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2)
https://youtu.be/BQKgVjjWFbE
가끔 등산가십니까? 산을 좋아합니까? 바다는요? 바다 보면 좋아요? 안 좋아요? 봄에 벚꽃 보면 좋아요? 안 좋아요? 가을의 단풍은요? 산에 가서 주로 어느 산에 많이 가요? 산에 가서 딱~ 보면 “야~ 산 좋구나. 야~ 저 바위 멋있다. 야~ 저 소나무 봐라. 참 멋있다.” 이러면 그때 내가 기분이 좋아요? 산이 기분이 좋아요? 내가 기분이 좋죠. 바닷가 가서 야~ 바다 멋있다. 그러면 바다가 기분이 좋아요? 바다가 기분이 좋아요? 단풍 좋다 할 때도? 꽃 좋다 할 때도? 예. 내가 산을 좋아하면 내가 좋아요.
그런데 내가 어떤 여자를 어떤 사람을 참 좋아해요. “야~ 누구 아무 게 좋다.” 그럴 때도 누가 좋아요? 내가 좋아요? 그 여자 좋아요? 그런데 내가 그 여자를 아무리 좋아하는데도 그 여자가 나한테 눈 한번 안 돌려. 그러면 미워져요? 안 미워져요? 그런데 산에 가서 아무리 내가 산이 좋다 해도 산이 나한테 눈 한번 돌려줬어요? 안 돌려줬어요? 그런데 산은 아무리 가서 산을 좋아해도 내 마음에서 산 미워진 적이 있어요? 없어요? 거의 없죠. 왜 그럴까 이거요.
산은 좋아하면 내가 산은 좋아만 하지 미워한 적은 없고, 그런데 사람은 좋아하면 나중에 미워한단 말이오. 내가 바다에 가서 이렇게 뭐 안 그러면 양어장에 가서 이렇게 물고기 밥 주고 비둘기 모이 주고 많이 줬잖아. 그런데 비둘기가 나한테 와서 인사한 적이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래도 비둘기 미워한 적 없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뭐~ 옆집의 아이가 어렵다 해서 장학금도 주고, 누가 어렵다. 그래도 도와주고 그런데 나중에 고맙다고 인사도 안 하고 그러면 미워집니까? 안 미워집니까? 미워지죠. 왜 이럴까? 이런 문제요. 왜 이럴까?
자. 그럼 또 이리함 보세요. 내가 여기 나가다가, 길을 가다가 남의 발에 탁 걸려 넘어졌을 때는 성나죠? 돌부리에 탁 걸려 넘어졌을 때는? 돌부리에 딱 걸려 넘어졌을 때 돌을 그냥 발로 사정없이 차 버리면 누구 발만 아픕니까? 내 발만 아프죠. 알아요? 내가 몰라요? 내가 안다. 이 말이요. 배를 타고 가다가 옆에 배하고 부딪혀서 내가 물에 빠졌어. 그런데 보니 빈 배요. 그런데 거기 사람이 타고 있으면? 예. 그럼 여기 이렇게 지금 보면 두 가지가 있거든요. 여기에 두 가지 성질이 있어요.
내가 산을 좋아하면 내가 좋다. 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면 내가 좋다. 그러니까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면 누군가를 사랑하면 내가 좋은 거요. 이런 성질이 하나 있어. 마음의 성질이에요. 마음의 성질이 이렇다. 그러니까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라. 좋아해라. 이거에요. 사랑해라. 2_내가 저 여자를 좋아했는데 저 여자가 나를 좋아 안 하니까 미워져. 그럼 미워하면 괴로워요? 안 괴로워요? 괴롭지. 그러니까 좋아하면? 행복하고 미워하면? 괴롭다. 이런 성질이 하나 있는데. 왜 산은 좋아했는데 산은 미워하는 게 안 일어나고. 사람은 좋아하면 미워하는 게 일어나는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다른 예를 들어 보면 이래요. 애기 낳아 키워 보셨죠? 그러면 애기가 낳아서 갓난아기 1주일밖에 안 되고, 한 달밖에 안 되고, 3달밖에 안 되고, 요런 애들은 키울 때 애기가 지가 알아서 하는 게 있어요? 부모가 다 해줘야 돼요? 다해줘야 되지. 젖병도 손에 쥐고 먹여야 되요. 지가 알아서 빨아 먹습니까? 해줘야 되죠. 그렇게 해 줘도 애가 엄마보고 “엄마 고마워요.” 이런 말 해요? 안 해요? 안 하지.
