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올라마음학교

[현대선14] 삶은 스스로 살아있다 / 피올라 현대선 4강 "삶은 스스로 살아있다" 1회

Buddhastudy 2024. 7. 9. 19:01

 

 

오늘 이렇게 처음 오신 분도 계시고

또 낯익은 얼굴도 계시고

다시 여러분들하고 한 달에 한 번 뵙는 거지만

이렇게 명상강좌를 하게 돼서

아주 반갑게 생각합니다.

 

특히 오늘은 식스존을 졸업하신 분들이 몇 분 계셔서

일부러 주제를

그런 분들은 다음 공부가 잘 빨리 연결되도록

그렇게 주제를 잡았어요.

그게 삶은 스스로 살아있다이렇게 잡았습니다.

 

대승불교가 소승불교하고 다른 점은

소승불교는 식스존을 의지해서 공부를 시켜요.

수행에 몇 단계가 있고

그래서 사다함, 수다원, 아라한 이런 단계들이 있고

또 어느 단계는 어떻고

12연기가 어떻고, 12연기를 자기의 일거수일투족을 12연기로 분석하고

이런 것들이

어쨌든 거기는 정말 출가 안 하고 공부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복잡합니다.

 

그런데 대승불교가 중국을 통하면서 불교의 핵심만

특히 육조 혜능을 통해서

이렇게 이게 거듭나면서 승화되면서

그냥 직지인심이 돼버렸어요.

 

그러니까 직지, 바로 가르친다.

인심 이 자리를

인심이라고 하는 게 사람 마음이 아니고

진리의 자리를 뜻하는 거예요.

이 자리를 바로 가르친다

네가 알아듣거나 말거나

 

이게 대승불교의 어떻게 보면 정말 그

화룡점정의 그 부분이죠.

 

그래서 인연이 닿는 사람은 그게 활짝 깨나는 거고

인연이 안 닿는 사람은 그냥 평생 가도록 공부만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 피올라 마음학교는

대승불교가 다 좋은데

조사선 여래선 조사선 이런 맥을 타고 오면서

현대에 와서 또다시 일정한 어떤 상을 갖게 됐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조사선이나 여래선이나 화두 참선이나

이런 것들을 가만히 여러분들이 해보면

그것들 나름대로

눈이 깨어난 사람 입장에서 보면 틀린 말은 아닌데

아직 깨어나지 못한 사람이 볼 때는

또다시 소승불교처럼 말이 많고 분별이 많은 쪽으로 떨어져 버리는 거예요.

설명을 많이 하다 보니까.

 

여러분이 팔만대장경을 보면

팔만대장경 그거 평생 다 읽겠어요?

그런데 설사 다 읽었다고 합시다

다 읽었다고 해서 깨닫겠어요?

안 되잖아요.

 

근데 대승불교가 다시 소승을 비판하면서

직지인심으로 시작한 대승불교가 이제는 다시

그런 것을 자기 살림으로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또 일부 화두선이나 조사선 하는 데서는

걸핏하면 팔방을 하고, 막 사람을 다그치고 하는데

이건 또 너무 한마디로

현대인이 볼 때는 교양 머리가 없어

 

그래서 현대인한테 맞는

500, 천년 전에 그런 그 문화를 그대로 답습하지 말고

현대인에 맞는 방법에 공부를 하자 해서

우리 피올라 마음학교는 그 현대선이라는 기치하에

현대 생활 속에서 깨닫는 그런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할 땐 아주 조근조근 설명해에요.

저희 사이트를 보세요.

제가 얼마나 말이 많아요, 정말 쓸데없이 말이 많잖아요.

그것도 팔만대장경이야.

 

그런데 행여나 그것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그렇게 말이 많은 거예요.

그런데 동시에 저희가 이런 걸 자주 찍고 양산하고 있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저도 직업이 있고

여기 계신 여러분들도 다 각자 생업이 있거나 할 애들이 다 있어요.

여기 전업 수행자는 없어요. 그렇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 삶을 살면서

일상 속에서 깨어나는 방법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거를 우리가 자기가 한 번 집중해서 따라오기만 하면은

자기 할 일 다 하면서도 깨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거죠.

