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0)

즉문즉설_법륜스님(제354) 욕심을 버린 신앙

Buddhastudy 2010. 8. 31.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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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카톨릭 다니다 불교로 온 거까지는 자기 자유지만은. 불교에 대해서 약간 오해가 있는 거 같애. 廓撤大悟확철대오를 한다. 그런데 그런 말이 있기는 불교 안에 있어요. 그런데 이게 꼭 만병통치약을 구하듯이.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가지고 재산 축적 안하고. 그냥 주식사서 한꺼번에 로또 사가지고 대박을 터뜨리려고 하는 이런 심보로 만약에 불교에 접근한다면 이 생에는 성취를 못할 거요. 아까도 얘기 했지만 욕심을 버려야 되는데. 이렇게 욕심으로 하거나 조급하게 하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이런 얘기요. 부처님 당시에 소나라는 비구가 있었는데 집이 부자였어요. 그런데 부처님 법문 듣고 출가를 해서 수행을 했는데. 열심히 했어.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정진을 했는데. 깨닫지를 못한 거에요. 그래서 다른 사람 다 얼굴이 밝은데 이 비구는 얼굴이 어두워요.

 

그래서 이 비구가 자기가 생각을 해봤어. 내가 게으른 것도 아니고. 이렇게 열심히 용맹정진을 했는데도 내가 못 깨달으니. 나는 이 깨달음과는 인연이 없나 봐. 그러니 이럴 바에야 여기서 허송세월 할게 아니고. 집에 가서 재산도 많고 하니까. 오히려 이 재산을 잘 관리해서 가난한 사람을 돕고 복을 많이 짓고. 다음 생에 오히려 조금 더 어릴 때부터 시작해서 공부를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집으로 갈려고 부처님께 인사를 갔어요. 그러면서 자기 얘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이 소나비구를 부르더니. 너 밖에 있을 때 뭘 잘했니? . 제가 거문고를 잘 탓 습니다. 그래? 그럼 거문고 소리가 잘 날려면 줄을 탱탱하게 조여야 되나? 줄을 느슨하게 해야 되나? 이러니까. 부처님. 너무 조여도 소리가 잘 안 나고. 너무 느슨해도 잘 안 납니다. 적당해야 소리가 잘 납니다. 그래.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이 , 불법도 그렇다. 너무 조급하게 서둘러도 도에 이르지 못하고. 너무 게을러서 느슨해도 어때요? 도에 이르지 못한다. 이러니까 이 사람이 금방 깨달았어요. 그런데 너는 지금 너무 조급하게 서둘렀다 이 말이오. 그래서 그 조급성을 내려놓고 다시 정진을 해 봐라. 그래서 이게 중도라 그래요. 너무 탱탱한 거 극단, 너무 느슨한 거 극단. 적당한 것을 중도다 이렇게 말해요. 그래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조급하게 일확천금을 구하듯이 담박에 이렇게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어릴 때 깨쳤으면 좋아졌지 깨쳤다가 없어져버렸다 말이 안 되요. 깨쳤는데 스승이 없어서 없어져 버렸다. 이런 말도 말이 안 맞는 말이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불법에 대해서 조금 접근을 다시 해보는 게 좋겠다.

 

그러니까 두 가지 길을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하나는 스승을 만나서 내가 다시 한 번 확철대오를 하겠다. 그러면 저의 스승이 아직 살아계십니다. 저의 스승을 찾아가서 한 번 일체를 버리고 닦아서 목숨을 걸고 해서 제가 확철대오 할 테니까. 저를 지도해 주십시오. 하고 목을 탁 갔다 받치듯이 해서 한 번 해 보세요. 그렇게 해서 도전을 정말 해 봐라. 몸은 게으르면서 공부는 안 하면서 서울대학교 갈려고 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온갖 것을 다 누리면서 무슨 확철대오를한다. 그런 허황된 얘기를 하지 않는 게 좋다. 탁 버리고 가서 한 번 도전을 해 봐라 이런 얘기요. 그 다음에 두 번째. 그게 아니고 내가 일생을 살면서 나를 좀 더 깊이 관찰해서 정말 깨달음이 뭔지를 잔잔한 맛을 보려면. 깨달음의 장이라고 하는 정토회 5일짜리 수련이 있으니까. 먼저 거기 가서 자기를 한 번 테스트 해봐라. 자기가 그런 소질이 있는지. 정말 자기가 그렇게 한 번 깨달아 본적이 있는지. 한 번 점검을 먼저 받아보는 게 좋겠다 이런 얘기요.

