 하면 나중에 그 집 자체를 못 쓰게 된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우리 자신도 우리 마음속에 어떤 아집적 좋지 못한 생각들이 있는가? 나를 중심으로 한 나쁜 생각, 원망하는 생각, 미워하는 생각, 두려운 생각, 절망스러운 생각, 이런 생각이 있으면
이것을 하나 하나 찾아서
그것을 자꾸 관찰하고 살피고,
그것을 자꾸 쓰다듬으면 없어지는 거예요.
또 하나 일어나면
그 자체를 주시해보면
그게 본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고,
다 바람처럼 먼지처럼
이게 다른 데서 영향을 받은 거거든요.
그거 하나 하나를 자꾸 깨끗하게 정화시키면
나중에는 편안해 지는 거죠. 그게 수행이에요.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하는 거다. 그래서 그것을 자꾸 누르기 위해서 자꾸 좋은 웃는 연습하고, 좋은 표정 짓고, 또 가만히 있으면 좋지 못한 자기감정들이 막 솟아나니까 자꾸 일을 만들어요. 자꾸 일을 꾸며내요. 전화도 한 2~3분해야 될 것을 30분 40분씩 하고. 혼자 자꾸 있으면 안 좋은 감정이 일어나니까 그거 누르려고. 그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쓸데없는 일을 자꾸 만들어 봤댔자, 이미 나에게 있는 그 아집에서 생긴 분노와 원망, 절망, 미움. 이런 것은 안 없어진다. 그러니까 그것을 덮고 피하지 말고, 맞닥뜨려라. 이거죠. 맞닥뜨려. 그래서
어두움이라고 하는 것은
밝은 것이 나타나면 사라지니까,
그런 좋지 않은 감정은
좋은 자비에너지를 일으켜서
그것을 바로 비추게 되면 사라져버린다.
그렇게 되면 편안한 마음이 되는 거죠. 그것이 수련의 공부가 점점 향상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마라. 아버지는 과거에 아들이었다. 그 아버지를 원망만 할 게 아니라, 아버지의 고통도 이해를 해야 되요. 아버지는 과거의 아들 아닙니까? 할아버지의 아들 아니에요? 맞잖아요. 또 아들을 무시하지 마라. 아들은 미래의 아버지다. 맞잖아요. 지금 5살, 3살 난 아들이 미래의 아버지인 거예요. 아버지는 과거의 아들이고. 이렇게 보면
미워할래야 미워할 대상이 없고,
집착할래야 집착할 대상이 없는 게
이게 무아를 깨달은 지혜의 자비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인들 그게 대단한 거냐? 과거의 아들이에요. 아버지는. 또 아들은 그게 별수 없는 미래의 아버지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다 연결되어 있어요. 그래서 다만,
자기중심적 아집을 가지고 보니까,
미움과 원망이 나는 거지,
무아의 지혜로 보면 미워할래야 미워할 대상은 없다.
다 이해를 하게 되고
또 그 이해하는데서 나를 편안하게 하고,
상대편을 편안하게 하는 에너지가 솟아나는데
그게 자비의 활력이라는 거죠.
그 자비의 활력으로 돌아가면
다 이 삶이 넉넉해지고, 즐거워져요.
그래서 이 세상은 혼자 완전한 게 없다.
다 함께 좋은 에너지를 일으켜서
서로 도울 때 완전하게 된다.
이거에요. 그래서 집안에서도 혼자 완전한 게 없다는 거죠. 그런데 그것을 우리나라에서는 가위바위보 철학이라고 그럽니다. 이 참 가위바위보가 묘하다는 거예요. 주먹이 대단한 것 같아도 보를 만나면 꼼짝 못해요. 주먹 혼자 있을 때는 대단하지만, 이게 뭘 만나느냐에 따라서 헛일이에요.
그런데 이 보가 대단한 것 같지만 가위 만나면 꼼짝 못해요. 이게 가위바위보 철학이에요. 이게. 서로 도와야 하는 원리입니다. 딱 균형을 이루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위는 주먹한테 안 되고, 주먹은 보한테 안 되고, 이래서
어떤 것도 완전한 게 없고,
딱 이 3개가 균형을 이루는 거죠.
이게 가위바위보 철학이 엄청난 겁니다.
가위가 보를 만났을 때만 보면 대단 한 거 같은데 주먹이 있는 거예요. 주먹이 있는 줄 모르고 혼자만 하는 게 이게 아집입니다. 또 보가 가위 만났을 때 대단한 거 같은데 보를 만나면 또 꼼짝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 홀로 존재하는 거 같은 것은 아집이고, 그 아집은 가위바위보의 원리를 모르는 거죠. 주먹 혼자 살아가려고 하는 이런 거. 참 재미있어요.
그래서 이런 것을 옛날 대가족제도에서 3대에다 적용을 합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 한대가 같이 살 거든요. 대가족에. 그러데 아버지는 할아버지한테 꼼짝 못해요. 또 손자는 아버지한테 꼼짝 못해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또 손자한테 꼼짝 못해요. 손자가 뭐 해달라하면 할아버지 꼼짝 못합니다. 이게 가위바위보 원리입니다. 꼼짝 못하는 거예요.
이것이 무아고, 주먹 혼자 있는 게 아니에요. 절대 혼자 있는 게 아니에요. 또 함께 공존하는 거죠. 이게 중도고 이게 연기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원리를 잘 깨달아서 잘 실천하면 그게 해탈이고, 그것이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자꾸 의식을 자기중심적으로 밖으로 밖으로만 향해 가면 끝이 없고, 자꾸 그 마음을 가라앉히고 맑혀서, 나쁜 분노, 나쁜 절망은 자꾸 덜어내고, 그 좋은 자비의 에너지를 자꾸 드러내면 그게 불보살이에요.
불보살의 마음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가는 데마다 극락입니다.
우리 분노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가는데 마다 어두움이고요.
좋은 에너지가 일어나는 그 마음,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가는 데마다 극락이거든요.
그래서 제사지낼 때 다 그런 마음이 나옵니다. 慈光照處자광조처에 蓮花出연화출이라. 자비광명이 비추는 곳에 연화세계가 탁 펼쳐진 극락세계가 드러난다. 慧眼觀時혜안관시에 地獄空지옥공이라. 혜안으로 볼 때 지옥은 없다. 그대로인 거예요. 자비심이 부족할 때 지옥이 있는 것이지, 자비심이 있는 곳에는 항상 극락세계가 나타난다는 거죠. 연화출이죠. 연화라는 게 극락세계거든요. 또
지옥이라고 하는 것은
지혜가 모자랄 때 있는 것.
지혜는 무아를 모를 때 있는 거다.
그래서 무아를 깨달은 그 지혜가 있을 때 지옥은 없다. 그래서 혜안관시에 지옥공이라. 만날 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냥 말로만 하고 넘어가니까, 그게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도 그냥 읽기만 하고 치우니까 그게 얼마나 기가 막힌 말씀인지 몰라요.
그래서 이런 경을 자꾸 읽고
우리 마음을 자꾸 돌아봐서
나쁜 마음이 일어나면
그것을 잘 비추어서 보면 그냥 사라지고요.
또 생각을 자꾸 딴 데로 계속 분산시켜서 쫓아가지 말고
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하면
그 나쁜 에너지는 멈추고,
좋은 그 힘이 우리 속에서 나와요.
그러면 거기서 복도 생기고,
또 고통도 없어지고,
그 인연으로 극락세계도 가고
성불도 하고, 중생제도도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믿음을 항상 가지고 정진도 잘하고 좋은 인연을 자꾸 맺어가야 합니다. 오늘 법문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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