 

오늘 그런 우리 학교에 그 정신을 살려서

과연 이 자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아주 알기 쉽게

식스존을 졸업하신 분들한테 맞는 버전으로

오늘 제목을 다룬 것이 뭐냐 하면

삶은 스스로 살아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이

잠을 자기가 자는 거예요? 잠이 와서 자는 거예요?

 

우리는 자기가 잔다고 생각하지만

여러분이 잠이 안 오면 못 자요.

잠이 와서 나를 잠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거예요.

내가 아 자야 되겠다

지금 눈이 말똥거리는데 자겠다고 해서 잘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안 돼요. 그거

 

또 아침에

아우 나 눈 안 뜰 거야. 난 앞으로 한 36시간 잘 거야한다고 해도

때가 되면 눈이 떠져요. 안 그렇습니까?

필요한 만큼 자꾸 눈이 떠집니다.

 

그러니까 내가 잠을 자는 게 아니고

 

잠이 나를 재워주고 있어요.

또 여러분이 아침 식사 드신 거

자기가 소화시키는 게 아니고

소화 당해 지고 있어요.

소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난 오늘 요 한 끼 갖고 버틸 거야해봤자

저녁 때 되면 배고프다고 밥 달라고 난리 치는 놈이

이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의지하고 상관없이

삶은 그냥 스스로

어떤 이 삶이 자기를 꾸려가고 있는데

우리는 내 생각이, 내 몸이

이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내 생각으로

우리가 나라고 하는, 일반인들의 나라고 하는 것을 분석해 보면

생각으로 하는 나라는 게 있고

그다음에 느낌으로 이 몸에 대한 느낌

또 때로 어떤 그 감정이, 희로애락의 감정이 일어나는

이런 것들을 막 이렇게 합쳐서

나라고 얼렁뚱땅 만들어서 조합을 시켜놓은 거예요.

 

마치 수레의 비유를 치자면

수레에는 바퀴도 있고, 몸도 있고, 손잡이도 있고 뭐 이러잖아요.

근데 그걸 다 분해해 보면

수레라는 건 없고

그냥 나무 쪼가리들하고 바퀴하고 뭐 이런 거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나라는 것도

잘 들여다보면, 정견을 해보면

나라는 생각, 그리고 육체에 대한 느낌, 그리고 옛날에 대한 기억, 어떤 이미지, 감정

이런 것들을 합쳐서 나라고 그냥 할 뿐이에요.

그래서 본래 무아다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무아라 그러면

여러분이 무 자에 또 떨어져서

그럼 허무하지 않느냐?”

이게 바로 생각에 빠진 사람들의 문젠데

그러니까 무아다라고 하면

, 그럼 이게 없구나이게 없다고 치면

그다음에 뭐가 남았을까?”

이걸 볼 생각을 안 하고

그냥 없구나하면

없다에 또 떨어져서

그럼 허무하다

이런 소리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이 삶이

스스로 살아있는 이 삶이라고 하는 이것을

여러분이 한번 발견하려고 노력해 봐야 돼요.

그러니까 깨달음이라는 거는

이 살아있는, 이 삶을 일으키는 살아있는 이것

이것을 발견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제가 이걸 이렇게 들었다가 내렸다고 합시다.

그럼 우리는 너무나 여태까지

보이는 상에

이걸 상이라고 그래요. 이렇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일어나는 모습을.

너무나 상을 따라하기 때문에

교장이 막대기를 들었다 내렸구나라는 것만 봐요.

 

근데 사실은

제가 이거 들기 전에 여기 뭐가 있었어요?

이미 여러분의 의식으로 충만한 허공이 있어요.

그 위에 이게 올라왔다 내려간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변화한 거에 불과하지만

이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여기는 이미 이게 있어요. 이미

여러분의 의식이 있단 말이에요.

