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괴로움을 없애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불교 수행은 괴로움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혹시 삶에 만족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시야를 시간과 공간으로 확장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생로병사가 심중에 부각하면서 괴로움이 스멀스멀 올라오게 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들어 죽고
그 시신은 불태워지거나 땅속에 묻혀 썩게 된다는 허망함에 고뇌하게 되겠지요.
구태여 생로병사가 아니어도
다른 무언가라도 떠올려 괴로움을 인식하고
그 수위를 최고로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의 괴로움은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생겨난 합리적인 심리 상태입니다.
생로병사를 잊거나, 혹은 종교적 신앙으로 의식을 마취시키면
괴로움은 잦아들지만
오히려 현실과는 동떨어지게 됩니다.
아무튼 적당히 괴롭거나 두려워해서는 불교에 한 발짝도 들여놓을 수 없습니다.
인생이 무상한 苦海라는 생각이 굳어져야
불교의 수행문이 열리게 됩니다.
이렇게 불교 수행의 준비 운동이 끝났으면
이제부턴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을 찾으면 됩니다.
괴로움을 없애려면
당연히 괴로움의 원인부터 알아야 합니다.
그 원인을 불교에서는 취착(取着)으로 봅니다.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대상들에 마음이 철썩 붙게 됨으로써
괴로움이 생겨난 것이지요.
그리고 대상에 휘둘리게 되면서 我相이 형성되고
동시에 피조물로 조각나면서 생로병사의 윤회에 걸리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대상으로부터의 자유’가 괴로움의 해결책이 됩니다.
그러니 생각을 끊어 마음을 비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이 있는 한 대상에 대한 취착(取着)은 그대로 이어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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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떻게 해야 생각을 끊어 마음을 비울 수 있을까요?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수행법들이 쭉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들이 팔정도와 위빠사나를 위시해서
이후에 등장하는 조사선, 간화선 묵조선 등의 수행법들입니다.
결국 불교 수행이란 것은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의 틀 가지 안에 있고
그래서 사성제의 가르침이 불교의 대들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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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사성제가 온전한 가르침이 맞을까요?
네 맞습니다.
재가 수행자에겐 딱 맞는 최상의 수행입니다.
다만 출가 수행자에겐 한없이 떨어지는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일종의 방편이니까요.
익히 아시다시피 세존은 득도한 이후에 전법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사성제를 찾아내면서 전법할 수 있겠다고 생각을 바꿨을까요?
상식적으로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세존은 아무리 궁구해도 전법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가르침을 접으려 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입을 열면 평생 방편밖에 설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방편들 가운데 돋보이는 것이 연기와 중도, 사성제 같은 것들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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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세존은 사성제(四聖諦)를 설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강아지에게 佛法을 설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겠지요.
네안데르탈인에게 佛法을 설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면 세존 당시의 사람들에게 佛法을 설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요?
그 당시 사람들의 의식 수준은 오늘날에 비하면 한참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첫 번째로 언어가 부족합니다.
의식의 레벨은 곧 언어의 질과 양에 비례합니다.
언어가 곧 개개인의 영력(靈力)이고 나아가 인류 문명의 발달 척도가 됩니다.
그런데 언어의 부족을 겪고 있는 당시 사람들의 의식 수준으로는
깨달음을 거머쥘 함량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두 번째, 당시 사람들은 차안과 피안의 이원론에 흠뻑 길들어 있었습니다.
이원론은 오늘날까지도 거의 대부분의 종교 교리를 꽉 메우고 있는데
이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수행은 단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세 번째, 신앙과 귀의에 의존하는 풍토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바쳐 신앙하는 풍토는 수행에 커다란 걸림돌이 됩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인해 세존은 사성제를 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괴로움을 소멸하는 진리’로 불교의 겉모습을 꾸민 것이지요.
사실상 거의 모든 사람들은 괴로움을 없애 행복해지는 것을 간절히 원합니다.
최고의 행복인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소비자의 욕구에 부응해 그것에 맞는 상품을 제시할 필요가 있고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사성제입니다.
이렇게 되니 따르는 제자들이 부쩍 많아지고
당시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던 브라만교 가운데서 불교를 발아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존은 사성제로 수행자들을 모으고
그 가운데 근기가 뛰어난 제자들을 위해 연기(緣起)와 無我의 가르침을 내렸습니다.
