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란 깨달음을 위한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깨달음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여기에 대해 반야심경에서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반야(般若)란 분별을 끊은 최상의 지혜를
바라밀(波羅蜜)은 고차원으로의 이동을 각각 뜻합니다.
정리하면,
‘분별을 넘어선 지혜를 통해 고차원의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듭남’과 비슷한 맥락인 것이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분별을 초월한 지혜를 습득할 수 있을까요?
그러려면 우선 분별에 휘말리지 않아야 합니다.
분별이란
외계에서 들어오는 정보에 着이 되어 일어나는 상념을 일컫습니다.
마치 바늘과 실처럼
생각이 일어나면
분별은 무조건 따라붙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생각을 끊어야 분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생각타파’의 기치가 올랐는데
이것이 다시 두 갈래로 나뉩니다.
전자는 생각을 끊어 無心의 경지를 쭉 유지하는 것을
후자는 無心의 경지에서 무분별지(無分別智)를 터득하는 것을
각각 선호하게 됩니다.
전자가 선정(禪定)이라면
후자는 반야(般若)입니다.
여기서 상종(相宗)과 성종(性宗),
그리고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 같은 개념들이 나오게 됩니다.
아무튼 선정이든 반야이든
우선 생각부터 처리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양자가 동일합니다.
자, 그렇다면 정말로 생각을 끊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제 생각이 끊어진 세계로 사고 여행을 떠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순간 대상을 봐도 비추기만 할 뿐 여기에 대한 해석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부처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그 질문에 대한 着이 일어나지 않아
‘뜰 앞의 잣나무’라는 엉뚱한 대답도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습니다.
언어의 족쇄에서 풀려난 것이지요.
그리고 눈을 비롯해 다른 감각기관에서 들어온 정보들에 대한 반응 역시 같습니다.
마치 거울이 된 것처럼 정보들이 있는 그대로 마음에 머물고 이내 사라집니다.
삼라만상을 다 담고도 남을 만한 海印이 되어 적멸에 휩싸여 있는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다시 현재 의식으로 돌아옵니다.
생각이 스멀스멀 일어나면서 방금 전에 자신이 경험한 바를 떠올립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억일까요?
-첫 번째, ‘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해석을 하지 않으니 ‘나’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두 번째, 시간의 흐름이 없고 현재만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존(現存)만 하고, 과거와 미래가 없음으로서 공간의 변화 역시 사라졌습니다.
-세 번째, ‘나’도 없고 時空의 변화도 없으니
생로병사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네 번째, 붓다와 중생, 無明과 깨달음이란 것도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섯 번째, 無我의 존재에 대해 그냥 ‘無我’라고 하든, ‘불성’이나 ‘참나’라고 부르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어차피 이름이란 것은 수단이면서 방편에 불과하니까요.
-여섯 번째, ‘無我’로 있든 ‘我相’으로 있든 이 역시 경계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허상이면서도 실재이니까요.
-일곱 번째, 지식과 지혜가 모조리 증발합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그냥 존재만 있게 됩니다.
생각이 끊어진 경계에서 대충 이상과 같은 결론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佛法의 핵심인 緣起와 中道, 無我, 空에 대해 완전히 체득하게 됩니다.
마음이 한결 자유로워졌을 뿐만 아니라 이치에 대해서도 막힘이 없게 된 것이지요.
이쯤 되니 여러 번 생각해도 견성한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수행자들은 이 대목에서 성불했다는 생각도 해 보지만
다소 자만하는 것 같아
대부분은 견성이나 돈오를 자청하는 선에서 멈춥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통해 성불을 자처하는 분들도 있고요.
아무튼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서
붓다의 지혜를 증득하고
이때부터 다음과 같은 ‘아는 소리’를 하게 됩니다.
“이미 깨달아 있는데 깨달을 바가 어디 있는가?”
“마음이란 게 없는데, 무엇을 닦고 무엇을 깨닫는다고 하겠는가!”