 

그게 있는데

우리는 원래부터 있고, 항상 있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이런 것만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자꾸 일어나는 상황들을 쫓아다니느라고

자기를, 참다운 자기를

정말 이 삶을 일으키고 있는 그 요것

진리인 이것을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근데 이미 지금 여러분 눈앞에

제가 막대기 들기 전이나

내린 후에도 여여하게 있는 이것이 뭐예요?

여러분은 이거를 의식이라고 하면 금방 이해하지만

이거라고 하면

그때부터 머리가 복잡해져 이게 뭘까 그죠?

 

이렇게 이름 붙이지 않고는 어렵다는 거예요.

이게 참 큰 병인 거야.

있는 그대로를 못 보는 거예요.

 

이 앞에 이 의식이 있다고 합시다.

여기서 의식이라는 글자를 떼봐, 떼어버려봐.

여기 뭐가 있어요?

뭔가 살아있는 게 있어요. 그죠?

그래서 이렇게 이거를 알아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사들이 깨달음이 뭡니까? 했더니

손가락을 들었다.

이게 손가락을 따라가면 안 되고요

손가락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 자리를 말하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뜰 앞에 잣나무 해봤자

뜰 앞에 잣나무 열심히 보거나

아니면 뜰 앞에 잣나무 왜 그랬을까?”

이런 생각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요.

뜰앞에 잣나무라는 상이 휘어 올랐다 내려간 이 자리가 지금 여기 있잖아요.

뜰앞의 잣나무 설법이 지금 여기도 일어나고 있는 거야, 그죠?

 

그러니까 여러분의 살아있는 이 자리가

스스로 살아있으면서

여러분이라는 생명현상 그리고 오온활동 현상이

그 안에 잠깐 나타나서

신기루처럼 그냥 난리법석을 한 번 치다가

저녁때 되면 또 잠 속으로 들어가는 것뿐이에요.

 

태어난다는 건

이런 작동 활동이 일어났다가

죽었다는 건

이것이 조용해졌다는 거예요.

그것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나는 무엇인가? 진리는 무엇인가? 본성은 무엇인가?

이거를 찾고, 이름 짓고

뭔가 분별하려고 하는 일이

아주 중병이에요.

 

그래서 바른 마음공부는

대부분의 사람이 전도몽상이 돼서 공부를 거꾸로 하기 때문에

그렇게 쉬운 게

이거 정말 쉬운 거 아니에요?

지금 눈앞에 이 의식.

 

여러분 이게 스스로 있다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내가 이렇게 눈 뜨고 보니까 있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눈뜨고 보니까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이 잘 보세요.

갓난애기가 내가라는 생각도 아직 못하는 갓난애기가

내가 눈뜨고 보고 있으니까 이게 있지라는 해석을 해서

걔 앞에 이런 세상이 있을까요?

아무 생각 없어도 그냥 이미 있을까요?

이미 있어요. 그렇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자꾸 생각으로

자기가 이 자기 에고가

이 생각이 자꾸 뭔가 이렇게 잡으려고 드는 이게 큰 병이에요.

그래서 올바른 마음공부는

나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내가 아닌가?’ 이거를 봐야 돼요.

 

여기서 지금 내가 아닌 거를 정견하고

, 이건 아니다, 아니다, 자꾸 빼면 남는 거는

진리만 남겠죠.

 

그러니까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이 본성 자리란 무엇인가? 본래면목이란 무엇인가?

그렇게 찾는 이상은 절대 못 찾아요.

왜냐하면 내 분별 때문에.

그런 거를 다 쉬어버려야만

저절로 남는 자리에서 쑥 드러나요.

 

공부 방법이 거꾸로 된 거예요. 여태까지

거꾸로 되니까 안 되는 거예요.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거예요.

 

 

근데 이런 거 가지고

알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대표적으로 어떤 앎이다.

엊그제도 우리 사이트에 보니까

아 아는 자리가 있더군요.” 하는 사람이 하나 나타났더라고

 

그런데 물론 아는 자리가 이 자리가 가진 능력 중에 하나죠.

여러분이 의식이라는 걸 또 아니까 이 자리가 있죠.

그렇지만 앎이다라고 하는, ‘이것이다라고 하는 순간

이것이 아닌 것이 생겨요.