연기와 無我는 중간 수준의 제자들을 위한 주옥같은 가르침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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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불교를 출범시킨 세존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세존은 훗날 기라성 같은 상근기의 제자들이 나와
불교를 더욱 발전시킬 것을 바랐을 것입니다.
그 기대에 부응한 것이 바로 대승불교입니다.
용수(龍樹)를 비롯한 상근기의 제자들이 등장해
空을 불교철학의 상층부로 올리고, 세친(世親)을 비롯한 여러 수행자들이 합심해
우수한 심리학적 체계를 세웁니다.
그리고 달마를 위시한 선지식들이 선불교를 통해
이원론적 관습을 부수고 사사무애(事事無碍)한 일원론적 기둥을 올립니다.
이렇게 세존이 올린 불교의 기치는 후대로 갈수록 점점 더 발전해
오늘날의 불교 원형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엔 비불설(非佛說)이란 것이 적합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비판하면 그건 부처님만 전적으로 옳다는 것이 되고
결국 부처님 신앙이 되고 맙니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권위에 대한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불교는 부처님이 씨 뿌리고
그것을 상근기의 제자들이 농사를 지어 키워낸 결과물로 봐야 합니다.
한 사람의 절대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승과 제자들의 합심으로 이뤄냈기에 불교가 위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다만 아쉬운 점은 아직도 불교는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용의 그림은 얼추 그렸지만
그 눈은 여전히 찍히지 않았으니까요.
+++
그러면 어떻게 그 눈을 찍을까요?
‘괴로움의 진리’를 살짝 바꾸기만 하면 됩니다.
時空이 조성한 생로병사에 대한 괴로움을
‘진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괴로움’으로 전환하면
불교는 완성됩니다.
‘無明에 대한 괴로움’인 것이지요.
이것만 붙잡으면 어느 누구든 성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이미 깨달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깨달아 있는 사람이 그걸 깜빡 잊고 있다는 사실만 눈치채면 되니까요.
따라서 진리에 대한 갈애를 일으켜 그것을 계속 유지한다면
당신은 세존이 이루었던 무상정등각을 필히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깨달음이 대단히 쉽다고 생각하시겠지요?
하지만 이건 어마어마하게 어렵습니다.
구조적으로 안 된다고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無明에 대한 괴로움’을 일으키는 것은
차원의 설정값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수행자를 막론하고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분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출가 수행자들이 그럴진대 재가 수행자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들은 진리에 대해 궁금하지 않고 떠올리기도 싫어합니다.
그냥 꺼리는 것이 아니라 아주 끔찍하게 싫어합니다.
그래서 無明에 대한 괴로움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어쩌다 몇 초 궁금해 하다가도 이내 사라지게 되지요.
그리고는 생각을 끊어 마음을 비운다며 해괴한 일만 평생 동안 벌이던지
아니면 신앙에 매몰해 자족하며 지내게 됩니다.
여러분은 ‘마음 비우는 모습’이 위대해 보이겠지만
백여 년만 더 지나면 개그콘서트의 소재로 쓰이게 될 장면입니다.
훗날의 진보된 인류는, 생각을 끊어 마음을 비우면서 깨달았다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배를 움켜잡고 웃게 될 것입니다.
진리를 궁금해 하십시오.
존재를 궁금해 하십시오.
‘나’를 궁금해 하십시오.
궁금해 하는 것이 수행이고
그 귀결점이 깨달음입니다.
궁금해하면
아상은 힘을 잃고
마음은 저절로 비워집니다.
궁금해하는 마음엔
나도 없고 너도 없고
그냥 존재만 있으니까요.
하지만 생각을 끊어 비운 마음엔
더욱 교묘하고 사악한 아상이 가득 들어차게 됩니다.
그래서 ‘절밥 20년이면 괴물이 된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노자가 이미 말했듯
비운 것이 채운 것만 못하게 되는 이치입니다.
당신은 정녕 진리를 궁금해 할 수 있나요?
당신이 진리를 궁금해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 진리를 의심한다면
세상엔 종교도 없고 신앙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마음을 팔아먹고 사는
가련한 수행자들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고 사는 종교라는 기생충이 없는 세상!
그런 청정한 환경에서
깨달음이 보편화되는 세상을 꿈꿔 보는 것은
너무 무리한 바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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