그다음에 2시에 똥 누지? 2시에 똥 누면 남 잘 시간에 똥 눈단 말이야. 아침에 누든지 저녁에 누든지 안 하고. 그다음에 3시에 일어나 울지? 4시에 오줌 누지? 밥상 차려 놓으면 와가지고 그냥 엎어버리지. 그래도 애를 두들겨 패고 애한테 악을 쓰고 이런 부모 있어요? 없어요? 없지. 그냥 애 다칠까 봐 걱정하고 보살피죠. 어쨌든 사람은 사람이지만 요런 애한테는 안 그러잖아요? 그죠?
그런데 애가 3살, 5살 되면 어쨌든 젖병도 지가 쥐고 먹죠. 화장실도 지가 가리죠. 밥상도 애처럼 그렇게는 안 엎잖아. 그죠? 그런데도 엄마가 애하고 싸웁니까? 안 싸웁니까? 싸우죠. 종종 싸웁니까? 내가 보기에 뭐 거의 맨날 싸우다시피 해요. 그럼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갓난아기가 알아서 하는 게 많습니까? 3살짜리가 알아서 하는 게 많습니까? 그런데 왜? 3살짜리는 싸우고 갓난아기는 안 싸우느냐? 예. 아니. 그러니깐 애한테 기대하는 게 있죠. 그러니까 갓난 애기는 애초에 기대를 합니까? 안 합니까? 안 해요. 제로에요. 아무 기대도 안 하니까.
여기는 내가 100% 해주고, 오는 건 하나도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안 생겨. 그런데 5살만 되도 애가 하는 게 제법 있는데도 한 10은 하는데 내가 20을 기대하다 보니까 불평이 생기는 거요. 그러니까 기대하는 마음. 내가 산에 대해서 내가 하는 것만 있지 산보고 뭐 달라는 건 없잖아. 그죠? 그런데 사람에 대해서는 내가 사랑을 하면 니도 나를 뭐해라? 사랑해라. 이렇게 바라는 심리가 생기잖아. 그죠? 그럼 이 바라는 심리가 미움의 원인이 돼요. 이건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니까 내가 사랑했기 때문에 미워지는 게 아니고, 바라기 때문에 미워진다는 거요. 그런데 우리가 상대가 나를 사랑 안 해줘서 내가 미워지는 게 아니고, 내가 상대를 사랑 안 하기 때문에 생기는 괴로움이에요. 내가 사랑할 때는 행복했는데. 사랑을 나도 바라는데 바라는 바가 채워지지 않으니까 미워지는 거거든요. 그러면 여기서 상대가 나를 사랑 안 해 줬다 하는 것도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마는. 내가 안 하더라도 내가 바라지만 않으면 괴로움이 생깁니까? 안 생깁니까? 안 생기죠.
그러니까 내 기준에서 볼 때는 만약에 나에게 바라는 마음이 없다면 어때요? 괴로움은 안 생긴다. 이런 얘기요. 그래서 기쁨을 얻으려면 베풀어야 되고, 그것이 괴로움으로 안 돌아오려면 바라지를 말아야 된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베풀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으면 기쁨이 없고. 베풀되 사랑하되 바라면 그게 기쁨이 나중에 뭐로 바뀌어서 괴로움으로 바뀌어 돌아온다. 그러니까 기쁨만 있지 괴로움으로 돌아오지 않으려면 기쁨이 있기 위해서는 베풀어야 되고, 그것이 괴로움으로 안 돌아오기 위해서는 바라지를 말아야 된다.