앎이다라고 하는 순간

알려지는 것이 나타난다고

이 앎에 의해서 알려지는 게 생겨.

 

자 봅시다.

*!

이 소리를 듣는 자, 그게 아는 앎이 있어요.

이 소리를 아는 앎이 있다고

, 그게 부처 자리구나알았다는 거예요.

그럼, 이 소리는 뭐야?

 

벌써 자기도 모르게

자기 생각에 속아서 이분법에 떨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사람이 너무 많아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견적 정도 한 거야.

아직 소는 보지도 못하고, 소 발자국 정도 보고 알았다고

다 끝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예요.

 

또 어떤 사람은 봄

본다라는 거 가지고 또 그런 사람이 있어요.

여기 보는 자가 있다.

 

그러니까 또 어떤 사람은

또 이것, 이것.

 

근데 이런 것이 뭐냐 하면

다 자기 분별이 일으켜서

뭔가를 붙들려고 하는 시도예요. 분별이라고요.

다시 말하면 생각이 만든 거예요. 생각이.

앎이라고 하는 것도 앎이다.

앎의 자리가 있죠. 누구나

우리 여러분 지금 제 말 들으면서 다 알고 있잖아요.

다 이해하고 있고

또 눈앞에 이런 허공이 있다는 거 알고 있고

자기가 지금 이런 시공간의 위치에서

이런 것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

동시에 이 알고 있다라는 앎을 붙드는 순간에

알려지는 것들이 생겨나요.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분별한 세상에 빠져버린다고.

 

그래서 내가 좀 전에 이거 물어보는 거야.

*!

이거 아는 놈이 부처다.

아까 아는 자리

그럼 이 소리는 알려지는 것인데

그럼 이 소리는 뭐예요?

 

진짜 이 부처의 자리는

이분법이 되지 않아요.

이거는 단일 의식이에요.

 

그러니까 알려지는 것이나 아는 자리나 다 그냥 하나라고요.

이게 이해하기가 좀 어려우시겠지만

내가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면

여러분이 꿈을 꾸시면, 꿈을 꾸시면

꿈속에는 분명히

생각하는 나가 있고, 대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나는

저 대상하고 싸우거나, 대상을 두려워하거나, 또는 대상과 친하거나

뭐 이런 꿈속에서의 행동들이 일어나는데

분명히 꿈속에서는

나와 나 아닌 것, 이것과 저것, 아는 놈과 알려지는 대상들이 있습니다.

 

근데 꿈 깨봐요.

그게 다 하나예요.

다 하나 아니에요?

다 내 의식과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들이라고.

어느 것도 꿈속에 이거는 진리인데 저건 진리가 아니에요라고 할 게 없어요.

 

이걸 지금 이 현실에 그대로 적용해 봅시다.

지금 여기 여러분이

요건 진리인데 이건 아니다라고는 할 게 있어.

이렇게 분리할 게 있어?

몽땅 진리인 거야. 몽땅 하나인 거야.

이게 아는 자리만 진리고요. 알려지는 건 아니고요.”

이게 다 분별이에요.

다 지 생각에 빠진 거야, 또 생각에 빠진 거야

미세한 자기 생각에 자꾸 빠지는 거예요.

 

자 여러분이 꿈을 깨고 나면

꿈은 그냥 다 하나였다

물론 그 안에서 여러 가지가 일어나죠.

 

바다를 가보면 오만 가지 파도가 다 일어나요.

그렇지만 바다는 다 하나예요.

오만 가지 파도가 다 일어나

이쪽 파도는 잔잔한데 저쪽 파도는 크고, 요란하기도 하고 그럽니다.

수많은 파도가 넘실거리지만

바다라는 측면에서 다 하나야.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일상도

오늘은 지금 내가

요거 하고 저거 분별하고

이 사람 만나고 저 사람 만나고 하지만

내일이 되면 오늘은 나한테 생각으로만 남아요.

생각으로 이 사람 만나고 저 사람 만나고 뭐 했다 그러지

지가 생각으로 분별하는 거지

사실은 어제인 오늘은 내일 가면

그냥 하나로써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도 의식이고

이 컵도 의식이고

이것도 의식이라는 거예요.

