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부처님께서 탐욕을 내려놓는 제일 전형적인 방법으로 설하신 것이 바로 이런 부정관. 그러니까 혐오스럽게 보게 하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하실 점은, 여기서 혐오스럽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싫어하는 마음하고 틀립니다. 싫어하는 것은 또 다른 번뇌인데, 이 혐오스럽다고 보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이거는. ‘아, 저것은 정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혐오스러운 대상이구나.’ 통찰하는 지혜를 말하는 거에요. 무슨 말씀인지 차이가 이해가 가시죠?
그 다음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성냄인데요. 신심명에도 보면 두 가지를 강조를 하잖아요. 좋아하고 但莫憎愛단막증애하면 뭐라 그랬어요? 단지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만 내지 않으면 洞然明白통연명백이라 그랬단 말이에요. 그죠? 모든 것이 명백하다. 그래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런 마음들이 우리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단 말이에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그런데 아까 탐욕은 어떤 형태라 그랬어요? 맑은 물에 물감을 칠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랬는데, 이 성냄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요. 물 밑에서 불을 때는 거와 같습니다.
물이 있는데, 그 밑에다 불을 떼면, 물이 부글부글 끓으면, 거기에 우리 얼굴이 보이겠어요? 안보인단 말이에요. 그죠? 그러니까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어떤 현상에 대해서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겠죠? 그죠? 있는 그대로. 그래서 이 성냄을 버리는 대표적인 수행방법으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자애수행입니다. 성냄의 속성은 분노, 화, 마음이 어떤 대상을 싫어하는 거잖아요. 그 대상을 싫어하는 대상으로 보는 건데. 그러므로서 우리 마음이 마치 물이 끓듯이 마음이 부글부글 끓는 그런 상태를 이야기하는데, 이거를 바꾸는 거는 아까 말했듯이, 탐욕은 아름다운 것을 부정한 것으로 보는 것처럼, 자애심이라고 하는 것은 그 대상이 싫은 대상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대상으로 바꾸어 봐야 됩니다.
미워하는 대상으로 보는게 아니라, 이 대상을 정말 미워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이해를 하고, 사랑스러운 대상으로 바꾸어 보는 것이 자애명상의 핵심입니다. 성냄도 마찬가지로 성냄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특징이 있어요. 남이 잘 되는 것을 싫어하고, 싫어하는 특징이 있는데, 그러면 이것이 왜 일어나겠어요? 그런 성내는 대상에 대해서 계속 성내는 마음으로 다가가면 계속 커지겠죠. 그죠? 그래서 이거를 벗어나는 방법은 아까 말했듯이 대상을 이런 싫어하는, 또는 미워하는 대상으로 보는게 아니라, 뭐로 봐야 되요? 사랑스러운 대상으로 바꾸어 본다는 거죠. 그렇게 보게 하는 것이 자애수행입니다.
그래서 이 자애라고 하는 것의 의미는 빨리어로 맷다. 자애하고 연민이 합쳐진게 자비심입니다. 우리가 보통 자비심이라고 할 때. 자애라고 하는 것은 남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구요, 연민심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가 고통 받을 때,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마음이다. 두 가지가 아주 중요한 마음에 상태이기 때문에, 불교를 이야기할 때 지혜와 자비다 이렇게 이야기 하잖아요. 그죠? 자비라는 것이 불교에서 굉장히 중요한 그런 마음이죠. 지혜는 좀 이성적이라면 자비는 감성적입니다. 그래서 우리 세상을 대게 윤활유같이 부드럽게 해주는 것이 자애의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애라는 것은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거구요, 존재들이 괴롭기를 바라는게 아니라,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죠. 우리가 화가 나면 어때요? 저 놈이 길거리 가다가 넘어지기를, 재산이 사라지기를, 잠도 편히 못자기를, 이렇게 남이 안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잖아요. 그죠? 그런데 이 자애심이라고 하는 것은 남이 잘 안되기를, 못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행복해 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애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자애명상을 하는 방법은요, 사실 자애수행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려면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냥 제가 간단하게만 설명을 드릴게요.
그 자애명상을 할 때는 일단 처음에 개인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전체로 나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를 들어서 지금 개인에 대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볼 수 있는 그런 마음상태가 되지도 않았는데, 이 자애명상을 할 때 내가 여기 앉아서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이런 자애 수행을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이쪽에 내가 대게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저 사람 빼고 행복하게 해 주세요. 이렇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죠? 누구나 다 행복하게 되야 되잖아요. 그죠? 그래야 자애명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각 개인에게 모든 존재에게 일단 내가 자애심이 일어날 수 있는 수행을 먼저 해야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차별이 없어져야 되요.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누구라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상태가 되야,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이런 식의 자애수행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먼저 개인한테 하는데. 개인에게 자애명상을 할 때도 우선 처음부터 만약에 대게 미워하는 사람에게 자애수행을 하려고 하면 잘 되겠어요? 내가 왜 저 사람을 잘 되게 해야 되. 이런 생각부터 먼저 일어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자애수행을 개인에게 할 때는 우선하기 쉬운 사람부터 먼저 합니다. 순서를. 그래서 마음을 차근차근 적응을 시켜 나가는 거죠.