“붓다와 중생이 둘이 아니듯 번뇌가 곧 보리이다.”
“오로지 현존하며 비출 뿐인데, 사실 비추는 것도 없고 비춤의 대상도 없다.”
이런 식으로 無心의 경험을 살려 현란하게 혀를 굴리며
평생 동안 道人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일곱 가지 깨달았다는 내용들이 사실일까요?
그리고 정말 그런 이치를 체득하면 깨달은 것이 맞을까요?
인류의 수행사(修行史)를 되돌아보면
수행자들의 깨달음은
전적으로 ‘절대’에 대한 체험에 의존합니다.
생각이 끊어진 경계에 몰입하니
상대적 분별이 끊어짐으로써 ‘절대’가 펼쳐지는 겁니다.
여기서 절대의 경지를 간결하게 묘사한
불이법(不二法), 쌍차쌍조(雙遮雙照), 사사무애(事事無碍), 응무소주(應無所住)… 등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깨달으면 절대의 의식을 지니게 될까요?
미안한 얘기지만 깨달은 사람은 그런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물론 사람들의 의식을 훈련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설할 수는 있겠지요.
세존 역시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잠에만 빠져 있는 것보다는 잠꼬대라도 하는 편이
그나마 현실에 한 발짝 더 다가서 있으니까요.
이런 의미에서 세존께서 절대를 방편으로 가르친 것이지
그것이 깨달음의 실상인 것은 아닙니다.
불제자들이 읊조리는 오도송 역시 같은 개념입니다.
선지식들의 오도송이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깨달음에 부합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마디로 이도 저도 아닌 잠꼬대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생각이 끊어진 경계에 들고도 깨닫지를 못하는 것일까요?
그건 경험에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응무소주(應無所住)하고 사사무애(事事無碍)한 경험을 통해 진리를 가늠하기 때문에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수없이 반복해
불이법(不二法)과 쌍차쌍조(雙遮雙照)의 이치를 터득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경험만큼 심하게 왜곡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정보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왜곡이고
이것을 처리하는 과정엔 거의 재창조됩니다.
그렇다고 정보의 왜곡을 막기 위해
사고의 기능을 꺼버리면 돌멩이처럼 되지 거기서 진실이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시험을 치를 때 문제가 어렵다고
시험지를 구겨서 휴지통에 버리는 것과 같은 경우이지요.
따라서 생각을 끊어 소멸시킨다고 해서
각성(覺性)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머리가 좋은 수행자들은 無心에서 나름의 이치를 터득해
그럴싸한 잠꼬대를 해댈 수 있지만
그런다고 세존처럼 잠에서 깨어나는 건 아닌 것이지요.
이런 이유로 세존은
득도한 이후 傳法을 포기하려 했고
佛法을 설하고도 佛法을 버릴 것을 천명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법이란 것이
결국은 한바탕의 잠꼬대에 불과하니까요.
요컨대, ‘생각타파’는
생각을 훈련시키는 좋은 수행이 될지언정
그것으로 깨달음을 거머쥘 수는 없습니다.
생각이 끊어진 상태란 건
생각이 ‘생각이 없는 상태’를 꾸며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생각이 없다는 無心이란 것 역시 ‘생각의 연장’인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그대로 두고
생각의 본질을 꿰뚫어 생각이 뭔지를 알아내는 쪽으로
방향을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각의 정체를 알아낼 때
비로소 생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생각을 알지 못하고, 마음을 알지 못하고, 존재를 알지 못하고 깨닫는 법은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이렇게 ‘지극한 앎’에 의해 자유로워진 의식 상태가 바로 ‘반야바라밀’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붓다의 지혜이고 깨달음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생각이 끊어진 경계에서 오도송을 읊고 계신가요?
당신은 여전히 깨닫고 싶은 마음으로 잠꼬대를 하고 있지는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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