?

꿈에선 다 하나듯이

컵이라는 의식이에요.

볼펜이라고 하는 의식이에요.

막대기라고 하는 의식이에요.

*!

차인벨소리라고 하는 의식이에요.

일체가 다 마음일 뿐이에요.

 

근데 우리가 분별에 떨어져

이건 컵이고

이거는 차임벨이고

이건 막대기고

이건 볼펜이고

이러느라고 못 깨닫는 거예요.

그래서 분별을 쉬라는 말이 나오는 것 뿐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이 정말 갓난아기처럼

아무것도 분별 안 하고 가만히 계셔보면

그러면 여기 눈앞에 뭐만 있겠어요?

여러분이 삶만이 있어요, 삶이.

스스로 살고 있는 삶이 있다고 스스로 살고 있어.

내가 이 삶을 살아야지하는 게 없어.

 

스스로 살고 있기 때문에

*! 이렇게 하면 들리고

보면 보이고 할 뿐이에요.

 

내가 아무리 보겠다고 해도

눈을 감고 있으면 안 보이고

무슨 시력이 나빠지면 안 보입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어요.

삶은 스스로 살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사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니가 아무리 걱정 근심해도

네 삶을 네 인생은 수명을 하루라도 연장할 수 있느냐?”

삶은 스스로 살고 있는 거지 네가 사는 게 아니다.

이 말씀이에요.

 

요게 하나님이에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이야.

그게 부처님이고요.

 

부처님 하나님이 이렇게 나타나 계신데

내가 내 분별, 생각 가지고

내가 살고 있다고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제가 이렇게 이걸 흔들어 본다고 합시다.

여러분 이 막대기를 보지 말고

이 막대기 흔드는 거 이면에서

이걸 보고 있는 여러분의 이 삶의 자리, 생명의 자리

이걸 보세요.

그게 여러분 아니야.

 

그게 지금 살아 있어서

그 자리가 지금 여러분이 알아듣게도 하고 있고

눈으로 이 화면도 보게 하고 있어요. 그 자리가

보고 듣고 안이비설신의를 다 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소소영령하고 신통방통하다는 거예요.

 

/깨닫지 못한 사람이 그걸 영혼이라고 하고

깨달은 사람은 부처라고 할 뿐이다./

수심결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 세상에 지금은 이 방 안 풍경만 보지만

여러분 이따가 끝나고 밖에 나가서 보면

온 세상이

하늘, , 온갖 삼라만상이 여러분 앞에 다 나타나잖아요.

 

그런데 하늘 땅 삼라만상이 다 어디 안에 있는가를 봐봐요.

다 어디 안에 있나?

이 삶 안에 있어요.

이 삶의 자리

끝도 없고 한계도 없고 무한한 이 자리 안에 있다고.

근데 이게 살아있어

이게 스스로 살아있기 때문에

봄이 되면 나무도

언제 나무들이

내가 봄 됐구나. 가만히 있어봐.

오늘이 몇 월 며칠이지 입춘이 됐으니까

뿌리를 내리고 기지개를 켜야 되겠다.”

이런 나무 없어요.

그냥 살려지고 있는 거예요, .

 

그러니까 여러분의 의지와 상관없이

지금

*!

이거 치면 들리게 돼 있고

눈앞에 뭐가 나타나면 안 보려고 해도 보이게 돼 있습니다.

누가 때리면 안 아프려고 해도 아파요.

그렇게 스스로 살고 있는 거지

내 의지와 상관없다니까요.

 

그래서 깨닫기 위해서는

오로지 오온이 공하다라는 걸 봐라.

제발 오온에 쫓아다니지 말고

오온이 공하다라는 걸 봐라.

분별 좀 그만해라.

 

이거 한 가지만 그 고구정녕하게

자꾸 얘기하는 거예요.

제발 그 짓 좀 그만해라.

가만히 있으면 이미 깨달았는데

뭘 자꾸 찾느라고 그 난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