그래서 제일 쉬운 사람이 누구겠어요? 자기 자신이겠죠? 내가 못되기를 바라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자기가 자기를 못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단 말이죠. 내가 일단 행복하기를 하는 그 마음으로, 정말 내가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을 먼저 일으켜야 되요. 실제로 자애수행을 할 때는 이거로 선정에 들어가는 단계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꼭 선정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진정으로 진심으로 이런 마음이 일어나면은 그거로서도 괜찮습니다. 형식적인게 아니라, 진짜로 이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런 진심이 우러나오는 거라면 꼭 선정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런 수행을 하는 의미가 있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자기 자신한테, 대표적인 구절이 이렇습니다. 이 훌륭한 또는 나 자신이 정말 행복하고 건강하기를,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이렇게 구절은 여러분이 좋아하는 거로 바꾸어도 되요. 모든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모든 육체적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또는 모든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자기가 원하는 구절을 가지고 그렇게 하고. 그래서 대표적인 것은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이 구절로 하는데. 나 자신에 대해 먼저하고.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 존경하는 사람한테는 좀 쉽겠죠. 그죠? 존경하는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쉽게 우러나오잖아요. 이렇게 존경하는 사람에게 먼저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써놓지는 안았는데, 약간 주의해야 될게 처음 할 때는 이성은 안하는게 좋습니다. 이성에 대해서 자애명상을. 나중에 아주 익숙해지고 나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데, 초보자 때에 이성에 대해서 자애명상을 하면은 자애가 아니라 뭐가 되겠어요? 탐욕이 됩니다. 탐욕이. 집착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성보다는 동성, 같은 성의 존재에게 하는게 좋습니다. 존경하는 사람 또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예를 들면 학교 은사스님이라든가, 존경하는 그런 분들이 있겠죠. 그죠? 그런 분들에 대해서 하고.
그 다음에는 아주 좋아하는 사람, 집착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이야기해요. 가족이라든가. 이런 경우에 하고, 그러고 나서 그 다음엔 중립적인 사람을 하는 거죠. 별로 내가 관심이 없는 사람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하고, 그러고 나서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서 자애 명상을 하게 되면 아~ 정말 이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일어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서 마음이 식지 않을 수가 있잖아요. 내가 왜 이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야 되냐고 화가 나고 그럴 때는, 밑에 보면은 이 성을 내려놓는 방법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말씀해 놓으신 것들이 있어요.
그것을 제가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리면, 첫째는 부처님께서 경전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주 건장한 사람이 쇠톱 중에 양쪽에서 두 명이 잡고 앞뒤로 가면서 써는 톱 아시죠? 흥부전에 나오는 톱. 그걸 가지고 양쪽에 건장한 사람이 나를 눕혀놓고 사지를 절단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대해서 화를 내면 그건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아니다. 이렇게 돼 있어요. 마찌마니까야라는 경전에 보면. 그러니까 그거는 뭐냐 하면 그만큼 우리가 나에게 해를 끼친다고 해서, 거기다 화를 낸다는 것이, 서로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걸 이야기 하는 거죠.
그래서 그런 구정을 상기하게 되면 ‘아, 내가 여기서 그런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거는. 내가 누구한테 약간 무시를 당한다거나 이런 것들은 별것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버릴 수 있겠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화를 다스리는 경구를 기억을 해서, 그걸 가지고 자기를 다스리는 방법이 있구요, 또 부처님의 전생을 반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거는 뭐냐 하면은 데바닷다 아시죠? 여러분들 금강경에 보면 인욕선인 이야기 나오죠. 인욕선인이 할절신체시 응생진한이건만. 이렇게 나오는 이야기 있잖아요.
그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부처님 전생이야기인데요. 부처님께서 바라밀을 닦고 계실 때 이었는데, 보살행을 할 때, 그 부처님께서 인욕행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그 나라의 왕이 누구냐 하면 가시국의 왕이 있었어요. 거기 총사령관이 있었어요. 요즘 말로하면 국방부장관정도 되는. 총사령관이 있었는데 그때 왕이 누구였느냐 하면 전생에 대바닷다입니다. 이 사령관이 누구였냐 하면 전생에 사리불존자였어요. 그리고 수행자가 누구였냐 하면 전생에 석가모니부처님입니다.
