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 깨어난 자의 삶이란
결국은 여러분이 본래가
이 영원한 본래의 우주의식, 순수의식, 신의식이
자기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서 창조체험놀이를 한다고.
이게 무슨 말이냐면
내가 옛날에 이거를 많이 그렸어요.
여기 이렇게 하나님이 있어.
이게 신이야. 또는 부처예요. 부처 자리가 있어
이 신에서 부처자리가 살아서 움직이다 보니까
이 세상에 생명이 탄생됐고
여기에 내가 지금 나왔어.
여기에는 예를 들어 다른 여자분이 나왔어.
또 여기에는 또 네가 나왔어.
또 여기에 다른 분이 나왔어요.
이렇게 해서
지금 이 세상에 70억 인구가 이렇게 만들어진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잘 봐.
여기서부터 이게 만들어진 요거를
이 사람 마음에서 보면
이것밖에 없는 거야.
즉 다시 말하면
자기 마음 세계는 자기밖에 없다고.
이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뭐냐면
나한테는 내가 볼 때는
그냥 상으로 보이는 거지
나의 의식 세계에 나타난 상일 뿐이야.
그래서 자기가 이 세계를 뭘 다 보더라도
결국은 내가 보는 세계라서
이거를 불교에서는 뭐라고 그러냐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하고
기독교에서는 이래서 유일신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 하느님 한분 밖에 없어.
그게 모든 걸 창조했다고.
그런데 잘 봐요.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이 안에 들어앉아 있다고
자기 마음과 의식이.
의식이 완전히 축소돼서
계속 여기만 보고 구하기만 해.
근데 한번 역발상으로
내가 이미 이거 한 덩이잖아, 이미 한 덩이잖아.
그러면 이 자리에서 거꾸로 나를 봐봐.
이 자리에서 거꾸로 나를 보면
너도 보고, 얘도 보고, 얘도 보고 하더라도
이 입장에서는
다 나의 손가락과 똑같아.
한 몸인데 여기 다섯 가지가 달려 있지만
이거 다 내 분신이야
그래서 이거를 ‘일즉다다즉일’ 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이 신은
신의식 우주의식은
이 수많은 생명들을 통해서
자기는 가만히 앉아서 모든 인생의 체험을 다해.
여러분은 자기 안에 이거를 만나면
만나서 진짜 순수하게 100% 확신되면
너의 인생을 내가 다 알 수가 있어.
그게 타심통이라는 거야.
왜?
이 자리로 확실히 가면 이것도 보이니까.
그게 안 보이는 건
아직 100%가 아니기 때문에 안 보이는 거야.
견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게 있구나, 이런 진리가 내 안에 있구나.”
이거를 보는 것이고
보림이라고 하는 건
여기서 이 자리로 나아가는 거예요.
뭐를 이 자리로 나아가는 거라고
하나님 자리 부처님 자리에 100% 순수하게 계합하는 거야.
그 방편이
기독교에서는 사랑이라고 하는 거고
불교에서는 자비라고 하는 것뿐이에요.
그러면 모든 일이 일어나는 곳은
자기의식, 투사된 이 안에서 일어나.
이 안에 자기가 보는 만치
자기가 요만치 보면 요만치
여기서 여기를 보는데 요만치 눈앞의 세계만 보여.
여기서 좀 더 본 사람은 이만치 보이고.
완전히 본 사람은 이걸 다 보겠지.
그래서 모든 일이 자기의 눈앞에 일어나는데
이게 일어나죠.
이거를 이쪽에서 보면 동그라미로 일어나겠지.
이 안에 자기 나름대로
어떤 여자가 나를 배신하고 도망갔는데 여기 스토리가 일어나죠.
그 세계 속에 사는 거야, 이 사람은.
“그래서 나는 상처받았다. 어쩌면 그럴 수가 있냐”
그래서 이게 자기가 가진 상념 세계야.
여러분이 <소울>이라고 하는
최근에 디즈니에서 만든 만화영화 한번 보세요.
거기 보면
그 주인공이 죽어서 중음신 세계에서
자기가 살 때 어떻게 살았는지
그 상념체의 세계에 둘러싸여서
자기가 살았던 그때 만났던 사람과 근무 환경
이런 게 옆에 상념으로 쫙 나타나는 게 있다고.
