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나’를 잘되게 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나’가 잘 될까요?
동물들이 적자생존하는 것처럼
사람들도 경쟁사회에서 우위를 차지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경쟁에 필요한 정보부터 습득해야겠지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학교에 들어가 학습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심지어 취업한 이후에도 학습은 지속되고
어떤 직업을 막론하고 무한경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 결과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면 흔히 ‘잘됐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잘된 것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잘되었다고 말하려면
재물과 명예, 그리고 사회적 지위를 따져봐야 합니다.
이것들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면 잘된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런 결론은 사회의 객관적 통념에 따른 것이고
주관의 세계로 옮겨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아무리 잘되었다고 해도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면 잘된 것이 아니니까요.
얼마 전 넥슨의 창업주인 김정주 이사가
우울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분만큼 잘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주관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아는 것만큼 잘된 건 아니었던가 봅니다.
따라서 잘되기 위해서는
객관의 세계 못지않게
주관의 세계에서도 잘돼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관의 세계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낼 수 있을까요?
주관의 세계란
한마디로 ‘마음’이고
그렇기에 ‘마음’이 잘되면 됩니다.
‘마음’이 잘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거야 행복하면 되겠지요.
어떻게 해야 행복할까요?
당연히 불행을 조장하는
번뇌 망상이 적거나 없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번뇌망상을 줄이거나 없앨까요?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
수많은 종교가 등장하게 됩니다.
유교에서는 도덕군자에 대한 학습을 가르쳐 마음을 다독입니다.
道家에서는 無爲自然을 가르쳐 마음을 순화시킵니다.
기독교에서는 ‘나’의 자리에 ‘주님’을 놓는 것으로 괴로움을 잊게 합니다.
힌두교에서는 가짜 ‘나’에서 깨어나 ‘참나’를 찾게끔 수행해 나갑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사실
다시 말해 ‘自性이 空하는 사실’을 일깨워 선정에 들게 합니다.
유교의 도덕군자가 되든, 道家의 신선이 되든
기독교의 주님 영접이 되든, 힌두교의 참나가 되든
불교의 無我가 되든
어떤 방법으로든 ‘나’의 기세가 꺾이면
그만큼 마음은 평온해질 것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나’를 뿌리째 흔들어
我相을 없앤다면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넘어
완전한 해탈심에 잠길 것입니다.
열반의 상태가 된 것이지요.
자, 그러면 이렇게 되면 ‘나’가 잘된 것이 맞을까요?
마음이 평화롭고
더 나아가 일모의 번뇌망상이 없는 열반에 이르렀으니
‘나’가 잘된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네, 잘된 것이 맞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기준에서는 이만큼 잘된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기준을 수행자로 옮기면 아직 잘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열반에 이른다고 해서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속인(俗人)들은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잘되는 기준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모름지기 수행자라면 그래서는 안 됩니다.
수행자는 마땅히 행복한 꿈보다 그런 꿈에서 깨어나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나’가 잘되는 것보다 ‘나’를 알고 싶어 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나’가 잘되고 싶은 마음이 터럭만큼만 있어도
차원의 설정값에 꽁꽁 매여 있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꿈에서 꿈으로의 이동만 일어날 뿐입니다.
가령 가슴 속에
‘나’ 대신
‘주님’이나 ‘부처님’을 영접한다고 칩시다.
이제 더 이상 ‘나’는 없고
‘주님’ 혹은 ‘부처님’만이 ‘나’의 의식을 송두리째 지배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각을 주님(부처님)의 뜻에 따라 일으키는 것이지요.
그러면 정말로 ‘나’는 없고
주님이나 부처님의 뜻만 가득하게 된 것일까요?
세상에 ‘나’를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 건 ‘나’가 잘되기 위해서
주님이나 부처님의 연기를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쉽게 말해 我相의 연출이고
그래서 오히려 고약한 아집만 자아내게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이런 병폐를 잘 알기에
신앙이나 귀의(歸依) 대신에
‘나’를 없애는 데에 주안을 둡니다.
하지만 마음을 비워서 ‘나’를 없앤 상태 역시
我相의 연출이란 점에선 다르지 않습니다.
我相이 ‘나’를 잘되게 하기 위해
마음이 비워진 상태를 그려낸 것이지요.
그래서 마음을 비워 해탈하고 열반에 이르러도
그건 그냥 我相의 꿈입니다.
꿈이기에 고차원의 지혜를 얻지 못하고
그저 편안해진 마음을 즐길 뿐입니다.
결론적으로 ‘나’가 잘되려는 마음이 개입해서 일어나는 수행은
그 어떤 것을 막론하고 外道가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我相의 ‘잘되려는 작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냥 궁금해하면 됩니다.
이치에 대해 궁금해 하고
철학에 대해 궁금해 하고
더 나아가 실존(제1원인)에 대해 궁금해하면 됩니다.
진리를 궁금해하는
마음엔 我相이 개입할 틈이 없으니까요.
진리에 대한 갈증은
내 마음과 너의 마음, 그리고 인류의 마음이 똑같습니다.
그래서 인류사를 보더라도
학자들이 쌓아온 논문 하나하나가 모아져 문명의 발달을 이끌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그냥 ‘인류’라는 한마음인 것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순간
我相은 자취를 감춥니다.
하지만 마음을 비우려고 하면
我相은 강력하게 그 중심에 서서
정신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着을 끊어 생각을 없애고
그럼으로써 마음을 편하게 하고 싶으신가요?
그렇게 해서 정녕 ‘나’를 잘되게 하고 싶으신가요?
그러면 정말로 잘 될 것으로 굳게 믿으시나요?
세존께서 하셨던 것처럼
잘되고 싶은 생각을 버리고
궁금한 것에 마음의 초점을 맞춰 보는 건 어떠신가요?
주변을 한번 둘러보세요.
궁금한 것 천지이지 않습니까.
그 가운데 꼭짓점에 해당하는
‘어떻게,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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