그래서 이 사령관이 그때 인욕선인이라고 하는 이 분의 명성을 듣고, 궁으로 초청을 합니다. 초청을 해서 이 분의 가르침을 듣고 그랬는데, 어느 날 이 분께서 앉아서 좌선을 하고 있었어요. 조용히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이 왕의 궁녀들이 왕을 시봉을 하다 왕이 잠자는 틈에 나와서 다니다가, 인욕선인이 좌선하는 모습을 보니까, 그 모습을 보는데 너무 거룩한 거에요. 앉아 있는 그 모습 자체가. 그래서 그 분이 앉아 있는 곳에 가서 절을 한 거에요. 경배를 하면서 그 주위에 있었어요. 왕이 깨서 보니까 자기 궁녀가 하나도 없는 거에요.
그래서 어디 갔나 해서 보니까, 웬 이상한 수행자 앞에 가서 절을 하고 있는 거라. 이때 이 왕이 엄청 질투심이 일어났습니다. 엄청 큰 질투심이 일어나서, 그 수행자를 잡아다가 “당신은 뭐를 가르침의 근본으로 삼느냐?” 그러니까 “인욕행을 한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손가락을 하나 자릅니다. “잘 참아봐라” 이러면서. 그런데 그때 그렇게 정말 이유 없이 내가 그 고통을 받는데도 부처님께서 단 한순간도 화를 안냈다고 그러잖아요. 그게 금강경에 나오는 인욕선인이야기입니다.
그런 거를 반조를 해보면 그런 거에 비하면 내가 누구한테 욕 좀 얻어먹고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거죠. 전생에 부처님의 그런걸 보고. 또 경전에 보면 어떤 이야기가 나오냐 하면요. 여러분들 옆에 있는 사람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전생에 자기 부모나 형제, 친척이 아닌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여기 있는 분들이 대부분 우리하고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 분들이, 대부분 전생에 친인척의 관계였다는 거죠. 전생에 우리 부모님이었을 수도 있고, 어머니였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는 거에요. 그 만큼.
그러니까 나한테 지금 화를 내게 한 사람이 어떻게 보면 전생에 우리 어머니였을 수도 있고, 내 아들이었을 수도 있다 이거죠. 그렇게 반조를 하면 ‘아, 그런 것은 내가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겠다.’ 마음을 변화를 시킬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바라보는 방법도 있고요, 또 이런 방법도 있습니다. 어떤 스님은 자기가 어느 절에 갔는데 그 절에 갈 때마다 자꾸 쫓아내는 거에요. 사람을. 그렇게 구박을 당했는데, 오히려 그 사람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아주 귀중한 바루, 바루 이거를 공양하므로서 그 화를 극복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건 뭐겠어요? 미운사람에게 떡 하나 더 주듯이, 그 사람에게 오히려 보시를 행하므로서, 내 마음에 그런 분노를 가라앉히는 그런 방법도 일종에 이 방법이라는 거죠. 그렇게 하면 화를 버리는데 도움이 되고요, 조금 더 수준 높게 반조를 하게 되면 어떤게 있느냐 하면, 자기 스스로가 우리가 짓는 업는 자기가 짓는 거잖아요. 남이 짓는게 아니고. 그래서 남이 나에게 화를 나게 했을 때, 사실 부처님께서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밥상은 줬어요. 그럼 밥상을 받으면 그 밥상은 누구 겁니까? 받은 사람 거죠. 그죠?
만약에 그 밥상을 받지 않으면? 그건 아직까진 내거라는 거죠. 그래서 화도 마찬가지라는 거에요.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화를 나게 했을 때, 그 화를 받으면 그 화는 내거지만, 화를 받지 않으면 그건 그 사람 거라는 거죠. 그래서 그 화를 낸 사람은 그 사람이 무슨 업을 지었어요? 불 선업을 지었잖아요. 화를 내는 그런 악업을 지었는데. 그걸 내가 받으면 나도 또 불 선업을 짓는게 되잖아요. 나도 화를 내는게 되잖아요. 자업자득이기 때문에, 내가 구태여 화를 내고 복수를 하려고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지은 그 과보는 받게 된다는 거에요. 구태여 앙갚음을 할 필요가 없다. 자업자득이다. 업의 주인은 나다. 이걸 앎으로서 거기에 대해서 관여를 하지 않는 방법. 이런 것도 있습니다.