그거 보셨나?
그게 바로 지 마음을 보고 있는 거예요.
이걸 보고 있는 거야.
그래서 모든 일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어.
여기에서 눈앞에서
자기 마음에서
자기의식 활동.
근데 전부 다 환상이야.
진짜 깨달은 사람은
이 모든 환상들의 실상이 꿈, 오온개공이다.
전부 다 헛되고 헛되도다를 봐요.
모든 게 헛되고 헛되 뭐만 남아?
하나님만 남죠, 부처님만 남죠.
의식만 남는 거예요.
왜?
영원한 진리고 생명인 의식이 진리니까.
그게 여러분이
견성하고 보림해 가는
또는 하나님을 만나고 영접해 가는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봤으면 영접을 해야지,
봤는데 지나가?
말이 안 되잖아.
그래서 기독교에도 보면
예를 들어
“사마리아니, 쓰러진 사람을 간호하고 돌아가서
유대인보다도 나았다.” 이런 예수님이 말씀하신 게 있는데
이게 뭘 의미하는 거냐면
이와 같은 진정한 진리를 향해서
너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아가는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그 쓰러진 병자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거예요.
그게 뭐냐?
그 병자의 육체가 예수님이 아니고
병자로 쓰러져서 돌아온 그 사람이 마이 스토리거든.
내 눈앞에 이런 사람이 일어났어.
이게 스토리야.
근데 그때 나는 어떻게 하나님을 영접할 거냐?
근데 거기서 대부분의 사람은
그건 뭐 어쩌고 저쩌고 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도망가거나
아니면 기타 등등, 이렇게 적당히 절충하거나 뭐 이러는데
그런 거에서 과연
너는 얼마나 너 자신의 스토리에서 자유스러울 수가 있는가?
얼마나 그것을 벗어나 있는가?
그리고 계속 순수한 의식으로서
그 의식이 느껴지는 대로 행동하고
이 아바타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가?
이런 얘기예요.
여러분 안에 이미 이게 있는데
이걸 못 보는 이유
여기 구름이 잔뜩 가려서 여기까지 못 봐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시야가 흐려 안개가 꽉 꼈어.
얼마나 맑으냐?
그래서 기독교에서도 아주 의식이 맑으신 분은
자기가 죽어서 가는 천국이 보여요.
또 불교에서도 자기가 죽으면 도솔천에 가네, 극락왕생하네
자기가 가는 33천세계가 보이는 보살분들도 꽤 있어.
여러분이 하실 일은 이거야.
모든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 이런 거에 보면
유튜브도 그렇고, 경전도 그렇고
너무 여러분을 깨달음의 길로 안내하기 위해서
자꾸 하지 말아라
이렇게 negative 끊어라, 절제해라, 뭐 어째라 하고
자꾸 네가티브를 말하다 보니까
여러분이 그거 따라서 하다 보면 어떻게 돼?
힘들어져요.
소극적이고 염세주의가 되고.
그러니까 그게 색즉시공이고.
그런데 사실은 이거를 발상을 전환해 보면
이 자리에서 이거 갖고 노는 게임이란 말이여.
여러분은 이미 자기 안에 이쪽도 있는데
왜 꼭 여기서만 놀아?
존재의 중심이 꼭 여기 있어야 돼?
여기 있는 거를 연습해 봐요.
여기 있는 걸 연습하면
이게 익숙해진다니까
익숙해져요.
여기 서 있는 사람은
어떤 일을 하려고 그래도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게
‘두려움’과 ‘잘못되면 어쩌나’
또는 ‘그랬다가 이렇게 되면 어떡하지?’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지?’
이런 것들이 먼저 떠올라요.
근데 여기 있는 사람은
그게 아무 상관이 없어.
그건 뭐 쓸데없는 니들 생각이고, 그건 그런 사람들 생각이고
나는 마이웨이를 가련다라는 확실한 소신과 비전이 있어.
그런 사람한테
‘잘못된 거 하지’ 이런 게 있나?
잘못되면 배우면 되지.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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