 

성당에 다니다가 절에 왔다. 절에 다니다가 성당에 갔다. 뭐 그거 여러분들이 볼 때 굉장히 큰일 같지만은. 제가 볼 때는 별로 큰일이 아니에요. 어차피 욕심으로 복을 구하는데. 하느님 찾아 구하나 부처님 찾아 구하나. 그 나물에 그 밥이기 때문에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는 아니다. 이 말이에요. 어떤 법에 의지해서. 예수님의 그런 희생정신 그런 것이 정말 좋아서. ~ 내가 불교 믿다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기독교로 갔다 라든지. 또는 교회 다니면서 믿고 했지마는 그것보다는 어떤 밖으로 어떤 것을 구하기보다는 나의 무지를 깨쳐서 내가 열반에 한 번 이르러봐야 되겠다. 그래서 내가 불교로 한 번 와 봤다던지. 이런 무슨 뚜렷한 게 있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중요하지 않다.

 

두 번째는 그런 뚜렷한 게 있으면. 우선 종교를 바꾸는 게 급선무가 아니고. 그 가르침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게 더 급선무다. 기독교 신자로 있으면서 불법 공부한다고 못 깨닫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확연히 깨쳐 보니까. ~ 그냥 기독교 신자로 있으면서도 이 법을 누릴 수도 있지만은. 그냥 껍데기도 바꾸는 게 낫겠다. 이렇게 해서 바꾸는 건 괜찮아요. 이거 무슨 세력 투쟁하려는 것도 아니잖아요? 지난 크리스마스 때는 저기 성당에 가서 신부님이 미사를 하시고. 크리스마스 날, 주 설교를 제가 했어요. 그럼 내가 크리스마스 날, 주 설교를 내가 하면 불경얘기 하겠어요? 성경 얘기 하겠어요? 성경을 가지고 얘기 해야지. 그렇게 해서 공감대를 서로 형성을 하고. 또 다음에 초파일 날은 또 목사님을 초청해서. 예불하고 하는 건 우리가 하고. 그 다음에 설법은 목사님이 하고 이렇게 한 번 해 왔어요.

 

? 우리 신자들에게도 기독교 목사님이 신부님이 오셔서 마음껏 한 번 얘기해보고. 또 나도 가서 성당이나 교회 가서 마음껏 한 번 얘기해 봤을 때. 이게 소비자에 대한 서비스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재고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된다. 저는 그래야 신앙이 더 깊어진다 이 말이에요. 기독교를 다 이해하고도 불교를 믿어야 뭐다? 신앙이 깊고. 불교를 다 이해하고도 기독교를 가져야 신앙이 더 깊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내 신앙을 갖는 것과 다른 신앙을 인정하는 것과는 마찰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폐쇄적으로 하는 것은 자기 신앙이 굳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교류하면 흔들릴까 봐 겁을 내는 거요. 두려워할게 뭐가 있어요? 그렇게 해서는 열린 공간에서 경쟁적으로 말하더라도 이 길 수가 없고. 공존 할 수도 없는 거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다시 진리가 뭐냐?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랬지 않습니까? 우리가 진리로 접근해 들어가야 된다. 그래서 불교 신자들도 앞으로는 조금도 불법에 귀의하는 쪽으로 가야 됩니다. 불법에. 부다닷마. 붓다의 가르침인 그 법 이치에 귀의하고. 그 이치를 통해서 가피를 입어야 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이 더 깊은 신앙을 가질 수가 있다. 옛날에 선사들이 목숨으로 바꾸는. 목숨을 버려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신앙은. 욕심을 갖고는 죽인다고 그러면 다 그만 둬버려요. 욕심을 버린 신앙을 가질 때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순교라고 하는 게 나온다 이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