그러니까 베푸는 걸 뭐라 그러냐? 보시라 그래. 그러니까 사랑을 베풀든, 재물을 베풀든, 베푸는 거는 보시죠. 그러니까 행복하고 싶으면 뭐해라? 베풀어라. 보시해라. 이 말이오. 그런데 그 베풂이 바라는 마음이 개입되면 그것이 때때로는 뭐로 돌아온다? 다시 불행으로 돌아오니까 그것마저도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뭘 없애라? 바라는 마음을 없애라. 그러니까 베풀어라 가 보시고. 바라는 마음 없이 베풀어라 이걸 뭐라 한다? 무주상 보시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럼 이거는 나를 완벽하게 행복하게 하는 길이다. 그래서 여기 2단계가 있다 이 말이오. 중생은 베풀지 않는 사람, 바라기만 하는 사람. 그러니까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다음에 두 번째 단계의 사람은? 베푸는 사람. 그래서 기쁨이 있지마는 거기는 베풀 때 반드시 보상심리가 따르기 때문에 거기에는 행복도 있지마는 뭐도 있다? 괴로움이 없어지지 않고 뒤따라온다. 그래서 이 괴로움마저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베풀 때 따라붙는 바람을 버려야 된다.
그럼 우리가 바람 없이 어떻게 베풉니까? 하는데 우리는 산을 좋아하거나 꽃을 좋아하거나 할 때 이미 그렇게 하고 있고, 우리는 엄마가 어린아이 키울 때는 애한테 그렇게 하고 있다. 그래서 엄마가 갓난아기에게 향하는 마음이 무주상보시의 마음이고 그것이 보살의 마음이야. 그럼 고 마음이 내가 태어나자마자 엄마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근본 가장 마음의 근본에 보살심이 있다. 그런데 엄마가 그다음부터 조금 지나면 엄마가 애한테 바랍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우리에게 이기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 보살심이 가장 근본으로 심성으로 형성되고 그다음에 이기심이 그다음에 뒤서게 되는 거요.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베풀지. 이익도 없는데 뭣 때문에 벳푸냐? 이렇게 생각하는 게 지금 거사님이 질문하는 거요. 10원 베풀면 20원이 돌아온다더니 30원 베풀면 50원 온다더니. 뭐 대가가 있어야 더 힘을 내서 더 많이 베풀지. 베풀어봤자 아무것도 돌아오는 게 없다면 뭣 때문에 벳푸냐? 그러니까 더 많이 베푼다. 그러니까 있다 해야, “야~ 니 십원 내면 천원 받는다. 천원 내면 만원 받는다 해야 더 열심히 베풀 거 아니냐?” 그 얘기도 맞아요.
그런데 그거는 중생의 욕구를 동원하고 있는 거고. 그러나 그것은 과보가 따른다. 해탈은 안 되고 과보가 따른다. 이 말이오. 즉 행이 잠시 오지만 뒤집어서 또 불행이 또 뒤따라오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만났는데 부부가 싸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자기가 낳은 자식하고 나중에 원수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친구가 만나서 원수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고. 다 그게 어떤 꼭 이기심도 있지마는 근본은 바라는 마음이에요. 꼭 돈만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것이 모든 인간의 갈등 괴로움의 근본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바로 그런 바라는 마음을 없애야 된다. 그러면 바라는 마음, 없다고 해서 예를 들면 부모가 자식한테 아무런 바라는 마음이 없다 해서 자식은 부모한테 은혜를 안 갚고 부모가 “니 갚아라. 갚아라. 갚아라. 갚아라. 갚아라.” 한다고 갚고 그러냐? 그건 아니에요. 갚고 안 갚고는 나하고 관계없이 그 사람의 영역이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바라지 않으면 나한테 괴로움이 없다. 그럼 바라지 않으면 안 돌아오느냐? 그게 아니라는 거요. 안 바라도 돌아올 건 다 돌아오는 거요. 바라도 안 돌아올 건 안 돌아오는 거요.
