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과정이 축적되면
어느 순간 견성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견성까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겪게 될까요?
앞선 영상에서 말했듯이
가장 근간이 되는 수행은 역시 [심식관구]입니다.
이는 깊은 호흡을 하면서
의식은 뒤통수에 두고
마치 동굴 속에서 밖을 보듯
눈두덩을 통해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러면서 현상계에 달라붙어 있는 나를
조금씩 분리해 나가는 수행입니다.
심식관구는 다음에 4단계를 거쳐서 견성에 이르게 됩니다.
1) 견미
세상에는 즐겁고 행복한 일이 넘쳐납니다.
대체로 돈과 명예, 권력을 지닌 사람들이
더 즐겁게 잘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가령 우물 안에 개구리들이 모여 산다고 칩시다.
그 개구리들 가운데 왕개구리가
권력을 쥐고 가장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물이라는 폐쇄된 공간이 배경에 깔려 있기에
왕개구리의 즐거움은
상대적 우월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듯 잘 산다는 사람들 역시
시공이 조장하는 생로병사의 수레바퀴에 끼어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즐거움을 느낄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느끼는 즐거움의 차이는
그저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런데 심식관구를 하다 보면
시공이라는 현상계의 스크린에서 조금씩 떨어져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때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감상이 일어나고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들이
아름답게 느껴지게 됩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하는 탄성이 나오고
심지어 삭막한 도심의 콘크리트 건물들마저도
신기할 정도로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마치 예술가가 작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세상 만물을 창조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지요.
이것을 이름하여 [견미]라고 합니다.
만일 심식관구를 하면서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는다면
현상계의 스크린에 단단히 붙들려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심식관구의 첫 번째 단계는
무조건 세상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또한 즐겁고 행복해야 하고요.
혹자는 주어진 상황이 혹독한데
어떻게 아름답고 즐거울 수 있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겁니다.
가령 공포 영화를 볼 때
그것이 영화인 줄 알기에 공포심과 더불어 즐거움이 나옵니다.
그렇듯 인생이 무척 고달프더라도
그런 현상계의 프로그램에서 떨어져 나오면
하나의 작품으로 보이게 됩니다.
시공의 캠퍼스에
나라는 주인공을 설정해서
암울한 현실을 표현하는 영상물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마다 삶이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심식관구를 통해
관찰의 즐거움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은
기존에 우리가 알던 아름다움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앞서 비유했듯이
개구리가 우물 안에서 느끼는 아름다움과
그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와 느끼는 아름다움은
비교할 수 없는 차이를 지니게 되는 이치입니다.
견미는
비단 시각적인 아름다움만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오감 모두에 해당되며
특히 후각적인 향미에 대한 아름다움은
시각 못지않은 탄성을 자아내게 합니다.
아무튼 심식관구를 통해
경험해 보지 못한 고차원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때를 일러 견미라고 합니다.
2) 견인
견미가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면
어느 때부터인가 주변의 사람들이 낯설게 느껴지게 됩니다.
분명히 알고 지내던 지인들임에도
거리감이 있거나 생소해지는 겁니다.
가령 늘 만나던 친구가
어느 날 스크린에 들어가서
마이크를 통해 대화를 한다면 어떨까요?
그만큼 낯설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렇게 주변 인물들과의 거리가 벌어지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이것을 일러 견인이라 합니다.
견미는
외부 환경이 고정되어
그곳에서의 분리가 비교적 쉽습니다.
하지만 주변 인물들은
나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분리되는 것이 어렵습니다.
심지어 가족이나 친지마저도 낯설게 느껴지곤 하는데
이 정도 단계에 이른다면
현상계의 프로그램에서 꽤 많이 빠져나온 것이 됩니다.
3) 견아
견인이 되고 계속해서 심식관구를 생활화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나라고 지금까지 알고 지내왔던 것이
아무리 봐도 이상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소시적부터의 기억이 축적되어
지금 나라는 정보를 가지고
이리저리 생각하며 언행하고 있는데
이런 것 자체가 심히 이상합니다.
눈두덩이 속에 숨어 세상을 바라보면서
나의 실체까지도 의심하게 되는 것이지요.
특정한 정보들로 가득 채워져
독특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나라는 것인가?
그런데 나를 그렇게 정의하는 게 참으로 이상합니다.
마치 나가 그냥 현상계라는
영화 속에서 주인공을 맡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그 주인공을 나라고 하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저 인물이 나라는 것이지?”
그런데 여러모로 봐도 나이긴 한데
그 나가 확실하게 가슴에 와닿지 않습니다.
이처럼 어느덧 나가 보이면서
나와의 분리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런 단계를 일러 견아라고 합니다.
4) 견성
견아가 되다 보면
어느 순간 나와 관찰자가 완전히 분리되는 때가 옵니다.
이때 깜짝 놀라면서
지금껏 나라고 알고 있던 것이 와장창 무너져 버립니다.
평생 나인 줄 알고 살아왔는데
그 나가 나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냥 현상계에서 주인공처럼 활동하던
정보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 정보 덩어리에 밀착함으로써
나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눈두덩이 뒤쪽에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관찰자가 있습니다.
물론 견성 단계에선
머리 전체가 사라졌기에
눈두덩이 뒤쪽이라는 개념도 없긴 합니다.
아무튼 어디선가 외계를 바라보는 관찰자가 나일까요?
분명 관찰의 주체이기에
이것을 나라고 부를 법도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나라고 하려고 해도
도무지 나가 되지 않습니다.
나라고 하면 특정한 범위와 객체적 정보를 지녀야 하는데
이 관찰자는 그런 것이 전혀 없으니까요.
그래서 나라고 할 여지가 아예 없습니다.
그럼 도대체 나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 것인가요?
시간과 공간을 비롯해
그 무엇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그냥 존재하는 상태가 분명히 있습니다.
범위가 없는 무형의 존재인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나가 아닙니다.
그래서 무아입니다.
이렇게 무아의 존재를 깨닫게 되면서
절대의 상태를 체험하게 됩니다.
어떤 수행자들은
절대에서 무와 해탈을 느낀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무나 해탈 역시 상대계의 단면이기 때문입니다.
절대를 언어로 표현하자면
모든 것이 성립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이 성립하는 차원입니다.
그러다 보니 제1원인 역시 성립하지 않으며
동시에 성립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무아의 존재를 통해
절대 의식을 회복하게 된 경지를 가리켜 견성이라 합니다.
자 이제 수행자들은
견미와 견인과 견아를 거쳐
마침내 견성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견성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었습니다.
제1원인의 숙제마저 끝냈습니다.
사실이 이렇다 보니
제대로 견성한 수행자들의 입에서
‘견성즉성불’이란 말까지 나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성철 스님이 돈오돈수를 언급하며
“제대로 견성했는데 그 뒤에 뭘 또 수행을 하냐?”는 말도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견성의 한계가 스멀스멀 나오게 됩니다.
다음 영상인 정수와 대오편에서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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