좀 더 고차원적인 방법은 지혜가 아주 성숙하게 되면, 내가 화를 내려고 하는 그 대상이 알고 보니까 오온이에요. 오온이고, 또 이 오온은 가까이 공해요. 실체가 없어요. 무상고무아란 말이에요. 실체도 없는 것에 대해서 내가 무슨 화를 낼 것인가? 화를 내려면 화를 낼 대상이 있어야 되는데 화를 낼 대상이 없다는 거죠. 이렇게 무아임을, 또는 공함을 관찰해서, 화를 버리는 것은 아주 수준 높은 방법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런 제가 말씀드린 몇 가지 방법을 가지고 화가 일어났을 때, 그 상황에 맞게 적절히 활용을 해서 화를 가라앉히면, 아까 말했듯이 자기 자신이나 남이나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
지금 자신. 좋아하는 사람. 중립적인 사람. 또는 싫어하는 사람의 경계가 전혀 없이, 구분 없이 사람들을 잘되기를 바라는 이런 마음을 일으킬 수가 있잖아요. 그죠? 그렇게 하면, 이건 경계허물기라고 그럽니다. 이제는 나와 나의 경계가 없어지는 거에요. 내가 잘되기를 바라는 만큼 남도 잘되기를 바란다는 거죠. 이런 상태의 마음이 형성이 되면, 그때는 예를 들어서 같이 수행을 하기 전에 앉아서 잠시 참선하잖아요. 그럴 때, 여기 참석한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하는 이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수 있다는 거죠. 이 속에 누구하나도 예외 없이.
그게 모든 존재에게 자애를 보낼 수 있는, 자애명상을 할 수 있는, 마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물에 빠졌는데, 그 목숨을 구하듯이. 그런 사람들을 마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처럼 생각하면서 이런 자애명상을 할 수 있다는 거죠. 이게 개인, 한 개인으로부터, 각 개인에. 그러니까 차별 없이 경계를 허문다음에, 모든 존재에게 해나가는 그런 방식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가 수행을 하게 되면 이런 자애명상의 이익이 뭔가? 그거를 잠깐 살펴보면요. 이런 자애명상은 성이, 사실 욕심이라는 것은 포장이 되가지고, 탐욕, 감각적 욕망이라는 건 행복으로 비치잖아요. 우리가 참 속기가 쉬운데.
그런데 화라는 것은 일어나는 그 순간부터 괴롭잖아요. 그죠? 화라는 것은 일어나는 일마다 괴롭습니다. 자기 자신부터가 괴로워요. 그래서 화가 심하면 밤에 잠도 못자고, 몸도 바짝바짝 마르고, 항상 가슴이 답답하고. 이런 병이 생기기 쉬운데. 이런 자애명상을 많이 한 사람에게는 일단 잠을 편안하게 자고, 편안하게 깹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없으면, 미워하는 대상이 없으면, 일단 자기 마음이 가장 편안해 지죠. 그리고 인자무적이라는 말이 있죠? 그죠? 적이 없습니다. 남이 항상 잘 되기를 바라는데 왜 적이 생기겠어요? 어디가도 남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니까 적이 없어지고요,
그리고 우리가 삼매에 드는 거는 어떤 마음이 삼매에 든다, 그랬어요? 행복한 마음. 행복해야 삼매에 들 수 있는데, 이 자애명상을 많이 하다보면 우리 마음이 계속 밝고 행복해 지거든요. 그러면 이런 마음상태로 수행을 하면 수행도 훨씬 잘된다 이거죠. 그게 삼매에도 잘 들고. 그리고 여러분 자애명상을 많이 하고 인자한 사람들 보면 얼굴이 어때요? 되게 편안하고 밝아 보이죠, 그죠? 아주 후덕한 얼굴이 되잖아요. 그렇게 안색이 밝아지는 또 이익이 있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는 혼란스럽게, 어리석게 죽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죽을 수 있다, 이거죠.
이렇게 자애명상은 우리가 단순히 이런 수행을 떠나서 화라는 것은 우리 삶에 고통을 일으키잖아요. 그래서 이런 자애명상을 잘 활용을 하면, 어떤 사람들을 볼 때, 설사 나에게 화를 내게 한다 하더라도 그 화를 잘 다스리면 여러분들이 이 수행하는데도 유익하고, 또 삶을 사는데도 훨씬 행복하게 살 수가 있겠죠. 그죠? 오늘은 탐욕과 성냄이라고 하는 이것을. 앞으로 수행을 하시다 보면 무명과 어리석음과 다섯 가지 장애요소, 이 두 가지와 계속 부딪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럴 때 어리석음은 이런 전도몽상을 버리는 거에요. 영원하지 않고, 무상하고, 고고, 괴로움인 것을 영원하다고 보거나, 행복이라고 보거나. 이런 왜곡된 또는 전도된 생각을 버리는 쪽으로 수행을 하면 되는 것이고, 이런 다섯 가지 장애요소가 일어날 때는 오늘 말씀드린 이걸 기본으로 해서, 탐욕이 일어날 때는 이렇게 내려놓고, 성냄이 일어날 때는 이렇게 내려놓고, 그렇게 하다보면 다섯 가지 장애요소가 서서히 약해지고 그러면 수행하기가 훨씬 편해집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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