그런데 바랐는데 안 돌아오면 괴로움이 생기지마는 안 바랬는데 안 돌아오는 아무 문제도 없고 안 바랬는데도 돌아오니까 기쁨이 커진다. 그러니까 우리가 베푸는 행위를 할 때 이 이치까지 깨쳐버리면 그게 돌아오는 전제조건이 없다고 해서 베푸는 행위가 소극적인 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래서 무주상 보시를 해라. 그러면 이 상이라는 건, 상을 물었는데 ‘내가 너 도와줬다.’ 라는 요 생각, 이게 상이라고 그래. ‘내 너 도와줬다.’ 이 말이에요. ‘내 너 도와줬다,’ 이 말은 ‘너 내 맘 알아라,’ 이 말이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내가 니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부모가 애들한테 이 말하는 이유는 ‘그러니까 니 나중에 내 공 알아서 갚아라.’ 이 말이에요. 그런데 부모들 말하면 ‘내 갚으란 얘기 안 했어요.’ 그 말은 안 했어. 그냥 ‘니 키우는 게 고생했다.’ 이 말 하지. 그러고 또 내가 사랑을 하면서 ‘나 당신 사랑해.’ 이런 말 할 때, 무슨 말 듣고 싶어서 자꾸 그런 말 한다? ‘나도 당신 사랑해.’ 이 말 듣고 싶어서 그러잖아. 그죠. 그런데 다섯 번을 해도 입을 꾸욱~ 다물고 말을 안 한단 말이에요. 기분이 나쁘단 말이에요.
이게 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이 눈물의 씨앗이 아니고 사랑을 바라기 때문에 눈물의 씨앗이 되고 미움이 되는 거요. 그래서 우리가 이런 바라는 마음, 상이 우리의 고의 근원이 된다. 그러니까 이거를 내려놔라. 그런데 거사님이 걱정하는 거는 인간의 모든 행위동력이 늘 그 어떤 욕망이 행위동력이잖아. 그죠? 그러다 보니까 만약에 욕망을 놔버리면 행위동력이 없어지지 않습니까? 이게 걱정이에요. 그런데 그건 일단 욕망을 한번 놔 보세요. 놔 보면 행위동력이 더 생기는지, 안 그러면 욕망을 놔버리면 행위동력이 없어지는 건지.
공을 허무하다고 이해하지 않습니까? 거사님도 그와 거의 비슷한 상태에 있는 거요. 그렇게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이런 염려가 있거든요. 집착을 놔버리면 그러면 무관심해지지 않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집착을 놓으면, 그 사람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생깁니다. 지금 이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서 ‘아~’ 걱정하는 거는 자식을 위하는 게 아니고 자기 걱정하는 거요. 일단 잠깐만 보내면 돼. 내일 죽든 모래 죽든 그건 그때 가서 볼일이오.
그런데 집착을 탁 놔버리면 어떠냐? “네가 장가를 가든, 뭘 가든, 네 맘대로 해. 난 모르겠다.” 이게 아니오. 이건 내 뜻대로 안 되니까 반발심리고 집착을 딱 놓으면 그를 지켜보는 거요. 그래서 장가를 가는 게 좋으면 가도록 도와주고, 혼자 사는 게 좋으면 혼자 살도록 도와주고 이렇게 돼요. 다시 한 번 예를 들게요. 여기 어떤 여자 분이 있는데, 내가 너무너무 예쁘고 좋아. 사랑해. 그래서 가서 “나 여보, 당신 사랑해.” 하고 껴안고 뽀뽀하면 그 여자가 기겁을 해요. 그러면 그 여자가 이걸 뭐라 그래요? 성추행이라 그러죠.
