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의 뿌리와 참나와 불성이라고 해도 좋고 주인공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 용어 가지고 싸우지 마시고, 여러분 안에 있는 그 자리를 만나세요.
만난 분들끼리 좀 얘기 나눠보세요.
체험이 똑같아요.
“저 성령 체험했다” 그러면
“교회도 안 다닌 놈이 무슨 성령이야!” 하고 하시는 분들이 체험 갖고 얘기하면은
“어 나랑 똑같네!” 그러십니다.
“어, 내가 체험했던 그건데.”
“이건 교회 다녀야만 체험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에요, 대화를 안 나눠보셔서 그렇지 나눠보시면 다 체험하고 있어요.
그거를 그 체험에다가 자기가 성령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이해하고 계신 거예요.
똑같은 걸 체험해도 불교 분이 그걸 체험하면요,
“부처님” “내 안에 주인공 한 마음”을 만났다고 이해하고 계신 거예요.
과학적으로도 실제 수녀님들, 그리고 고승 분들 뇌파 측정해가지고 실험했잖아요, 미국에서.
둘 다 똑같은 상태, 뇌가 똑같은 상태에 들어갔다 나와요.
그런데 나와서 수녀님들은 하느님 만났다고 그러고
고승들은 불성, 참나를 만났다고 해요.
그럼 이미 나와서 언어의 영역에서 달라지는 거지, 언어 이전에 영역에서
뇌에서 시공 인식을 못하게 시공을 인식하는 영역이 꺼져 버려요. 불이 나가고
오로지 시공을 초월한 어떤 감각만을 느끼다 나옵니다.
그리고 나서 이름을 붙여요. 각자대로 자기 문화권에서.
그래서 싸워요. 교인들 끼리 모여서
“저 불쌍한 불교인들은 하느님도 못 만나고 어떻게 어렵게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절에서는 모여서
“저 교회나 다니는 사람들은 이 불성을 모르면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서로 걱정해줘요.
사실 다 같은 건데.
그게 웃기는 짓이지요.
“우리 조선 선비들은 왜 이런 걸 모르고, 그 퇴계 율곡은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보다 더 엄청난 신앙심 속에 살아가요. 그런 분들은.
선비들도 다. 퇴계도 하느님이라고 그랬어요.
인의예지의 이 원리, 천명을 “하느님 마음” 이라고 불렀어요.
천명을 품고 있는 그 마음, 하느님.
그래서 퇴계 계열이요, 마지막에 퇴계 계열에서 면우 선생까지 내려오는 그 계보에서 보면요, 마지막에 면우 선생 스승이 한주 이진상이라는 분인데, 그분 계통에서요,
아예 종교적으로 이 하느님으로 “상제”라고 부르면서
유교의 신앙화 된 모습도 등장해요. 나중에. 구한말에,
조선 유교가 망하게 생겼으니까,
조선 유교가 갖고 있는 어떤 특징들을 더 극명하게 드러내는 과정에서
아예 종교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해요.
그러니까 다 하느님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면우 선생님 문집도요, 그 우리 안에 있는 태극, 태극을 하느님이라고 생각해요, 옛날 선비들은.
상제, 하느님, 태극
다 같아요. 같은 의미에요.
우리 안에 있는 그 신성한 마음에서
인의예지의 원리를 갖추고 있으면서
우리를 인의예지로 인도한다.
그 드러난 결과물이
측은지심이니, 수오지심이니 하는 이런 양심의 그런 작용들이다.
다 같아요. 다를 수가 없어요.
다른 걸 느꼈다면 그런 분은 가짜죠.
혹시나 다른 걸 느꼈다면 가짠데,
제가 27년 28년간 지금 종교를 연구하면서 느낀 거는
정확한 체험이 일치한다는 거예요.
개념들만 다르지 조금씩.
문화권 따라 조금씩 다르지 체험들이 일치한다는 거.
그게 놀라운 얘기입니다.
'윤홍식 > 윤홍식_3분인문학(2018)' 카테고리의 다른 글
[3분 인문학] 무의식은 알고 있다 _홍익학당.윤홍식 (0) | 2019.03.29 |
---|---|
[3분 인문학] 에고와 참나 _홍익학당.윤홍식 (0) | 2019.03.28 |
[3분 인문학]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 있는 곳 특징 _홍익학당.윤홍식 (0) | 2019.03.26 |
[3분 인문학] 역지사지가 답이다 _홍익학당.윤홍식 (0) | 2019.03.25 |
[3분 인문학] 내 안에 행복의 섬이 있다 _홍익학당.윤홍식 (0) | 2019.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