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의 핵심 경전으로
반야부의 반야심경과 금강경이 있습니다.
특히 한국불교에선 이 두 경전에 대한 애착이 매우 큽니다.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 한 글자로 되어 있는 空을 알아야 합니다.
반야심경은 空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금강경은 空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空에 모든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空이란 무엇일까요?
반야심경에서는 一切皆空이라고 합니다.
삼라만상 모든 것이 空이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을 좀 더 풀면 色卽是空, 空卽是色이 됩니다.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空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空은 도대체 있다(有)는 건가요, 아니면 없다(無)는 건가요?
연필을 하나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건 불교 용어를 빌리면 色입니다.
色을 쉽게 말하면 ‘有’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色을 가리켜 空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空은 色이면서 동시에 ‘有’라는 얘기가 됩니다.
하지만 空을 ‘有’라고 보면 아마 죽비로 한대 얻어맞을 겁니다.
그러면 空은 아무것도 없는 ‘無’라는 걸까요?
그런데 空이 ‘無’라면
구태여 복잡하게 空이라는 글자를 채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뜻이 분명한 ‘無’ 대신 모호한 ‘空’으로 표현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도대체 불제자들은 空을 뭐라고 해석하고 있을까요?
불교에서 쓰는 空은 ‘色(有)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텅 비어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연필의 실체가 空이라는 것인데
지금 현재는 나무와 흑연으로 꽉 차 있지 않습니까?
불제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空에 시간을 대입합니다.
연필의 현재는 色이지만
미래에는 합성된 것들이 흩어지면서 空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간이란 것 자체도 허구라고 가정하면
연필은 色이면서 동시에 空이 됩니다.
연기법에 의해 어떤 인자들이 모여 연필을 꾸며내지만
본질은 그 실체가 없다는 것이지요.
결국 삼라만상은
연기법에 의해 自性이 없고
그렇기에 空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렇게 緣起-無自性-空을 함께 붙여서
空을 설명하는 것이 오늘날의 불교입니다.
이제 ‘나’의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연기법에 의해 잠시 합성된 것들이 모여 ‘나’를 이루고 있고
그래서 ‘나’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의 본질은 無我이면서 空이 됩니다.
이런 이유로 불교에서는 ‘自性이 空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이때 ‘空한 自性’을 ‘참나’나 ‘불성’으로 보면 힌두교
無我로 보면 불교가 각각 됩니다.
어찌 되었든 불제자들은 하나같이
‘自性이 空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자 수행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自性이 정말로 空할까요?
지금 화면에 보이는 연필의 自性이 정말 空 하나요?
연필은 나무와 흑연으로 속이 꽉 차 있습니다.
이것을 空으로 보기 위해서는 연기법을 이용해 소립자로 쪼개야 합니다.
소립자들이 합성해서 연필을 구성하고
따라서 그것들의 연연이 다 되어 흩어지면 연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유로 연필이 空 하다고 하면
이건 철학도 아니고 논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앙도 아닌
그냥 허무주의 개똥철학에 불과합니다.
유학자들이 불교의 空 이론을 보다가
그 미천함에 혀를 내두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더군다나 초등학생의 지성으로 봐도 수준이 한참 떨어지는
緣起-無自性-空을 가지고 첨단 과학문명의 시대에 說을 풀고 있으니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겠습니까!
연필을 다시 한 번 볼까요?
이것이 뭘까요?
이게 연기법에 의해 自性이 없는 空으로 보입니까?
이걸 空으로 보기 위해 연기법을 뇌리에 욱여넣고
그것을 신앙하느냐고 얼마나 애쓰고 있으신가요?
‘연필이 뭐꼬?’의 답을 얻는 데에
연기법이나 無自性 같은 건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연필은 있는가?
아니면 없는 것인가?
이렇게 有와 無로만 궁구하고 그 답을 내면 됩니다.
연필을 有로 확신하니까
그것을 어떡하든 부수기 위해서
연기법과 無自性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연필을 無로 보면
緣起-無自性-空과 같은 낯 뜨거운 풀이를 할 이유가 없겠지요.
그럼 연필이 無인가요?
연필이 어떻게 無가 되겠습니까?
그럼 연필이 有가 확실히 맞나요?
연필이 有가 되면 삼라만상 자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自存의 원리’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연필은 과연 뭘까요?
지금 우리가 사는 3차원은
有와 無로 갈라진 것처럼 보이는 세상입니다.
4차원에서 보면 有와 無는 결코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현대물리학에서 보여주는 ‘상태중첩’보다도 더 有와 無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여기서 더 올라
5차원에서 대상을 보면 어떻게 비출까요?
有와 無에 자유롭다는 표현 자체도 우스꽝스럽게 됩니다.
왜냐하면 有와 無란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수행자들은 그런 언어도단의 경지를 無心으로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생각이 끊어져서 有와 無를 떠올리지 않는 것과
이치적으로 따져서 有와 無를 넘어선 것은 천양지차입니다.
다시 말해 ‘체험’이 아니라 ‘진리적 자각’에 의해서만
有와 無를 초월한 空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아무튼 5차원 實存의 눈을 떴을 때
인간이 쓰는 有와 無의 언어가 적합하지 않아 불가피하게 채택한 것이 空입니다.
그래서 空을 알기 위해서는
有와 無를 가지고 4차원의 구조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5차원의 실존(제1원인)을 깨우쳐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연필 한 자루를 들고
‘이것이 뭐꼬?’하며 그 답을 찾으면
깨달아 성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연기법을 가지고
無自性을 만들어 空을 이해하려 하면
이는 세존의 가르침에 위배될뿐더러
인류의 지성에도 역행하는 愚를 범하게 됩니다.
사실 세존이 언급한 연기법이란
수행자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한 일종의 방편입니다.
가령 등산을 할 때 불필요한 짐을 내려놓는 게 좋듯
수행자들 역시 着을 줄이기 위해 연기법을 숙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연기법을 이해하는 만큼 심신은 가벼워질 테니까요.
이처럼 준비운동에 해당하는 연기법을 가지고
空을 해석하고 깨달음을 운운하니
유학자들로부터 허무주의에 빠진 미개한 자들이라며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空이 그토록 어려운가요?
有無보다 단순한 구조를 떠올리면 됩니다.
有無가 동전처럼 앞뒤로 붙어 있는 구조보다 더 단순한 구조를 찾아보십시오.
그런 구조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나요?
그건 당신이 차원의 설정값대로 생각해서 그런 겁니다.
차원의 설정값이 당신으로 하여금
有와 無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게끔 옥죄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을 한번 느껴 보세요.
중생과 붓다, 無明과 깨달음, 無我와 참나, 열반과 해탈, 有와 無를 비롯해서
모든 인자로부터 벗어나 그냥 있고 싶은 마음을 내 보는 겁니다.
그 마음이 차원의 설정값을 포맷시키면서
有와 無의 족쇄를 걷어내고
실존의 눈을 번쩍 뜨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無我이면서도 無我가 이닌 한바탕의 空이 되어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空을
緣起-無自性-空으로 풀고 있나요?
당신은 정녕 세존이 하셨던 것처럼
차원을 끝까지 높여 공을 바라볼 생각은 없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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