그럼 그 여자를 괴롭힌 거죠. 그런데 나는 괴롭히려고 그랬어요? 아니에요. 나는 사랑해서 그랬단 말이오. 그렇기 때문에 “난 널 사랑하는데 당신은 왜 그래.” 이렇다고 “내가 널 사랑하기 때문에 널 껴안고 뽀뽀했다.”고 이 문제가 해결되는 거 아니에요. 상대가 싫으면 그것은 추행이 된다. 내 사랑이 상대를 이해하지 않고 일방통행으로 가면 상대에게는 고통이 됩니다. 폭력이 된다. 폭행이 된다. 이 말이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자녀에 대한 사랑이 자식한테는 굉장한 고통이 되고 감옥이 되는 거요. 그래서 애들이 다 집을 뛰쳐나가는 이유가 그런 데 있다. 이 말이오. 감옥에서 탈출하는 거요. 그러기 때문에 이해 없는 사랑은 폭력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걸 벗어나야 돼. 이런 식으로 하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끼리 계속 고통이 생기는 거요. 그래서 불법을 우리가 알아야 된다. 그래서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을 내야 되는 거요.
그럼 상대를 이해하면 누가 편안합니까? 이해를 못 하면 누가 답답해집니까? 내가 답답해지죠. 그래서 부처님은 남을 위해서 일하라는 거 아니에요. 남을 위하는 마음을 내는 게 누구한테 좋다. 나한테 좋다. 그 사람한테 바라지 마라. 이렇게 얘기하니까 그 사람을 위해서 그러라는 게 아니오. 바라는 마음을 버리면 누구한테 좋다? 나한테 좋아. 그런 것처럼 거사님이 정말 집착을 욕심을 한번 내려놔 보면 내가 무기력해지는지. 더 생기가 돋는지.
집착을 하면 파워가 나오는 거 맞습니다. 그런데 그 파워는 파괴적 파워가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집착을 내려놔 버리면 파워를 중심으로 세상을 안 보는 거요. 관여 안 하는 게 그 사람한테 좋으면 관여 안 하는 거요. 관여하는 게 그 사람한테 좋으면 관여를 하는 거요.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파괴력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라. 그게 비록 힘이 부드럽지마는 그건 항상 이익되게만 작용을 한다.
어떻게 하면 잘 놓아지느냐? 아~ 그냥 하면 돼. 방하착이라는 말이 그냥 놔라. 이 말이오. 그냥 놔라. 놓으려고 애쓴다는 말은 놓고 싶다는 거요? 놓기 싫다는 거요? 놓으려고 애쓴다. 이 말이 놓고 싶다는 거요? 놓기 싫다는 거요? 조금 더. 자~ 내가 이걸 쥐고 “아~ 놔야 되는데. 이거 놔야 되는데. 책상 위에 놔야 되는데. 탁 놔버리면 되는데.” 이 말은 놓고 싶은데 안 놔지는 거요? 놓기 싫은 거요? 예. 노력한다는 말은 벌써 싫다에 사로잡혀 있어요. 싫다고 싸우는 거요. 그러니까 그건 공부의 진척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식의 공부는 공부를 근본 뿌리를 탁 뽑아서 간 게 아니기 때문에 아직도 현상, 드러난 현상, 꿈속에서 노는 거기 때문에 선에서 방하착 이러는 거요. “어떻게 하면 놓습니까? 스님, 이거 어이하면 놓습니까? 어떻게 놔요?” 이래 물으면 뭐라고 한다? “그냥 놔라.” 여기 불덩어리가 하나 있는데 이걸 쥐고 내가 손을 딱 대고 “앗~ 뜨거.” 이랬어요. 어떻게 놨느냐? 그냥 놨다. 뜨거운 줄 알면 놓거든요. 그래서 여기 깨달음이 필요한 거요. 이게 집착인 줄 알면 그냥 놓는 거요.
그런데 문제는 집착인 줄 모르고 그것이 고를 불러오는 줄을 모르기 때문에 이게 불덩어리긴 하지마는 이게 예쁘고 좋으니까 어떻게든 갖고 싶은 생각 때문에 손에 쥐면서 뜨겁다고 하면서 “아이고, 뜨거운 거 어떻게 놓습니까?” 계속 묻는 거는 놓기가 싫은 거요. 그래서 여기 두 가지 길이 있다. 놓는 것만 꼭 좋은 거 아니오. 이게 놓고 싶은데 안 놔지는 게 아니고. 놓기 싫어서 안 놓는 거다. 요 근본을 일단 이해해야 된다. 이해하면 그다음 길은 두 가지요.
놓기 싫으면 어떻게 해라? 쥐고 있어라. 손이 뜨거운데요? 과보요. 과보를 감내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쥐고 싶으면 과보를 감내하면 돼요. 그런데 손을 데는 과보를 받기 싫으면 어떻게 합니까? 놓기 싫어도 어떻게 해야 된다? 놔야 된다. 놓기 싫어도 어떻게 해야 된다고? 놔야 돼. 어떻게가 아니고. 놓기 싫은 생각을 탁 놔야 돼. 싫어도 놔야 돼.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뭐~ 어쩌구저쩌구 이런 얘기 하면 안 돼요. 해야 되면 그냥 해버려야 돼.
싫고 좋고를 자꾸 논하면 안 돼요. 이게 신심명 첫 구절에 至道無難지도무난이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다만 사랑하고 미워하지만 않으면 된다. 사랑하고 미워하지 않는다는 게 좋고 싫고에 메이는 거거든요. 좋고 싫고를 떠나야 된다. 좋고 싫고 마음은 우리에게 늘 일어납니다. 왜? 우리들의 업식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이건 내가 일어나고 싶다 싫다. 이런다고 되는게 아니라. 일어나는데 거기에 매이지 마라. 그런데 우리는 좋으면 갖고 싶고 싫으면 버리고 싶은 데 콱~ 매여있다. 이 말이오.
그래서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져야 된다. 자유롭지 못하죠. 지금. 그래서 우리가 윤회 고를 갖고 있는 거고. 그걸 알면 놓으면 되는데. 우리가 업식에 끄달려. 순간순간 늘 업식에 사로잡히니까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니까 착각을 하는 거요. 이렇게. 놓고 싶은데 못 놓는 것처럼 착각하는 거요. 그래서 깨어 있어라. 쥐고 있으면 아~ 이게 내가 지금 놓기 싫어서 못 놓는 건지. 이걸 알아야 되는데. 난 놓고 싶은데 안 놔진다. 이렇게 하니까 사실이 아니란 말이오.
놓고 싶은데 안 놔지니까 도움을 요청해야지. 그럼 이게 타력이 되는 거요. “아, 내가 놓기 싫어하는구나.” 이걸 알면 놓고 싫고는 누가 하면 된다? 내가 하면 된다. 그래서 순간에 딱 깨어 있어야 된다. 자기 상태를. 그런데 여기서 수행의 환상이 뭐냐? 불성이 어떻고. 뭐 불성을 발견하고. 이러니까 하느님을 믿고 천국 가고 이런 얘기하고 결국 심리적으로 비슷한 관념이 되거든요.
이렇게 환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이름은 자력이라고 그러고, 이름은 수행이라고 하면서도 늘 상, 환영을 가지고 논하기 때문에 바로 행복해지는 길을 못 가고 늘 밖으로 빙빙 돌고 있다. 그래서 선에서 直指人心직지인심 見性成佛견성성불이다. 이러죠. 그 장면의 실상을 바로 딱 꿰뚫어 봐라. 이거야. 됐습니까?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